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직 나만이 마스터다-793화 (793/803)

793====================

과거의 최강

계기가 되었던 건 지난 준결승전 D조의 경기다.

예은과 함께 직관을 갔었을 때.

당시 예은이 뾰로통했다는 걸 모를 수가 없다.

심한 정도는 아니었으나 은은하게 불만이 배어있다.

구체적으로는 사온 간식 중 맛있는 것만 골라먹었다.

평소에도 자주 있는 장난이지만 정도에서 눈치를 챘다.

아마 그래서 일 거다.

"불만?"

"뭐 좋기는 한데.."

어제 준결승전 이후에는 간단한 뒤풀이가 끝이었다.

무대에서 했던 선언은 지켜지지 못했다.

어디까지나 드립은 드립.

다음 주말이 결승전인 만큼 감을 잃어버려서야 곤란하다.

경기가 끝난지 얼마 안됐기 때문에 더더욱이다.

지난 8강과 달리 휴일 없이 빡세게 진행된다.

노고를 달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즌 중이라는 사실을 잊어서야 본말전도다.

하지만 아주 약간의 유도리는 있다.

경기 다음 날인 오늘은 낮 연습만 가졌다.

그리고 오후는 휴식 및 결승전 상대에 대한 대비다.

따지고 보면 절반의 휴일이긴 하다.

허용 가능한 최대치, 적절한 타협선이다.

그래서 오늘은 직관을 하러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여차저차 사정이 있어 집으로 방향을 틀었다.

"말꼬리가 길다?"

"전혀 불만 아니고요. 그냥 신경써줘서 고맙다고..."

째릿한 눈동자로 쳐다보면 나도 모르게 쫄아버린다.

고양이를 앞에 둔 쥐의 심정이 이런 걸까.

본능적으로 쫄게 만드는 위압감이 있다.

'확실히 고맙기는 고마운데.'

두꺼운 커튼이 창밖의 햇살을 반쯤 차단한다.

눈 앞에는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스크린이 보인다.

그렇다.

예은이 거실에 홈시어터를 추구하셨다.

이렇게 쇼파에 앉아있으면 영화관이 따로 없다.

"니가 자꾸 싸돌아다니잖아."

경기장에 가는 걸 마음에 안 들어한다.

이전에는 꽤 좋아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사소한 변덕 쯤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의아하다.

"경기장 가는 게 싫어?"

"아니."

무언가 말하기 힘든 듯 눈썹을 찡그린다.

그리고 나를 빤히 쳐다본다.

알아서 알아 들으라는 무언의 협박이다.

내가 그렇게 눈치가 있는 타입은 아니다.

하지만 서당 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다.

그동안 눈칫밥을, 갈굼을 먹으면서 깨달은 바가 있다.

"우리 은이, 오빠랑 둘만 있고 싶어쪄여?"

"이게 어딜 죽을라고."

앙탈이라고 보기엔 매서운 손맛이다.

예은의 작은 주먹이 복부에 퍽퍽 박히며 숨이 턱턱 막힌다.

때리면서도 부정은 않는 게 맞추기는 한 모양이다.

시즌 중에는 개인 시간이라는 걸 가지기 힘들다.

당연히 숙소 생활이 기본이고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

아무리 내가 일개 선수라 볼 수 없는 입장이어도 룰은 지켜야 한다.

우두머리가 룰을 지키지 않으면 집단이 붕괴되는 건 한순간이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그러다 보니 나와 예은도 연인처럼 지낼 수 없다.

팀의 분위기를 해쳐서는 안되는 노릇이니 당연하다.

그리고 원래 좀 일반적인 연인 느낌도 아니긴 하다.

'그래도 가끔 외롭긴 해.'

신기하게도 같이 있으면서 외롭다는 감정이 인다.

자제를 해야 한다는 게 생각보다 많이 힘들다.

또 예은이 아닌 척 하면서도 은근히 외로움탐 한다.

그 외로움이 쌓이고 쌓여 이런 귀여운 반항을 낳았다.

"아니라고 했지?"

"그래, 아니라고 쳐줄게."

본인이 완강히 거부하는데 구태여 진실을 밝히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홈시어터를 포함해 이것저것 준비한 음식들.

간만의 홈파티가 기대심을 나타낸다.

"다른 것도 먹어도 돼?"

"내가 만든 건 마음에 안 드시다?"

"아니, 음식 말고 입술이라던가."

"못 살아 진짜.."

지난 스프링 시즌보다는 무난했다.

여름의 강자 KTX 롤러코스터 A.

분명 난적이었지만 왕은 아니었다.

봄의 제왕 다대기 보다는 부족함이 있는 상대였다.

'정말 문제가 되는 건 이제부터지.'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만약 그들이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면.

계속 남아 프로게이머 생활을 이어갔다면.

SKY T1 K가 과연 최강을 논할 수 있었을까?

SKY T1 K가 15, 16시즌을 독주할 수 있었을까?

생각을 곱씹을수록 안타까움이 묻어나온다.

갈 거면 빨리 좀 가지.

'14시즌의 최종 보스.'

롤드컵을 재패한 삼선 블루를 일컫는 말이다.

슬로우 스타터, 대기만성의 무서움을 보여준 팀이다.

물론 그들이 꽃 피는 건 롤챔스가 아닌 롤드컵 때의 일이다.

원래의 역사에선 그랬다는 이야기다.

상정할 수 있는 최악의 가능성.

늘 맞지 않도록 바라고는 있다.

고생 사서 하는 타입은 결코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항상 사람 힘들게 만든다.

인생 좀 쉽게 살도록 내버려두지를 않는다.

.

.

.

* * *

바로 어제 있었던 준결승전 A조의 경기.

그 여파는 분명히 지금도 남아있다.

한동안은 떠들썩하게 화제로 오갈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다.

<두 형제가 외나무다리 위에서 만났습니다. 지난 스프링 시즌에서도 그랬지만 삼선 게임단 서로 은근히 악연이에요?>

<올라가는 이상 늦든 빠르든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거든요! 후회 없는 승부 되도록 양 팀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금일 준결승전 B조의 경기를 맡은 두 명의 해설 위원.

클끼리와 강빈이 저마다 한 마디씩 의미를 담아 던진다.

까놓고 강빈 해설의 말은 의미가 있다기보단 세상의 이치다.

올라가는 이상 언젠가 만난다.

토너먼트 리그인 이상 당연하다.

그 당연함이 때로는 억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오늘 칼퇴근은 틀려 보이는 전범준 캐스터가 입을 열었다.

<백수의 왕 사자는 자기 새끼를 절벽에서 밀어 살아남은 쪽만 기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오늘 살아남은 쪽이 이번 시즌의 왕이 될 자격을 가지는 겁니다!>

사실 사자는 그런 잔인한 짓 안 한다.

사나운 맹수라는 이미지와 달리 내 가족한테는 따듯한 초원의 상남자다.

이야기가 와전되어 잘못 전해졌다.

아무튼 걸맞는 비유이기는 하다.

섬머 시즌 준결승전 B조의 경기.

삼선 레드도, 삼선 블루도 물러설 수 없는 한 판 승부다.

레드는 아쉬웠던 스프링 시즌의 복수.

블루는 서열의 고착화를 막기 위함이다.

삼선 레드야 신세상 매직에게 결승전을 졌으니 그럴 만하다.

그런데 블루는 어째서 오늘 경기가 중요한 걸까?

역설하자면 올라가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클끼리 해설이 짧게 두 팀의 관계를 정리한다.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혹시 모르시는 분들 위해 말씀드리자면 원래 두 팀은 하나였어요. 작년 섬머 시즌에 블루가 완전히 공중분해 되면서 다른 전철을 밟게 됐죠.>

여기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간다.

본래 삼선 레드는 슈퍼 아마추어들만을 엄선했다.

게임단 내에서 날고 기는 이들은 전부 레드에 들어갔다.

반대로 블루는 능력적으로 살짝 떨어지는 이들.

전력 투자에 있어서 상당히 비대칭이었다.

까놓고 말해 블루는 찬밥 신세였다.

이 자체는 시즌2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성적을 내기 위함.

대부분의 게임단들이 하는 공공연한 부조리다.

문제가 있었다면 성적이 거꾸로 되었다는 부분이다.

막상 까고 보니 블루가 더 잘하더라?

사정이 있기는 하나 연속으로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야말로 전설을 써내린 팀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공중분해.

선수들의 개인 사정, 재계약 시즌이 겹치며 해체가 됐다.

<레드 선수들의 색깔이 너무 강하다. 같은 팀에 있기에는 손발이 안 맞는다. 블루의 해체가 계기가 되어 나뉘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 섰습니다. 두 단어로 요약하자면 리빌딩, 성공적! 하지만 나눠진 이상 올라갈 수 있는 팀은 하나 뿐입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말이 있다.

마주서게 된 두 팀이 관계가 그러하다.

한 마디로 태생부터가 라이벌.

결단코 물러설 수 없는 자존심 싸움이다.

특히 블루팀은 지금까지 한 수 아래였다.

윈터 시즌, 스프링 시즌 레드보다 성적이 안 좋았다.

스프링 시즌 때는 패배하기까지 했다.

그러니 더욱 져서는 곤란하다.

전범준 캐스터가 우렁차게 외친다.

<양 팀 준비 완료되었다고 합니다. 선수들 만나보겠습니다. 밴픽~ 보시죠오!>

리빌딩 이후로도 삼선은 여전히 강팀이다.

하지만 최고가 되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더욱 간절하다.

슬슬 꺾고 넘어서 줘야 할 때가 아닌가?

-캬 나이즈 선픽! 패기 지리고요.

-장군님 오늘 보여주시나?

-블루는 이번 시즌도 제물이 되겠네.

-다대기 2차 각성 각이다 ㅇㅈ?

중계 플랫폼, 커뮤니티 등에서는 승패 예측이 활발하다.

대세는 이미 한 쪽으로 기울어졌다.

상대 전적에서 앞서고 있는 삼선 레드.

나름대로 타당한 추론이지만 한 가지가 빠져있다.

최근 기세가 이토록 날카로울 수가 없다.

이를 가장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 김은준 해설.

새로운 전설의 탄생을 느꼈다며 호들갑을 떨었던 그는 공교롭게도 오늘 경기를 맡지 않았다.

별다른 부연 설명 없이 시작하고 만다.

예고된 이변은 착실하게 싹을 틔운다.

.

.

.

* * *

화제가 꽃 피운다.

현재 진행형으로 이야기가 오간다.

국내 최대 규모의 로드 오브 로드 커뮤니티 잉벤.

삼선 게임단의 내전은 현재 진행형으로 불타오르고 있다.

─쓰레빠 쓰리런ㅋㅋㅋ

파랑 쓰레빠가 다시 잡았네ㅋㅋㅋ

간만에 박 터지는 내전 나왔다.

다음 세트 빨강 쓰레빠가 이기면 이번엔 블라인드 각?

└각이지. 안 가면 에바 터는 각.

└응, 블루가 또 잡으면 끝이야.

└ㄴㄴ장군님 개빡쳤다. 축지법 써서 캐리할듯.

첫 번째 세트의 승리는 예상을 깨고 삼선 블루.

적절한 저격밴과 탄탄한 운영으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세트에서 삼선 레드가 추격했다.

야흐오를 밴하면 자드를 하면 되지!

과거의 다대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줬다.

미드 라인에서 한 차례 솔킬이 나오며 게임이 기울어졌다.

그런데 또 다음 세트에서는 삼선 블루가 반격에 나섰다

─제임스로 야흐오 뚝배기 깨버리네ㅋㅋ

저격밴하고 조커 숨겨두고 이게 내전이냐?

라이벌 대전도 이 정도까지는 잘 안 갈 텐데ㅁㅊ

서로 잘 알아서 그런지 진짜 더 무섭다.

└우정이고 함께 보낸 세월이고 그런 거 없어. 이기는 게 짜세야!

└지는 쪽은 회식 자리에서 밥 안 넘어갈듯?

└이기는 쪽도 마찬가지지ㅋㅋ 눈치 개보임.

결승전에 진출할 팀을 정하는 자리다.

롤드컵 진출권과도 연관이 크다.

불똥이 튀기는 건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한데?

세간에서는 우정 파괴 쓰리런이라며 난리가 났다.

저격밴이 당연한 듯 오가고, 듣도 보도 못한 조커 카드가 튀어나온다.

여기까지 온 이상 같은 게임단이고 나발이고 없다.

이윽고 네 번째 세트가 시작한다.

삼선 레드에게 있어 의미가 더없이 깊다.

─여기서 2대2 뜨면 진짜 난리 난다.

블라인드 가면 삼선 레드가 무조건 이겨ㄹㅇ

다대기가 야흐오 잡고, 아웃섹이 리심 잡는 순간 그냥 끝나는 거지.

└ㄹㅇ야흐오&리심 가져가면 신세상 매직도 잡을 걸?

└에이, 그건 에바 털지. 해봐야 암ㅋ

└ㄴㄴ저 조합은 스프링 때도 안 열어줬잖아. 다 이유가 있다니까.

└삼선 레드가 블라인드에 강하긴 해.

그러나 팬들의 바람대로 블라인드에 가는 일은 없었다.

미드 라인전에 모든 힘을 쏟아낸 다대기와 아웃섹.

코볼트의 토이치를 감당하지 못하고 한타에서 거짓말처럼 참패를 당했다.

─이걸 코볼트가..?

미드 털려서 무난한 자드 캐리 나올 줄 알았는데.

한타 가니까 그냥 토이치가 싹 쓸어 먹네.

조합을 저렇게 짠 이유가 있구나.

└미드 필리언이 이래서 좋지. 망해도 1인분 가능.

└원딜러가 잘한다는 전제 하에. 솔랭에서 하다가는 망하기 딱 좋은 픽이야.

└코볼트가 요즘 제일 잘 나가는 원딜이잖아. 피지컬 원탑임. 서포터도 존잘이고.

└사스가 M씨 가문 4대 천왕..

스타트는 분명 삼선 레드가 유리하게 끊었다.

6레벨이 되는 순간 까다로워지는 미드 필리언.

삼선 블루의 미드라이너 퐁이 꺼낸 조커 카드는 이미 해법이 나왔다.

이전에 올마스터가 한 번 선보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차례 신세상 매직을 상대한 삼선 레드는 대비책이 서있었다.

초반 라인전 단계에서 과감한 갱킹.

필리언을 잡으며 미드 라인의 우위를 가져왔다.

그럼에도 그의 캐리를 막지 못했다.

봇라인에서 일어난 대형 참사.

코볼트의 토이치가 폭풍 성장하자 감당이 안된다.

준결승전 B조의 승자는 모든 이들의 예상을 벗어났다.

============================ 작품 후기 ============================

화면 상단에 있는 추천 버튼! 잊지 않고 눌러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독자님들이 주시는 쿠폰 덕에 힘내서 연재 이어나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항상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