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야구팀-127화
"..."
다음날 일요일, 수혁의 방. 수혁은 그저 멍하니 의자에 앉아있었다.
지금 그의 눈에는, 아니 온몸에는 생기라고는 전혀 찾아볼수가 없었다. 그냥 시체 하나가 의자에 앉아있는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가 살아있다고 느낄때는
"왜... 왜..."
그가 힘없이, 간신히 말 몇마디를 내뱉으면서 소리없이 눈물이 그이 볼을 타고 흘러내릴때 뿐이었다.
"난, 난, 최선을 다했는데, 최선을 다했는데 왜, 왜! 왜!"
종종 간신히 말 몇마디를 내뱉다가 폭발해버린 감정, 그러기를 여러번 반복하면서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가족들이 각자 볼일이 있어서 어디론가 나갔다는것, 그래서 집안에 아무도 없는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게 분노와 절망이 되풀이되면서 수혁의 몸은 점점 더 지쳐만 갔다. 그러면서 그의 정신은 더욱 피폐해져갔고,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그의 몸은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번을 더 반복했을까, 결국 체념한건지 조금전까지만 해도 분노에 차있던 눈이 많이 수그러들었다.
겨우 진정을 하는듯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수혁은 다시 분노한 표정으로 커다란 박스를 가져왔다. 그러고는 집안에 있던 글러브랑 공, 배트 등을 모두다 넣고는 집 밖에 내다버렸다.
그리고 현관문이 쾅- 하고 닫히는 순간
'앞으로 야구따위 안해, 안할거야...'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버렸다.
*
쌍둥이네 집, 성빈과 종빈이 그의 아버지와 마주앉은채로 앉아있었다.
진지한 표정의 아버지와는 다르게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두 사람, 그들의 얼굴에는 이제 다 끝났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고 있었다.
"...내가 만족할거라 생각하진 않았지?"
"..."
"..."
아버지의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는 두사람, 아니 정확히는 할수가 없었다. 좋은 성적을 가져와서 당당하게 보여주고, 계속 야구를 할 생각 뿐이었던 두 사람에게는 너무나보 비참한 결말이었다.
"그럼 이제부터 열심히 공부하는거다"
아버지는 그런 둘의 표정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 방금막 자기 할말만 끝내고는 방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끼익- 탁.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둘만 남은 방 안, 둘의 얼굴에는 절망만이 드리워졌다.
"..."
"..."
앞으로 야구를 할수 없다는 사실 때문인지 둘은 아예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무런 말도 나올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아버지를 붙잡고서 다시 한번만, 한번만이라도 더 기회를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럴수가 없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그걸 증명할수 있는 무대가 있을까, 다음번에도 또 이렇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미 망가질대로 망가져 버렸을 팀인데, 다시 뭉칠수 있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그들을 강제로 꾹 눌러앉히고 있었다.
"..."
"..."
그러면서 둘의 침묵은 점점 더 길어져만 갔다.
*
"호진아, 밥먹어라"
"........네"
호진네 집, 호진은 어머니의 부름에 힘없이 일어나서 부엌 식탁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서 말없이 밥만 입안으로 꾸역꾸역 밀어넣었다.
"..."
그의 어머니는 그런 호진을 안쓰럽게 쳐다봤다.
간만에 아들이 친구도 생기고, 좋아하던 야구도 마음껏 할수 있게 되었는데, 그 모든게 나 무너졌을 테니까, 그리고 자신이 그걸 도와줄수 없다는 그런 현실 때문에 더욱더 마음 한켠이 아려왔다.
'미안하다 호진아...'
*
"하..."
어느 평범한 주택의 원룸, 용식이 식탁에 앉은채로 안주도 없이 소주를 들이키고 있었다.
"진짜...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진짜 조금만, 아주 조금만 있었더라면... 씨발... 개같으니라고..."
그의 입에서는 거친 욕설이 튀어나오면서 동시에 병을 쥐고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에 쥐어진 소주병은 멀쩡하니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 이새끼도 안깨지네... 뭐 당연한 거겠지만..."
용식은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돌려서 바깥을 쳐다봤다. 그러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이제 팀이 해체되는건 시간문제... 하, 막막하다..."
*
"자, 그러니까 여기선..."
'이제 공좀 던질수 있었는데...'
어느 학원의 보충수업시간, 영훈이 침울한 표정으로 교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영훈의 모습은 머릭이서 보면 수업에 열심히 집중하고 있는것처럼 보일법 했다. 교재를 쳐다보고 있는 시선과, 손에 쥐어져있는 샤프, 열심히 수업을 듣는 학생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 영훈의 머릿속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이드암으로 처음 공을 던졌을때의 그 느낌, 그리고 그때 보았던 공의 궤적,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구한 방향으로 들어가는 제구력까지.
그 모든건 영훈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보면 그가 너무 늦게 발견할 걸수도 있었다.
'진짜... 이제서야 제대로 던져보나 했는데...'
그러면서 눈물 한방울이 교재 위로 툭 하고 떨어졌다.
*
"학생, 5000원이야"
"여기요"
"그럼 맛있게 먹어"
딸랑-
아파트 단지 근처의 분식점, 산욱이 저녁거리를 사들고서 그곳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아무런 느낌도 없는 표정으로 집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하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매우 환상적인 상상이 그려지고 있었다.
처음 면홍중 야구부와의 시합에서 친 그라운드 홈런을 시작으로, 개원중, 두번의 연습경기, 그리고 세번의 예선전까지.
그때까지 경기를 해오면서 날렸던 모든 안타, 장타, 홈런등이 그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언제 온거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어느새 문앞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비밀번호를 누른 다음에 힘없이 들어가서 신고 나갔던 슬리퍼를 대충 벗어버렸다.
*
타악- 타악-
"오케이,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 각자 하던거 정리하고 집으로 가자!"
"넵!"
개원중 강당, 선민은 아침 일찍부터 나가서 열심히 훈련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야구 유니폼을 입은채로 배트를 든게 아닌, 운동하기 좋은 옷차림에 오른손에는 배드민턴 라켓을 들고 있었다.
원래 학교 배드민턴 선수였던 그로서는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간거나 마찬가지였다.
선민은 하던 훈련을 멈추고는 이내 떨어진 셔틀콕들을 주워서 박스 안에 담았다.
그다음 창고 안으로 가져다 넣은다음에 강당 한쪽 바닥에 앉은채로 등을 기댔다. 그리고 가져온 물 한병을 따서 한모금 들이켰다.
시원한 물이 선민의 목을 타고 넘어갔다. 그리고 선민의 표정이 잠깐 밝아지더니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그때 그 경기들은 아직도 선민의 머릿속에 남아서 맴돌고 있었다.
뭔가 특별하게, 미친듯이 활약한 경기는 없었지만,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주자를 잡아보기도 했었고, 안타를 쳤을때는 매번 왠지 모를 흥분도 느껴졌다.
"진짜 재밌었는데 말이지..."
선민은 그러면서 다시 물 한모금을 들이켰다.
*
슈욱- 터업-
슈욱- 터업-
아파트 단지의 작은 운동장, D.라이더즈 면홍중과의 시합 전에 연습하던곳, 그곳에서 상민과 운선이 가볍게 캐치볼만 하고 있었다.
원래 서로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같이 경기를 하고, 훈련도 하다보니까 어느새 친해진 둘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장난끼가 많고 너무 낙천적인 성격이 잘맞았던 둘인지라, 어제의 충격좀 진정시킬겸, 그 둘만 따로 모여서 캐치볼을 하고 있었다.
물론 다른 애들한테 연락해볼까 했지만, 둘다 지금 다른 사람들의 상황이 좋지 않을 거라고 예감했다. 누구나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따라 둘도 딱히 다른말이 없었다. 단지 둘다 진지한 표정을 한채로 공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야, 우리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러다가 잠시 쉬는사이, 운선이 상민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뭐... 수혁이 그녀석이 다시 정신을 차린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면 뭐 이제 거의 끝이라고 봐야지"
상민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고개를 살짝 떨궜다. 그리고 늘 웃는 얼굴이 아닌, 딱딱하게 굳은 표정, 그리고 그건 운선도 마찬가지였다.
*
"하... 제대로 당했어... 골드 스타즈가 실력을 숨기고 있었을줄은..."
여느 여학생의 방처럼 평범한 예영의 방, 그녀는 왼팔로 턱을 괴고는 오른손으로 마우스 휠로 화면을 내리고 있었다.
그녀가 보는 화면에는 수많은 표들과 그래프, 그리고 수많은 문자들과 숫자들이 적혀있었다. 그 모든게 전부다 이번 황룡기 동네야구대회의 자료들이었다.
"진짜... 본선만 가면 내가 되는데까지 팍팍 밀어주려고 했었는데..."
예영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보고있던 자료를 꺼버렸다. 이어서 컴퓨터 전원까지 완전히 끄면서 자신의 침대위로 벌렁 누워버렸다.
"근데... 앞으로 걔 어떻게 보지...?"
침대위에 눕자 지금쯤 지난번에 완전히 죽어가던 수혁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예영의 입에서 다시 한번더 한숨이 새어나왔다.
"어떡하지..."
*
"쩝... 나름 재밌었는데 금새 끝나버렸네..."
웅철네 집. 웅철은 모처럼 집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간만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리고 방금 막 점심을 챙겨먹고 나온 상황, 그는 그대로 소파에 앉아버리고는 리모컨을 들어서 티비 전원을 켰다.
"음... 뭐 볼거 있나..."
웅철은 리모컨 버튼을 누르면서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우연찮게 잡힌 야구 중계방송, 왼쪽위 구석에 [황룡기 동네야구 대회], 그리고 [재방송] 이라는 글자가 쓰여있었다.
"음? 이거 중계도 했었나?"
웅철은 순간 의아해했다. 그가 팀의 매니저로 있을때는 단 한번도 중계를 하지 않을으니까 나올만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모든 팀들마다 다들 한번씩 중계방송은 나갔었다. 그리고 나름 홍보도 했었지만, 사람들의 관심이 없어서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확실히 중계방송은 계속되고 있었다.
방송은 웅철이 지금까지 본 경기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투수들은 제구가 안돼서 볼넷을 주기 일쑤였고, 타자들도 스윙을 했다하면 헛스윙, 아니면 힘없는 땅볼로 물러나고 있었다.
물론 그중에서 타구의 속도가 조금 빠르다 싶은 땅볼들은 알까기등 어이없는 실책들로 거의다 안타처리가 되고 있었다.
한마디로 볼맛 뚝 떨어지게 만드는, 아주 저퀄리티 경기였다.
"...이제보니까 그냥 우리팀이 엄청 잘하는 거였네"
웅철은 고개를 숙인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서 채널을 돌리려는 순간,
파앙-
"스트라이크!"
심판이 확실히 빠진 볼을 스트라이크로 잡아주는 장면이 그의 눈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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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아직 끝나지 않았다(2)2015.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