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37 노잼스의 종말 =========================
신세상 매직 대 가짜에어 독수리의 두 번째 세트 밴픽.
적어도 밴픽 만큼은 정말 재밌게 한다.
커뮤니티와 중계 플랫폼들의 공통된 반응이다.
-가짜에어 독수리도 뭐 하나 준비해오긴 했구나.
-이렇게나 연구할 정도면 인정을 해줘야 하나?ㅋㅋ
-ㄴㄴ 저거 북미에서 나온 거 따라 쓰는 걸껄?
-미역슨이 썼지. 미드 가르마. 그래도 한국 롤챔스에서 나오니 반갑네.
설마 가짜에어 독수리가 주류에서 탈피한 픽을 쓸 줄이야.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는 강빈 해설을 대신해 김은준 해설위원이 나지막하게 설명했다.
<미드 가르마. 랄라를 대체하는 카드로 꺼냈네요. 지금 보시면 서포터도 소리커도 가져갔어요. 원딜러를 확실하게 보조하겠다. 그런 의미를 가진 카드라 보입니다.>
노텀과 쇈으로 원딜러를 물겠다는 신세상 매직.
이에 맞서 원딜러를 황제처럼 모시는 가짜에어 독수리.
이번 만큼은 김은준 해설도 순수하게 극찬했다.
<신세상 매직이 광우스타를 밴하고 쇈을 뺏어갔거든요? 이를 가짜에어 독수리가 정말 완벽하게 받아쳤습니다. 이런 말씀 잘 안 드리는데 밴픽 단계에서 카운터를 당했다. 굉장히 불리한 구도가 되었다고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장난스러운 느낌이 있는 클끼리 해설.
딱히 주의 깊게 안 들어도 되는 강빈 해설.
이 둘과 다르게 김은준 해설은 언제나 진지를 먹는다.
그러니까 지금 하고 있는 말이 진담이라는 소리다.
시청자들의 반응이 싸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뭐지, 개꿀잼 몰카인가?
-김은준 때문에 흥이 다 깨져 버렸잖아 책임져!!!
-진짜 신세상 매직이 지는 거야???
-아직 밴픽일 뿐이잖아. 게임 들어가면 또 모르지.
밴픽 단계에서 졌다고 해도 게임 풀이에 따라 충분 달라질 수 있다.
벌써부터 승패를 속단하기엔 이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가 없다.
이미 밴픽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레드팀인 신세상 매직이 마지막 픽을 하지 않은 정도.
그런데 남은 것이 고작 서포터라 변수로 치부하긴 힘들다.
<의아한 상황이긴 해요. 서포터는 늦어도 보통 세 번째로는 가져갑니다. 그만큼 밴픽이 말렸다는 것을 반증하는 거겠죠.>
<노림수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신세상 매직이라면 기대해볼 만하다고 봅니다.>
<에이, 그건 현실적으로 힘들어요. 픽을 바꾼다 해도 큰 변화가 생길 조합은 아니에요.>
강빈 해설의 혹시나를 김은준 해설이 칼같이 자른다.
신세상 매직이 가져간 픽은 다음과 같다.
쇈, 치비르, 티바나, 노텀.
여기까지만 봐도 픽이 대략적으로 보인다.
언제나 밴픽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는 김은준 해설이 설명을 덧붙였다.
<탑과 정글이 쇈이나 티바나를 할 테고, 미드는 노텀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로 올마스터는 미드 노텀을 대회 무대에서 선보인 적이 있는 선수에요.>
김은준 해설은 국내는 물론 해외의 게임까지 눈 여겨 보기로 유명하다.
특히 올마스터의 경기는 하나도 빼지 않고 전부 찾아봤다.
그것이 단순한 허세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술술 새어 나온다.
<2013년도 NA롤챔스 윈터 시즌 8강에서 꺼냈습니다. 그리고 또 올마스터 선수가 파릇파릇한 아마추어 시절에 LCL에서 꺼낸 적이 있었어요. 십중팔구 미드 노텀이다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거의 사생팬, 스토커 수준이다.
아무튼 미드 노텀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대회에서는 정말 진귀하다고 할 수 있는 픽.
-미드 노텀 꿀잼 아니냐? 마피아 게임잼ㅋㅋ
-ㄹㅇ 불 끄면 한 명씩 죽음!
-쇈이랑 같이 들어가서 원딜 암살 개꿀~
시청자들의 기대치가 잔뜩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결코 이를 생각해 한 발언이 아니다.
김은준 해설이 이어서 못을 박았다.
<가짜에어 독수리가 밴픽이 정말 정교합니다. 가르마를 괜히 뽑은 게 아니에요. 성장 기대치가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는 가르마지만 라인전과 소규모 교전에서 위력이 상당합니다. 그리고 가짜에어 독수리는 미드의 성장 기대치라는 단점을 원딜 캐리로 상쇄해 버릴 수 있죠.>
<그래도 올마스터 선수와 뮴뮴 선수의 케미라면 변수를 만들어볼 수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것도 조금 회의적입니다. 두 선수의 기량이 출중하긴 하나 노텀도 라인전에서 밀리는 픽이고, 티바나와 쇈도 갱킹이 좋지는 않아요.>
수습을 하려는 전범준 캐스터의 말조차 사뿐하게 분쇄했다.
김은준 해설은 얼핏 봐도 현재의 밴픽 구도를 상당히 마음에 안 들어한다.
사실 이는 일부 팬들도 격하게 공감을 하고 있다.
-광우스타 밴하고 쇈 가져가 놓고도 밴픽 싸움 져버리네.
-신세상 매직도 결국 후반 지향하는 것밖에 답이 없나..
-솔직히 미드 노텀도 이제 참신하진 않지ㅋ
하다 못해 라인전 단계에서 이득을 볼 수 있는 조합도 아니다.
더욱이 얼밤 때와는 달리 가짜에어 독수리는 미드 라인도 탄탄하다.
갱붐 선수는 최근 떠오르고 있는 미드 라인의 샛별이다.
제아무리 올마스터라 한들 상성이 밀리는 픽으로 라인전을 압도할 수는 없다.
답답하게 흘러가는 밴픽 구도.
이윽고 3초, 2초, 1초 레드팀의 마지막 픽이 종료됐다.
<서폿 필리언. 비슷하게 원딜러가 안정적으로 딜링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겠다. 그런 의도로 뽑은 픽이라 생각됩니다.>
안 그래도 불만을 드러내던 김은준 해설의 말미에서 답답함이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게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다.
<마지막 픽에서 초강수를 둬서 자그 같음 암살자를 가져가서 노텀 정글과 함께 물어보는 구도가 됐으면 어땠을까.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렇게 되면 쇈이 남지 않나요?>
<그래서 제가 밴픽에서 실수를 했다, 거듭 말씀드린 거죠. 조합이 너무 애매해서 뭐라 말씀드릴 수가…>
답지 않게 흥분해서 떠들던 김은준 해설의 입술이 갑자기 굳었다.
밴픽이 끝나고 30초에 지나지 않은 스왑 시간.
모두가 뻔하다고 여겼던 신세상 매직의 픽이 움직였다.
마치 마술처럼 재조립된다.
<이거 설마 쇈이 서폿을 가고 필리언이 미드를 가나요?>
<탑 티바나, 정글 노텀, 미드 필리언, 원딜 치비르, 쇈 서폿..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지긴 합니다….>
신랄하게 비평을 하던 김은준 해설의 말꼬리가 말아졌다.
무언가 떠오른 게 있는 걸까.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게임의 구도가 180° 상이해졌다.
-알고 보니 몰카에 몰카였던 거임ㅋㅋ
-김은준도 에라 모르겠다 춤추고ㅋㅋㅋ
-가짜에어 독수리 반응 개뜨거울 듯ㅋㅋ
정말로 가짜에어 독수리의 부스 안에서 코치와 감독들이 바쁘게 의견을 주고 받고 있다.
그것도 여기까지.
이제 게임이 시작될 시간이다.
시간은 불과 10초도 남지 않았다.
뒤바뀐 분위기에 발맞춰 전범준 캐스터가 우렁차게, 아주 신나게 소리친다.
<롤챔스 스프링 시즌 4강 A조 신세상 매직 대 가짜에어 독수리의 두 번째 세트! 과연 치열했던 밴픽 싸움의 승자는 어느 쪽인지! 경기~~ 시작하죠~!!>
조금은 감정이 담긴 외침이다.
지나친 팩트 폭격에 침체되었던 공기.
그 책임을 묻는 듯한 두 번째 세트가 막을 올렸다.
.
.
.
* * *
아무리 5전 3선승제의 다전제라고는 하지만 첫 번째 세트를 패배했다.
당연한 팬들의 우려, 그리고 두 번째 세트의 밴픽도 의아함을 자아냈을 것이다.
'밴픽이란 건 상당히 심오하거든.'
명백히 카운터 당하는 조합이라도 뒤집을 여지가 있다.
이 챔피언이 굳이 이 포지션에 갈 이유가 있을까.
상대의 예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번 두 번째 세트의 밴픽은 한 마디로 정리가 된다.
'쿠팡.'
미니언이 도착하며 라인전이 시작된다.
탑과 봇라인이 바뀐 라인 스왑의 구도.
상대는 가르마를 필두로 1레벨 조합을 강력하게 가져갔다.
그에 반해 아군은 쇈을 제외하면 1레벨 싸움이 영 아니올시다.
어쩔 수 없이 라인 스왑을 허락해야만 했다.
이조차 의도했던 큰 그림이다.
안 믿는 사람도 곧 믿을 수밖에 없다.
"형 또도 박사 아직도 2레벨이에요. 너무 불쌍한데.."
"원래 인생이 그래. 한 번 집 나갔으면 되돌아올 생각을 말아야지."
게임 시간 4분이 흘렀다.
그럼에도 또도 박사는 현재 2레벨.
그리고 아군 원딜러 초홍이의 치비르는 4레벨이다.
말도 안되게 두 번쯤 죽었으면 모를까.
빗장 수비를 지향하는 가짜에어 독수리답게 그런 실수는 하지 않았다.
게임 스코어는 0대0 아직 선취점조차 터지지 않았음에도 기형적이다.
'라인 스왑 메타가 자취를 감춘 이유였지.'
거의 정석으로 자리 잡을 뻔했던 철거 메타.
모 전략이 나오게 된 이후 그 빈도수가 확연하게 줄었다.
현재 진행되는 게임에서 그 수법이 완벽하게 재연되고 있다.
<이거나 먹어라!>
봇라인에 CS를 먹기 위해 찾아온 또도 박사.
경험치 먹을 사거리에 닿기도 전에 치비르가 맞이한다.
거대한 부메랑이 날아가며 또도 박사를 쓱삭! 갈라버린다.
또도 박사는 식칼을 던지며 반항하지만 막힌다.
치비르의 E스킬 스킬 실드.
식칼은 흡수됐고 치비르는 달려 나간다.
기어코 따라가서 평타를 두 대 더 욱여넣는다.
"또도 박사 점멸 뺐음. 치비르 캐리 인정? 어 인정~."
언제나처럼 개소리를 떠드는 초홍이는 어쨌든.
현재 게임의 구도는 지나칠 정도로 유리하다.
봇라인에 완벽하게 프리징 된 미니언 웨이브.
첫 웨이브부터 미니언을 당겨 먹은 결과다.
'쓰고 나서 말하긴 뭣하지만 정말 지옥 같은 수법이긴 해.'
원딜러가 혼자 라인을 당겨 먹게 만든다.
그리고 나머지 팀원들은 올라가서 탑 1차를 방어한다.
이 과정에서 적 탑라이너는 CS를 먹을 구석이 없다.
원래라면 또도 박사는 쌍둥이 골렘을 먹고.
팀원들과 함께 탑 2차까지 쭉 밀고.
아이템 산 다음 라인전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첫 단추부터 말썽이다.
탑라인은 아군 세 명이 철저하게 막고 있다.
봇라인은 원딜러가 혼자 당겨 파밍 중이다.
멋 모르고 봇라인에 갔다간 호되게 두들겨 맞는다.
2레벨과 4레벨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점멸을 빨리 써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솔킬로 연결될 뻔했다.
안타깝게도 진짜 지옥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
"또도 박사 쌍둥이 골렘 먹고 왔나 보다. 그래도 3레벨은 찍었네."
"어차피 내가 경험치도 못 먹게 할 거셈."
"멍청아, 쟤네도 리심이 뒤 봐주러 올 거 아니야. 받아먹기나 해."
광우스타를 자르고 쇈을 가져온 이유.
하나는 탑라인 3대4 구도에서 다이브를 방지하기 위함이다.
상대가 저 두 챔피언을 가져가면 만에 하나 다이브를 당할 우려가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가 바로 로밍.
쉔 서폿은 일반적인 라인전 구도에서는 정말 안 좋다.
근접 챔피언답게 라인전이 약한데 갱호응도 별로다.
하지만 라인 스왑이 되면 단점들이 전부 사라진다.
뚜벅뚜벅.
리심과 또도 박사가 라인을 밀어서 포탑에 박으려 한다.
치비르가 행하고 있는 프리징을 풀어낼 속셈이다.
프리징만 푼다면 다음 라인부터는 또도 박사는 편하게 식칼 파밍을 할 수 있다.
그 전에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는 쇈이 먼저 당도한다.
안타깝게도 적 서포터 소리커는 로밍이 좋지 못하다.
게다가 꼬그모를 지키느라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다.
쇈은 여유롭게 정글을 지나 봇라인까지 당도했다.
장신구 와드를 통해 봤다고 해도 한 걸음 늦는다.
유틸 특성을 찍은 서포터는 기본 이동 속도가 다르다.
게다가 탑에서 CS를 먹고 가죽 신발까지 사왔다.
후욱-!
결정적으로 점멸의 유무.
쇈의 도발 점멸이 또도 박사를 깔끔하게 긋는다.
치비르가 점멸로 호응하자 운명이 정해진다.
─퍼스트 블러드!
적을 처치했습니다.
안 그래도 레벨이 낮은 또도 박사다.
쇈과 치비르에게 협공을 다하니 사르르르.
같이 있던 리심도 무사할 수 없었다.
"리심 점멸 빠졌어요. 저희 포탑 밀 수 있겠는데요?"
"내가 솔용 할 테니 위쪽에 와드만 하나 박아줘."
"예, 알겠습니다 누님!"
라인을 밀러 왔던 리심은 체력이 다 까진 채 점멸로 도망쳤다.
상대 봇듀오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열심히 탑을 압박 중이다.
아래쪽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눈 뜨고 보는 수밖에 없다.
─아군이 적팀의 포탑을 파괴했습니다!
아군이 용을 처치했습니다!
쇈과 치비르는 여유롭게 봇라인 1차 포탑을 파괴했다.
노텀은 빨간 장갑을 끼고 솔용을 해냈다.
순식간에 벌어지는 글로벌 골드의 격차.
하지만 진짜 심각한 것은 고작 골드가 아니다.
"와 이 전략 진짜 잔인하네요. 형 진짜 너무하다."
"내가 저거 당했으면 부스로 찾아 들어갔을지도 몰라. 밤길 조심해라 시현아."
고질라와 씨지맥이 한 마디씩 나를 탓한다.
게임을 이겨줘도 불만이네.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이해가 안되는 건 아니다.
'밤길 조심해야 하려나.'
탑에서 파밍하고 있는 티바나는 7레벨이다.
이제 막 부활한 또도 박사는 아직도 3레벨이다.
게임 시간 8분에 탑솔러의 레벨 차가 네 단계.
둘이 마주하게 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기가 민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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