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23 개벽 =========================
무대를 양분했을 때 좌측.
삼선 레드의 부스 안은 분위기가 좋을 수 없다.
첫 세트에서 참패를 당해버렸다.
조별 리그라고는 하나 자존심에 금이 갈 일이다.
다른 챔피언도 아니고 야흐오.
이길 작정으로 꺼내든 카드였다.
"이미 노출된 카드기도 하니 크게 개의칠 건 없어. 중요한 건 다음 세트겠지만.."
아웃섹이 떨떠름하게 말을 끊는다.
다분 다대기의 멘탈을 잡아주기 위해 한 발언이다.
그런데 그 다대기가 아직 혼이 나간 상태다.
"뭐.. 상대가 작정하고 카운터를 준비해온 느낌이었고 어차피 조별 리그야. 그리고 슬슬 정신 차려야 돼."
조별 리그는 각 팀당 두 번의 경기를 치른다.
그러다 보니 특별한 이유 없이 작전 타임을 요구할 수 없다.
15분이 지나자마자 바로 다음 세트가 시작된다.
후우.. 한숨을 내쉬운 다대기가 자포자기하듯 입을 열었다.
"무상성인 구리가스나 할까.."
"너 그거 하면 이번엔 진짜 절교다…."
현재 미드 구리가스는 대회 픽밴률 50%가 넘어가는 인기 챔피언이다.
르풀랑의 침묵이 삭제되고, 랄라가 너프를 먹자 명실상부 탑티어로 떠올랐다.
너무 구리가스만 쓰자 게임사가 리메이크 일정을 잡아버렸을 정도다.
문제가 있다면 다대기의 구리가스 승률은 형편없다.
대회에서 여러 차례 꺼냈지만 전부 패배.
아웃섹 안에는 이미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아웃섹이 말을 이었다.
"트와이스 페이크 상향되지 않았어? 쓸 만하다 생각하는데."
"그랬지.."
대답은 하고 있지만 표정에 여전히 영혼이 없다.
시간은 매정하게 자꾸자꾸 흘러간다.
이윽고 약속의 15분이 도래했다.
대기실에 열 명의 선수들이 모인다.
게임이 시작하며 밴픽창으로 옮겨간다.
좋든 싫든 이제는 해야만 할 시간이다.
서로 세 명의 챔피언을 밴했다.
구태여 마검사를 자르진 않았다.
이번 세트에서 후픽을 하는 건 자신들이다.
상대의 픽을 먼저 보고 시작할 수 있다.
"아.."
영혼이 없던 다대기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친우인 아웃섹의 말에도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던 그다.
그만큼 지금의 상황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소리다.
신세상 매직이 조금 전 가져간 챔피언.
다대기로 하여금 손가락을 부들 떨도록 만들었다.
첫 세트의 패배를 자아낸 야흐오다.
당사자가 무어라 입을 떼기도 전에 아웃섹이 먼저 선수를 쳤다.
"기회다! 자드로 야흐오 잡을 수 있잖아?"
"..알고 있어. 혹시 탑 아닌가 재고 있었을 뿐이야."
다분 도발의 의도가 섞여있을 야흐오의 픽이다.
어쩌면 멘탈이 무너지는 것까지 노렸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다대기는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자드라면 충분히 야흐오를 카운터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메타에서 자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그림자 분신 너프가 워낙 큰 데다 메타에도 맞지 않는다.
하지만 다대기에게 있어 자드는 인생 챔피언이다.
'상대가 대놓고 사린다면 킬각을 잡기 어렵겠지만.'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올마스터라면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혼란했던 머릿속이 차차 잡힌다.
끓었던 분노가 에너지원이 되었다.
차분하게 최선의 정답을 찾아내었다.
아직은 기다릴 뿐.
야흐오는 탑과 미드 양쪽이 모두 가능하다.
처음 야흐오가 나왔던 LPL에서 탑으로 활약했다.
바로 저 올마스터가 리픈을 때려 잡았다.
또한 신세상 매직의 탑라이너, 씨지맥은 솔로랭크에서 탑야흐오를 사용한다.
들떠서 미드 픽을 박았다간 역으로 이용당할지 모른다.
신세상 매직은 작년부터 쭈욱 그런 팀이었다.
"나 마지막으로 자드 가져간다."
"쟤네 티바나 박았는데 픽해도 되지 않아?"
"티바나가 정글로 빠질 가능성도 있어."
"하긴.. 그런 장난 많이 치는 팀이지. 아무튼 정신 차려서 다행이다."
정신 차린 친우의 모습에 아웃섹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삼선 레드는 자신과 다대기가 주축이다.
다대기가 멘탈이 나가면 어떻게 수습이 불가능하다.
이전만 해도 코볼트와 마차.
봇듀오의 캐리력도 상당했으나 바뀌었다.
삼선 블루가 해체가 돼버린 게 원인이다.
섬머 시즌 이후로 대규모 리빌딩이 있었다.
아웃섹과 다대기, 미드&정글이 주축이 되는 삼선 레드.
코볼트와 마차, 봇라인이 주축이 되는 삼선 블루.
레드와 블루의 색깔을 완전히 양분하였다.
새로이 레드에 들어온 데프콘과 하트브레이커.
두 선수 모두 기본 기량은 출중하지만 시간이 필요했다.
그 때문에 지난 윈터 시즌에서 숙적인 SKY T1 K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이제는 충분히 무르익었어.'
더 이상 같은 실수를 반복해선 안된다.
팀원들 뿐만 아니라 자신도 마찬가지.
다대기는 이전 세트를 회상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 사이, 상대의 마지막 픽이 완료됐다.
티바나는 역시 탑.
이블퀸을 정글로 가져갔다.
올마스터라면 탑이나 미드로 쓰는 기행을 저질러도 이상하진 않다.
하지만 곰곰이 따져봤을 때 그럴 가능성은 한없이 낮다.
설사 한다고 해도 문제가 되진 않는다.
'100% 외통수다.'
어떤 챔피언이 미드로 와도 자신의 승리다.
야흐오를 상대하는 방법을 다대기는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었다.
.
.
.
* * *
정말 기대치도 않았던 일이다.
고작 조별 리그 주제에 믿기지 않는 흥행을 몰고 왔다.
경기장의 관중들이 꽉 차버렸음은 물론.
어지간한 결승전에 준하는 시청자 수가 나오고 있다.
올마스터가 만들어내는 마법이다.
그 마법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삼선 레드와의 두 번째 세트가 시작되었다.
<경기 시작됐습니다. 신세상 매직은 뭉쳐서 레드팀의 레드 쪽으로 향하네요.>
<방향이 갈렸죠. 삼선 레드는 역으로 블루 팀의 레드 지역을 장악했습니다. 이건 서로 교환을 하는 흐름입니다.>
최근 대회에서 자주 보이는 장면이다.
소환자의 전장은 완벽한 대칭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초반 인베에 유리한 팀이 있다.
서로 전력으로 뛰어갔을 때 만나는 지점.
레드팀의 경우 몸을 가릴 부쉬가 많다.
이 점을 이용해서 미리 와드를 깔고, 낚시를 하기에 정말 용이하다.
신세상 매직이 시작하자마자 위로 달린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블루팀인 이상 방어라는 선택지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그럴 바에야 역으로 적 진영에 침투하는 것이 낫다.
클끼리가 담담한 어조로 설명을 덧붙인다.
<삼선 레드도 달릴 수밖에 없었죠. 모르고 있다가 3버프 컨트롤 당하는 경우가 왕왕 있거든요? 물론 라인 스왑이 전제되는 플레이긴 한데 신세상 입장에서는 손해볼 게 없습니다.>
프로 무대에서는 정석에 가까워진 흐름이다.
특히 라인 스왑이 목적이라면 안 할 이유가 없다.
이를 받아치는 방법도 있기는 하지만 이 경우 1렙 한타를 각오해야 한다.
이블퀸과 야흐오.
신세상 매직은 1레벨 조합이 강력하다.
삼선 레드로서는 한 발 빼는 판단을 하는 것이 옳았다.
<티바나도, 한나도 라인전을 보고 하는 픽은 아닙니다. 라인 스왑을 통해 성장의 기반을 마련하겠다. 이미 티바나는 밑으로 빠져서 유령 먹으러 갔어요.>
서로 보이지 않음에도 거의 똑같은 액션을 취하고 있다.
삼선 레드도 정글러가 적 레드를 빼먹고, 네네톤은 유령을 치는 중이다.
미술 시간에 종종 하는 데칼코마니를 보는 듯하다.
솔로랭크에서는 1레벨에 봇듀오가 리시를 하지 않는가?
프로 무대에서는 지금의 흐름이 그와 비슷한 거다.
이미 체계적으로 분석이 된 초반 게임 풀이다.
이제부터 양 팀의 정글러는 3레벨을 찍는다.
그리고 할 일이 없어진 탑솔러와 함께 라인을 간다.
봇듀오를 도와 2차 포탑까지 쭈욱 민다.
유일하게 ctrl c+ctrl v가 아닌 라인은 미드 뿐이다.
<올마스터의 야흐오! 그리고 다대기의 자드입니다! 결승전에서도 보기 힘든 빅매치에요, 빅매치!>
전범준 캐스터가 들뜬 것도 무리는 아니다.
흥행의 보증 카드와도 같은 챔피언들이다.
두 챔피언 모두 싸움 좋아하기로 정평이 났다.
중계 플랫폼 등의 채팅창이 엄청난 속도로 올라간다.
-야흐오랑 자드 누가 유리함?
-표창 막으면 야흐오가 이기지 않을까?
-ㄴㄴ야흐오가 짐 내가 봄.
-응, 원래 우리팀 야흐오는 못해.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결코 지루할 수가 없는 구도의 라인전이다.
조냐 상태가 된 강빈 해설을 대신해 클끼리가 혼잡해진 교통을 정리했다.
<자드의 입장에서 말씀을 드리자면 방법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영약을 들고 무리하는 야흐오를 따내는 것.
다른 하나는 두란 방패로 6레벨까지 안전하게 가는 것.
다대기가 선택한 것은 후자가 되었다.
<정글러가 활발하다면 라인전에 힘을 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무난하게 2차 타워까지 쭉 밀 흐름이에요. 서로 정글 개입이 없다면 라인전이 유리한 건 야흐오입니다.>
실력이 아닌 상성을 봤을 때 야흐오가 유리하다?
확실히 클끼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자드의 라인전은 표창으로 시작해 표창으로 끝난다.
이 표창을 잘 맞히면 자드가 이기고.
상대가 잘 피하면 자드는 지속적인 디나이를 당한다.
그런데 표창 견제가 야흐오에겐 씨알도 안 먹힌다.
<하도 재빠른 데다 스쳐도 실드가 있습니다. 굳이 장막까지 따질 것도 없어요. 표창은 파밍용밖에 되지 않습니다.>
스킬 메커니즘에서 자드는 야흐오를 이기기 힘들다.
쿨타임마다 표창을 맞아주는 바보면 모르겠지만 올마스터다.
어설프게 노리고 던져봤자 틈만 벌어질 뿐이다.
표창이 빠진 자드는 무력해진다.
휘익!
휘익!
야흐오가 두 번 연달아 미니언을 탔다.
자드에게 접근해 칼을 쑤셔 넣는다.
딜교환에서 한 차례 이득을 보았다.
<이렇게 무작정 들어와서 치면 자드는 빠져야 합니다. 딜교환 타이밍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는 점이 자드 입장에서 정말 골치가 아프죠!>
이런 박진감 넘치는 라인전이 대체 얼마 만인가?
관중들도, 시청자들도 분위기가 무척 좋다.
어찌나 들떳는지 강빈 해설의 조냐가 풀렸다.
하지만 그런 강빈과는 달리 클끼리는 차분하다.
<라인전만 놓고 봤을 때는 야흐오의 우위가 맞습니다. 그래서 두란 방패를 들은 거에요. 모든 스킬이 1인칭이기 때문에 두란 방패가 효과적이고, 충분히 맞으면서 파밍이 가능합니다.>
그렇게 조금씩 성장을 하기만 하면 된다.
라인전에서 조금 밀려도 상관이 없다.
자드를 후픽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첫 번째 세트에서 마검사가 야흐오를 솔킬 냈을 때와 비슷합니다. 결국 에어본이 안되면 야흐오는 궁극기를 못 쓰거든요?>
마검사 때는 모를 수도 있었다.
아무리 프로라도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하지만 야흐오의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다.
야흐오와 자드.
두 챔피언 모두 다대기의 18번이다.
상대법을 모른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심지어 자드가 E선마에요. 야흐오의 상대법을 100% 숙지하고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어차피 표창은 장막에 막히니까 회전베기로 슬로우 걸고 때리겠다는 이야기네요.>
조건부 궁극기인 야흐오에 반해 자드는 확정 타겟팅이다.
야흐오가 회오리를 모아버리기 전에 썰어버리면 그만이다.
그나마 하나 있는 변수는 돌풍 장막.
표창을 장막으로 막아내는 것 정도다.
즉, 회전베기부터 선마스터하면 변수조차 사라진다.
때문에 야흐오는 자드의 초반 성장을 억제해야 한다.
유리한 라인전을 바탕으로 킬각을 잡아낸다.
혹은 디나이시켜 CS차이를 크게 벌린다.
안타깝게도 그것이 잘 되지 않는 상황이다.
<정글러의 개입이 없는 건 서로 마찬가지에요. 생존기인 그림자를 파밍용으로 부담없이 사용합니다. 어차피 이블퀸은 탑에서 포탑 때리고 있어요. 두란 방패기 때문에 기다리면 체력도 찹니다.>
딜교환은 밀릴 수 있지만 파밍을 하는 데엔 지장이 없다.
무럭무럭 성장을 하다 보면 언젠가 입장이 역전된다.
다대기의 노림수는 바로 그것이다.
기다리는 시기가 오기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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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싸랑!
미니언을 향해 질풍보를 내딛는다.
칼을 휘둘러 원형으로 베어낸다.
화락!
자드는 똑같이 칼을 휘두르며 뒷무빙을 밟는다.
딜교환을 지양하고 CS만 먹겠다는 속셈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와 달리 꽤나 묵직해졌다.
'역시 회전베기부터 찍었나.'
자드로 야흐오를 상대하는 보편적인 방법이다.
표창이 장막에 막힌다면 안 막히는 E부터 찍으면 되지.
6레벨 찍고 궁극기로 들어가서 그냥 패면 이긴다.
리픈이 야흐오의 카운터인 이유와도 비슷하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숙련도 문제지.'
숙련도, 그리고 템트리의 문제다.
야흐오니까 무조건 스토커의 단검.
딜템부터 올리면 사정없이 망한다.
급할수록 돌아가야 하는 법이다.
나는 라인을 쭉 밀고 귀환 타이밍을 잡았다.
찰칵!
어쌔신의 신발.
평타 딜링을 효과적으로 막아낸다.
그리고 한 자루의 두란검을 더한다.
체력과 피흡을 적절히 올려준다.
이제부터 시작되는 건 막싸움이다.
야흐오 대 자드의 라인전은 그런 느낌이다.
그 막싸움에 가장 효율적인 아이템을 둘렀다.
남은 건 얼마나 더 집중을 해내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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