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07 뜻밖의 초대 =========================
로드 오브 로드 챔피언스 리그 파이널.
작년 이맘때 쯤 프랑스 파리에서 열렸다.
비가 주륵주륵 습하던 파리의 나날을 나는 기억한다.
그 LCF개최 측에 연락을 준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리고 오늘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 도착했다.
익히 와본 적이 있는 로스앤젤레스의 공항.
나로서는 제2의 고향이라고까지 느껴질 정도다.
단순하게 지낸 날짜를 따지는 게 아니다.
나의 새 인생이 날개를 펼 수 있게 만들어준 장소다.
이곳에서 나는 돈으로 환산을 할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을 얻었다.
그 중 하나.
어쩌면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할 사람이다.
예은이 내 손 꽉 잡은 채 앞뒤로 휘휘 젓고 있다.
"신나?"
"신나지. 해외 여행이잖아?"
"딱히 여행으로 온 건 아닌데."
"뭐, 겸사겸사."
아무래도 이곳의 기온이 조금 덥다.
아직 겨울이 가시지 않은 한국에 비하면 정말 천국이다.
그래서인지 마주 잡은 두 손이 점점 촉촉해진다.
"야, 너 땀 난다."
"네 땀 아니야?"
"아니거든. 무조건 니 땀이야."
그러시다고 하신다.
어쨌든 이번 LCF의 개최지가 캘리포니아가 된 이유.
도착하자마자 피부로 느꼈다.
'하긴 날씨가 이렇게나 좋은데.'
개막식이 열리는 지역은 이곳보다 조금 더 남부다.
해안가에서 떠들썩하게 개최할 예정이라고 한다.
혹시나 해서 물어봤는데 한국 해운대 결승전의 영향을 받은 게 맞단다.
3월 초에 그것이 가능한 후보지를 한정해 보자면 적다.
특히 로스앤젤레스 근가는 E-스포츠가 발전돼 있다.
로드 오브 로드 게임사가 위치한 곳이니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지지난 시즌2의 롤드컵 개최지이기도 한 만큼 로드 오브 로드 팬들에게 친숙하다.
그런 L.A가 위치한 캘리포니아.
다가오는 LCF에 더없이 적절한 지역임이 맞다.
'하나 찜찜한 게 있기는 하지만.'
정말 여러모로 인연이 깊을 수밖에 없다.
와 닿지도 않는 게임사를 말하는 게 아니다.
당장 건너편에서 오고 있는 녀석들 이야기다.
"세상에! 전설적인 프로게이머 에러갓이야."
"뭐? 최근 빌어먹을 중국 놈들을 짓밟아줬다는 그?"
"이야~ 사인이라도 받아가야겠는데?"
저렇게 이죽거리면서 껄렁껄렁 걸어오고 있는 놈들 말이다.
CLC, 그리고 CLC 2군의 프로게이머들.
아니 이제는 CLU라고 했던가.
NA롤챔스의 시드권을 쭉 유지하고 있다고 하니 형제팀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헛소리 때문에 반만 반가워야겠다."
"얼굴 보기가 이렇게 힘들어 우리 인기 스타 나으리."
"한국에서 보고 반년 만 아니야?"
코치인 라이로, CLU의 정글러 프릭 등등.
한 번씩만 포옹해도 다섯 명이나 된다.
다 나온 건 아니고 안내 차원에서 몇 명만 나왔다고 한다.
이 정도만 해도 지나치게 호들갑이지만 말이다.
'중국 생각 나서 살 떨렸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바로 바깥.
몰래라는 개념이 없는지 대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주위를 살짝 둘러보니 우리를 알아본 사람들이 제법 있다.
카메라나 핸드폰을 들고서 이쪽을 향해 찍는다.
중국에서는 찍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카메라 모서리로 나를 찍고 내 물건을 가져갈 듯한 분위기였다.
인파가 보내오는 느낌이 정말 살 떨리게 무서웠다.
속된 말로 빠 어쩌고 하는 여성 광팬들이 가장 두려웠다.
다행히 미국 팬들은 그 정도로 극성인 사람들은 없어 보인다.
다가와서 친근한 인사를 건네며 사인을 부탁하는 팬들이 수 명.
내가 미국에서 경기를 한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아직까지 기억을 해준다는 건 정말로 고마운 일이다.
그렇게 간이 사인회가 열리고 팬들과 포옹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사이에 다른 한 명의 팬이 말썽을 부리고 있다.
빠 뭐시기에 속하던 사람이 한 명 주위에 있었다.
"오오~ 표정 썩은 거 봐. 눈에서 레이저 나가겠어."
"둘이 사귄다는 거 사실 반만 믿고 있었는데 진짜였구나."
"핫숏, 너 밤길에 뒤통수 조심해야겠다."
예은도 일단 핫숏의 팬이었다.
하지만 한 번 투닥거린 이후로 잠잠했다.
그것으로 팬심은 꺼진 줄 알았는데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쪼잔하게 이러기 싫은데..'
다른 녀석들과는 악수만 해놓고 핫숏과는 포옹을 했다.
딱 과거 팬이었다, 아니었다 그 차이라고 생각한다.
알고 있음에도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그게 표정으로 드러났는지 연놈들이 히히덕 대고 있다.
예은의 얼굴을 보니 절대로 일부러다.
"미안해. 설마 예은이 포옹할 줄은 누가 알았겠어?"
"딱히 괜찮은데요."
"괜찮은 얼굴이 아니구만. 너도 알잖아? 옛날의 예은이 어땠는지."
나로서는 지금의 예은이 당연하다.
하지만 핫숏에겐 그렇지가 않았다.
뜨거워진 머리로 잠시 되새겨 보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랬었던 것 같기도 하고..'
지금으로부터 1년도 더 된 일이다.
당시 예은은 한 마리의 야생 짐승이었다.
주위에 있다가 물어 뜯기면 책임 안 졌다.
실제로 변을 본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나도 그때 호되게 당했지. 진짜로 무서웠어. 여성 팬들에게 트라우마가 생겼을 정도였다니까."
"아.. 이제서야 좀 기억이 나네요. 그때 장난 아니긴 했어요."
전성기 시절의 예은은 정말 미쳐 날뛰었다.
도저히 막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조금 된 일이라 잊고 있었는데 핫숏이 예은을 상당히 무서워했다.
'팬이라고 소개를 시켜줬던 게 나였지.'
내가 CLC 소속이라고 하자 예은이 깜짝 놀랐다.
롤드컵 표를 구해달라며 난리도 아니었다.
알고 보니 CLC, 그것도 핫숏의 엄청난 팬이었다.
그래서 큰 마음 먹고 구해줬다.
사실 내가 구해준 건 아니고 핫숏이 신경을 써줬다.
그런데 서로 만나더니 그새를 못 참고 일을 터트렸다.
모종의 이유로 핫숏을 겁나 갈구고 결국 백기를 들게 만들었다.
이 믿기지 않는 기행을 실제로 저지른 게 과거의 예은이다.
정황을 봤을 때 핫숏에게는 죄가 없다.
일부러 나를 자극한 현재의 예은에게 모든 혐의가 걸려있다.
"우쭈쭈~ 질투 나냐?"
"말을 말자 말을."
나를 더욱 자극할 작정인지 놀려 댄다.
다분 빡칠 만한 상황이지만 옛날에 비하면 양반이다.
따지는 건 나중에 하기로 하고 숙소로 향했다.
그리운 CLC의 숙소.
간만에 이곳 로스앤젤레스에 돌아왔으니 묵은 회포부터 풀 시간이다.
.
.
.
* * *
외국 여행을 갔는데 현지에 친구들이 있다.
어찌 만나지 않고 넘어갈 수 있겠는가.
오래간만에 반가운 얼굴들을 보았다.
'다는 아니지만.'
작년 LCF 이후 CLC를 나간지 1년이 되었다.
아무래도 상당한 세월이 흘렀다.
은퇴든 이적이든 간에 멤버 변경이 있을 수밖에 없다.
CLU의 탑라이너였던 헤일커드.
CLC의 탑라이너인 바이바이.
CLC의 서포터였던 카우스터.
이렇게 셋이 CLC를 나갔다고 한다.
'은퇴가 아니고 이적이라.. 다행인 일이야.'
내가 알고 있는 미래에서 이 셋은 그냥 은퇴를 했다.
날이 갈수록 떨어지는 실력.
냉정한 프로게이머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힘들었다.
결정적으로 로드 오브 로드 판의 흥행이 저조하였다.
물론 당시에도 잘 나가는 선수들은 잘 나갔다.
하지만 애매한 위치에 있는 선수들로선 고민이 되었다.
지금이라도 다른 일자리 알아보는 게 훨씬 낫겠다.
안정적이지 못한다는 프로게이머라는 직업.
리스크와 리턴을 고려해서 판단해야 한다.
연습생 생활을 전전했던 나로서는 정말 공감이 가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나는 사정이 조금은 나았어.'
보통 프로게이머가 은퇴를 하면 코치를 하는 걸로 아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이 코치를 할 수 있는 프로게이머는 전체의 1할도 안된다.
이유인 즉, 프로게이머는 게임을 잘하는 사람이다.
잘하는 사람이지 잘 아는 사람이 아니다.
게임을 잘하는 것과 잘 아는 것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야기다.
나 같은 경우 실력은 조금 떨어져도 코치로서의 재능은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기를 쓰고 중국 2부 리그의 프로게이머라도 해서 이력을 만들라고 했었는데.
"중국을 정복하고 돌아온 에러갓과 조금은 살가워진 예은의 눈동자에 건배!"
CLC에서 떠난 선수가 있다면 일단 이 녀석은 무조건 포함돼있지 않을까.
내심 첫 번째 순번을 꼽고 있었던 로크도그가 기운 차게 술자리의 시작을 알렸다.
아무튼 중국 이야기를 해대는 바람에 잠깐 기억이 났다.
"야야, 분위기 파악해. 싸웠대잖아."
"들어보니 뭐 별 것도 아니더만. 옛날처럼 멱살 잡고 한 대씩 치던가."
옛날에는 내가 맞기만 했지 치지는 못했다.
목숨이 얼마나 아까운 건데 어찌 감히 대들겠는가.
그러고 보면 나도 많이 바뀌었다.
'예은이랑 기싸움도 하고 말이야.'
공항에서 핫숏과 포옹했던 사건.
아직 그 냉랭한 분위기가 풀리지 않았다.
둘이서 이야기 할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없다.
바로 CLC의 숙소에 갔고.
가자마자 애들 데리고 마시러 왔다.
이전에도 수 번 들렸던 술집이다.
핫숏이 무척이나 좋아하는 그 삐걱대는 단골 가게 말이다.
"크크큭! 여기가 낡긴 했어?"
"쉿! 목소리 좀 낮춰. 들렸다간 우리 다 내쫓긴다고!"
"네 목소리가 제일 커. 이 멍청이 마르코야."
핫숏디디와 세인트조지아.
둘의 사이는 여전한가 보다.
혹시 다시 트러블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을 했었는데 기우였던 모양이다.
'참 신기하긴 해.'
미래가 점점 바뀌어 간다.
은퇴를 했을 선수들도.
틀어졌을 둘의 사이도.
운명이라는 건 정말 신기하다.
내가 한 건 지구 건너편 나비의 날갯짓에 지나지 않는다.
그 자그마한 변화가 만들어낸 E-스포츠의 세계화.
어디까지나 내 상상이지만 신빙성은 있다.
그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설명이 불가능하지 않은가.
뭐, 정말 진지하게 그리 여기는 건 아니고 종종 생각에 잠기는 정도다.
눈을 감으면 그런 거 말고는 걱정거리가 없다.
최근의 일상이 너무 행복한 나머지 가끔 꿈이 아닌가 볼을 꼬집곤 한다.
또각, 또각.
그런 내 고민을 알아서일까.
나를 덜 행복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오늘도 사고를 치셨다.
술이 든 유리잔을 하나씩 들고 예은과 술집 밖으로 나왔다.
이미 다들 술이 들어간 상태다.
분위기도 무르익어서 잠깐 나와도 괜찮을 터다.
차가운 밤공기가 피부를 때린다.
따듯했던 낮과는 대조적으로 해가 지니 쌀쌀하다.
이곳 로스앤젤레스는 지난 해에도 그랬었다.
"겉옷 줄까?"
"..괜찮지롱."
술 좀 마시다 보면 추울 줄 알고 챙겨왔다.
청색 자켓을 벗어 입혀주니 마다하진 않는다.
걸치자 마자 킁킁 냄새를 맡으며 내 인내심을 자극한다.
"옷에서 니 냄새나."
"싫으면 벗던가."
"니 냄새.. 싫지 않아."
뭐 하자는 건지.
이해는 안 가긴 해도 기분은 나쁘지 않다.
애인이 냄새 페티쉬란 건 살짝 충격이지만.
"죽을래?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런 게 아니면 뭔데?"
"그냥, 나도 모르겠어."
대화가 갈수록 산으로 간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냉랭했던 분위기는 잦아들었다.
차츰 말문이 트이고 있다.
공항에서의 사정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복수였다고?"
"나만 질투하면 불공평하잖아."
"뭐야, 그게."
너무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이 지어졌다.
귀국하자마자 있었던 츠위와의 사고.
그때의 감정을 아직까지 묵혀두었나 보다.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많다니까."
"야 이.. 머리 헝클어지잖아."
잠깐 짜증을 내는 듯하더니 이내 받아들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머리 쓰다듬어는 건 싫어하진 않았던 예은이다.
오히려 먼저 해달라고 할 정도로 좋아했었다.
이렇게 좋아하는 것 보면 앞으로는 자주 해줘야겠다.
"여전히 머리 잘 만지네. 고년한테도 해줬어?"
"안 해줬어."
"정말이지?"
술이 들어가면 웃음이 많아지고 부드러워진다.
그리고 나한테 앵겨붙는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겠지만 화해는 이미 마친 듯하다.
"새꺄, 사랑하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거지 왜 새끼를 붙여?"
"내 성격 알면서 왜 그래.. 나는 삐져도 너는 삐지지 마."
최근 거의 금주에 가깝게 못 마시게 했다.
술이 별로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취할 만도 하다.
혹시 몰라 뒤를 돌아보니 우리쪽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다.
가게의 유리창 너머로 수많은 시선들이 느껴진다.
'한 1년은 놀림감이 되겠는데.'
술집에 다시 들어가는 순간 어떤 반응을 해올지 머릿속에 그려진다.
예은 성질 박박 긁어서 테이블을 엎게 만들면 난 구경이나 해야겠다.
서둘러 로스앤젤레스를 뜰 이유가 하나 늘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내일부터 당장 갈 곳이 많다.
E-스포츠 판이 엄청나게 성장했다.
이곳 미국에 돌아오게 된 건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진다.
============================ 작품 후기 ============================
화면 상단에 있는 추천 버튼! 잊지 않고 눌러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독자님들이 주시는 쿠폰 덕에 힘내서 연재 이어나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