00703 인천공항 상륙작전 =========================
정말 피곤하기 이를 데 없었다.
츠위와 예은을 데리고 늦은 저녁 식사.
사실 저녁이라기 보다는 야식 혹은 술자리에 가까웠다.
모름지기 술이 들어가면 흥겨워지기 마련이다.
안타깝게도 분위기는 마지막까지 싸늘했다.
며칠 더 한국을 관광하다 돌아가기로 한 츠위에게는 따로 사과를 해야 할 듯싶다.
'참, 두 사람 다 한 걸음도 양보를 안 하네.'
애매하게 술자리가 끝나고 슬슬 잠에 들을 시간이다.
팀 숙소에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호텔이라도 잡게 되는 걸까.
은근히 설레고 있었는데 이전에 살던 집이 남아 있다고 한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예은과 지냈던 장소.
용인 쪽에 마련했던 집이 아직도 있을 줄은 몰랐다.
따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당연히 방을 뺐다고 생각했다.
"그냥.. 추억도 있고 해서 샀어."
"아, 그냥 산 거야..?"
공항 밖부터 이동 수단은 익숙한 세단이다.
예은의 아버님이 선물로 주셨던 그 차량.
술을 마시고 나선 운전할 수 없으니 대리 기사를 불렀다.
현재 차를 타고 쭉 이동 중이다.
도착에 걸린 시간은 한 시간 반쯤일까.
아주 잠시 눈을 붙이니 집 앞이었다.
"졸려?"
"좀 피곤하네. 그러게 친하게 좀 지내지. 초홍이랑 같은 또래인데."
내가 눈치를 주자 고개를 휙 돌린다.
예은도 자신이 어른스럽지 않게 대처했다는 건 알고 있다.
알고 있음에도 그렇게 했던 이유.
차 안에서 들었지만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다.
"걔 너를 보는 눈치가 심상치 않았단 말이야."
"같이 지내다 보니 정이 좀 든 정도야. 아무 일도 없었어."
"믿지만, 앞으로도 그럴 거란 보장은 없잖아?"
눈치가 아주 삼단이다.
나는 츠위에게 듣기 전까지는 정말 까맣게 몰랐는데.
정면으로 따져오면 내가 할 말이 없다.
띵동!
엘리베이터를 타고 15층에 도착했다.
나와 예은의 보금자리.
정말로 오랜만에 다시 찾는 장소다.
하지만 추억에 젖기에는 상황이 안 좋다.
"많이 졸려?"
"몸이 찌뿌둥하네. 낮에 일을 하다 왔거든. 와서 좀 편히 쉬려고 했는데."
찔리기는 하는지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사실 하나 거짓말을 해버렸다.
낮에 한 건 일이라기 보단 인사였다.
중국에서 신세진 분들께 얼굴이라도 한 번 비쳐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것도 포괄적으로 따지면 일인 건 맞다.
어쨌든 그렇게 피곤한 상태는 아니었다.
두 처자 사이에 낑겨서 눈치 보느라 심력을 소모한 탓이지.
집 안은 의외로 청소가 돼있었다.
전문 업자한테 맡겼나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예은이 매주 한 번씩 와서 청소를 했다고 한다.
"정리 하다 보면 옛날 일도 떠오르고.. 심심해서 했어."
"누가 보면 내가 하늘 나라라도 간 줄 알겠다."
조금 호들갑스럽긴 하지만 덕분에 다시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체크 아웃 시간까지 고려해야 하는 호텔보다는 마음이 편하다.
내 방에 들어가기 앞서 바로 따신 물로 씻었다.
이 별 것 아닌 물의 차이가 상당히 그리웠다.
중국은 수돗물의 상태가 맛이 가있다.
느낌 상으로는 급수장에서 받아쓰는 군대보다도 더럽다.
눈에 띄게 티가 나는 건 아니지만 뭣 모르고 마셨다간 배탈이 난다.
그런데 한국은 수돗물을 생으로 마셔도 된다.
이 당연함이 당연하지 않은 곳에서 생활을 해왔다.
조금 즐기면서 샤워를 한 탓에 시간이 소요됐다.
그럴 만한 가치가 차고 넘치는 시간이었다.
기분 탓이 아니라 정말 평소보다 피부가 뽀송뽀송하다.
'지나치듯 봤을 땐 몰랐는데 은근히 리모델링도 돼있네?'
샤워를 마치고 내 개인실이었던 방에 들어갔다.
일단 내부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쓰던 책상 하며 가구들도 그대로다.
하지만 커튼과 침대가 바뀌어있었다.
조금 두텁다고 할 수 있는 커튼.
그리고 방의 크기 비해 크다고 할 수 있는 침대.
두 가지는 확실하게 이전에 쓰던 것이 아니다.
'오, 푹신푹신하구만.'
앉아보니 느낌이 다르다.
잘은 모르겠지만 고급품인 모양이다.
안 그래도 잠이 솔솔 오던 와중에 자연스레 입이 열린다.
하품이 새어 나오려 찰나, 이를 행했을 장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때? 새 침대 불편하거나 하진 않아?"
"엄청 푹신하고 좋은데? 근데 조금 큰 거 같기도 하고."
혼자 잘 만한 크기는 아니다.
침대가 커서 불편한 건 없겠지만 그래도.
내가 잠버릇이 나쁜 것도 아닌데 이 정도로 클 필요는 전혀 없다.
방 면적의 절반을 차지하는 침대라니 너무 오바한 감이 있다.
"이전에 쓰던 침대는 낡아서 바꿨어. 마음에 들어?"
"그거.. 구입한지 얼마 안되지 않았나?"
"안 쓰다 보니 삭았나 보지."
반박을 받지 않겠다는 눈초리다.
뭐, 예은이 딱히 사치하는 타입도 아니고.
잠자리가 불편했다거나 그랬을지 모른다.
바꾸는 김에 내 것까지 신경 써준 거라 생각한다.
"샤워하고 온 거야?"
"웅, 그랬지. 자기 전이잖아."
방에 뚜벅뚜벅 걸어온 예은이 어느새 내 옆에 가지런히 앉았다.
습기가 어린 샴푸 향기가 코를 자극해온다.
내 피부도 나름 뽀송뽀송하다고 생각했는데 비교가 안된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 녀석 정말 피부가 매끈매끈하다.
"화장 했어?"
"간단하게 로션이랑 몇 가지."
"난 화장 안 하는 게 더 좋던데."
"혹시 몰라서 한 거야 혹시.. 모르니까."
화장에 신경 쓰는 일이 잦지 않은 예은이다.
특히 잠 잘 때는 절대 하는 일이 없었다.
그런 예은이 오늘따라 화장을 한 이유.
어떤 이유인지 대략 짐작은 간다.
'먹는 게 시원찮아졌어.'
그렇게나 꾸역꾸역 복스럽게 잘 먹던 예은이 술자리에서 음식을 남겼다.
공항에서도 혹시나 했는데 살이 엄청 빠졌다.
내가 없는 동안 많이 힘들었구나.
쭉 늘어뜨릴 맛이 나던 볼따구가 아주 홀쭉해졌다.
그래도 눈에 띄게 여윈 정도는 아니다.
나니까 알아보는 거지 다른 사람은 몰라봤을 거다.
하지만 예은의 입장에선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
평소 잘 하지 않던 화장을 한 이유는 아마 그래서일 거라 생각한다.
"슬슬 잘까 하는데 따로 할 말 있어?"
"자, 잘까? 불 꺼?"
아직 대답을 하지도 않았는데 예은이 일어나서 불을 끄고 온다.
기분 탓인지 걸음걸이가 묘하게 신중하다.
그런데 하나가 의아하다.
"어, 여기서 자게?"
"침대가 이 방에 밖에 없어서 그런 거거든?"
새침하게 툭 쏘아붙이더니 머리맡 탁자 근처에 있는 조명을 켰다.
모르고 있었는데 아기자기한 모양의 스탠드가 하나 놓여져 있었다.
기둥처럼 솟아있는 탓에 침대의 모서리라 멋대로 착각했다.
"내가 없었으니 침대를 두 개 들여놓을 필요가 없었겠구나."
"..그런 셈이지."
그러면 예은 방에 두어도 될 텐데.
하긴 내가 오늘 온다는 걸 생각해서 옮겨뒀을 수도 있다.
웬만하면 자기 방에 들어오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정황을 놓고 보니 앞뒤가 대충 짜맞춰진다.
"그럼 같이 자게 될 텐데 괜찮겠어? 불편하면 내가 거실에서 잘까?"
"그럴 필요까지야.. 사귀는 사이기도 하고…."
어울리지 않게 예은의 말꼬리가 말아 올라간다.
남녀가 한 이불에서 잠자리를 함께 잔다는 것.
쉽게 생각해도 될 부류의 이야기는 아니다.
'뭐, 괜찮겠지.'
내가 욕심만 내지 않으면 별 일은 없을 테다.
예은이 몸 상태가 말이 아닌데 밀어붙이고 싶지는 않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지금 상당히 졸리다.
아침부터 이곳저곳 많이 쏘다녀야 했다.
게다가 한국에 오자마자 신고식을 거하게 치렀다.
눈을 감는다면 1분이 채 지나지 않아 잠이 들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분명 그렇게 되리라 생각한다.
'그래도 이것 만큼은 꼭 하고 싶은데.'
욕심이라는 것도 결국 정도의 문제다.
예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선이라면 괜찮을 터다.
나는 누워있는 자세 그대로 손을 뻗었다.
최소한의 반항으로 손바닥으로 나를 찰싹찰싹 때려온다.
그래도 딱히 거부를 하진 않는 눈치다.
"바보, 바보. 뭐 하려고 그래."
"안기만 할 게, 안기만."
폭 끌어 안은 예은의 피부는 딱 알맞은 정도로 뎁혀져 있었다.
한겨울답게 뜨신 물로 샤워를 했는지 몸 안쪽이 후끈후끈하다.
촉촉한 피부는 굉장히 부드러워 인형하고는 비교도 안된다.
굉장히 따뜻하고 기분 좋은 향기가 난다.
구태여 자세를 조정하지 않아도 예은이 맞춰준다.
평소 같았으면 손이 엄한데 갔을 상황이다.
채 그럴 정신도 없이 눈꺼풀이 무거워져 온다.
그렇게 안기만 한 채 꿈나라에 빠져들었다.
.
.
.
* * *
!*!이 아래와 다음 화는 그렇고 그런 내용입니다.
차후의 전개와 이어지는 부분 하나도 없어요..
if라는 느낌으로 봐주세용.....
상해, 그리고 북경.
내가 가장 많이 거주했던 두 도시는 철천지원수 사이다.
우리나라의 지역 감정과는 비교도 못하게 골이 깊다.
하지만 그런 둘 사이에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별 건 아니고 시차가 없다.
두 도시 모두 우리나라보다 딱 한 시간 빠르다.
게다가 어젯밤은 숙취가 생길 정도로 알코올을 섭취하지 않았다.
시차가 있는 만큼 평소보다 이르게 눈이 떠지는 건 당연했다.
만약 한 시간 늦게 일어났다면 꿈에도 몰랐을 사실이다.
정말 믿기지 않는 사태가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하아.. 하아.."
야릇한 음성이 고막을 자극한다.
목소리를 최대한 죽이고 있지만 확실하다.
틀림없이 예은의 목소리다.
'설마 하지만..'
내 팔을 꼭 끌어안고 있다.
폭신한 가슴의 감촉이 무척 기분 좋게 느껴진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아찔한 신음 소리가 점점 더 짧은 주기로 들려온다.
그리고 내 팔을 감은 마주 닿아있는 심장 고동도 급박해진다.
기분 탓인지 꼼지락꼼지락 몸을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하다.
슬며시 실눈을 떠 예은을 살펴보았다.
두터운 커튼 탓에 햇빛이 투과되지 않는다.
때문에 안색까지는 안 보이지만 한 가지는 알 것 같다.
'..혹시 꿈인가?'
마음 같아선 내 볼을 꼬집어보고 싶지만 안된다.
자칫 몸을 뒤척였다간 들키고 만다.
나 같아도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을 상황이다.
일단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있기로 했다.
"…랑해.."
또렷하진 않지만 아까와 같은 신음은 아니다.
간간히 궁금증을 일으키는 세 글자.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자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꿀꺽, 목구멍으로 액체가 삼켜지는 소리와 함께 예은의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깨있..지?"
아주 조그맣게 귓가에 울린다.
숨결이 닿는 걸로 미루어봐 아주 가까이서 속삭인 듯하다.
내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멈추었다.
잠이 깨지 않았다고 판단한 걸까.
그렇게 멎을 거라 생각했던 소란은 시작이었다.
손바닥에 말랑한 감촉이 느껴진다.
고민해볼 것도 없이 알 수 있는 부위다.
예은이 내 손을 끌어 당겨 자신의 가슴에 대었다.
그리고 마저 이어서 속삭여온다.
"지금 일어나면.. 하게 해줄게."
순간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눈을 떠버렸다.
빼도 박도 못하게 예은과 눈이 마주쳤다.
예은도 적잖이 당황했는지 눈동자를 피한다.
하지만 꼭 할 말이 있는 듯 망설이지 않는다.
뾰로통한 어조로 나를 탓해왔다.
"말해두지만 다 니 탓이니까."
"내 탓이야..?"
솔직히 말해 모르겠다.
만약 예은이 그런 쪽으로 관심이 컸다면 어젯밤 피곤하더라도 반드시 한 번 살을 겹쳤을 것이다.
내가 알기로 예은은 그런 걸 썩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싫어한다는 건 아니고 딱 흥미가 있는 정도.
한국에서의 마지막 날밤을 제외하면 스킨십도 제한적이었다.
나의 기억에 남아있는 예은은 분명 그러했다.
"..니가 그런 짓 해버린 이후로.. 이상해졌단 말이야."
"…."
조그맣게, 하지만 또박또박하게 말을 해온다.
채 깨지 않은 정신으로 조금 머리를 굴려봤다.
답이 나오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중국에 가기 전날의 하룻밤과 결항이 되어 비어버린 또 하루.
이틀간 정말 거리낄 것이 없었다.
젊음이 아니면 불가능할 속된 말로 광란의 시간을 보냈다.
당시 예은은 내가 하고 싶어하니 맞춰주는 거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예은은 혼자서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반응에서 유추해보건데 거짓말은 아니었다.
게다가 화상 통화를 할 때도 그때 얘기를 꺼내면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런데 알고 보니 예은도 꼭 싫었던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무슨 말인진 알겠는데.. 그때 덮친 건 내가 아니라 너…"
"시시콜콜하긴.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평소와 같은 앙칼진 목소리다.
내 말을 끊고 바로 입술을 겹쳐온다.
이제 막 일어난 참이라 입냄새가 날 수도 있는데.
개의치 않는지 혀까지 쑤욱 넣어왔다.
예은의 입은 내가 기억하던 그대로 달콤하고 따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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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항상 감사합니다.
이번 화 밑 부분이랑 내일 한 화는 if라고 생각하고 봐주세요..
담배는 내일로 끝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