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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바뀐 심장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그 속담.
특히 남자들 여자 꼬실 때 변명이랍시고 떠드는 소리다.
용기 있는 자 미인을 얻으리라.
의외로 제법 먹힐 때가 있다.
물론 얼굴이 받쳐준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아무튼 그 속담은 로드 오브 로드에선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
슈루룩-!
3코어가 나와버린 나무카이다.
포탑 안쪽으로 그냥 대놓고 들어간다.
자기 사전엔 무리가 없다고 역설한다.
<우리에게 돈! 나무카이도 에어본 있거든요?! 방심했다가 훅 갔죠?>
<점멸로 랄라, 헤일 띄우면서 깔끔하게 잡아냈습니다. 궁극기 반응도 못하고 참사. 헤일은 살았지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헤일처럼 한타에서 위협적이고 까다로운 챔피언이 없다.
과거 SKY T1 S의 이지범은 헤일로 펜타킬이라는 임팩트를 보여준 적이 있다.
그만큼 숙련도가 굉장히 높다는 소리.
그런 이지범의 헤일이 속수무책이다.
<야흐오도 약속의 2코어 나왔어요. 더 이상 맞고 살던 옛날의 야흐오가 아닙니다. 더블 킬! 할 거 다 하고 장렬히 산화!>
<역시 과학 같은 죽음을 맞이하긴 했는데.. 고르키도 건재하고 무엇보다 나무카이가 단단합니다. 단단하면서 데미지도 엄청 세요.>
약속의 2코어.
무극의 대검과 스토커의 단검을 일컫는 말이다.
두 개의 치명타 아이템이 나오는 순간 야흐오는 진화한다.
이제부터는 그냥 죽지 않고 딜 넣을 거 다 넣은 후에 죽는다.
죽더라도 주요 딜러한테 몇 번 칼 쑤셔주기만 하면 된다.
현재 신세상 매직에서 가장 강력한 챔피언은 나무카이.
아이러니하게도 탱커인 나무카이의 화력이 장난 아니다.
<주문력이 200을 넘었어요. 억겁의 스태프에 심홍의 완드. 딜방템이라 단단하면서 셉니다.>
<궁극기 터트리면 테러스티나는 무조건 원콤 나요. 그렇다고 탱커로서의 역할이 부실하냐? 그것도 아니거든요?>
흥할대로 흥해버린 나무카이는 3코어가 나왔다.
억겁의 스태프, 정령힘의 향상, 심홍의 완드.
그리고 평타딜을 효율적으로 받아내는 어쌔신의 신발.
혼자서 모든 딜을 다 받아내며 때에 따라 암살도 해낸다.
속박으로 따라붙어 풀콤을 먹이면 그게 암살이지 뭐겠는가?
일그러진 전진의 판정이 워낙 사기라 알고도 못 피한다.
더욱 주목해야 하는 건 불사신 같은 탱킹력이다.
누구보다 나무카이에 대해 잘 알 수밖에 없는 한 사람.
과거 초식 정글러의 대가였던 클끼리가 할 말이 있다.
<제가 쇈, 아모모 뿐만 아니라 나무카이 장인이기도 했잖아요. 그때는 궁셔틀이다, 조합픽이다. 그런 챔피언이었는데 올마스터 선수의 나무카이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릅니다.>
클끼리가 활동했던 과거에는 정글러가 가난했다.
그러다 보니 아이템이 라이너보다 덜 나왔다.
게다가 팀파이트 위주로 갔기 때문에 존재감이 적었다.
하지만 지금 경기를 캐리하고 있는 나무카이는 미드다.
아이템도, 레벨링도 정글보다 훨씬 우월하다.
존재감이 남다른 것은 당연하다.
또한 빼먹어서는 안된다.
<일그러진 전진의 사거리가 줄어들어서 정글로 쓰기엔 애매해지지 않았나. 그럼 라이너로 쓰면 되지! 게임을, 전장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게임이 터져버리는 속도가 얼척이 없다.
랄라의 커져라, 헤일의 궁극기.
SKY T1 S의 버텨내는 능력은 끈질기다.
그런데 나무카이는 바퀴벌레보다 더 끈질기다.
─레드팀의 억제탑이 파괴되었습니다!
두 명을 잡고 억제탑까지 밀어버렸다.
하지만 억척스런 다이브를 해버린 탓에 체력 상태가 안 좋다.
특히 나무카이는 집중적으로 공격에 노출됐다.
부활 시간은 남았지만 빼는 것이 옳지 않을까.
툭!
나무카이가 평타로 미니언을 친다.
치자 수백의 체력이 쭈욱 차오른다.
잠시 후 한 대 더 치자 또 회복한다.
일련의 행위를 세 번 반복했다.
<일부러 스킬쿨 돌려서 나무카이 체력 회복시켰네요. 영리합니다. 오더 맞추면 못할 것도 없죠!>
<솔랭이었으면 여기서 라인 밀고 뺐을 겁니다. 역시 신세상 매직, 체력 채우고 밀어붙이겠다. 이대로 게임 끝날 가능성 농후합니다.>
주변에서 스킬을 쓰면 패시브가 찬다.
평타 가격시 최대 체력의 7%가 회복.
이는 의도적으로도 채울 수 있다.
이를 테면 허공에 스킬을 남발하는 식으로 말이다.
신세상 매직의 팀원들이 협조했다.
나무카이가 체력을 채우도록 도와줬다.
반피가 넘어가자 거칠 것이 없다.
<일그러진 전진! 일단 스킬 발동되면 절대 못 피합니다. 브라운 단단하지만 연계되는 CC기에 사망! 속박 쿨마다 한 명씩 데려가는 저승사자입니다.>
스킬 레벨이 올라 2초 속박이다.
일그러진 전진으로 들어가 불가사의한 파동으로 밀어낸다.
나머지 아군들이 손쉽게 점사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그러면 나무카이라도 어떻게 데려가야 할 텐데.
아무리 때려도 죽지를 않는다.
오히려 체력이 더 차는 것 같다?
무한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나무카이에게 빠져서는 섭할 한 마디다.
<열심히 때려서 체력 깎으면 뭐합니까! 다시 차는데! 지금 나무카이는 세계수입니다 세계수!>
차후 잘 큰 나무카이를 표현하는 세 글자로 확고하게 굳혀진다.
세계수, 우주와 생명을 상징하는 만물의 근원이다.
게임, 만화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단골 소재다.
가장 큰 특징은 끝없는 생명력.
지금 화면을 통해 모습을 비치고 있는 나무카이가 정확히 그러하다.
가장 선두에 서서 모든 위험을 짊어짐에도 죽이는 것이 불가능하다.
올마스터가 어떤 선수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한 판이었다.
기대를 모았던 8강 B조의 경기.
미드 라인전은 역력한 격차를 보이며 막을 내렸다.
.
.
.
* * *
로드 오브 로드 챔피언스 리그 섬머 시즌.
본선 무대도 벌써 1주차가 훌쩍 지나갔다.
지난 주말, SKY T1 S와의 경기는 홀가분하게 마무리했다.
'실력 차가 좀 나기는 했어?'
경기의 내용은 일방적이었다.
첫 세트는 물론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압도적으로 휘몰아치며 마운트를 잡았다.
원래 SKY T1 S가 좀 그런 팀이다.
약팀을 상대로는 상당히 강하다.
강팀을 상대로는 아무것도 못한다.
전투력 측정기 같은 느낌의 팀이다.
기둥이 되어주는 미드가 무너지자 순식간.
첫 세트의 여파가 컸는지 눈에 띄는 실수가 잦아졌다.
3대 0으로 8강 경기를 손쉽게 가져갈 수 있었다.
'진짜는 이제부터지.'
다음 준결승전까지 정확히 1주일 남았다.
오늘은 8강 C조의 경기가 치러지는 날.
우리하고는 하등 상관이 없다.
문제가 있다면 대진표가 상당히 빡세게 잡혔다.
'KTX A를 벌써 만나게 됐네..'
8강은 총 2주에 걸쳐 치러진다.
SKY T1 S와의 승부가 B조의 경기.
A조의 경기는 그 전날에 결과가 나왔다.
KTX 롤러코스터 A가 가짜에어 비둘기를 똑같이 3대 0으로 격파했다.
대진표 상 준결승전에서 만나게 된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나는 주시하고 있다.
어쩌면 가장 큰 고비가 될지도 모른다.
'여름의 강자가 괜히 붙은 수식어는 아니니까.'
오늘과 내일에 걸쳐 치러지는 C조와 D조에서도 당연히 승자가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둘 중 하나가 결승전에 진출하게 될 것이다.
어떤 팀이 올라와야 지금의 KTX 롤러코스터 A를 넘어설 수 있을까.
나조차도 확실하게 결론짓기 힘들다.
"얼굴 심각해."
차가운 무언가가 볼에 닿았다.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예은이다.
예은이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가져왔다.
"아 땡큐."
"실론티 괜찮아?"
"응, 잘 마실게."
쇼파에 기대듯 앉았던 자세를 고쳐 잡으며 음료수를 땄다.
한 모금 넘기니 시원한 청량감이 식도를 타고 흐른다.
호불호가 갈리는 음료수지만 나도 예은도 좋아한다.
'이렇게 여유로이 있어도 되는 건가 몰라.'
타지역과의 일정을 맞추기 위함이었던가.
이번 섬머 시즌은 스케줄이 여유 있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대회 도중임에도 휴일을 잡았다.
E-스포츠라는 게 컨디션 영향을 상당히 받아 너무 굴리기만 하는 것도 안 좋다.
그래서 주말인 오늘 내일은 푹 쉰다.
물론 한 가지 전제 조건이 깔려있다.
너무 늘어지지 않는 것.
한 마디로 연습 게임 정도는 하라는 것이다.
신세상은 다른 게임단들보다 유도리가 있는 편이다.
"요놈, 나랑 있으면서 힐링이 안돼?"
"아니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불만어린 표정으로 나를 부담스럽게 쳐다본다.
차마 시선을 마주보기가 곤란하다.
나는 대충 둘러대며 음료수를 마셨다.
사실 갈증은 이미 해결됐지만 눈치가 보인다.
준 거 다 안 먹으면 등짝 스매시 제대로 맞는다.
음식 하나로 구구절절 까일 수 있다는 게 진실로 놀랍다.
무엇보다 대답을 이어나가기 뭣한 상황이다.
꼬치꼬치 캐물어보면 답할 것이 없다.
'생각보다 별로 화제가 안됐지.'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안다.
KTX A가 밟아나간 변천사.
섬머 시즌이 되어 완전히 무르익는다.
이에 대해 솔직하게 토로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자꾸 혼자만 고민하는데.. 나 화낸다?"
"정말 별거 아니야아아아...."
예은이 내 볼을 잡고 좌우로 늘리니 소리가 새어나온다.
선풍기 앞에서 음파를 내보내는 그 모양새다.
아프게 꼬집은 건 아니지만 예은이 불만스런 표정이다.
따지고 든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예은의 물음은 전혀 방향이 달랐다.
"혹시 힘들어?"
"응.. 조금? 괜찮아."
힘든 것도 사실이다.
특히 대회 중에는 그럴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나는 일반 선수들보다 배는 바쁘다.
나 자신의 필살 카드 이외에도 여러가지.
신세상 매직의 밴픽도 내가 반쯤은 맡고 있다.
그리고 본래라면 감독에게 떨어지는 주요 업무 처리도 해야 한다.
이청호 코치와 예은이 각각 분담을 해주고는 있지만 어느 정도다.
결국 전체적인 결정은 내가 손을 보지 않으면 안된다.
나만이 알고 있는 이러저러한 지식들.
가미 되지 않으면 지금의 신세상 매직은 있을 수 없다.
"내가 힐링 해줄까?"
"뭐? 맛있는 거라도 있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살짝 삐진 얼굴이다.
생각나는 게 그거밖에 없냐며 한 소리 하신다.
그런데 그거 말고 대체 뭐?
예은도 가끔은 대담해지는 일이 있었다.
"어때? 쩔지?"
"…."
대답을 할래야 할 수가 없다.
예은이 나를 꼭 끌어안았다.
그것만이라면 당연히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내 허벅지 위에 올라탔다.
그 위치에서 두 팔로 내 머리를 감쌌다.
어떤 상태가 돼버렸겠는가?
큼지막한 두 살덩이가 얼굴을 압박해온다.
"좋았어..?"
"..숨 막히고 아팠는데."
예은도 부끄러운지 그 상태를 오래 지속하진 않았다.
오래 지속했으면 대형 참사가 나버릴 뻔했다.
정말로 숨이 하나도 안 쉬어져서 목소리도 안 나왔다.
부드럽기라도 하면 모를까.
속옷을 입고 있는 상태에선 어쩔 수 없다.
그 사실을 본인도 눈치챘는지 입술을 다물고 고민하는 표정이다.
"제대로 해주면 힘낼 수 있어?"
"여러가지 의미로 힘이 무럭무럭 솟을 건 확실하네."
"으이구.."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그 탓에 조금 시간이 지체됐다.
이내 마음을 먹은 예은이 등 뒤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스르르 무거운 천뭉치가 하나 빠져 나온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기다리자 예은의 눈가가 살짝 찡그러진다.
무언가 한심한 녀석을 보고 있는 눈초리다.
이제 와서 빼는 일은 없었다.
'뭐.. 됐나.'
따듯하고 부드러운 살덩이에 잠겨 있으니 아무래도 상관 없어지는 기분이다.
여름의 강자 KTX 롤러코스터 A.
그런 팀이 있었던 것도 같기도 하다.
당연하게도 정말로 잊지는 않았다.
조금 더 생각을 해보니 충분히 괜찮을 듯도 싶다.
절대 이유 없이 감정적으로 도출한 결론은 아니다.
'삼선 레드때가 특별했던 거야.'
지난 시즌의 삼선 레드.
무언가가 큰 전환점이 되어 팀의 기량이 폭발했다.
특히 다대기의 급성장이 눈부셨다.
우승을 했다고는 하나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시즌의 KTX 롤러코스터 A.
무언가 큰 전환점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전력을 숨겼을 수도 있겠지만 그럴 만한 계기는 내가 아는 한에선 없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니 불안해 할 것은 하나 없다.
너무 과민반응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대비를 착실하게 해놓는 것은 물론 좋다.
그렇다고 상대의 전력을 과대평가 하는 것도 큰 실수가 될 수 있다.
적어도 오늘 하루는 고민따위 내려놓고 푹 쉬자.
정말 따듯하고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
낮 시간 뿐만 아니라 밤도 말이다.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내 안테나를 울린 위험 신호는 전혀 다른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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