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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바뀐 심장
예은은 이래 봬도 헌신적인 편이다.
정말로 믿을 수 없게도 사실이 증명하고 있다.
본인의 미래와 연관된 중요한 결정.
내 권유를 따라 희생해준 것은 특히 크다.
그리고 같이 살면서 느낀 거지만 은근히 참하다.
처음에는 옛날에 나를 핍박한 게 미안해서 그러는 건가.
그렇게도 생각했는데 꾸준히 별다른 트러블이 생긴 적이 없다.
입술만 좀 검지와 엄지로 잡고 있으면 이상적인 색싯감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 예은이 어째서 자꾸 화장실을 들락거릴까.
중요도가 낮은 조별 리그라 아직까진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조금 곤란한 일이 생길 수 있다.
무언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걸까.
남자로선 알 수 없는 부류의 이야기라던가.
결과만 따져보자면 절반은 맞았다.
"자."
예은이 나에게 손수건을 내밀어온다.
호의는 고맙지만 나도 뒷주머니에 하나 있다.
그리고 지금 당장 따져야 할 부분은 그게 아니다.
"주는 거면 고맙게 받긴 하겠는데.. 왜?"
갑자기 이런 거 줘도 곤란하다.
선물인가?
아니면 메세지가 담겨있는 건가?
맥락이 조금 많이 없다.
"멍충아. 닦아 달라고."
"그러니까 뭘..?"
예은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모난 점이 눈에 띄지 않는다.
경기 중에는 다소 땀을 흘렸겠지만 이미 다 말랐다.
혹은 화장실에 닦았을 수도 있다.
선수복에도 뭔가 묻어있지는 않아 보이고.
적어도 손수건이 필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말해주지 않고서야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 안쪽 말이야, 안쪽."
예은이 손가락으로 선수복 셔츠를 살짝 들어 올린다.
어디 부분을 어떻게 닦아 달라는 건지.
감은 잡았지만 상당히 난감하다.
'아, 그러고 보니 그랬네.'
그제서야 모든 의문이 풀린다.
확실히 무더위가 쏟아지는 여름.
부스 안은 에어콘이 설치돼 있지만 습한 공기는 어쩔 수 없다.
경기력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너무 춥지 않게 틀어야 하기도 하다.
한 세트를 끝내고 나면 에어콘 온도를 내려 몸을 식히는 것이 보통이다.
남자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
하지만 여자, 특히 예은은 경우가 달랐다.
"손 넣어야 하는데 괜찮아?"
"싫으면 말등가."
휙 손수건을 빼앗으려는 걸 가까스로 막았다.
싫다고는 안 했는데 이거 왜 이러시나.
나는 건네받은 손수건을 손끝에 감았다.
그리고 왼손으로 예은의 허리춤을 잡았다.
잡기 알맞게 쏙 들어가 있는 허리.
천 너머로도 전해지는 감촉은 부드럽다.
이 안쪽을 직접 만져버린다면 어떨까.
'엄밀히 따지면 직접은 아니지만.'
손수건 한 장을 오른손에 덧대고 있다.
그대로 셔츠 안쪽으로 밀어넣는다.
부드러운 배꼽살을 타고 올라가자 이윽고 막힌다.
거대한 둔턱이 진로를 방해한다.
"땀 많이 났네."
"그야 당연하지. 크니까."
딱히 가리는 것도 없는지 슴부심이 당당하다.
여자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이 하는 고민이다.
유방이 발달하면 아래쪽에 땀이 찬다.
겨드랑이에 땀이 차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냄새가 나거나 하진 않지만 당연히 거슬린다.
자칫 잘못하면 땀띠가 날 수도 있다.
이전에 예은이 한 번 투덜거린 적이 있었다.
"화장실에 땀 닦으러 갔던 거야?"
"안 닦으면 더럽게 찝찝해."
확실히 닦아주지 않으면 자연 건조되기 힘든 부위다.
그렇다고 셔츠를 흔들어서 통풍을 하기엔 눈치 보인다.
팀원들도 팀원들이지만 카메라.
이런 걸로 구설수 오르는 일 질색하는 예은이다.
"지난 여름에는 어쨌어? 그때도 힘들었을 것 같은데."
"결승전 빼곤 딱히.. 그때는 다른 일 때문에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당시 일이 생각나는지 볼을 조금 부풀린다.
그러고 보면 결승전에서 예은의 컨디션이 안 좋았었지.
언급한 그 일의 영향이 가장 크겠지만 땀 때문도 있을지 모른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다른데 있다.
'잘 먹어서 그런가 장난이 아니긴 해.'
올해 초 귀국할 때만 해도 입맛이 없었다.
내가 알던 예은이 맞나 싶을 정도로 평범하게 먹었다.
그러다가 결국 다시 이전의 예은으로 돌아왔다.
또 사이 좋게 지낸 것이 영향을 준 게 아닐까.
만져주면 커진다는 말.
예은을 보면 아주 거짓부렁은 아닌 것 같다.
근 반년 사이의 성장세는 감격스러울 정도다.
"닦아 달랬지, 만지라고는 안 했거든?"
"안 만지면 닦을 수가 없잖아."
"하여튼.."
원래부터 있는 편이었지만 요새는 굉장하다.
감사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땀 좀 닦아주는 거야 수고도 아니다.
"아래쪽은 얼추 닦은 것 같은데?"
"그 정도면 됐어. 땡큐."
손수건을 접어 한 번 더 문질러주는 것으로 끝이 났다.
가능하다면 말랑말랑한 감촉을 즐기고 싶지만 시간이 됐다.
슬슬 돌아가서 두 번째 세트를 준비할 시간이다.
"섰냐?"
"이런 걸로 무슨."
"어쭈? 좀 컸다?"
사실 아랫도리에 살짝 문제가 생기긴 했다.
하루이틀 부대낀 게 아님에도 어쩔 수가 없다.
예은을 만지는 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나름 자제력은 생겨서 다행이네.'
생기지 않았다면 큰일났을 상황이다.
정신까지 20대 초반의 팔팔했을 때면 물불 안 가렸을지 모른다.
사람 곤란하게 만드는 재주는 참 타고난 녀석이다.
"그래서 애인 땀도 닦아주기 싫다?"
"미리 말을 좀 해. 깜짝 놀랐잖아."
"깜짝 놀래켜주려고 했지 키킥."
농담을 주고 받으며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 보니 가장 중요한 걸 까먹고 있었다.
여기 여자 화장실이었지.
만에 하나 누군가 들어오기라도 했다면 아찔한 일이다.
나중에 들어보니 이용자가 거의 없어서 괜찮다고 한다.
여성 스태프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 사람들은 휴식 시간이 더 바쁘다고.
다음 촬영 준비와 스케줄 관리 등 이러저러.
오히려 E-스포츠는 게임 도중에 카메라 돌아갈 일이 적다.
아무튼 곤란한 일이 생기지 않아서 다행이다.
프로게이머 K씨 경기 도중 여자 화장실에서 변태 행위 발각.
뉴스에 대문짝만하게 뜨는 건 사양이다.
'근데 내가 닦아주는 게 더 편한가?'
여자 입장이 돼보지 못해서 모르겠다.
혼자 닦는 것이 더 빠르고 간단하지 않을까.
생각을 조금 더 해보기에는 시간이 촉박하다.
.
.
.
* * *
첫 세트부터 색다른 픽을 선보인 마진 공격대의 도전장.
이를 당황하지 않고 받아친 신세상 매직의 대응도 일품이었다.
하지만 아직 한 판 더, 혹은 두 판이 남아있을지 모른다.
짧은 휴식 시간 이후 두 번째 세트의 밴픽이 시작됐다.
<운영적인 미스, 한타에서의 포지셔닝. 중반 이후 무력하게 무너진 마진 공격대입니다. 하지만 저는 패배의 원인을 조금 달리 생각하고자 합니다.>
게임이 끝나는데 시간이 걸렸을 뿐 승패는 중반 이후 역력했다.
급격하게 무너져내린 마진 공격대.
이 정도로 털리면 다음 세트의 긴장감이 덜해질 수 있다.
클끼리가 입을 열은 이유에는 그것도 있지만 본론은 그게 아니다.
<팀마다 고유의 색깔이 있습니다. 마진 공격대는 강력한 라인전 이후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것. 딱 한 걸음, 한 걸음만 더 내디뎠으면 경기 어떻게 될지 몰랐어요.>
초반에는 신세상 매직을 몰아붙였다.
마진 공격대가 이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미드에서의 연이은 손실.
예상치 못한 한타 대패.
이 두 가지가 겹쳐지며 패배라는 결과가 도출되었을 뿐이다.
<마진 공격대가 신세상 매직 잡고 3세트 갈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가서 패배하는 팀은 조 2위 진출입니다, 2위 진출!>
전범준 캐스터가 호들갑스럽게 소리친다.
조별 리그 순위 결정전 이다 보니 중요도가 낮다.
신세상 매직이 진지하게 임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다가 두 번째 세트를 패배한다?
그렇게 되면 연장전이 성립된다.
양 팀 모두 승점이 같기 때문이다.
순위 결정전이라고 하나 중요도가 결코 가볍지 않다.
<막말로 여기서 신세상 매직이 지면 퇴근 시간 길어지는 거거든요!>
<그건 너무 막말 같은데요..?>
이어진 개드립을 나름대로 1년간 오프게임넷 짬을 먹은 클끼리가 흘려넘긴다.
아무튼 어떤 의미로든 두 번째 세트는 기대가 된다.
여러가지 잡담을 떠드는 사이 시간이 흘러 밴은 최종장에 접어들었다.
여기서부터는 김은준 해설의 전문 분야다.
<마지막으로 끠즈.. 안 잘랐네요. 안 자르고 파사딘을 밴했어요. 자드도 밴 안 했다는 건 산다라를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구태여 부연 설명이 필요없다.
밴픽 마스터 김은준이 알아서 주도한다.
그의 말대로 마진 공격대는 산다라를 가져가지 않았다.
<최근 솔로랭크에서 쿠로이 선수가 르풀랑을 연습하고 있고, 실제로 승률도 높아요. 보다 안전하게 가면서 라인전도 강한 르풀랑..! 안 가져갈 이유가 없죠.>
밴픽이라는 건 한 마디로 퍼즐이다.
얼핏 보면 찍어 맞추는 걸로도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정교하게 답을 이끌어내는 지뢰찾기다.
이를 해내기 위해서는 폭넓은 사고.
그리고 공을 들인 자료가 필요하다.
이 분야에서 김은준 해설의 적중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단 한 선수를 빼고 말이다.
<마진 공격대는 밴픽 양상이 크게 변하지 않았네요. 조금 더 공격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토이치&랄라. 하지만 픽의 목적 자체는 비슷합니다.>
<어떻게 보면 주유 조합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라인전 단계에서 공격적으로 갈 수 있다는 게 참 마진 공격대 답다. 이번 세트 결코 쉬이 내줄 생각 없습니다.>
슬슬 양 팀의 조합이 완성돼간다.
마진 공격대는 두 해설의 말대로 취지는 같다.
보다 완성도가 높다.
해설진의 의견은 겹쳤다.
이에 대항하는 신세상 매직.
변한 것이 있다면 탑과 미드다.
나중에 솔킬을 따서 복수하긴 했다지만 라인전의 고통은 잊혀지지 않는다.
하이브리드에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티바나를 가져갔다.
남은 것은 이제 미드 뿐이다.
<다시 끠즈를 해도 되긴 하는데 그러면 또 고통을 받아야 하죠? 가장 효과적인 대처 수단인 파사딘이 밴된 상황입니다>
클끼리의 말대로 끠즈를 하는 건 고민이 된다.
일정 이하 구간에서 르풀랑과 끠즈는 손싸움이다.
하지만 극천상계쯤 되면 르풀랑이 겁나 잘한다.
절대 거리 안 주면서 평타와 Q짤로 말려 죽인다.
이러면 끠즈가 대응할 수단이 없다.
만약 버틴다 해도 주도권을 오랫동안 빼앗긴다.
씨지맥 선수가 픽을 바꿨듯.
올마스터도 무언가 결단을 내릴 것이다.
자신감이 붙은 김은준 해설이 입을 열었다.
<저는 맞불 작전 예상합니다. 최근 미드 챔피언들이 너프를 먹으면서 다시 떠오르고 있는 자드! 꺼내봄직 하거든요?>
관중석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다른 챔피언도 아니고 자드라?
정말 그리 된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자드랑 르풀랑 누가 유리하냐?
-순수 손싸움일 걸?
-ㄹㅇ잘하는 사람이 이김.
-그럼 올마스터가 이기겠네?ㅋㅋㅋ
중계 플랫폼의 채팅창들이 폭주한다.
커뮤니티에서도 비슷한 반응이 올라온다.
그 정도로 올마스터의 자드는 명성이 자자하다.
더욱이 최근 자드의 티어가 올라가고 있다.
스프링 시즌만 해도 못 써먹겠다.
그런 이야기가 많았는데 요즘은 솔로랭크에서도 얼굴을 자주 비친다.
성장 기대치가 높은 원딜러가 득세하는 시대다.
이를 카운터치는 암살자도 덩달아 픽률이 올랐다.
그 정점에 있는 것이 바로 자드.
탤런도 유행 중이지만 르풀랑 상대로는 아니올시다.
그리고 이를 예측한 사람이 김은준 해설이다.
밴픽에 관해서 그만큼 신뢰도가 높은 사람이 없다.
하지만 한 가지를 까먹으면 섭섭해진다.
<자드 픽창에 올렸습니다. 3초, 2초, 1초.. 어어??>
분명 부스의 안과 바깥은 차단되어 있다.
그럴 텐데도 시청자들의 반응을 즐기는 것 같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드를 올려놓았다.
3초, 2초, 1초가 되는 순간 바꿔 들었다.
그 자체야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맞불 작전은 당연히 위험 부담을 동반한다.
깔끔하게 2승 챙기고 오늘 경기 마무리하자.
그렇게 판단했다면 안정적인 챔피언을 가져갈 만하다.
문제가 있다면 올마스터가 가져간 픽.
대체 무슨 의도로 한 건지 알 수가 없다.
<브란도나 블러디체리를 픽하려다 실수를 한 게 아닐까.. 실수한 게 아니라면 이거는 정말 오늘 롤챔스 보는 이유 만들어주는 겁니다.>
당황한 김은준 해설이 되는대로 말을 늘어놓는다.
자신 있게 예측한 픽이 틀려버렸다.
만약 그 정도라면 웃어 넘겼을 것이다.
그런 것도 처음 틀릴 때나 쪽팔린 거지.
이미 몇 번이나 망신살이 뻗쳤다.
아무리 그렇다 쳐도 이건 아예 이해가 안된다.
신세상 매직이 마지막으로 가져간 챔피언.
브란도, 블러디체리보다 픽률이 낮다는 빅토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