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0====================
뒤바뀐 심장
본선 경기부터는 팬들의 관심이 확 올라간다.
조별 리그 1주차 B조의 경기.
상암 E-스포츠 경기장은 여느 때 이상으로 북적거린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오늘 경기를 치르는 팀이 어디 보통 팀인가?
인기도, 인지지도 비할 데가 없다는 바로 그 팀이다.
"오늘 경기요? 에이, 신세상 매직이 이기겠죠."
마이크를 든 기자의 물음에 한 시민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경기 전 사전 조사라는 느낌이다.
과연 오늘 어느 팀이 이길 것 같나?
당연하게도 딱히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예상을 한다고 무조건 맞을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시민의 대답도 확실히 일리는 있다.
"대충 어제 경기 느낌 나지 않을까요? 신세상 매직의 일방적인 학살이 될 거라 보고 있습니다. 신세상 만세!"
어제 A조의 경기는 그야말로 무참했다.
물이 오를 대로 오른 KTX 롤러코스터 A.
전 라인에 폭탄 세례를 떨어뜨리며 화끈하게 터트렸다.
KTX A팀의 정글러 까메오가 게임을 지배했다.
리심을 잡기만 하면 이건 뭐 끝판왕급이다.
갱킹각도, 역갱각도 어느 하나 놓치는 일이 없다.
이 선수, 알고는 있었지만 포텐 터지면 장난 아니구나.
현재 가장 주목 받고 있는 정글러라 말할 수 있겠다.
오늘 치러지는 B조의 경기도 비슷하게 되지 않을까.
일방적인 구도를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무래도 상대가 강팀이라 손꼽히진 않는다.
일각에서는 다른 의견도 나온다.
"압승을 예상하면서 온 이유요? 음.. 저는 미드 라인전을 기대하고 있거든요."
8강 B조의 경기는 신세상 매직 대 SKY T1 S다.
T1 K도 아닌 T1 S.
가짜에어 독수리와 비둘기 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상대가 조금 맥이 빠진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긴 한 가지.
T1 S에서 한 선수만은 달리 봐야 한다.
한 마디로 방패 같은 성향의 선수다.
기자의 물음이 이어진다.
"지루해질 것 같지는 않냐고요? 에이, 그럴 리가요. 올마스터잖아요. 올마스터. 가짜에어 독수리도 그냥 뚫어버리는데."
단단한 방패를 꿰뚫어버리는 날카로운 한 방.
그 카타르시스를 기대하고 온 팬들이 한가득이다.
현재 경기장에 사람들이 넘쳐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오늘 경기의 구도는 창과 방패.
모순이란 단어가 더없이 어울린다.
과연 어느 쪽이 더 단단하거나 예리할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경기다.
.
.
.
* * *
사람들은 저마다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원인이야 당연히 여러가지.
전세계 75억 명이나 되는 인구수 만큼이나 많을 것이다.
하지만 범위를 한국으로 좁혀본다면 이야기가 조금 간단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한 것으로 고민한다.
다름 아닌 비교.
넓게 봤을 때 맥락은 대략 비슷하다.
전통적으로 한국 사회는 폐쇄돼 있었다.
삼국 시대, 고려, 조선, 마지막으로 대한민국.
내려져온 비좁은 지역 사회의 특성이 현대 사회에도 남아있다.
당연 긍정적인 부분도 있겠지만 부정적인 부분도 적지 않다.
옆집 철수는 반에서 3등 안에 든다고 하더라.
옆집 영희는 수학 올림파이드에서 금상을 탔다더라.
이런 눈에 띄는 부분 외에도 은근하게 많다.
엄친아, 엄친딸 이런 용어가 괜히 생기는 게 아니다.
현 SKY T1 S의 미드라이너.
이지범이 가진 고민도 비교에서 야기됐다.
'내가 테이커보다 밀린다고?'
여느 프로팀이 그러하듯 SKY T1 게임단도 두 개의 팀이 존재한다.
하나는 SKY T1 K.
다른 하나는 SKY T1 S.
이지범이 속한 쪽은 후자다.
뽑기운이 안 좋았던 것일까.
아니면 역시 아마추어 때의 성적 때문일까.
비교적 낮은 평가를 받는 SKY T1 S에 이지범은 배속돼 있다.
그것이 불만이라는 건 아니다.
"아~ 어떻게 걸려도 신세상 매직이냐.."
"대진운 제대로 꼬였네. 마진 공격대가 이겨줬으면 좋았을 것을."
아직 경기가 시작하기까지는 시간이 남았다.
휴게실 안에서 선수들이 투덜거린다.
그럴 만도 하다.
상대가 무려 신세상 매직.
이미 롤챔스에서 두 번이나 우승을 차지한 강팀이다.
더욱이 그 중심에는 올마스터가 있다.
요행을 바라기에는 상대가 너무 좋지 않다.
"어떻게 무리하는 걸 잡아먹으면 잘 풀릴 것도 같은데."
"그래만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
"야, 지범이 부담 주지 마. 니가 트리플리프트를 상대한다고 생각해봐라."
팀원들의 대화에 이지범은 오히려 고까워졌다
프로 수준의 미드라이너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
자존심에 있어 둘째 가라면 서럽다.
테이커와 비교 받는 것도 아니꼬운데 올마스터라.
같은 게임단 소속이 아니라지만 눈에 안 밟힐 수가 없다.
전세계에서 인정 받는 스타라고 하던가.
어쩌면 기회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오늘 경기에서 이긴다면.'
꼭 승리까지 연결되지 않아도 된다.
핵심이 되는 건 미드 라인전.
어떻게 풀어내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자신에 대한 평가가.
선수로서의 미래가.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이 말이다.
'테이커보다 아래다. 적어도 그런 헛소리는 안 들을 수 있겠지.'
최고의 미드라이너.
미드가 주포지션인 선수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자리다.
이지범도 예외일 수 없었다.
특히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비교될 일이 많은 그로서는 더더욱이었다.
자신 고유의 플레이 스타일.
실력 대비 부각되는 일이 적다.
하지만 오늘이라면 결코 묻힐 일이 없다.
무난하게 가기만 해도 여지가 있다.
만에 하나 이겨버리기라도 한다면?
'충분히 할 수 있다.'
이지범은 테이커와 완전히 반대 되는 성향의 미드라이너다.
전범준 캐스터에 의해 명명된 별명인 Easy Tiger.
이 두 단어가 그라는 선수를 설명해준다.
안정적인 파밍을 지향한다.
그러면서도 백업 또한 밀리지 않는다.
가장 특기로 하는 것은 바로 한타다.
가히 수비형 미드라이너의 모범과도 같은 선수다.
Easy Tiger, 만만한 호랑이라는 뜻은 그래서 비롯됐다.
발톱을 숨기고 있는 호랑이.
역설적으로 정말 만만하기도 하다.
팀이 판을 짜주지 않으면 무언가 해보지도 못하고 무력하게 진다.
혼자 온갖 발버둥을 쳐서 만들어내는!
이를 테면 테이커나 올마스터 같은 슈퍼 플레이는 장기가 아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결점일까?
"이제 5분 남았어. 곧 부스로 들어갈 시간인데 혹시 할 말 있는 사람?"
김다균 코치가 휴게실 안의 선수들을 빙 둘러본다.
SKY T1 K와 마찬가지로 T1 S 또한 그가 맡고 있다.
참으로 바쁘다고 할 수 있는 업무.
그만큼 선수들이 성적을 내주고 있는 덕분이다.
힘들어도 보람이 있기에 해나간다.
대한민국 가장들의 일상이기도 하다.
"딱히 의견 없으면 이야기했던 대로 가자. 미드 버텨줄 수 있지?"
SKY T1 S의 기본적인 전략이다.
여기에 더해 대 신세상 매직전의 대비책.
탑라이너인 씨지맥이 무리를 자주한다.
가져가는 챔피언도 갱에 취약하다.
팀의 정글러인 호롱은 갱각을 잡아낼 기량이 된다.
오더 능력은 빈약하지만 반비례해 피지컬이 뛰어나다.
탑에서 만들어낸 이득을 바탕으로 스노우볼을 굴린다.
김다균 코치는 이지범의 무난한 대답을 기대했지만.
"코치님, 지난번에 말씀 드렸던 거 말인데요."
드물게도 이지범의 입에서 반문이 나왔다.
늘 묵묵하게 팀플레이 그가 왜?
이미 한 번 오고 갔던 이야기였다.
"아, 그거? 일단 상황을 보고. 상대 픽에 따른 거니까."
"..알겠습니다."
몇 마디 따지고 싶은 욕구가 굴뚝 같다.
하지만 그러기엔 슬슬 시간이다.
무대 위를 향해 선수들이 입장한다.
.
.
.
* * *
2014 로드 오브 로드 챔피언스 리그 섬머 시즌.
역대 대회들 중 가장 많은 변화가 있었다.
메타 그런 거 이전에 패치 자체가 잦았다.
챔피언들이 리메이크 되고, 상하향 되고.
대회 도중임에도 큰 패치는 연달아 터졌다.
갖가지 새로운 챔피언들이 모습을 드러낼 환경이 제공됐다.
<요즘 세간에서 정말 화제죠? 테이커의 미드 부시안! 정말 심각하게 세긴 했습니다.>
프로들의 스크림, 솔로랭크, 해외 경기 가리지 않고 모두 찾아본다.
그러한 김은준 해설의 말마따나 최근 부시안 만큼 뜨거운 감자에 오른 챔피언이 없다.
얼마 전 리메이크를 통해 완전히 달라졌다.
원딜러의 평균치였던 사거리가 짧아졌다.
대신 다른 부분들이 상향을 받았다.
가장 큰 변화점이 바로 대쉬기다.
누가 봐도 이거 OP아닌가?
눈치를 챌 수밖에 없는 수준이다.
덕분에 패치 첫 날부터 아주 난리가 났다.
이미 솔로랭크는 필밴인 상태다.
<쿨타임 감소를 40% 갖추면 지독한 추격 쿨이 계~속 돕니다. 대쉬하고 평평! 또 대쉬하고 평평! 카이팅이 배인보다 더해요.>
2초마다 굴러대는 배인은 지극히 까다롭다.
브루저 입장에서 정말 골때리기 그지없다.
그런데 부시안은 1초마다 더욱 먼 거리를 대쉬한다.
<물론 리스크도 있습니다. 이즈레알 앞비전 제발 하지 마라! 적어도 부시안은 해야 되는 챔피언이 됐어요.>
<그만큼 숙련도가 필요하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올마스터 선수는 까다로운 챔피언 정말 좋아하거든요!>
<맞습니다. 부시안 살았으면 무조건 했을 선수에요. 머릿속에 너무 자연스럽게 그려져서 의심도 안 가네요.>
전범준 캐스터의 호들갑에 김은준 해설이 체념하듯 말한다.
올마스터는 결코 방심해선 안되는 선수다.
나온지 얼마 안된 신규 챔피언도 완벽에 가깝게 다뤄낸다.
고작 리메이크 정도로 불편을 겪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잘랐다.
이 선수라면 분명히 할 테니까!
형제팀으로서 비교적 약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나 SKY T1 S도 밴픽 하나는 상당하다.
전담 코치가 같은 사람이니 당연한 노릇이다.
<그리고 나머지 밴은 요즘 핫한 파사딘. 그리고 혹시 모르니 자드! 부시안은 원딜도 가능하지만 미드 3밴이라 보는 게 타당하죠?>
<올마스터를 의식했다, 확실히 그런 의도가 엿보입니다. 하드 캐리형 챔피언 잘못 쥐어주면 게임 혼자 해먹는 올마스터에요. 하지만 이렇게 되면 OP챔피언들이 상당히 많이 삽니다.>
가볍게 시작했던 올마스터 찬양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현재 흘러가고 있는 밴픽 구도.
언뜻 보면 SKY T1 S가 개쫄았구나.
올마스터한테 조금이라도 덜 털리려고 저격밴을 하네?
그렇지가 않다는 소리다.
해당 메타에서 OP챔피언들이 많을수록 이러한 양상을 보인다.
<너희 고르키 가져갈 거야? 그럼 우리 랄라랑 리심 다 가져간다? 명백히 SKY T1 S가 이득입니다. 최근 리심이 괜히 0티어 정글러라는 소리를 듣는 게 아니거든요?>
3대장 취급 받던 거미여왕, 이블퀸.
각각 너프를 먹자 리심이 최강이다.
이 약간의 차이가 초반 주도권을 만든다.
공격적인 선수의 손에 들어간다면 더더욱이다.
SKY T1 S의 정글러 호롱은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리심 못하는 정글러가 어디있겠냐만은 호롱 선수의 리심은 특별합니다. 언제든 캐리할 수 있는 폭발력을 가진 선수에요.>
<어, 클끼리는 현역 때도 못하던데요?>
<왜 저는 걸고 넘어지십니까.. 저도 잘해요 리심.>
전범준 캐스터의 딴지에 클끼리가 굉장히 억울하다는 듯 항변한다.
섭섭한 일이지만 어쩔 수가 없다.
선수 시절 해먹은 짓이 조금 심각했다.
<포킹이랑 코스프레는 잘하는 걸로 아는데 플레이는 좀..>
<리심 잘한다니까요? 제가 선수 생활을 반년만 더 길게 했으면 이런 루머가 안 퍼졌을 텐데 많이 아쉽네요.>
안타깝게도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긍정을 해주지는 않는다.
서로 첫 번째 픽을 시작으로 조합이 완성돼 간다.
반드시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픽이 뭐가 있을까.
신세상 매직에서 하나 꺼냈다.
화제가 전환되자 클끼리가 기쁘게 소리친다.
<야흐오! 이거 랄라 카운터로 뽑은 겁니다. 어설픈 야흐오는 역카운터를 맞기도 하는데 잘하는 야흐오는 랄라 진짜 집요하게 괴롭힙니다. 올마스터가 오늘 하나 보여줄 작정이네요.>
<그래서 아까 이야기 마저 이어서 공식전 음파 적중률이 어떻게 되시는지..>
<저 음파 안 맞히는 편입니다. 괜히 맞혔다가 날아가면 큰일이잖아요?>
음파 맞히면 일단 날아가고 생각하는 리심보다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나름 선방 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는 SKY T1 S도 마찬가지다.
야흐오의 카운터는 무엇인가?
그리고 랄라는 꼭 미드로만 쓰여야 하는가?
신세상 매직이 정말 잘하는 밴픽 꼬기다.
미드로 가져간 척하고 탑으로 쓰기.
이외 여러가지 방법으로 상대를 교란시킨다.
하지만 이는 결코 전매특허가 아니다.
김다균 코치가 이끄는 SKY T1 S.
그들이라고 못할 것이 있을까.
야흐오의 하드 카운터 헤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헤일이 야흐오 상대로 진짜 좋은 픽입니다. 라인전부터 한타까지 완전한 카운터다. 확실히 그런 스킬 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이미 대회에서 여러 번 기용이 된 이력이 있다.
헤일의 평타는 야흐오의 장막으로 못 막는다.
게다가 궁극기 불멸이 가진 효과는 무적.
진입 타이밍을 잘 잡아야 하는 야흐오는 골머리를 썩는다.
클끼리가 해설을 이어나간다.
<하지만 아직입니다. 저 야흐오가 꼭 미드갈 거란 보장은 없죠?>
<씨지맥 선수도 탑야흐오를 하니까요. SKY T1 S도 가능성을 생각해 둬야 하겠습니다.>
어디 한두 번 당해봤겠는가.
확신을 내렸다간 말을 주워담지도 못한다.
신세상 매직이라면 이상할 것도 없다.
두 번째 미드 픽이 나오며 밴픽의 양상을 크게 바꿀지 모른다.
그 예상은 역시나 틀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