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06 인천공항 상륙작전 =========================
귀국한지 보름이 약간 안되게 지났을까.
정말 걱정이 되었던 예은의 새로운 기호 식품 문제.
결과적으로 깔끔하게 해결이 되어 문제랄 것은 없다.
하지만 언제까지 고주망태 늘어져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
나와 예은은 한 마디로 알콜달콩한 상태다.
"한 잔 마시고 잘 거지?"
찰랑찰랑 금빛 액체가 담긴 유리잔이 볼에 닿았다.
서늘한 감촉에 정신이 바짝 깬다.
들고 있던 컨트롤러를 순간 놓칠 뻔했다.
나와 예은의 방을 제외한 제 3의 방.
게임방이라 부르기로 한 곳에서 게임기를 두들기는 중이다.
잠시 화장실을 간다고 한 예은이 술을 퍼오신 모양이다.
"..이렇게 따라서 갖고 오면 내가 마실 것 같아?"
"한 잔 정도는 괜찮잖아. 응? 그치?"
뒤에서 꼭 끌어안고 애교를 부린다.
하루 24시간 중 유일하게 예은이 귀여워지는 시기다.
그러니까 요즘 술을 너무 마셔 댄다.
'영향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알콩달콩이 아니라 알콜달콩.
원래부터 술을 좋아하던 예은이 구름과자를 끊고 난 이후 더 찾게 됐다.
심심한 입을 달랜다고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래서 가만히 놔두었더니 아주 밑도 끝도 없었다.
'도수가.. 최소 35도는 넘겠네.'
이 금빛 액체의 출처는 이전부터 예은이 애지중지 모으고 있는 양주장이다.
거실 한 켠에 위풍당당 자리 잡고 있다.
반년 못 본 사이에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빼곡해졌다.
내용물도 상당히 알차 하나하나 깔 때마다 자랑을 늘여놓았다.
그만한 것들을 근 2주 사이에 1/3가량이나 해치웠으니 주량이 도를 넘었다.
얼마 전부터 예은의 동의 하에 내 통제 하에서만 음주를 하기로 했다.
"한 잔.. 허락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자기 전에 한 잔 하면 혈액 순환에도 도움이 되고 잠도 잘 와."
주절주절 알코올 예찬론을 떠들어온다.
근데 그건 레드 와인으로 반 잔 정도 마실 때의 이야기고 당연히 양주는 해당되지 않는다.
잘 관리 안 하면 알코올 중독자될까 걱정이다.
한 잔 정도는 괜찮을 거라 생각하지만 말이다.
"너 요즘 너무 사람 불안하게 만든다."
"누가 보면 내가 절제심도 없는 줄 알겠네."
"응, 그래 보여."
처음에는 이런 인상과는 거리가 멀었던 거 같은데 알고 지낼수록 이 녀석도 사람이다.
특히 최근은 위태위태해 보여서 걱정이 많다.
차츰 나아지고는 있어도 언제 또 탈선할까 감시가 필요하다.
"음식도 시원찮게 먹게 됐고 이 아빠는 근심이 크다."
"뭐래, 그냥 요즘 입맛이 없어서 그래."
"입맛.. 뭐?"
그게 뭐 되도않는 소리인지 귀를 의심했다.
물론 예은이 살이 빠졌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 이유가 짧아진 입 탓이라는 것도 잘 안다.
매일매일 같이 식사를 하니 모를 수가 있을까.
하지만 잘 안 먹는 수준도 아니고 나 만큼은 먹는다.
이쁜 애인이 꾸역꾸역 먹는 광경은 안 보게 돼서 살짝 좋기도 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입맛이 없어서라니.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너.. 혹시 나를 먹보라고 생각하고 있던 거 아니야?"
먹보가 아니라 밥순이라고 생각했던 적은 있다.
애가 좀 화가 나도 밥만 먹이면 달랠 수 있더라.
안타깝게도 실화라서 틀릴 구석이 없다.
"나도 뭐 팍팍 먹고 싶은데 안 넘어가는 걸 어떻게 해."
"음.. 맛집 투어라도 한 번 해야 하나."
"너무 진지하게 고민 하지 마라. 다치기 전에."
예은이 주먹을 손에 쥐고 으득으득 소리를 낸다.
사랑하는 애인한테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자니 씁쓸하지만 걱정이 되는 건 정말이다.
그러고 보면 그 맛집 투어.
괜찮게 할 수 있는 계기가 있었다.
"자기 전에 게임 한 판 할래?"
"그거 슬슬 질리는데. 딴 겜 하면 하고."
내가 조금 전까지 하고 있던 RPG게임.
적당히 아무거나 골라 잡은 콘솔 게임이다.
내용은 은퇴한 기사가 마물에 의해 점령된 수도에서 지인을 구출하고 어쩌고저쩌고.
그런 식으로 스토리가 진행되는데 거의 다 깨간다.
"아니, 이 게임 말고 그거 있잖아 그거. 롤 하자고."
"음주롤? 좋지. 근데 웬일이야?"
예은과 내가 솔랭 듀오를 하면 어지간한 게임은 개박살이다.
한국 계정은 아직 새로운 시즌의 배치도 끝내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이다.
아무리 음주롤이라고 해도 얄짤이 없다.
나는 몰라도 저 무서운 누님은 봐주지 않는다.
물론 내가 말을 꺼낸 목적은 그게 아니다.
"칼폭풍 협곡 말이야. 간단하게."
"흐응.. 김 빠지는데. 뭐, 좋아."
딱히 거부할 이유는 없다는 게 이유가 됐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았다.
게임방에는 공용 컴퓨터도 두 대 존재한다.
방에도 개인 컴퓨터가 있지만 이렇게 같이 용무를 볼 때 필요할 것 같아서 마련해 두었다.
딸칵!
컴퓨터를 켜고 로드 오브 로드에 접속한다.
최근 롤을 안 하고 있지는 않았다.
딱 몸 푸는 정도는 하고 있다.
칼폭풍 협곡의 큐를 돌리니 다행히 빠르게 큐가 잡혔다.
"나 미달리 주라."
"..너 티몽이잖아."
"그러니까 달라는 거지 멍충아."
예은이 팔꿈치로 나를 툭툭 친다.
말이 교환이지 이건 강탈이나 다름없다.
강제로 내 마우스를 움직여서 끝끝내 수락을 누르게 만들었다.
이렇게 대놓고 힘 싸움을 하면 이길 수가 없다.
져주는 게 아니라 얘가 좀 너무 세다.
"옛날 생각나네."
"뭐가? 맞고 살던 기억?"
"....꼭 내 자존심을 즈려밟아야만 하겠니."
처음 대회 무대라는 곳을 도전했을 때였다.
로드 오브 로드 챌린저스 리그, 프로게이머의 등용문이라 할 수 있는 아마추어 리그다.
LCL에서 처음 경기를 치르기 전에도 함께 칼폭풍 협곡을 하였다.
'그때도 티몽과 미달리였었지.'
물론 그때는 내가 운이 없어서 티몽을 하게 됐다.
지금처럼 어거지로 떠넘겨진 건 아니었다.
어쨌든 한 번 더 비슷한 구도의 게임이 진행된다.
[전체]-헐, 올마스터 본인 맞음? 대답 좀.
[전체]-전적 보고 왔는데 진퉁 맞네. 팬이에요!
[전체]-뮴뮴 누님이랑 협곡 데이트 중이세요?
[전체]-캬ㅋㅋㅋ 학교 가서 자랑해야지.
곧 겨울 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하는 시기던가.
나 한 번 만난 걸로 친구들 간에 재미난 화제를 만들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그 기억 속 올마스터가 부디 트롤러로 남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겠다.
칼폭풍 협곡에서 빡겜을 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티몽님.
-네.
-프로게이머한테 템트리 지적하기 뭐한데.. 꼭 AD템 가야 함?
-이거 좋음;;
칼폭풍 협공에서 티몽은 최악 중에 최악인 챔피언이다.
상대가 내 버섯 위치를 대놓고 알 수 있다.
게다가 버섯을 깔아도 아주 손쉽게 지워버린다.
소환자의 전장에서는 살 수 없는 칼폭풍 협곡 전용 아이템들.
개중에는 은신 감지 효과가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
AP템트리를 가봤자 하등 의미가 없는 것이다.
'AD티몽도 괜찮은데..'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나쁘지 않다.
얼어버린 망치와 쿠단의 소용돌이.
이 두 가지 아이템으로 지속딜을 넣는다.
헤일의 하위 호환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어쨌든 이게 티몽의 최선이다.
날카로운 티몽의 최선을 맛봐라!
─적에게 당했습니다!
[전체]-아싸 올마스터 솔킬 땀ㅋㅋㅋ
[전체]-뭔 솔킬이야 나 덕분에 딴 거지.
[전체]-근데 진짜 올마 맞음? 왜 이렇게 못함?
내가 나쁜 게 아니라 티몽이 나쁜 거다.
이 요망한 쥐새끼로 칼폭풍 협공을 대체 어찌 하라고.
하지만 희망이 없는 소린 아니다.
우리팀에는 무려 미달리를 잡고 있는 프로게이머가 있으니까!
"작작 좀 죽어봐. 누님 캐리하기 힘들다."
"그 미달리 내 거였는데.."
"깔깔 재밌다 롤~!"
아주 신나게 즐기고 계신다.
상대가 기껏해야 실버, 플레 이러다 보니 싸움이 되지를 않는다.
논타겟이라는 게 아무리 운빨을 탄다고 해도 이 정도 격차가 나면 그냥 타겟팅이다.
"예은아.. 예은아? 나 힐 좀 주지 않으련?"
"한 잔 더 마시는 거 허락해주면."
"그런 거에 내가 넘어갈 줄 알아?"
마음 같아서는 당장 넘어가고 싶다.
프로게이머로서의 체면이 짓밟히는 중이다.
적팀은 지금 게임 승패 상관없고 티확찢에 목이 말랐다.
어떻게든 나만 죽이면 된다는 마인드.
테이커나 당할 법한 집중 사냥을 당하고 있다.
'조금만 더 버티자...'
버티다 보면 결국 빛 볼 날이 찾아온다.
다행히 아군이 이기고 있는 상황이다.
꾸역꾸역 버티면서 어시를 챙겼다.
한두 번 킬딸까지 치자 목표했던 아이템이 나온다.
슬슬 티몽도 사람 구실을 할 시기가 왔는데.
─적팀의 포탑을 파괴했습니다!
적팀의 억제탑을 파괴했습니다!
아무래도 그전에 게임이 끝날 모양이다.
서렌을 쳐오지 않을 뿐 승패는 이미 결정이 났다.
부활을 하자마자 창을 맞고 시작하는데 어찌 버티겠는가.
따악!
정중하게 최대 사거리에서 꽂힌 창 한 방!
반피가 나간 신짜장은 전의를 상실하고 만다.
칼폭풍 협공은 우물이라는 개념이 없다.
회복 스킬이나 맵 구석구석에 나오는 회복 토템으로만 체력을 채울 수 있다.
이렇게 포위가 된 상황에서는 회복 토템을 먹을 방도가 사라진다.
프로게이머가 칼폭풍 협공에서 빡겜을 하다니.
분명 상대팀에서도 슬슬 한 소리를 할 때다.
[전체]-꺄아! 누님한테 창 맞음ㅋㅋㅋ
[전체]-하트에 제대로 직격 당했다 ㄱㅇㄷ~
[전체]-뮴뮴 누님도 올마스터도 스프링 시즌 재밌는 경기 보여주세요!
[전체]-올마스터 맞나? 마지막까지 못하네..
공인이라서 한 마디 할 수도 없고.
살짝 빡이 치려던 찰나에 게임이 끝났다.
내 옆에 계신 분은 굉장히 흡족하게 함박 웃음을 짓고 있다.
"오랜만에 하니 재밌다. 한 판 더 할래?"
"..씻고 자자."
"삐졌냐? 삐돌이래요~ 우쭈쭈."
설마 칼폭풍 협곡 한 판 졌다고 삐지기까지 할까.
바로 그 설마다.
일반 유저들이 놀리더라도 적어도 너는 토닥토닥 해줬어야지.
힐도 안 주고 진짜, 힐도 안 주고 진짜.
서러워서 두 번 말했다.
"에이, 티몽 스티커 줄 테니 화 풀어."
"끝까지 놀리네."
"꼬우며 한 판 떠볼 텨?"
친절한 플레이를 한 팀원에게 선사하는 티몽 스티커.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선 놀려 먹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예은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향해 피식 웃는다.
평소 같았으면 이대로 침대에 들어갔겠지만 오늘은 아직 볼 일이 안 끝났다.
"후우…."
"오, 빡쳤다 빡쳤어."
"..화 안 났거든."
누가 보면 정말 화난 줄 알겠지만 화 안 났다.
내가 참고 사는 게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아무튼.
볼 일이라 함은 다름이 아니다.
꼭 전해야만 할 말이 있다.
"다음 주에 LCF 열리는 거 알지?"
"응, 알지 왜?"
"한 번 와달라더라. 바쁜 거 아니면 같이 가자고."
난데없이 칼폭풍 협곡을 하자고 했던 이유다.
1대1 토너먼트 이벤트전.
차후에는 올스타전 같은 데서 64강씩 하게 된다.
하지만 이번 LCF는 간략하게 진행한다고 한다.
"흐응.. 할 말은 그것 뿐이야?"
예은이 입술이 뾰족하게 내민 채 나를 지긋이 쳐다본다.
예전 같았으면 몰랐겠지만 이제는 안다.
무언가 하나 눈치를 채라는 신호다.
아주 잠시 침묵의 시간이 지났다.
"끝나고 해수욕 갈까? 거기서 맛있는 것도 먹고."
"좋아. 까짓 가지 뭐 별 거라고."
원하던 대답을 하는데 성공했나 보다.
흡족한 미소와 함께 주먹으로 한 대 툭 친다.
친근함의 표시다.
그리고 점점 미소가 음흉해지더니 역시 한 마디 붙여온다.
"그럼 축하하는 의미에서 한 잔 더 콜?"
"..오늘만이다."
"아싸뵹!"
무슨 축하인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도 좋고 하니 허락한다.
아이처럼 들뜬 예은의 모습에 절로 입가가 흐뭇해진다.
그동안 정신적으로 불안해진 예은 탓에 속이 많이 상했다.
예은이 아니라 예은을 두고 중국에 간 나 자신에게 말이다.
이렇게 쾌활하고 활기찬 녀석이 나 때문에 마음 고생을 하다니.
만에 하나 예전처럼 돌아가지 못하면 어떡할까, 엄청나게 마음을 졸였다.
'정말로, 정말로 다행이야.'
순간 짠해서 눈물이 한 방울 나올 뻔했다.
예은이 술을 가지러 간 참이라 수습할 수 있었다.
다시 시작되는 예은과의 생활.
소중했던 나날이 이어진다는 게 감사할 따름이다.
다음날 아침.
신속한 답변을 부탁드린다는 LCF측에 전화를 걸었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여유가 없던 듯 연거푸 감사하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신경 쓰지 말라고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한 가지 더 이야기가 진행됐다.
어떻게 보면 필연이다.
하지만 이를 듣는 나로서는 상당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게 한참이나 인연이 없던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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