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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연인의 청혼 (1/199)

1화. 연인의 청혼2021.01.04.

-항상 염려하는 마음을 담아서, 아가씨의 심장에 씨앗을 남깁니다. 작은 씨앗이 뿌리를 내려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처럼, 아가씨의 꽃도 활짝 필 수 있기를. 아가씨의 모든 걸음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멀리 있지만, 항상 만날 수 있길 가슴 설레게 기다리겠습니다. 소중하고 또 소중한 나의 제비꽃이여-

16553695551812.jpg“소중하고 또 소중한 나의 제비꽃.”

편지를 읽고 있는 그녀는 정말로 제비꽃 같았다. 비록 병색이 완연했지만, 하얀 피부에 결 좋게 쏟아지는 보랏빛 머리카락 사이로 신비할 정도로 맑고 투명한 녹안이 싱그러웠다. 아멜리아는 편지와 함께 온 제비꽃을 바라보며 행복하게 웃었다. 유모의 안부 편지에 항상 똑같이 따라오는 마지막 구절은 죽음을 기다리는 자신에게 매번 좀 더 살아도 된다고, 살 수 있다고 용기를 준다.

16553695551812.jpg“유모는 여전히 잘 지내고 있구나.”

16553695551827.jpg“로사 유모님이 편지 보내신 거예요?”

마미의 목소리에 아멜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16553695551812.jpg“가끔 이렇게 보내줘.”

16553695551827.jpg“저한테도 보내주시지. 서운해라.”

16553695551812.jpg“답장에 네 안부도 전해줄게. 그럼 보내줄 거야.”

몇 해 전, 로사 유모는 백작가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매번 사랑 듬뿍 담긴 편지를 전해주곤 했다. 항상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제비꽃 한 송이와 함께 말이다. 제 연약한 심장이 이 생명 가득한 제비꽃처럼 빛나길 바라면서. 참 신기하게도 유모가 있는 곳은 북부령으로 여기서 엄청 먼 곳인데, 이 제비꽃은 단 한 번도 시든 적 없이 도착했다. 마치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하지만 꽃을 시들지 않게 하는 마법이라니, 그런 마법은 들어본 적 없다.

16553695551812.jpg‘넌 그냥 기적인가 봐. 나한테도 그런 기적이 와주면 좋을 텐데. 그러면 그분을 슬프게 하는 일도 없겠지.’

편지를 내려놓는 아멜리아의 표정이 일순 어두워졌다. 유모의 편지 옆에 또 다른 편지. 겉표지가 금색 휘장으로 화려했다. 바로 그녀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연인, 에드조프 라이엇 바스티얀 대공의 구혼서였다. 연인의 구혼서를 두고 표정이 이토록 우울한 건, 그의 청혼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병들었던 이 심장이 언제 어떻게 멈춰버릴지 모르니까. 자신은 그런 시한부를 타고 났으니까.

16553695551812.jpg‘이런 내가 그분과 결혼할 수는 없지.’

하지만 청혼을 마음대로 거절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16553695551827.jpg“아가씨, 어디 불편하세요? 갑자기 표정이…….”

16553695551812.jpg“아니야, 아무것도.”

아멜리아는 마미가 보지 못하게 구혼서를 숨기며 말했다.

16553695551812.jpg“그나저나 백작가까지 직접 마중 나와 줄 줄 몰랐어. 정말 고마워.”

마미는 피오레 공작가의 하녀이자, 아멜리아의 유일한 친구였다.

16553695551827.jpg“공작 각하께서 아가씨 건강을 생각해서 허락해주셨어요. 저도 오랜만에 아가씨를 너무 뵙고 싶었고요! 이번 연회에 아가씨가 오실 줄 상상도 못 했는데. 용케 체자렛 백작님께서 외출을 허락하셨네요.”

아멜리아는 마미의 말에 씁쓸하게 웃었다. 현재 아멜리아는 아픈 몸을 이끌고, 외가인 피오레 공작가의 연회에 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명령 때문이었다.

16553695580881.jpg‘이번 연회에서 바스티얀 대공 전하의 청혼을 반드시 받아들이고 와. 지금껏 쓸모없었으면 이제라도 쓸모 있는 딸이 되어야지. 그나마 괴물 대공과 결혼 시키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겨. 바스티얀 대공께서 너 같은 아이에게 청혼이라니. 얼마나 행운이더냐.’

아버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딸이 되고 싶지만, 청혼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16553695551812.jpg‘그래도 오랜만에 그분을 만날 수 있으니까 좋아. 외출도 오랜만이라 설레고.’

아멜리아는 특유의 긍정적인 미소를 지으며 달리는 마차 밖을 바라보았다. 달리는 길이 산길이라 끊임없이 마차가 흔들렸지만, 그뿐만 아니라 백작가의 영애가 타고 있다기엔 너무 초라한 마차였다. 영애를 호위하는 기사 역시 턱없이 부족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영애 따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 마미도 처음 이 마차와 호위 인원을 보고 놀랐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체자렛 백작은 아멜리아를 미워했고, 계모 역시 그녀를 싫어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조금이라도 사랑받는 딸이 되고자 노력했다.

16553695551812.jpg‘청혼은 받아들일 수 없지만, 연회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야지. 체자렛 백작가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게.’

이번에 열리는 연회는 무척 특별한 연회였다. 피오레 공작가의 새 가주 후보자들을 정식으로 소개하는 자리였으니까. 그녀의 외가인 피오레 공작가는 저격수인 머스켓티어 집안으로, 핏줄만으로 작위를 계승하지 않는 유일한 가문이었다. 마법을 이용하는 총술에 뛰어난 재능이 있는 자라면, 공작가 사람의 추천서를 통해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마법을 쓰지 못하는 아멜리아는 자신의 의붓 여동생인 메사리나를 추천했다. 그녀는 타고난 마법사로 총술이 뛰어나, 아멜리아의 자랑이었다. 메사리나는 백작가에서 유일하게 그녀의 안부를 물어주는 가족으로, 아멜리아는 그녀를 무척이나 아꼈다. 그래서 죽기 전에 메사리나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걸 줄 생각이었다.

16553695551827.jpg“메사리나 아가씨는 먼저 출발하셨다고 하셨죠?”

16553695551812.jpg“응. 바쁜 일이 있대. 같이 가면 좋았을 텐데. 오랜만에 셋이서 수다도 떨고 말이야.”

16553695551827.jpg“글쎄요. 저는 어쩐지 메사리나 아가씨가 어려워서요.”

마미의 표정이 퉁명스러워졌다. 예전부터 마미는 메사리나에게 선을 두었는데, 이번에 피오레 공작가에 추천서를 써준 것도 마미는 못마땅해 했다.

16553695551812.jpg“그러지 마. 메사리나가 얼마나 착하고 좋은 아인데. 너도 친해지면 좋겠어.”

마미는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16553695551827.jpg“노력해볼게요.”

16553695551812.jpg“아무튼 너무 좋다. 오랜만에 외조부님도 뵙고 그리고······.”

쾅-!

16553695551827.jpg“악!”

16553695551812.jpg“마미!”

마미의 목소리가 엉망으로 튀었다. 잘 달리고 있던 마차가 기우뚱하더니 이내 폭발음과 함께 멈춰버리고 만 것이다.

16553695551827.jpg“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마미가 몸을 떨었다. 아멜리아 역시 무서웠으나, 애써 정신을 똑바로 붙잡고서 마차 문을 열었다.

16553695551812.jpg“도대체 무슨······ 흡!”

그녀가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그녀를 호위하던 기사의 목이 그녀의 발 앞으로 굴러 떨어졌다. 사방에 난무하는 피. 마차를 습격한 건 도적떼였다.

16553695610103.jpg“저년인가?”

16553695610103.jpg“아, 맞아. 저년이야.”

도적들은 마치 아멜리아를 아는 듯 그녀에게 다가오기 시작했고, 아멜리아는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끝까지 몸을 꼿꼿하게 세운 채 고개를 들었다.

16553695551812.jpg“지금 무례하게 뭐하는 짓······ 윽!”

하지만 도적은 순식간에 아멜리아의 머리카락을 휘어잡고서는 그녀를 무릎 꿇렸다.

16553695551827.jpg“아가씨!”

16553695551812.jpg“나오지 마!”

아멜리아의 만류에도 마미가 뛰쳐나와 아멜리아를 보호하려고 했지만, 도적들이 그런 마미를 끌고 갔다.

16553695551827.jpg“악!!!”

16553695551812.jpg“마미! 뭐 하는 짓이냐. 당장 저 아이를 풀어줘!”

아멜리아의 날카로운 고함에 도적은 음흉한 미소를 그렸다.

16553695610103.jpg“이것 봐라? 그래도 귀족 영애라고 엄청 앙칼지네?”

16553695551812.jpg“지금이라도 당장 그만 두거라!”

16553695610103.jpg“미안한데, 네년 목숨 값이 대단해서 그만 두진 못해.”

불길한 한마디가 귓가로 서걱였다.

16553695551812.jpg‘목숨 값이라니?’

16553695610103.jpg“일단 저년부터 처리하고······.”

16553695551812.jpg“안 돼! 원하는 목숨이 나라면서. 그럼 나만 죽여.”

생각보다 강단 있는 모습에 도적은 멈칫했다. 아멜리아는 일부러 더욱 의연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16553695551812.jpg“저 아이를 풀어다오. 그럼 순순히, 내 목숨을 주겠다.”

도적은 이 상황에서 눈물조차 보이지 않는 아멜리아를 재미있게 쳐다봤다.

16553695610103.jpg“귀족이 제 목숨 대신 하녀 목숨을 살리려는 건가? 게다가 죽는 게 무서운 줄도 모르고. 아니면 이런 상황이 익숙한 건가?”

16553695551812.jpg“······.”

16553695610103.jpg“불쌍한 인생이네. 뭐, 나야 힘쓸 것도 없이 순순히 죽어준다면 감사하지.”

도적이 피 묻은 시커먼 칼을 그녀를 향해 치켜 올리자, 아멜리아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며 눈을 질끈 감은 순간.

16553695610103.jpg“뭐, 뭐야.”

갑자기 사방이 쿵, 쿵 울리더니 땅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16553695610103.jpg“갑자기 지진이야? 악!”

지진을 견디지 못한 산에서 산사태와 함께 토사가 쏟아지더니, 그대로 도적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16553695610103.jpg“사, 살려줘! 살려달라고! 악!”

그런데 이상했다. 지진도 토사도 전부 아멜리아를 비켜 오직 도적들만 휩쓸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너무 기이한 현상에 눈만 동그랗게 뜨고서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16553695551812.jpg‘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결국 도적들은 전부 휩쓸려 사라지고, 그제야 지진이 멎었다. 사방이 먼지와 토사로 엉망이었지만, 아멜리아만은 멀쩡했다.

16553695551812.jpg“하아. 하아······.”

그녀는 제자리에 주저앉은 채,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 아멜리아에게 도적들에게 끌려갔던 마미가 달려왔다.

16553695551827.jpg“아가씨! 괜찮으세요? 대, 대체 이게 무슨······.”

16553695551812.jpg“모르겠어. 모르겠는데······.”

그때, 한 남자가 걸어왔다. 남자를 본 아멜리아는 도적을 봤을 때보다 더 흠칫했다. 햇빛이 넘치는 찬란한 남쪽에서 두꺼운 짐승의 가죽을 뒤집어 쓴 사내. 덥수룩한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두건으로 얼굴의 반을 가린 터라, 푸른 눈동자만이 시퍼렇게 번뜩였다. 그는 아주 기이한 기운으로 그녀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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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눈으로 아멜리아를 살피며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자 그녀가 저도 모르게 움찔했고, 남자는 그 눈빛에 곧장 걸음을 멈추었다. 마미가 그런 아멜리아를 감싸며 그 남자를 향해 외쳤다.

16553695551827.jpg“가, 가까이 오지 말거라! 이분이 누구신 줄 알고!”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16553695695389.jpg“······괜찮으십니까?”

아멜리아는 거친 겉모습과 달리 너무 다정한 어조에 놀랐다.

16553695551812.jpg“아, 네. 괜찮아요.”

그녀는 저 남자가 자신을 도와주려고 한다는 걸 깨달았다.

16553695551812.jpg‘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분명 겉모습은 수상했으나, 그런 기분이 들었다. 아멜리아는 겨우 몸을 일으키고서 마미에게 말했다.

16553695551812.jpg“마미, 일단 마차부터 확인해 봐. 움직일 수 있는지 말이야.”

16553695551827.jpg“네? 하지만······.”

마미가 남자를 힐끔거렸다. 아멜리아는 그런 마미를 다독였다.

16553695551812.jpg“괜찮아. 어서.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잖아.”

16553695551827.jpg“아, 알겠습니다.”

마미가 먼저 움직이고, 아멜리아 역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16553695551812.jpg“윽!”

심장에서 느껴진 통증에 그녀가 가슴을 붙잡자, 남자의 눈빛이 무섭게 경직되더니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왔다.

16553695695389.jpg“잠시 실례하겠습니다.”

16553695551812.jpg“네?”

남자가 그녀의 무릎 뒤로 손을 넣고, 등을 감싸며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올렸다. 아멜리아는 몸이 붕 뜨자 깜짝 놀라서 발버둥 쳤다.

16553695551812.jpg“아, 아니 저는 괜찮아요! 걸을 수 있어요!”

하지만 남자는 손에 힘을 주며 차갑게 대꾸했다.

16553695695389.jpg“이대로 있다간 날이 저물 테고, 그럼 서로가 곤란할 겁니다.”

산에서 날이 저물면 위험했다. 자신을 내버려두고 갈 것 같지도 않았고, 괜히 시간 끌어서 이분까지 곤란하게 할 수는 없었다.

16553695551812.jpg“그럼 마차까지만 부탁드릴게요.”

그녀는 조금이라도 이분이 힘들지 않도록 그의 단단한 어깨를 꽉 붙잡았다. 덕분에 그녀의 몸이 그에게 더 가깝게 밀착되고 말았다.

16553695551812.jpg“이러면 좀 덜 힘드시죠?”

천진난만한 그녀의 물음에 남자의 몸이 살짝 굳었으나, 내색하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낯선 남자의 품이 처음엔 살짝 어색했지만, 일부러 자신을 의식하지 않는 그의 배려에 차츰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게다가 그에게선 익숙한 제비꽃 향이 느껴졌고, 자신만큼이나 긴장한 그의 귓불이 어울리지 않게 붉어져 있었다. 아멜리아는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아멜리아를 곧장 마차에 태워주었다. 도적떼의 습격으로 말은 살아남았으나, 마부는 도망간 터라 말을 다룰 줄 아는 마미가 고삐를 잡았다. 남자는 말없이 마차 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러자 아멜리아가 곧장 외쳤다.

16553695551812.jpg“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어디 사시는지 말씀해주시면 꼭 은혜를 갚고 싶은데…….”

일순, 남자의 시선이 부드럽게 얽히며 맞닿았다. 처음엔 무척 섬뜩한 눈동자라고 생각했는데.

16553695551812.jpg‘눈이 참 예쁘네. 푸른빛이 신기해.’

그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제 되었다는 듯 짧게 읊조렸다.

16553695695389.jpg“은혜는, 이걸로 충분합니다.”

16553695551812.jpg“네?”

의아한 한마디와 함께 그는 마차의 문을 굳게 닫았다. 남겨진 아멜리아는 묘하게 그의 모습이 자꾸만 되뇌어졌다. 잠시 후, 남자의 곁으로 복장을 갖춘 기사가 나타났다.

16553695610103.jpg“대공······.”

16553695695389.jpg“쉿.”

기사가 그를 부르려고 하자, 남자는 냉한 어조로 기사의 입을 막았다. 기사는 떠나는 마차를 힐끔거리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16553695610103.jpg“대체 뭐 하시는 겁니까? 저 여자는 누군데······.”

16553695695389.jpg“말조심해라.”

남자가 기사를 무시하고서 말에 올라탔다.

16553695695389.jpg“잠시 볼일이 있다.”

16553695610103.jpg“예? 북부로 돌아가시는 거 아니십니까?”

16553695695389.jpg“넌 따라오지 말고 아까 그놈들.”

남자는 토사에 휩쓸려간 도적들을 떠올리며 더욱 차갑게 얼어붙은 어조로 명했다.

16553695695389.jpg“전부 죽여.”

16553695610103.jpg“······.”

16553695695389.jpg“아니. 한 놈은 살려라.”

16553695610103.jpg“그게 무슨! 대공 전하. 전하!”

하지만 대공이라 불린 그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남겨진 기사는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 무사히 공작가에 도착한 마미는 그때의 상황이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몸을 떨었다.

16553695551827.jpg“도적떼라니! 그 근방은 그래도 사람들이 많이 다녀서 위험하지 않는데!”

아멜리아는 도적이 언급한 목숨값이라는 말이 걸렸지만, 애써 떠올리지 않았다.

16553695551812.jpg“때마침 산사태가 일어나서 다행이었어. 게다가 마음 좋은 분도 만나고 말이야.”

16553695551827.jpg“솔직히 전 그 남자도 무서웠어요. 도적들과 한패인 줄 알았다고요.”

16553695551812.jpg“아니야. 엄청 친절하셨어. 그리고…….”

16553695551812.jpg‘눈동자가 예뻤어.’

아멜리아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던 그 눈동자가 아른거렸다.

16553695551812.jpg‘언젠가 다시 만나 은혜를 갚아야 할 텐데…….’

16553695551827.jpg“공작 각하께서 아셨다면 크게 분노하셨을 텐데.”

피오레 공작은 잠시 황궁에 일이 생겨서 공작가를 비운 상태였다.

16553695551812.jpg“우리 둘 다 무사하니까, 외조부님께 알리지 마.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

마미는 시종일관 의연한 아멜리아가 대단해보였다.

16553695551827.jpg“아가씨도 정말 대단하세요. 저는 진짜 너무 무서워서 눈물부터 나왔는데, 아가씨는 울지도 않으시고.”

마미는 그녀가 마미를 살리려고 목숨을 걸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굳이 말하지 않은 채 엷은 미소를 지었다.

16553695551812.jpg“내가 무서워하면 너까지 더 이성을 잃을 것 같아서, 나라도 괜찮은 척한 거야.”

16553695551827.jpg“죄송해요. 제가 아가씨를 지켜드렸어야 했는데.”

16553695551812.jpg“마미, 그런 생각 마. 넌 날 도와주잖아. 그런 널 지키는 게 내 의무야.”

아멜리아는 곧은 시선으로 마미를 다독였다.

16553695551812.jpg“귀족의 의무는 그런 거야. 그리고 내가 널 엄청 좋아하니까, 당연한 거고.”

마미는 그런 아멜리아의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비록 심장이 약하다고 하나, 마음까지 약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누구보다 강했다.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항상 웃으려고 노력하니까.

16553695551827.jpg‘천재 머스켓티어였던 아일리 아가씨의 딸다워.’

하지만 그런 아멜리아를 유일하게 약하게 만드는 게 바로 그녀의 연인이었다. 마미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띠며 말했다.

16553695551827.jpg“그런데 아가씨, 마차에서 아가씨 물건을 가져오다가 이걸 발견했는데요.”

마미가 들고 있는 건 바로 구혼서였다.

16553695551812.jpg“그건!”

16553695551827.jpg“바스티얀 대공 전하께서 청혼하신 거예요?”

더는 숨길 수가 없게 된 아멜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16553695551812.jpg“맞아. 난 이번 연회에서 대공 전하의 청혼을 받아들여야 해. 그러려고 아버지가 연회에 날 보낸 거야.”

16553695551827.jpg“그런데 왜 숨기신 거예요? 설마 대공 전하를 싫어하는 거예요?”

16553695551812.jpg“그럴 리가!”

16553695551827.jpg“당연히 그렇겠죠. 바스티얀 대공 전하는 유력한 황위 계승자신데. 게다가 외모며, 성품이며,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잖아요.”

에드조프 라이엇 바스티얀. 아멜리아의 연인이자, 이 솔라 제국의 유력한 황위 계승자였다. 현재 황제에겐 두 명의 황자가 있었으나, 에드조프의 배다른 동생은 천한 피가 흐르는 괴물이었기에 현재로서는 에드조프가 가장 유력했다.

16553695551812.jpg“그래. 그분은 찬란한 황제가 될 거야. 그런 분에게 난 어울리지 않아.”

도적 앞에서도 곧았던 아멜리아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16553695551812.jpg“난, 곧 죽을 테니까······.”

16553695551827.jpg“아가씨! 그런 말씀 마세요! 아가씨는 오래오래 사실 거예요. 꼭 그러실 거라고요!”

마미의 말은 고마웠으나, 그런 기적은 불가능했다. 지금도 틈만 나면 느껴지는 심장의 통증이 고통스러웠다.

16553695551812.jpg“난 그분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나 때문에 너무 마음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지금도 그분에게 너무 미안해. 그분은 날 너무 사랑해주는데, 난 그분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마미는 그저 사랑받는다는 이유로 자책하고 나약해지는 아멜리아를 안타까워하며 또 다른 걸 보여주었다.

16553695551827.jpg“마차에서 이것도 발견했어요.”

16553695551812.jpg“제비꽃이잖아. 시들지 않았네!”

로사 유모가 준 제비꽃이 그 난리 통에 시들지 않고 다시 그녀에게 돌아온 것이다.

16553695551827.jpg“이 꽃도 이렇게 생명력이 강한데. 아가씨도 절대 지지 마세요. 오래오래 사랑받고, 사랑하시라고요.”

마미의 말에 아멜리아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16553695551812.jpg‘정말로 이 제비꽃 같은 기적이, 내게도 와줄까.’

*** 깊어진 밤, 함께 있어주겠다는 마미를 뒤로 하고서 아멜리아는 메사리나를 찾아가기 위해 방을 나섰다. 분명 먼저 출발했는데, 메사리나가 보이지 않았다.

16553695551812.jpg‘이상하네. 내가 공작가에 도착한 걸 들었을 텐데.’

그녀의 손엔 은빛 소총이 들려 있었다. 총의 손잡이는 기품 있는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이자 피오레 공작가의 물건이었다. 아멜리아는 연회가 열리기 전, 이걸 메사리나에게 꼭 주고 싶었다.

16553695551812.jpg‘메사리나가 꼭 피오레 공작가의 새로운 가주가 되었으면 좋겠으니까.’

설렘을 안고 메사리나가 지내는 방의 문을 열려는 순간.

16553695862777.jpg“이리 와. 그래. 더 가까이.”

아멜리아의 귓가로 낯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16553695862782.jpg“사랑해요, 대공 전하.”

이어 말도 안 되는 속삭임이 아멜리아의 귓가를 사정없이 할퀴어갔다. 그녀의 눈동자가 마구 떨려왔다.

16553695551812.jpg‘대체, 저게 무슨 소리지?’

아멜리아는 대책 없이 밀려드는 공포를 억누르며 문을 살짝 열었다.

16553695862782.jpg“하아, 하아!”

바깥에서보다 더 선명한 소리가 울렸다. 어느새 점점 그녀의 의식이 멍해졌다. 두 눈도 멀어버렸으면 했다. 커다란 침대에서 메사리나가 누군가에게 안겨 있었다.

16553695862782.jpg“전하. 그렇게 안으시면…… 하윽!”

붉디붉은 머리카락을 마치 꽃처럼 피운 채로. 아멜리아는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메사리나를 짐승처럼 안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여동생을 안고 있는 남자는 자신에게 청혼을 한 연인.

16553695551812.jpg“바스티얀, 대공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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