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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최강
기대를 몰고 오는 매치업이라는 게 있다.
갤럭시 크래프트 때는 흔하지 않았던가.
이 선수가 올라가야 결승전이 흥행하지.
대충 이런 느낌.
대부분의 팬들은 신세상 매직과 삼선 레드의 접전을 예상했다.
그도 그럴게 세간의 평부터가 유일한 호적수다.
신세상 매직을 막아설 수 있는 건 삼선 레드 뿐이지 아닐까.
<저는 솔직하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도 사실 삼선 블루가 올라갈 거라 높을 확률로 점치고 있었어요.>
<가위바위보는 나중에 내는 쪽이 무조건 이기긴 하죠.>
<이런 거 나중에 말하면 폼 안 사는 거 저도 알아요.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제가 당일 경기 해설을 못했는데!>
언제나 당연한 듯 앉아있는 상암 E-스포츠 경기장의 중계석이 아니다.
어느 해변의 모래사장 위에서 김은준 해설이 서운함을 토로한다.
중계석이 아닌 모래사장 위.
위치 선정이 이러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작년에도 이쯤 해서 오지 않았던가?
섬머 시즌 하면 역시 해운대다.
갤럭시 크래프트 시절부터 내려져온 유구한 전통.
2세대 E-스포츠 로드 오브 로드도 지켜나가려 하고 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예상하셨던 걸로 쳐드릴 수도 있습니다.>
<아니, 진짜.. 하…. 제가 8강 경기 때 알아봤다니까요. 그때 말했잖아요?!>
클끼리의 은근한 빈정에 김은준 해설의 서운함이 배가 된다.
당연하게도 진지한 이야기는 아니다.
게다가 장소도 중계석이 아니지 않은가?
카메라가 비치는 주변은 온통 모래사장, 그리고 바다.
간단하게 의자와 테이블 등이 구비된 야외 무대다.
시청자들에게 가장 친숙한 중계진들이 잡담을 주고 받는다.
오늘 승자 예상이라던가.
알아야 하는 관점 포인트라던가.
결승전인 만큼 간단하게 넘어갈 일이 아니다.
<삼선 블루의 승리를 예상하신 분들도 많을 거거든요. 오늘 경기도 정말 승자 예측이 안돼요! 그 강력한 삼선 레드를 똑같이 3대1로 꺾지 않았습니까?>
<상대 전적이라는 게 사실 큰 의미가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최근의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결승전의 승자, 붙어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몰라요.>
전범준 캐스터가 슬슬 밑밥을 깐다.
클끼리가 자연스럽게 받아치며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현재 오프게임넷을 보고 있을 시청자들.
그들이 지루해 하지 않도록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사람이 개미떼처럼 많은 해운대이지 않은가?
통제하는 스태프들이 배 이상으로 고생하는 것은 당연하다.
경기장이 완전하게 준비가 되려면 무대 설치 이외에도 이것저것 시간이 든다.
<해운대 10만 관중의 신화! 가뿐하게 이어받을 기세 아닙니까?>
<저는 한 발 더 나아가 그 이상을 써내려 가는 시발점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갤럭시 크래프트의 이상. 가능성은 이미 보여줬잖아요.>
E-스포츠의 성장세는 보증이 진작에 완료됐다.
수많은 대기업들이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투자에 저조한 한국이 이 정도다.
전세계적으로는 시장이 완벽하게 형성됐다.
앞으로 더욱 활성화되리란 사실은 확정이 났다.
이번 섬머 시즌의 결승전은 지난 해 이상으로 뜨겁다.
하늘 위에서 내리쬐는 따가운 햇살도 방해가 되지 않는다.
2014 로드 오브 로드 챔피언스 리그 섬머 시즌.
어쩌면 본래의 역사보다 한 발 빠르게 만났을지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사실.
어느 누군가는 평생 알 수 없을 사실.
과거의 최강.
현재의 최강.
보다 앞서 자웅을 가린다.
.
.
.
* * *
푸른 파도가 바위에 부딪히며 부숴진다.
부숴진 파도는 새하얀 모래사장을 검게 물들인다.
바다에 오게 되면 나도 모르게 감성적으로 변한다.
'지난 해는 정말 큰일이었지.'
부산 해운대의 앞바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한 번씩은 왔다 간다.
나에게도 이곳은 추억의 장소가 돼버렸다.
모래사장의 끝을 따라 걷고 있자면 싫어도 생각이 나버린다.
"이번에는 뭐 숨기는 거 없지?"
"없다니까."
"흐응.. 못 미더운데."
모자를 푹 눌러쓴 예은이 내 손을 꽉 잡는다.
감정이 담긴 듯 굉장히 조여 온다.
저지른 죄가 있어 차마 반항은 할 수 없다.
사실 악력에서 밀려서 못한다는 표현이 맞다.
"경기 있어서 봐주는 거야."
"..알아 뫼시겠습니다."
분명 서로 사정도 있었고, 허락도 받았고,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거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미안한 일이다.
얼마나 마음 고생했는지, 참았는지 한국에 돌아와서야 알게 되었다.
물론 예은도 뒤끝이 남아서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니다.
문득 기억이 났을 뿐이다.
천천히 걸음을 밟자 슬리퍼 사이사이로 모래알이 들어온다.
기억에 남아있는 감촉이다.
지난 해 이곳의 모래가 유난히 엉겨붙었다.
그 까끌함은 도저히 잊혀지지 않는다.
"올해도 갈 거야?"
"진짜 신뢰 못하나 보네."
"아니, 그거 말고 저~쪽."
예은이 히죽 장난스런 웃음을 지으며 푸른 바다 건너편을 가리킨다.
동해안 아니랄까봐 정말 아무것도 없이 지평선만 펼쳐져 있다.
혹시 이 바다에 나를 담가버리기라도 할 속셈인가.
'아니..겠지?'
적어도 입수 전에 최후의 변호는 허락해줄 거라 믿는다.
우리 예은이 좀 괴팍해도 대화는 통하는 편이다.
옛정을 봐서 편하게 보내줄 거라 생각한다.
"이상한 상상했지?"
"아뇨."
"딱히, 해도 되는데."
표정을 보아하니 너무 넘겨짚은 모양이다.
예은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장소.
한 번 더 생각을 해보자 그제서야 떠올랐다.
"다, 당연히 알고 있었지. 하나도 안 쫄았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거야.."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허벅지를 툭 쳐온다.
하긴 아무리 그래도 거기까진 안 나가겠지.
나도 딱히 장난으로 생각한 거지 진심은 아니다.
'..차가운 바닷속은 면했네.'
감금으로 바뀐 것만으로도 비약적인 감형이다.
아버님에게 소유권이 있다고 하는 무인도.
그 위에 세워진 호텔은 지난 해에 신세를 진 기억이 있다.
일반 해변가하고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바다가 아름답다.
육지에서 꽤 멀리 떨어진 데다 사람의 손을 거의 안 탔다.
그런데 사용인들이 관리까지 하니 어수선하다는 느낌도 없다.
나중에 찾아 보니 1박에 천만원 대를 넘는다.
성수기에는 배단위를 가뿐하게 넘어선다.
그런 곳을 지인 특권으로 아무렇지 않게 빌리다니.
사실 가장 신기한 건 그만한 돈을 내고 빌리는 사람이 있다는 부분이다.
"싼 편인데? 거의 유지비만 받는 수준이니까."
"그게..싸?"
예은의 말을 들어보니 대략 이해는 된다.
작정하고 시설을 돌리면 1년 내내 예약이 꽉 차있을 수준이라고.
취지 자체가 비즈니스로 세운 곳이 아니라 그러지 않을 뿐이란다.
이전이었으면 절대로 못 믿었을 이야기다.
중국에 가서 잘 사는 사람들이 어떠한지 못 봤다면 말이다.
'섬 하나를 통째로 빌리는 셈이니 어찌 보면 싼 편인가.'
호텔이긴 하지만 딱히 객실이 많이 있지는 않다.
일단 그곳에 가면 나와 예은 단 둘이 있는다.
입이 무거운 사용인이 너댓 명.
휴가를 보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사치스런 장소다.
인연이 없을 만한 장소지만 지인 특권으로, 혹은 미래의 마누라 특권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향락이다.
"이번에야 말로 보여줄 테니 기대하고 있어라?"
"응? 뭘?"
"뭐긴 뭐야. 캘리포니아에서 못 보여줬잖아."
아무래도 예은은 못내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모양이다.
LCF 관련으로 초청받아 캘리포니아에 갔던 올해 초.
모든 일을 끝내고 시간이 남아 노닥거릴 예정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러지는 못했다.
사람 많은 곳에서 노출을 하기에는 아직 응어리가 남아있었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아직도 마찬가지.
하지만 장소가 외딴 섬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냥 다 벗고 헤엄쳐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아무도 없는데."
"아주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해변가를 둘러보자 슬슬 시간이 됐다.
발걸음을 옮기고자 하는 장소는 정해져 있다.
오늘 내가 해운대까지 와버린 이유.
그리고 결승전에서 승리해야만 하는 목적.
'햇살이 뜨겁구만.'
한 여름의 햇살보다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찬 장소다.
경기장에 도착하자 이미 인파가 더없이 붐빈다.
최소로 잡아도 수만, 사람들 사이에 부대낀다.
관중석에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댄다.
그런데 관중석도 아니고 무대에 선다.
수 시간, 수 만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이제 조금은 익숙해진 일상이다.
사복을 갈아입고 선수복으로.
경기장에 올라선다.
.
.
.
* * *
여느 대회가 그러하듯 결승전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오늘 이 자리에 서게 되는 두 팀.
하나는 기대와 선망의 대상이다.
신세상 매직.
작년 섬머 시즌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창단을 하자마자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후로도 연전연승, 고공행진을 이어나갔다.
지난 스프링 시즌에는 또다시 우승을 차지했다.
이번 섬머 시즌도 결승전 자리에 올라섰다.
이에 맞서게 될 상대.
지금껏 유난한 주목을 받은 적은 없다.
아니, 꼭 그렇게 생각할 것만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인연이 깊다.
아는 사람은 아는 이야기.
삼선 블루는 원래 우승 커리어가 있던 팀이었다.
신세상 매직은 그 후신(後身).
원 삼선 블루의 선수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졌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세간의 인식부터가 완전히 다른 팀이다.
하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상관이 있었다.
"삼선 레드도 삼선 레드지만 신세상 매직도 좀 그래."
"한 번 넘어서지 않으면 쭉 이야기가 나오겠지."
삼선 블루의 부스 안.
경기 시작에 앞서 두 명의 선수가 잡담을 나눈다.
팀의 봇듀오를 맡고 있는 둘은 오늘의 결승전이 정말 간절했다.
더 이상 삼선 레드에 밀린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싫다.
그 첫 번째 난관은 넘어섰지만 아직 다음이 있다.
전신(前身)보다 부족한 후신(後身).
과거 찬란했던 삼선 블루에 비해 초라하다.
재창단 초기에는 수도 없이 들었던 빈정이다.
물론 그것은 옛날 이야기.
이제는 거의 나오지 않지만 근본적인 해결이 된 건 아니다.
그저 시간이 많이 흐르자 자연스레 그늘이 진 것 뿐이다.
언제까지 과거의 그늘에서 허우적대야 하는가.
두 선수에게 있어 오늘의 경기가 특별함을 갖는 이유다.
이제서야 당당히 마주 설 수 있게 되었다.
"자, 긴장하지 말고 평소처럼만 하면 돼. 코치가 보기엔 너희들이 신세상 매직에게 밀릴 이유가 하나도 없어!"
"아, 예에.."
삼선 레드를 넘어서자 레파토리가 신세상 매직으로 바뀌었다.
틀에 짠 듯한 백성현 코치의 북돋움에 코볼트가 매가리없이 대답한다.
참 사람은 좋은데.
인성적인 부분에서는 모자람이 없는데!
안타깝게도 능력적인 부분은 글러먹었다.
노력은 하지만 발전이 더디다.
게임 내적으로 도움이 거의 안된다.
'뭐, 경기는 결국 선수가 하는 거니까.'
팀 내에서는 진작 결론이 나온 부분이다.
코볼트는 지난 준결승전을 짤막하게 회상했다.
삼선 레드를 상대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던 이유.
무언가가 특별히 달라져서는 아니다.
'하던대로 해나가기만 하면 돼.'
어째서 자신들이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나.
독특한 전략을 구사했기 때문이 아니다.
다대기처럼 벽을 깬 듯 각성을 한 것도 아니다.
그저 보다 완벽해졌다.
이상(理想)에 한 걸음 다가섰다.
"다 살려?"
"살리면 리심은 무조건 가져가지 않을까?"
"죽이자. 죽이고 파사딘은 간보자."
첫 번째 세트의 밴픽이 시작됐다.
여느 게임단과는 사뭇 다른 광경이다.
누군가 주도하지 않고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 받는다.
이는 비단 코치가 능력적으로 부족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삼선 블루라는 팀이 가진 색깔.
결과만 놓고 보자면 크게 유별날 건 없다.
상대방의 주력을 저격하고, 자신들은 OP를 가져간다.
그 기본적인 밴픽 전략에 있어 압도적으로 완성도가 높다.
"맞아, 나무카이랑 파사딘 같이 가져가는 건 너무 욕심이다."
"피로라 후픽 나오고 그러면 나 힘들어. 정글이 주구장창 안 봐주면 절대 못 버텨."
모든 선수들의 챔프폭이 넓으며 연습량 또한 많다.
각자의 라인에서 새로이 뜨는 챔피언들.
저마다 대비해오는 것만으로도 밴픽이 한결 편해진다.
선수 본인이 장단점을 확실하게 꿰고 있냐, 그렇지 않냐.
그 사소한 차이가 완벽이라는 신기루를 흉내낸다.
신기루, 존재하지 않는 환상.
그렇기에 지금까지는 저조했다.
한 번 형성되자 더 이상 헛것이 아니게 됐다.
이번 시즌에 들어 확연하게 불길이 거세진 이유다.
한 가지 계기가 생기자 물꼬가 터진다.
SKY T1 K, 그리고 삼선 레드.
손 꼽히는 강호들을 꺾으며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마지막 관문을 눈 앞에 둔 선수들의 눈동자가 불타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