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09 뜻밖의 초대 =========================
로드 오브 로드 챔피언스 리그 파이널.
매년 열리는 연례행사가 4회차를 맞이했다.
북미, 그리고 유럽의 팀들이 캘리포니아를 찾았다.
새하얀 백사장에는 이미 무대 준비가 갖춰져 있다.
남은 것은 두 분류의 주인공들이 착석하기만 하면 된다.
그 두 분류의 주인공.
팬들과 선수들이 정문을 통해 당당히 걸어 들어온다?
"어, 저 검은 백팩 미터스 아니야?"
"맞는 거 같네. 미터스도 오늘 개막식 멤버에 있었지."
LCF를 보러 온 듯한 두 명의 젊은 남성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떠든다.
미터스, 실력만 따진다면 북미 최고의 정글러는 그가 아닐까.
작년에 투르칸으로 팀을 옮겼지만 다시 C9으로 돌아와 활약하고 있다.
명실상부 스타라는 두 글자가 부족하지 않은 프로게이머다.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고 있지만 그의 이름은 가볍지 않다.
주위를 오가는 이들 중 그를 알아본 팬들은 적지 않다.
구태여 몰려가서 곤란하게 만드는 행위는 하지 않는다.
이것 또한 나라가 다름으로서 생기는 팬 문화의 차이다.
연예인, 여기서는 프로게이머의 사생활을 존중한다.
프로게미어들이 팬들 사이를 아무렇지 않게 오간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관심이 없다는 소린 아니다.
"혹시 사인 괜찮으십니까? 미터스 팬클럽에 가입한지 올해로 1년 차인데요."
"그럼요. 항상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러한 상황이 익숙한 듯 상의 주머니에서 검은 팬을 자연스럽게 뽑는다.
미터스의 사인을 받은 한 명의 팬이 자리를 떠나자 다른 한 명이 공간을 메꾼다.
어디까지나 통행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근 1년 간 몰라보게 성장한 E-스포츠 판인 만큼 더욱 철저하게 매너가 지켜지고 있다.
팬들 사이에서는 암묵적인 합의가 맺어진 부분이다.
그렇게 한 분류의 주인공들이 안쪽의 좌석을 차례차례 채워나간다.
단순하게 해수욕을 즐기러 온 이들.
LCF를 위해 먼 걸음 달려온 이들.
잘은 모르겠지만 관심이 있는 이들.
목적은 달라도 모이는 장소는 한결 같다.
막을 올리기에는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
사람들의 발걸음에는 여유가 넘친다.
혹시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가 어디 없을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사람들도 적지가 않다.
그 레이더에 한 명이 딱 걸려버렸다.
"에러갓이다!"
그러니까 이곳 미국에서는 드문 일이다.
그와 동시에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상황이 다급해지면 어떤 사람도 결국은 비슷하게 행동한다.
여유가 없어지고, 호흡이 가빠지고, 자신도 모르게 실수를 한다.
자제심을 잃고 만다.
방금 전 소리친 남자를 질책할 만한 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다.
"사인! 사인 좀 해주세요!"
"저 LCF 결승전에서 맨 앞 줄에 앉아 티몽 코스프레 했던 팬인데 기억 나시나요?!!"
"누가 저 멍청이 좀 떼내!"
아비규환까지는 아니다.
조금 혼란이 일어난 정도다.
하지만 드문 일인 것도 사실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버린 이유.
설명을 하자면 간단하다.
어지간히 유명한 선수가 아니다.
아니, 미터스만 해도 북미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선수인데?
안타깝게도 비교가 불가하다.
"젠장, 난 뉴욕 산단 말이야. 양보 좀 해!"
"뉴욕이든 텍사스든 알래스카든 간절한 건 마찬가지인 걸 몰라?"
"저 스웨덴에서 왔어요 에러갓!"
인지도라는 측면에서도 분명 차이가 있다.
결정적인 건 북미에서 활동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선수들이야 관람 꼬박꼬박 나가면 기회가 언젠가 온다.
그런데 올마스터는 개막식이 끝나면 미국을 뜰 예정이다.
그리고 또 언제 돌아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팬들이 이렇게나 달아오른 것도 어쩔 수가 없다.
떠들썩해진 캘리포니아의 해변가.
하지만 예정에 지장이 갈 정도는 아니다.
고대하던 LCF의 개막식이 막을 올릴 시간이다.
.
.
.
* * *
앉은 자리 바깥이 요란스럽다.
큰 환호성이 들려오는 걸 보면 시작한 모양이다.
LCF가 개막하고 1대1 토너먼트 리그 첫 번째 경기가 진행 중이다.
그 가슴 벅찬 순간을 뒤로 하고 당장의 일부터 해결해야 한다.
맞아 죽기 싫으면 말이다.
"아주 좋아 죽더라? 인기 많아서 좋으시겠어, 응?"
"순수하게 팬의 호의에 감사한 것 뿐.. 야, 진심으로 아프니까 그만해.."
온화한 캘리포니아에서도 남부 지역.
한국의 초여름에 준할 정도로 날씨가 괜찮다.
개막식의 경기장이 바로 이곳의 해변이다.
비키니 차림의 헐벗은 누님들이 사인을 부탁한 건 내 잘못이 아니다.
"눈 돌아가는 건 니 잘못이 맞겠지. 그래, 안 그래?"
"옆구리 좀.. 옆구리 좀.. 제발."
예은과 함께 선수 대기실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중이다.
모든 선수들이 이곳에 있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있다.
그것도 하나하나가 네임드라고 할 수 있는 유명인들.
당장 얼굴을 알고 있는 선수들만 따져도 적지 않다.
C9의 간판 스타 북체정 미터스.
한국에도 익히 알려진 정글러 에메랄드 프록스.
유럽의 정상급 원딜러 포나틱의 네클래스.
그 날고 기는 선수들 중 나의 안타까운 상황을 눈치 챈 이가 없다.
얼핏 보기엔 나와 예은이 화기애애하게 떠드는 걸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실체는 전혀 그렇지 않다.
손가락으로 내 옆구리를 격하게 꼬집어 댄다.
얼굴만 화기애애할 뿐 대화의 내용은 살벌하다.
무서운 점은 일부러 한국어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부분이다.
"혹시 바가지 긁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쥐?"
그러엄. 내가 자초한 잘못이지."
"이번엔 이 정도로 봐줄게."
다행스럽게도 고통의 시간이 끝이 났다.
예은의 화가 풀렸다기 보단 상황.
앞서 경기에 출전한 두 선수가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다.
"간발의 차이로 져버렸어. 현역 때였으면 내 압승이었을 텐데."
"헛소리는, 누가 봐도 내가 압도적이었어."
머리를 긁적이며 한탄하는 핫숏의 말에 트리플리프트가 어이없다는 듯 대꾸한다.
대진표가 조금 꼬인 셈이다.
두 사람이 1대1 토너먼트 리그의 봉화를 붙였다.
"너희들도 경기를 봤어야 돼. 전성기의 나였으면 말이야…"
"핫숏, 말하는 중에 미안한데 저쪽에 TV있어요."
"아, 정말?"
당연하게도 선수 대기실에는 텔레비전이 비치돼 있다.
방금 전 둘의 1대1은 뭐랄까.
그냥 한 마디로 떡 발렸다.
나름대로 진 이유가 있는지 핫숏이 완강하게 고개를 젓는다.
"아니. 난 저 치사한 자식처럼 주챔프를 바꾸진 않았어."
"그럼 내가 순진하게 배인이라도 할 줄 알았나?"
"이 자식 이럴 줄 알았지. 처음부터 뒤통수를 때릴 계획을 짜고 있었구만."
"처음이고 나발이고.. 1대1 토너먼트인데 1대1에 강한 챔피언을 꺼내는 게 당연하잖냐."
트리플리프트가 한심하다는 듯 툭 쏘아붙이더니 자리에 앉는다.
뭐, 어떻게 보면 너무하지만 여기선 나도 트리플리프트의 편이다.
'토너먼트, 리그니까.'
통상의 이벤트 전이라면 티몽을 고르든 두두를 고르든 마음대로다.
시청자들이 좋아하는 챔피언을 하는 게 옳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랭킹이 맺어지는 토너먼트 리그다.
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가 이기길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것이다.
속된 말로 빡겜이 필요한 순간이다.
'해도 핫숏이 졌겠지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핫숏이 은퇴를 한지 무려 1년이 넘었다.
간간히 방송도 하는 등.
솔로랭크를 나름 한다고는 하지만 턱없이 부족하다.
물론 1대1이라는 게 순수한 실력 대결은 아니다.
웬만한 프로라면 내가 이 정도까지 말 안 했다.
응, 상대가 트리플리프트야.
전 구단주든 뭐든 간에 안되는 건 안되는 거다.
"다음 내 차례인데. 할 말 없어?"
"잘 갔다 와! 파이팅! 힘내라 우리 예은이!"
불만족스러운 듯 눈썹을 살짝 내린다.
딱 보니 한 마디 하려는 눈치인데 다행히 시간이 됐다.
예은을 보내고 한숨을 후.. 몰아 쉬니 잠자코 보고 있던 세인트조지아가 내 등을 토닥여준다.
세인트조지아하고는 딱히 친해질 계기가 없어 어색한 사이인데 위로를 해주고 싶을 정도로 안타까웠나 보다.
"혹시 힘들면 말해. 아마 다른 사람들은 이해 못해줄 거다."
"뭐.. 연락 해라. 들어는 줄 테니."
핫숏은 물론 트리플리프트도 데어본 적이 있다.
과거 예은은 어지간한 야생 동물보다 사나웠다.
개과천선한 지금도 툭 하면 성깔 나오기 일쑤다.
이런 고민을 이해해줄 사람은 많지가 않다.
아니, 연인 사이에 어떻게 순탄키만 하겠어?
그래도 넌 여자친구가 얼굴도 이쁘고..
아마 대부분 이러한 반응을 할 게 뻔하다.
나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몇 안되는 친구들.
CLC와는 아마 평생 인연이 이어질 듯하다.
핫숏이 타준 코코아를 마시며 예은의 경기를 관람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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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정규 경기는 아니라지만 치열하다.
애시당초 그럴 수밖에 없는 구도다.
각 포지션 별로 손가락에 꼽히는 선수들만 모였다.
롤이 뭐 1대1 게임도 아니고 질 수도 있지.
없다.
적어도 이를 보는 팬들의 심정은 불타오른다.
<로드 오브 로드 챔피언스 리그 파이널! 특별 이벤트로 진행되는 1대1 토너먼트 리그입니다.>
<이벤트전이라고 하나 대충, 절대 안되죠! 팬들도 자신이 응원하는 선수에게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NA롤챔스의 캐스터 도리아, 그리고 해설가 몬테소리.
이번 LCF가 미국에서 치러지니 만큼 당연하게도 메인 진행은 둘이 맡는다.
첫 번째, 그리고 두 번째 대전이 끝났다.
객석의 반응을 달구고 있는 세 번째 대전이 준비에 들어갔다.
<지난 해의 LCF가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네요. 에러갓과 함께 전설을 써내렸습니다.>
<모를 수가 있나요? 뮴뮴 선수! 누님, 혹은 여왕님으로까지 불렸습니다. 로드 오브 로드 최초의 여성 프로게이머! 놀라운 건 실력도 외모도 뭇 남성 프로게이머들의 심장을 터트려 놓았습니다.>
로드 오브 로드로 한정하지 않는다면 여성 프로게이머는 존재했다.
남성들 사이에 섞여 선전한 선수들이 제법 있었다.
하지만 고작해야 그 뿐이었다.
솔직히 말해 여성이라는 것 빼면 딱히 내세울 게 없다.
실력적인 면에서 특별한 활약을 보여준 이가 없었다.
그런데 이 선수, MyumMyum은 근본부터가 달랐다.
<남성 선수들에 뒤지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이만한 실력을 가진 선수가 전세계적으로 봐도 별로 없죠?>
<같은 팀에 에러 선수가 있어서 상대적으로 덜 조명 받았을 뿐이지 웬만한 팀에서는 에이스, 가능하고도 남는 선수였습니다. 심지어 여성 선수들이 꺼려하는 정글과 탑, 미드 등 솔로 라인 굉장히 잘하거든요? 이번 1대1 토너먼트에서도 강력한 우승 후보라 제가 장담합니다.>
몬테소리의 확언에 관중석이 떠나갈 듯 울린다.
특히 중앙 쪽에 모여있는 수백 개의 플랜 카드.
정성을 들여 제작했을 길다란 현수막도 수 개 펼쳐져 있다.
최소 수백, 많으면 천 단위가 넘어갈 듯하다.
그만한 인원의 팬들이 오직 한 선수를 열렬하게 응원한다.
당연하다.
Unknown Error가 현직 전설이었던 시즌2 LCF 당시.
인기 투표로 Unknown Error를 앞세운 선수가 바로 MyumMyum이었다.
일단 여성 선수라는 희소 가치.
실력도 발군인데 몸매도 발군.
아니, 외모적인 부분에 흠잡을 데 없다.
팬들이 어찌 안 생길 수 있겠는가.
<이런 말 해도 되려나요? 1년 전보다 정말 몰라보게 아름다워졌습니다.>
<이미 임자 있거든요? 몬테소리 해설 진정하는 게 좋아 보입니다. 그리고 아시겠지만 아름다운 가시에는 장미가 있는 법이죠.>
<하하.. 제가 만든 유행어인데 그걸 생각 못했네요. 맞습니다. 이 선수 범접할 수 없는 매력을 자랑합니다.>
전성기 시절에는 방송 사고 낼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스타성이 뛰어난 나머지 개최측에서 사정 많이 봐준 감이 있다.
그러한 부분까지 오히려 매력으로 작용해 팬들을 사로 잡았다.
MyumMyum 선수의 팬들은 팬심이 엄청나게 깊다.
그녀가 활동지를 옮긴지 오래임에도 변치 않는 해바라기와도 같다.
현재 경기장에 모인 저 극성팬들은 결코 우연히 조직된 게 아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뮴뮴 누님 조금만 신경 써도 장난 아니라니까?
-누님 나오는 경기는 챙겨보는 편인데 한국에서도 딱히 관리 안 하더만 오늘은 웬 일이래?
-남친이랑 와서 그런 거 아니야? 부럽다 진짜.. 에러갓만 아니었어도 백 번은 더 죽였어.
-정말 에러갓이니까 용서 받을 수 있다.
카더라로 통하던 둘의 연애 소식은 이미 공식적으로 인정이 오갔다.
아쉽지만 대부분의 팬들은 축복을 하는 분위기다.
아무튼 간에 경기가 시작된다.
싱글 라운드로 짤막하게 진행되는 1대1 토너먼트 리그.
숱한 남성 팬들의 마음을 사로 잡은 MyumMyum 선수의 원 펀치 쓰리 강냉이가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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