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08 뜻밖의 초대 =========================
오랜만에 가진 만족스러운 술자리.
술고래인 예은이 완전히 뻗었다.
내가 친히 업고서 근처 호텔까지 가야 했다.
당연 CLC 숙소에 가자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거절했다.
다음 날 아침 겁나 민망할 게 분명하니까.
붙드는 걸 무시하고 걸음을 옮기니 뒤에서 휘파람 불고 난리도 아니었다.
"어젯밤 기억나?"
"..안 나. 물어보지 마."
늦은 아침, 양치질을 하며 넌지시 말을 건네니 이 반응이다.
술에 챘을 때는 그렇게 귀여웠는데 깨자마자 시큰둥하다.
"침대에서 앙앙댄 것도 기억 안 나?"
"뭔 개소리야, 어제 안 했잖아! 아.."
보글보글 거품이 일어난 칫솔을 들고 반박하던 예은이 벙찐다.
함정 수사에 제대로 걸려들었다.
아무 일도 없던 듯 다시 양치질을 하신다.
"못한 거 지금 할까?"
"..닥쳐."
호텔에서의 체크 아웃 시간이 끝나간다.
이제 다음 목적지를 향해 떠날 시간이다.
아직 LCF가 열리기까지 하루가 남았다.
나를 제외하고도 트리플리프트, 세인트조지아, 그리고 강제 게스트 핫숏디디.
CLC 소속 세 명이 LCF 개막전 1대1 토너먼트 이벤트전에 참가할 예정이다.
어젯밤 마음 놓고 진탕 마셨던 데는 그러한 사정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이틀이나 먼저 캘리포니아엔 온 데도 사정이 있다.
"너 양복 되게 안 어울린다. 꼬라지가 이게 뭐냐?"
"야, 목 졸려.."
호텔룸 한 켠에 비치된 대형 거울 앞.
반사된 유리면을 통해 익숙하지 않은 내 모습이 비친다.
짙은 회색의 정장을 입고 서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입었는데 예은의 마음에는 영 흡족하지 않나 보다.
손수 입혀주겠다며 아까부터 넥타이를 끌어당겨 내 목을 조르고 계신다.
과정은 고통스러웠지만 결과적으로 나아진 것 같기도 하다.
"이제 좀 사람 같네. 아직 쑥과 마늘이 더 필요해 보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괜찮은 거 같은데.. 같이 다니기 쪽팔려?"
"뭘 입어도 쪽팔리게 돼있으니까 신경 쓰지 마."
헤실헤실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신랄한 독설을 해오신다.
아니 뭐 알고는 있다.
세상사 노력을 해도 안되는 게 있기 마련이다.
예은의 옆자리에 걸맞은 남자가 되는 것은 어렵다기보단 불가능에 가깝다.
다른 건 몰라도 외모적인 부분은 특히 그럴 수밖에 없다.
"내가 네 옆에 서고 싶은 거니까 괜찮아."
"아, 그래..?"
사람 쑥스럽게 만드는데 뭐 있는 녀석이다.
옆에서 보면 참 깨가 쏟아지는 장면이 아닐까.
그걸 말하는 장본인은 아마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인지를 했다면 분명 손을 휘저으며 횡설수설, 혹은 악담을 내뱉어 가리려고 했을 거다.
아무튼 극히 인연이 없을 정장을 입게 된 건 다름이 아니다.
대학교에 가게 됐다.
정말 뜬금없게도 대학교에 갈 일이 생겼다.
그것도 한국의 대학이 아닌 미국의 대학.
캘리포니아 주립대에서 초청이 왔다.
가장 믿겨지지가 않는 건 나 자신이다.
나는 지금 대학에 강연을 하러 간다.
.
.
.
* * *
강연이라 해봤자 내가 할 수 있는 건 몇 가지 없다.
기껏해야 롤 이야기.
그리고 내가 겪은 모든 것.
이 두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이 되나 보다.
학생들의 반응은 의외로 뜨겁다.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나에게 질문해온다.
"질문 있습니다. 두 분이 사귄다는 게 정말입니까?"
"믿기지 않겠지만 정말이란다."
"혹시 약점 같은 걸 잡았다던가.."
부담되게 넓은 강의실의 안.
한 학생의 날카로운 질문에 웃음바다가 돼버린다.
옆에서 강의를 보조해주던 예은도 쿡쿡 숨죽여 웃는다.
'분위기는 편해서 좋네.'
학생들 분위기라는 게 한국이나 미국이나 크게 다르지는 않나 보다.
수업 시간에 보면 선생님들 사생활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이 있다.
선생님 여친 있어요?
프로게이머 되면 짱 박혀서 게임만 해야 하는데 여친 못 사귀는 거 아니에요?
그런 쓸데없는 질문을 사전에 틀어 막으려고 예은을 데려왔다.
그래도 결국 건수 잡힐 게 없지는 않나 보다.
그러고 보면 나도 학창 시절에 다를 거 없었지.
학생들 생뚱 맞다고 생각할 게 아니다.
"잠깐 이야기가 샜는데.. 아무튼 지금 로드 오브 로드는 단순한 게임 대회를 넘어서 스포츠화가 진행되고 있으니 미래 지향적으로 봐도 괜찮다고 생각해. 내 인생 아니라고 막말하는 게 아니라~"
정식 교수가 아닌 강사기 때문에 이야기도 가볍다.
방금의 드립이 마음에 들었는지 학생들이 킥킥 웃는다.
하지만 내용 자체는 절대 성의 없이 말을 꺼낸 게 아니다.
북미, 유럽, 한국, 그리고 내가 얼마 전까지 있었던 중국.
단순히 주워들은 내용이 아닌 직접 보고 듣고 경험했던 나라들이다.
전부 E-스포츠의 성장세가 대단하다.
내년 아시안 게임에 채택될 가능성이 확정에 가까운 수준이라고 하니 말 다했다.
"이곳 캘리포니아 주립대와 마찬가지로 LOL장학금, 그리고 E-스포츠 학과들이 확충이 되는 추세야. 판이 커진다는 건 꼭 게임사나 프로게이머가 아니더라도 일자리는 많아진다는 거지. 이쪽 계열에 로망이 있다면 E-스포츠 판의 미래는 걱정 접어도 된다고 봐."
초청 강의는 사실 몇몇 중국 대학에서도 권유를 받았다.
거절하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개강 날짜 쯤 됐을 때 내가 중국에 없다.
한국으로 귀국할 예정이 잡혀있었다.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의 경우는 LCF 이벤트전 겸사겸사.
그리고 로드 오브 로드 게임사에 특별히 부탁을 받았기 때문도 있다.
거절했다가 내가 하는 챔피언들을 전부 너프시키면 어떻게 해.
농담이지만 살짝 위기감을 느낀 건 사실이다.
그래서 받아들인 감도 분명히 있다.
덕분에 주제에 맞지도 않는 강사 노릇을 하는 중이다.
정장을 입고 강단에 서있자니 몸이 뻣뻣하다.
학생들이 주의 깊게 들어주지 않았다면 난감했을 것이다.
"질문있는데요. 프로게이머는 E-스포츠 학과랑 큰 상관이 없지 않나요? 실력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좋은 질문이야. 확실히 프로게이머는 그럴 수밖에 없긴 하지. 하지만 은퇴 후의 미래, 그리고 그 외의 직종. 예를 들어 코치라던가 게임 전문가라던가 관련 학과를 나온 사람이 유리하지 않겠어?"
이래 봬도 상당히 진지하게 하는 소리다.
대부분의 학문이 처음부터 자격증이 있었고, 전문 학과가 있었던 건 아니다.
마찬가지로 E-스포츠 학과도 처음 시작은 조금 삐걱대는 건 당연하다.
이 내용은 사실 내 주관은 아니고 들은 이야기다.
초청 강연에 앞서 참고 자료라며 두꺼운 자료집을 보내왔다.
질문에 대한 예상 답변까지 자세하게 써있었다.
받을 때는 이거 뭐 짜고 치는 고스톱 아닌가?
살짝 그런 생각도 들었는데 자세히 읽어보니 아니었다.
그리고 예상 답변이 없었다면 강연을 이어나가기 곤란했을 것 같다.
그렇게 질답을 주고 받으며 근 한 시간에 걸친 난생 최초의 대학 강연을 끝냈다.
일단 내가 생각하기에 강의 도중에는 실수를 하지 않았던 듯하다.
몸이 긴장을 했기 때문일까.
강의를 마치고 강단 뒤쪽으로 발걸음을 빼니 식은 땀이 주륵 흐른다.
"수고했어 여기 수건."
"땡큐, 이상하진 않았지..?"
"괜찮던데? 나중에 교수 해도 되겠다."
단 한 번도 입 바른 소리를 한 적이 없었던 예은이다.
그런 예은이 칭찬을 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당황한 게 표정에 드러났는지 예은이 말을 이어왔다.
"마치 게임할 때처럼 진지하더라."
"게임할 때의 내가 어떤데?"
"눈빛이 살아있다고 해야 하나? 띨빵해 보이지 않아서 멋있어."
늘 생각하지만 단어 선택 좀 가려서 해줬으면 싶다.
여과없이 내뱉기만 하면 듣는 입장에서 상처 받는다.
그래도 대충 무슨 의미로 말을 한 건지는 알겠다.
"살다 살다 내가 너한테 외모 관련 칭찬을 다 듣네."
"그럼 멋있는 구석도 없는데 사귀어준 줄 알어?"
정말 귀여워서 꼭 끌어 안아주고 싶지만 아직 강의실 안이다.
구석 쪽으로 옮겨갔지만 당연히 학생들의 시선이 닿는다.
노가리를 까려면 하나 더 일을 수행해야만 한다.
나를 대신해 강단 위에 선 누군가가 마이크를 잡았다.
딸칵.
현실감이 와 닿지 않는 이야기였다.
전화로 들었을 때는 나한테 농담이라도 하는 줄 알았다.
당사자로서 현장에 서고 나서야 실감이 난다.
"이 자리에 온 학생, 기자, 신분을 막론하고 모를 수가 없는 대스타입니다. 명실상부 E-스포츠의 세계화에 큰 발자국을 남긴 프로게이머. 이에 저희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에서는…"
듣고 있자니 적잖이 민망하다.
과정을 생략했으면 싶지만 자리가 자리다.
'무슨 놈의 박사야.'
유명하신 분들 프로필에 보면 한 줄 꼭 써있는 명예 박사.
그것을 내가 받게 되었다.
스타 메이킹 띄워주기는 중국에서 끝난 줄 알았는데 아직 하나 남았나 보다.
단상 중앙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니 여기저기서 카메라 불빛이 번쩍인다.
강의를 할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기자들이 제법 많이 와있다.
상당히 낯 간지러운 상황이다.
이 대학의 총장이란 분과 악수를 나누고 수여증을 건네 받았다.
얼핏 굉장해 보이는 명예 박사는 사실 큰 의미는 없다.
하지만 E-스포츠 학과의 홍보와 화제 유도에 도움이 된다면 거절할 이유 또한 없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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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캘리포니아에 상륙한 올마스터.
현지에는 에러갓 혹은 Unknown Error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아무튼 그와 관련된 이야기로 래딧은 떠들썩하다.
─친구 때문에 L.A공항 갔다가 땡 잡았다.
친구가 L.A들릴 일 있다고 해서 마중 차 나갔는데 익숙한 얼굴들이 보이더라?
CLC 선수들 있길래 악수하고 사인 받고 오, 오늘 운수가 좋네.
근데 지금 CLC 선수들이 왜 공항에 있지?
어차피 기다려야 돼서 잠자코 보고 있었는데 에러갓이 딱...
사인이랑 같이 찍은 사진 인증한다.
└Oh, 진짜 에러갓 본인이다. 뒤에 뮴뮴 누님도 있고.
└LCF 이벤트전 치르려고 왔구나. 미리 와서 준비하나 보네.
└근데 정작 친구는 잊힌 느낌..
글쓴이-안 그래도 까먹고 그냥 왔다가 욕 먹었어!LOL
시작은 몇몇 유저들이 인증을 하면서 부터였다.
LCF에 게스트로 올마스터가 온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화제다.
하지만 그가 언제 어느 때 도착하는지는 당연히 알 수가 없다.
역시나 유명인은 유명인.
래딧 유저들의 실시간 감시 카메라에 딱 걸렸다.
도착하자마자 과거 같은 팀 소속이었던 CLC의 선수들과 친목을 도모하러 갔다.
그런 훈훈한 이야기가 감돌았던 것도 잠시다.
어, 이게 되나?
의아하면서도 뽕을 맞을 수밖에 없는 화두.
얼마 전 창설이 된 캘리포니아 주립대의 E-스포츠 학과에서 일이 터졌다.
올마스터가 무려 강연을 했다고 한다.
심지어 E-스포츠 학과 최초 명예 박사라는 학위를 수여받았다.
─프로게이머도 엄청 잘 나가면 명예 박사까지 받는구나.
에러갓은 엄청 특이 케이스니 비교할 사람은 없겠지.
서양권 E-스포츠도 흥행시킨 장본인이니까.
최근에는 중국에서도 한바탕 해먹었다며?
└세계 어느 곳에서도 유명하지 않은 곳이 없으니 롤판을 대표할 만하지.
└크, 근데 이건 LCF 개막식과도 맞물리는 게 일부러 화제를 유도하는 것 같아.
글쓴이-아마 맞을 거야. 캘리포니아 주립대 E-스포츠 학과 자체가 게임사 후원으로 신설된 곳이니까.
로드 오브 로드 게임사의 본사와 캘리포니아 주립대는 가까이 있다.
그게 꼭 연관이 있는 건 아니지만 거리가 가까운 만큼 관심도 인다.
결국 E-스포츠 학과의 신설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LCF부터 시작해 차례차례 터져 나간다.
최근 메타가 재미없어지면서 살짝 부진했던 로드 오브 로드다.
단 한 사람에 의해 분위기가 반전되고 있다.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있을까.
─드디어 내일인가?
다시 에러갓을 보게 되는 날이 왔구나.
사실 롤드컵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뭐 어때.
에러갓이라면 1대1 토너먼트도 재밌게 해줄 거라 믿어!
└듣기로는 핫숏도 나온다던데? 재밌겠더라.
글쓴이-내가 지금 잘못 들었나? 핫숏이라고?
└그래, 핫숏디디. 1대1 토너먼트니까 나올 수 있는 거겠지.
└완전 퇴물일 텐데 망신만 당하고 가는 거 아닐까 몰라.
└그 맛에 보는 거잖아LUUUUL
하루에 걸쳐 간단하게 치러진다.
하지만 그 의미가 결코 옅다고는 볼 수 없다.
로드 오브 로드 유저라면 누구나 한 번씩은 상상한다.
팀게임인 로드 오브 로드는 순수하게 최강자를 가리기 힘들다.
자신이 응원하는 선수가 팀 때문에 고통 받다 패배하면 가슴이 아프다.
적어도 그런 일은 보지 않아도 되는 1대1 리그.
팬들의 관심으로 뜨거워진 캘리포니아의 해변가에 이목이 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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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항상 감사합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제가 이 분야를 자세하게 아는 건 아니라 오류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지적해주신다면 수정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