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11 뜻밖의 초대 =========================
이벤트전이지만 자존심이 걸려있다.
널널했던 16강과 달리 8강부터는 다들 깨닫는다.
아, 이거 대충 했다가는 후회 깨나 하겠구나.
이미 떨어진 선수들은 어쩔 수 없다.
살아남은 선수들은 긴장을 되새긴다.
8강의 네 번째 대전이 막을 내렸다.
좌아악-!
시원하게 그어진 레이저가 땅바닥을 긁는다.
그 끄트머리에 파루스가 닿고 말았다.
이번 웨이브만 먹으려던 욕심이 화를 불렀다.
4초에 걸쳐 가해지는 도트 피해가 마지막 한 줌을 사그라들게 만든다.
<굿바이 포레븐! 준결승전에 올라가는 건 에러 선수로 결정되었습니다!.>
<강력한 라인전으로 초반 재미를 봤는데 아쉽게 됐네요. 이로써 준결승전의 모든 멤버가 정해졌습니다.>
포레븐은 레클레스와 함께 유럽에서 손 꼽히는 원딜러다.
피지컬을 앞세운 강력한 라인전이 주특기다.
1대1 리그에서는 레클레스보다 더욱 위협적이지 않을까.
안타깝게도 올마스터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회심의 킬각이 실패하며 그 이후로 야금야금.
레이저에 긁히다 결국 죽어버리며 탈락이 확정되었다.
<이렇게 되면 4강, 준결승전 매치업이 정말 흥미진진하게 짜이게 된 셈이죠?>
<맹세컨데 대진표는 순수하게 룰렛을 돌려 결정됐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결국 운명이라는 소리입니다!>
몬테소리의 외침과 함께 현장의 관중들이 무척 들뜬다.
올마스터의 준결승 진출을 축하한다.
분명 그 의미도 있겠지만 진짜 각별한 건 그 다음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대진표가 정말 맛깔나게 짜였다.
팀의 구단주인 핫숏디디를 잡고 올라온 트리플리프트.
8강에서 갬빗 게이밍의 알렉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준결승전에 진출했다.
마찬가지로 미역슨도 갬빗 게이밍의 다리안을 잡고 준결승전에 올라갔다.
작년 롤드컵에서 우승을 거머쥐으며 명실상부 세계 최강이라 칭송 받는 갬빗 게이밍이다.
안타깝게도 선수들 개개인이 피지컬 보다는 팀파이팅과 운영에 특화돼 있다.
특히 다리안은 라인전은 약하지만 한타를 잘하는 탱커 타입.
1대1 토너먼트에서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진짜 기대되는 건 역시 B조죠? 칼로 물베기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냥 속시원히 저지르는 게 어때요? 부부 싸움, 실제 연인 사이로 유명한 에러갓과 뮴뮴 누님이 맞붙습니다!>
네클래스와 포레븐을 잡고 올라온 Unknown Error.
잭스페케와 프로즌을 패버리고 올라온 MyumMyum.
절대로 만나서는 안될 두 사람이 외나무다리에서 마주치고 말았다.
.
.
.
* * *
밖에서는 준결승전 A조의 경기가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선수 대기실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다.
'후우.. 간만에 경기를 하려니 피곤하구만.'
조금 가볍게 갔으면 싶었는데 점점 불이 붙었다.
갈수록 선수들의 기싸움도 머리 싸움도 불길이 대단했다.
다음 대전 상대가 된 선수들 사이에서는 살짝 차가운 공기가 흘렀을 정도다.
차라리 그냥 대회면 그러려니 할 텐데 이벤트전이 더하다.
아무래도 1대1 매치다 보니 승패가 명확하게 갈린다.
자존심을 자극하는 부분이 있다.
경기장에서는 웃고 있지만 속마음을 애가 탄다.
누가 기획한 건진 몰라도 1대1 토너먼트는 정말 얄밉게 잘 골랐다.
아무튼 이제 대부분 마무리가 된지라 선수 대기실은 다시 수다스런 분위기다.
유명 선수들끼리 잡담을 나누며 친목을 도모한다.
나도 예은과 오붓하게 앉아 협박을 받고 있다.
"여기서 내가 널 잡으면 부전승으로 올라가는 거 맞지?"
"현실갱은 조금.. 너무 나간 거게 아닐까."
예은이 나를 주먹으로 툭툭 치며 쪼아댄다.
그게 어지간히 웃긴지 주위 선수들이 박장대소한다.
나와 예은을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은 탈락 후 대기 중이다.
하지만 아직 짐을 싸서 되돌아갈 단계는 아니다.
LCF의 개막식, 1대1 토너먼트 리그와 함께 하나 더 있다.
별 건 아니고 사인회에 동참해줄 수 있나 협조 요청을 받았다.
거절할 이유가 없으니 진행할 예정이다.
물론 토너먼트 리그가 끝난 후에 말이다.
"뭐 할 건데?"
"말차차."
"오, 쉽게 말해주네. 근데 구라지?"
"서방님이 말하면 믿어라 좀."
"이게 어딜 죽을라고."
이런 느낌으로 예은과 투닥투닥거리는 게 옆에서는 아주 재밌어 죽는 모양이다.
만약 예은의 완력이 평범한 여성 수준이었다면 재밌을지 모르겠다.
지금도 예은이 나한테 건 헤드락은 긴장을 풀면 기절할 수준이다.
가슴이 닿는 감촉이라던지 생명의 위협 앞에서는 아무것도 안 느껴진다.
"내기 할래?"
"또 뭘 뜯어 먹으려고.."
굳이 한국어로 이야기를 걸어오는 게 심상치 않다.
헤드락을 푼 예은이 속삭이듯 말을 이어왔다.
"지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 소원 들어주기."
"지면 목줄이라도 채울 기세네."
"어떻게 알았어?"
그런 매니악한 플레이에는 관심이 없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예은에겐 참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하다.
너무 잘 어울려서 살이 떨릴 정도다.
"농담이고, 그 정도 까지는 안 해."
"하기는.. 하는구나."
아무래도 거부권은 없어 보인다.
어차피 뭐 밑져야 본전이다.
무리한 요구는 거절해야지.
나에게 있어서도 꼭 손해 보는 제안은 아니다.
'이기면 되는 거잖아?'
도박에서 절대 가져서는 안되는 심리!
이번 판만 어떻게 이기면..
집안 풍비박산 제대로 나는 레파토리다.
하지만 이번 경우에 한해서는 자신이 있다.
이전에 한 번 이겼을 때는 예은의 고등학교 교복 차림을 감상했다.
정말로 단아한 옷차림이었다.
이번에는 절대 같은 과오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이기면 그만이다.
꽈득!
예은과 내가 실랑이를 하는 사이에도 경기는 진행되고 있었다.
미역슨의 산다라와 트리플리프트의 부시안.
팽팽했던 두 선수의 접전에 끝이 예고되었다.
파바바밧!
산다라가 조종하는 다섯 구체가 부시안을 향해 틀어박혔다.
부시안은 탈력을 걸며 맞딜을 꾀했다.
스킬을 피하기만 하면 이긴다는 판단.
판단 자체는 옳았지만 결국 맞고 말았다.
파아앙!
선 궁극기를 쓴 탓에 주변에 검은 구체들이 다섯 개나 떨어져 있다.
다섯 갈래로 퍼진 구체들 중 하나가 부시안에게 스쳤다.
산다라가 바닥을 잡아 뜯으며 마지막 일격을 가한다.
"아! 저 못난이, 잘난 척하더니 당하기나 하고."
핫숏이 선수 대기실의 TV를 보며 쓴소리를 한다.
말은 저렇게 해도 한 마디, 한 마디 안타까움이 묻어 나온다.
국적과 연령을 막론하고 남자들 사이라는 게 으레 그렇다.
'아이러니하네. 일단 준결승전을 통과해야겠지만.'
만약 결승전에 간다면 미역슨과 만나게 된다.
운명이라는 게 이런 걸까.
어느 한 쪽이 떨어질 수 있었음에도 질기다.
아직 나는 하나 더 벽을 넘어야 한다.
다소 바가지를 긁히더라도 이번 게임은 이겨야겠다.
기다리는 미역슨을 실망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
.
.
* * *
혹시 대진표에 살짝 손이 간 게 아닐까?
피닉스가 날아오른 건은 아닐까?
만약 댔다면 신의 한 수다.
16강, 8강, 4강, 결승.
가면 갈수록 흥미진진해진다.
물론 참여한 선수진이 워낙 화려하다는 이유도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이러한 대진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절대 연인들의 알콩달콩한 데이트가 아닙니다. 두 선수 모두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니 말이죠.>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매치업이 성사돼버렸습니다. 에러 선수는 이기든 지든 가시밭길입니다.>
몬테소리의 말장난에 관중들이 빵빵 터진다.
준결승전 B조 Unknown Error 대 MyumMyum.
애인 사이로도 유명한 두 선수다.
출처는 무근이지만 잡혀 산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왜?
뮴뮴 선수의 기가 조금 많이 세다.
올마스터의 유일한 하드 카운터라는 드립은 웃고 넘어갈 이야기만은 아니다.
<그래도 진검 승부입니다. 예쁜 애인이라고 봐주고 그런 거 없거든요.>
<이렇게 남녀가 싸우면 결국 지는 쪽은 남자에요. 하지만, 이건 게임입니다. 신성한 E-스포츠 승부의 장이에요. 지금이야 말로 묵혔던 한을 풀 때입니다!>
정작 본인은 컴퓨터 세팅하기에 바쁘다.
무언가 이심전심 통하는 게 있는 듯 중계진들이 대신해서 변호하고 있다.
그래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이다.
적어도 남자들이라면 고개를 끄덕할 수밖에 없다.
이윽고 양 선수의 세팅이 완료됐다.
부부 싸움이 과연 칼로 물 베기일지.
아니면 사나이가 칼을 뽑았으니 무라도 벨지.
아무튼 기대가 되는 매치업이다.
<경기.. 시작됐습니다. 말차차, 누가 에러갓 아니랄까봐 보기 드문 픽을 꺼냈어요?>
<가끔 대회에서 선수들이 비장의 카드라고 준비한 게 무리수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선수에 한해서는 그럴 걱정이 없죠. 확실히 기대해 볼만해요. 뮴뮴 선수도 재미난 걸 꺼냈으니 말입니다.>
올마스터가 뽑은 챔피언은 말차차다.
그리고 뮴뮴은 애꾸사자를 꺼내 들었다.
두 챔피언 모두 가진 바 특색이 분명하다.
<탑라인과 비슷하게 부쉬가 있습니다. 애꾸사자도 충분히 킬각을 잡을 수 있는 픽이에요.>
<근데 이게 순수하게 챔피언의 상성만 놓고 봐서는 안됩니다. 수풀에서 사자가 확! 튀어나올 때마다 가슴이 쫄깃해지거든요? 에러 선수는 특히 더 그럴 겁니다. 방송 보시는 분들 중에 오래 사귄 애인이나 유부남이 계신다면 제가 무슨 말하는지 이해가 되실 거에요.>
이벤트전이다 보니 해설도 굉장히 자유롭다.
선수의 수준만 놓고 보면 이만큼 기대되는 매치업이 없는데 단박에 개그쇼가 돼버렸다.
기분탓인지 애꾸사자가 수풀에서 점프를 할 때마다 올마스터가 움찔하는 것 같기도 하다.
<부쉬 견제와 유지력, 그리고 모종의 사정 때문에 애꾸사자 살짝 우위를 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달라지겠죠?>
<빅토리를 했을 때처럼 한 번 귀환 타이밍을 잡고 6레벨을 찍으면 주도권이 넘어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궁극기가 제압 판정이라 클린즈로 못 풀어요. 이는 결국 한 번 킬각을 노려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로드 오브 로드라는 게임은 심리전이 굉장히 크게 작용한다.
그러다 보니 평소 꽉 잡혀 사는 심리가 플레이에 반영이 된 듯하다.
보는 입장에서 안타까움이 절로 느껴지진 않는다.
예쁜 애인 사겼으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애꾸사자 진짜 무섭다. 잡아먹을 기세네.
-방금 말차차 무빙 실수한 거 봄?LUUUUL
-에러갓 하드 카운터 뮴뮴 누님이다!LOLOLOL
-에러갓도 안주인 앞에서는 얄짤없구나.
오히려 채팅창의 반응은 참으로 통쾌하다.
에러갓도 카운터 하나쯤은 있어야 균형이 유지되지!
뮴뮴 선수의 선전을 기원하는 팬들이 많다.
하지만 여기서 올마스터 지기라도 하면 곤란해진다.
결승전의 꿀잼 매치업이 살짝 애매해지고 만다.
이미 진출한 상태인 미역슨 선수.
학수고대해오던 올마스터와 미역슨의 리벤지 매치가 무산된다.
<에러 선수도 슬슬 반격을 꾀합니다. 드디어 혼돈충이 나왔어요!>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을 덧붙이자면 말차차가 스킬을 네 번 사용하면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소환수입니다. 붙어서 때리면 강력하긴 한데 직접 조종을 할 수 없다보니 잉여인 감이 있어요.>
말차차도 빅토리 못지 않게 쓰는 사람만 쓰는 비주류 챔피언이다.
일반 스킬에 CC기가 없고, 그나마 제압이 달려있는 궁극기는 채널링 스킬이다.
그런 말차차를 올마스터가 선보이고 있다.
그라면 무언가 하나 보여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중계진들이 눈치를 챈 건 첫 번째 귀환 이후였다.
말차차의 아이템 창이 상당히 잡동사니다?
도리아 캐스터가 의아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두란링 하나와 롱스워드 두 자루를 구입했습니다. 하이브리드 말차차? 말차차는 AD계수가 없지 않나요?>
<예.. QWER 모든 스킬이 전부 순수한 마법 피해로 AP계수만 붙어있습니다. 물론 하나 AD계수가 붙어있는 곳이 있기는 한데요..>
대답을 하는 몬테소리도 상당히 떨떠름하다.
사실상 의미가 없는 수준이라 말을 꺼내도 될지.
그래도 일단 해설자로서 설명을 하기는 해야 했다.
<말차차가 공격력을 올리면 소환한 혼돈충도 같이 강해집니다. 결과적으로 AD계수가 붙어있는 셈이죠. 그걸 노리고 롱스워드를 샀다면.. 고민을 해봐야 할 문제 같습니다.>
솔직히 살짝 날아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 멀쩡한 AP챔피언으로 대체 뭐 하자는 짓인가.
만약 타이온이나 전기쥐처럼 AD템 효율이 나오면 또 모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말차차는 그런 챔피언 같지는 않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애인이라고 봐주는 건가.
무언가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는지 몬테소리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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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님들이 주시는 쿠폰 덕에 힘내서 연재 이어나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항상 감사합니다.
빨리 완결하고 신작 쓰고 시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