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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제왕
삼선 레드의 부스 안.
바깥과는 공기의 색이 확연하게 다르다.
긴장된 각오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부외자도 알 수 있을 지경이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기회다.
선수들의 각오가 남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이 꼭 좋은 방향으로만 작용할까.
안타깝게도 현실은 냉정한 법이다.
"아…. 타액 좀 사선으로 굴렸으면 나이즈한테 속박 거리 안 주고 카이팅할 만했는데.."
하나의 세트가 끝나면 승패와 상관없이 피드백 시간을 갖는다.
우리가 어떤 실수를 했고, 왜 했고, 어떻게 하면 안 할 수 있을까.
어느 게임단이든 간에 당연히 한다.
자신의 실수를 토로하는 데프콘의 표정이 어둡다.
"그거 네 잘못 아니라니까. 그냥 우리가 못 버텨서 상대가 너무 큰 거야."
"까놓고 나랑 아콘이 못했지. 상대 브루저 그렇게 크면 원래 원딜은 할 거 없어."
"그래도 제가 그때 안 죽었으면 한 턴 버티고 마법사의 종말 띄워서…"
실수라기 보다는 어쩔 수 없었다.
나이즈, 그리고 말카림.
두 챔피언이 잘 컸을 때 원딜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사소한 카이팅 실수가 있었다고 한들 자책할 거리는 아니다.
팀원들은 물론 코치도 괜찮다며 위로를 해줬다.
그럼에도 데프콘의 표정은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나 다행인 건 지금까지 작전 타임 요청을 아껴두었다.
시간이 넉넉한 덕에 조금 더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윽고 네 번째 세트의 밴픽이 시작되었다.
"멘탈 괜찮아?"
"잘 모르겠어요 후우.. 일단 최대한 해볼게요."
상대팀이 또다시 도박적인 수를 꺼내왔다.
그 의도가 어떤 것이던 한 가지를 확인해야 한다.
다대기는 데프콘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이건.. 힘들겠어.'
대답의 내용은 문제없지만 중요한 건 힘이다.
목소리에 명백히 힘이 빠져있다.
데프콘의 멘탈이 온전치 않을 때 이런 반응을 보인다.
다대기는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대외적으로 삼선 레드의 두 기둥은 자신과 아웃섹이다.
실제로도 그렇지만 다른 라인의 비중이 적은 것은 아니다.
탑 라이너인 아콘은 안정적으로 버텨준다.
봇은 캐리형 원딜로 후반 보험을 들어준다.
이는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지난 시즌 리빌딩 이후 새로이 팀에 들어오 데프콘.
아직 대회에서 이렇다 할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기대치가 결코 자신과 아웃섹에 뒤지지 않는 선수다.
정식 스크림 경기를 통해 기량을 증명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대회 울렁증을 가지고 있다.
선수들에게 드물지 않은 증상이지만 조금 극단적이다.
스크림, 그리고 대회.
분명 똑같은 팀이랑 경기를 하는데도 실력 차이가 하늘과 땅이다.
얼마나 심했으면 상대팀에서 혹시 코볼트가 대신한 거 아니냐고.
개인적으로 몰래 물어보기까지 했을 정도다.
'멘탈 관리만 된다면 정말 이만한 원딜러가 없는데.'
그래도 스프링 시즌에 들어서는 크게 완화됐다.
완화됐을 뿐이지 문제점은 여전하다.
특히 경기 중에 멘탈이 무너지면 복구가 안된다.
데프콘의 반응을 보아하니 멘탈이 성하지 않다.
두 번째 세트에서 핑크스로 아무것도 못한 것.
전 세트에서 제대로 된 한타조차 못해보고 패배한 것.
경험과 반응에서 미루어봤을 때 이번 세트는 힘들지 모른다.
'내가 해야 한다.'
상대가 자드를 선픽 박았다.
그 의도가 무엇인지는 단박에 눈치챘다.
이번에야 말로 1대1을 해보자.
더군다나 강제적이다.
두 번째 세트에서는 페이크에 당했다.
그때도 어쩔 수가 없었다.
야흐오를 상대할 수 있는 픽이 자드밖에 남지 않았다.
솔로랭크였다면 트와이스 페이크를 자신 있게 박았을지 모른다.
상성? 그게 무슨 상관인가.
트와이스 페이크는 플레이어의 기량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대부분의 상성은 극복이 가능하다.
그 중에서도 유난한 게 있긴 해도 괜찮다.
솔로랭크 야흐오 유저의 절대 다수는 무빙으로 농락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가 올마스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잘하기도 하거니와 무슨 짓을 할지 알 수가 없어.'
남은 챔피언이 오직 자드 뿐.
이번 판도 비슷한 흐름이다.
나이즈가 밴된 이상 다른 선택지가 남아있지 않다.
'그때와는 조금 달라.'
첫 세트부터 세 번째 세트까지 쭈욱 리심을 내줬다.
아무리 최근 너프가 있었다고 하나 리심의 장인 아웃섹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줘도 상관없다는 자신감이 밑바탕 돼있었다.
그래서 다르다는 거다.
이번 세트에서 상대는 자드와 함께 리심을 가져갔다.
야흐오와 리심을 같이 주면 안된다는 견제의 의도가 묻어있다.
진지하게 미드 자드일 가능성이 높다.
어차피 다른 선택지는 남아있지 않은 상황.
그리고 하나 아껴두었던 비장의 카드가 존재한다.
"나 야흐호 하려는데 어때?"
"괜찮아 해. 리심 밴돼도 할 거 있으니까."
다대기의 물음에 아웃섹이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주력 챔피언이 밴되는 경우는 수없이 겪어봤다.
애시당초 자신의 챔피언 폭은 결코 좁지가 않다.
물론 야흐오와의 시너지를 생각하면 선택의 폭이 좁아진다.
현 주류 정글러 중 에어본 있는 녀석이 없다.
기껏해야 바위와 탈리반 3세 정도.
두 챔피언 모두 썩 좋지가 않아서 써먹기 뭣하다.
때문에 준비를 철저히 했고 하나 찾아냈다.
다대기의 조커 카드가 탤런이었다면 자신은 이것.
막다른 골목에 몰린 지금이야 말로 꺼낼 때다.
"라인전에서 굳이 무리 안 해도 한타 가서 연계만 제대로 하면 이길 각 나와."
"그래, 안정적으로 하자. 안전하게 가야 돼."
뒤가 없는 만큼 안전하게 가는 것은 당연한 지사다.
그러면서도 폭발력이 있는 조합을 택해야 한다.
최근 솔로랭크에서 은근하게 픽률이 오르는 우콩 정글.
그 평가는 주류 정글러들에 비해 높지는 않지만 딱히 떨어지지도 않는다.
"야흐오에 우콩이면 일단 이니시는 완벽하네. 난 뭐 하는 게 좋을까?"
"AD비중이 높으니 또도 박사 어때."
"에어본 없어서 조금 애매한데."
"괜찮아. 서폿이 에어본 있는 거 해주면 충분해."
선수들과 코치가 분주하게 피드백을 주고 받는다.
야흐오와 우콩을 중심으로 차차 조합이 완성된다.
그려왔던 구도와 크게 엇나가지 않았다.
상대가 가져간 조합과도 상성이 엇갈리지 않다.
충분히 5대5라 할 수 있는 구도.
경기의 승패는 그 내용으로 정해진다.
어떻게 플레이하냐에 따라 이 다음이 있을 수 있다.
삼선 레드의 선수들은 긴장된 각오로 소환자의 전장에 들어섰다.
.
.
.
* * *
─소환자의 전장에 온 것을 환영해요.
이번 결승전을 위해 준비해온 전략은 총 네 가지다.
그 중 세 가지를 이미 써먹었다.
마지막 한 가지는 쓸래야 쓸 수가 없다.
'블라인드 밴픽 전용이니까.'
결승전의 마지막 경기, 다섯 번째 세트는 블라인드 모드로 치러진다.
로드 오브 로드 유저라면 누구나 경험이 있는 일반 게임의 비공개 선택 모드다.
양 팀의 픽이 전혀 보이지 않으며 밴 또한 불가능하다.
당연하게도 일반 세트와 전략을 다르게 간다.
아무튼 네 번째 세트는 블라인드 모드가 아니다.
그렇기에 앞서 사용한 세 가지 전략 중에서 써야 했다.
그런데 그걸 할 수 있는 여건이 안됐다.
구리가스는 상대가 밴을 했고.
나이즈는 우리 쪽에서 잘랐다.
살려뒀다간 블루팀인 적이 가져갈 우려가 높다.
별 다른 전략이 남지 않은 관계로 이번 세트의 조합은 무난하다.
─미니언이 생성되었습니다.
무난하게 자드와 야흐오의 라인전이 성사되었다.
준결승전에서의 발언을 의식한 픽이다.
아주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상대도 지금의 구도를 예상했어.'
대회에서 야흐오는 리심과 같이 가져가려고 하는 성향이 있다.
왜냐면 야흐오가 원래 좀 갱각 잘 주는 챔피언이다.
정글러 입장에서 갱각을 잡기가 쉽다.
상대 정글도 어쩔 수 없이 미드를 봐준다.
즉, 미드&정글 2대2 싸움이 일어날 공산이 크다.
이때 정글러에게 에어본이 있고 없고는 하늘과 땅 차이다.
스펠 써서 회오리를 어거지로 피하면 야흐오가 무력해진다.
그런데 현재 에어본 있는 주류 정글러는 리심 뿐.
그 리심은 우리가 가져왔다.
때문에 상대는 저 우콩 정글을 준비해왔을 것이다.
야흐오를 해야 하는데 리심을 뺏긴 상황.
대신할 수 있는 카드로서 우콩은 적절한 픽이다.
'아직 너프가 안된 시기니 괜찮은 픽이야.'
차후에는 평가가 낮아지지만 현재는 쓸 만하다.
애초에 평가가 낮아진 이유가 너프를 먹어서다.
너프를 먹지 않은 지금은 1티어는 아니어도 꺼낼 만한 카드다.
실제로 나도 한 번 사용한 이력이 있다.
챠락!
수리검이 뻗어져 나가 미니언의 막타를 친다.
이미 라인전은 시작됐고 치열한 심리 싸움이 오가고 있다.
조별 리그에서 한 번 경험했던 구도.
이번에는 서로가 챔피언을 바꾸게 됐다.
휘이잉..!
상대가 든 검 끝에 바람이 모였다.
다음 칼날에는 회오리가 묻어나간다.
야흐오를 상대할 때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다.
<발암을 맞아라!>
미니언을 타는 순간에 맞춰 그림자를 깔아 공격했다.
예상했다는 듯 수리검이 전부 막혀버렸다.
이어서 나를 향해 다가와 내지른다.
휘리링-!
일직선으로 곱게 뻗어나간 회오리는 나를 맞히지 못했다.
닿기 직전에 그림자를 재사용해 위치를 바꿨기 때문이다.
화락!
서걱!
서로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딜교환.
적당히 체력을 깎고 다시 원위치 한다.
회오리를 피했음에도 딱히 이득을 보진 않았다.
초반 라인전은 야흐오가 자드보다 셀 뿐더러 시작 아이템이 갈린다.
'포션이 많으니 됐지만.'
시즌4에 들어 롱스워드의 가격이 싸졌다.
롱스워드 3포션 스타트가 가능하다.
물론 야흐오 상대로 두란 방패 효율이 좋기는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그냥 딜로 찍어누르는 게 맞아.'
어차피 궁극기를 맞지 않는 이상 안 죽는다.
조금이라도 공격력을 올려서 킬각을 잡아낸다.
그것이 내가 대 야흐오전에서 내린 해답이다.
초반 라인전이 약간 힘들어지지만 괜찮다.
챠락!
화락!
야흐오가 들어올 때 꾸준하게 딜교환을 해준다.
서로 체력이 조금씩 깎여나간다.
결과적으로 이득을 보는 건 야흐오.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다.
서걱!
서로 체력이 절반 이하로 빠지자 변화가 생긴다.
자드의 평타가 묵직하게 들어간다.
방금 딜교환은 확실히 내가 이득을 봤다.
'이런 식으로 가는 게 가장 이상적이지.'
상대의 체력이 절반 이하가 되면 자드의 패시브가 터진다.
이 패시브 데미지는 결코 경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결정적인 것이 한 가지.
나는 발화지만 상대는 탈력이다.
먼저 킬각을 잡아오기 힘들다.
'갱 가능성도 생각해야 하고.'
자드는 생존기가 있으며 원거리 파밍이 된다.
야흐오는 생존기도 없고 원거리 파밍이 안된다.
이 차이가 상대의 딜교환을 망설이게 만든다.
세상에는 만에 하나라는 게 있다.
프로게이머라도 아주 잠깐 한 눈 팔 수 있다.
리심에게 땅치기만 맞아도 연계 들어가면서 죽는다.
눈에 띄게 소극적으로 변한 야호으의 움직임.
그리고 망설임은 하나의 필연을 만든다.
적다면 적을 수 있는 자그마한 이득이다.
화락!
챠라락!
그림자 분신을 깔고 스킬쿨을 돌린다.
제대로 스치며 체력이 뭉텅 깎여나간다.
두란검으로 겨우겨우 흡혈했던 야흐오의 체력이 도로아미타불.
결국 한 번 귀환 타이밍을 잡는 수밖에 없어졌다.
'꼭 이길 필요는 없어.'
만약 대놓고 공격적으로 했다면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야흐오가 탈력을 걸면서 역킬각을 잡는다.
혹은 우콩이 은신 점멸로 딜갱을 해버린다.
어느 쪽이든 당하는 건 내가 될 공산이 크다.
라인 주도권을 잡은 쪽이 상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위협만 주다 기회를 잡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람이 조급해지면 실수가 나오기 마련이다.
'뭐, 큰 이득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초반 상성 탓에 아주 약간 나고 있던 CS차이.
일련의 상황을 만들기 위해 마셔야 했던 포션값.
다 따지면 포탑에 먹힌 미니언 웨이브 정도일 것이다.
투자를 한 만큼 소득을 거둘 수 있어 다행이다.
찰칵!
진짜 노렸던 이득은 이쪽이다.
자드가 야흐오 상대로 어려운 건 초반 뿐.
정확히는 첫 귀환 전까지다.
이제부터는 상성이 조금 바뀐다.
'그때는 내가 이겼던가.'
역으로 이겨 놓고 할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그럴 수 있는 판은 이미 짜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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