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괴물 대공에게 청혼을2021.01.11.
에드조프가 귀에 닿은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녀를 빤히 보자, 아멜리아는 쓴물이 느껴질 정도로 격한 감정을 누르며 말을 이었다.
“제가 계속 모를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당황했던 에드조프는 지금 상황이 장난이 아님을 깨닫곤 순식간에 입꼬리를 차갑게 비틀었다.
“안 속네. 아주 멍청하진 않나보군.”
그녀 앞에 그는 항상 귀공자였다. 빛나는 은빛의 긴 머리카락과 항상 달콤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는 금빛 눈동자. 그려낸 듯한 이목구비에 더없이 우아한 미소를 가진 귀공자.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 오만하고 건방진 모습이 그의 진짜 모습인 것이다.
‘이 남자는 단 한순간도 내게 진심이었던 적이 없었구나.’
“눈치채지 못했다면, 죽는 그 순간까지 좋은 남편 노릇은 해주려고 했는데. 그만큼의 자비는 그대에게 베풀 생각이었어.”
에드조프의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멜리아는 그런 그를 보며 아무렇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렇게 눈치챘으니, 이 관계는 이제 파국인 거죠.”
그는 말도 안 된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가 날 떠나겠다고? 날 떠날 수나 있고?”
비록 지금 아멜리아의 모습은 의외긴 했지만, 그래도 에드조프는 확신했다. 저 여자는 결코 자신을 떠날 수 없다는 걸. 저 가여운 여자에겐 자신이 전부니까. 같잖은 사랑이란 감정으로 조종할 수 있게. 마지막 순간까지 제게 복종하도록, 그렇게 사랑하는 척 연기한 것이니까.
“당연히 떠나야죠. 대공 전하께서는 절 사랑하지 않고, 저 또한 대공 전하를 더는 사랑하지 않으니.”
지금도 이 여자는 이렇게 사랑 타령만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대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아멜리아는 자꾸만 짓눌리는 숨을 겨우 내쉬며, 그를 향해 정확히 말했다.
“예. 그러니까 이만 끝내도록 해요. 청혼은 거절하겠습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 주세요, 대공 전하.”
아멜리아는 단호하게 등을 보였다. 하지만 에드조프가 순식간에 그녀의 허리를 한 손으로 감은 채 끌어당겼다.
“이게 무슨!”
에드조프는 목소리를 높이는 아멜리아를 가만히 바라보며 다른 손으로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러곤 금방이라도 키스할 듯 고개를 숙이며 귓가에 속삭였다.
“그대가 나한테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아주 잘 알겠어. 내게 쉬워 보이고 싶지 않다는 것도 알겠고. 하지만 지금도 나한테 이렇게 떨리고 있잖아.”
에드조프는 슬쩍 시선을 들어 마구 흔들리고 있는 아멜리아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이 여자는 제게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절대.
“시간을 주지.”
“······.”
“아멜리, 그대는 내게 쓸모가 있어. 하지만 메사리나, 그 천한 계집은 아니야. 그저 잠시 갖고 놀았던 것뿐이야. 메사리나와 당신의 차이는 그거지. 그러니까 당신이 메사리나에게 졌다고 생각하지 마.”
에드조프는 그녀의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느리게 쓰다듬으며 더없이 매력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번 연회에서 우린 결혼 발표를 할 거야. 내가 황제가 되면, 그대는 얌전히 내 옆에서 황후가 되면 돼. 그대가 죽는 날까지, 정비로서 귀여워하고, 사랑해줄 테니까.”
에드조프는 눈물이 고이는 아멜리아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각인처럼 새겼다.
“지금처럼 내게 계속 복종하도록 해.”
끔찍한 말을 남긴 채, 그가 떠났다. 아멜리아는 제 몸에 들러붙어 있는 그의 시선과 숨결과 목소리에 온몸을 떨었다. 처음엔, 아무리 그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해도 너무 사랑했던 사람이기에 온전히 떨쳐내지 못한 무언가에 휩쓸려 제 감정이 엉망으로 날뛰었다. 하지만 지금은 온전히 떨렸다. 정말이지 치가 떨려서. 그의 역겨운 민낯에 숨이 막힐 만큼, 치가 떨렸다.
“복종이라고?”
지금껏 그가 자신에게 준 것은 사랑이 아닌 명령이었나.
“완전히 나를 자기 소유물로 취급하고 있었구나.”
실수였다고? 고작 내가 상처 받았다고? 이제야 저 남자의 간악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날 완전히 가졌다고 착각하며 지내 봐. 앞으로 무엇이 어떻게 바뀌어서 당신 앞에 내동댕이쳐질지. 그때의 당신도 지금처럼 여유로울 수 있을지, 나도 궁금하니까.”
아멜리아는 자신의 심장에 손을 갖다 대었다. 느낄 수 있었다. 평소와 다른 심장 소리. 온몸으로 퍼지는 이 생기 넘치는 소리가. 난생 처음 가져보는 건강한 심장. 살아 있다, 내가. 아주 건강하게. 조금은 특별하게.
[너의 심장을 딱 1년만 꽃 피게 해주지. 딱, 1년이야.]
“제비꽃의 기적이, 내게도 이뤄졌구나.”
고작 1년. 아니, 충분한 1년이다.
“얌전히 당신 옆에서 황후나 되라고? 과연 당신이 황제가 될 수 있을까?”
눈물을 담았던 아멜리아의 눈동자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내가 느낀 고통을 당신도 느끼게 해줄게. 당신이 가장 간절히 바라는 욕망을 내가 전부 빼앗을 거야.’
남은 1년, 제대로 날 사랑하기 위해. 날 아프게 하고 상처 준 그들에게 처절하게 복수하리라. 이번엔 자신이 전부 가질 것이다. 더는 이 눈을 가리고, 귀를 막은 채 그들 앞에 세워져서 멍청하게 당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누가 누구에게 진짜 복종해야하는지, 철저히 깨닫게 해줄게.’
“아가씨! 아가씨!”
마미가 울먹이면서 침실로 들이닥쳤다.
“마미.”
“으어엉! 아가씨! 얼마나 놀랐다고요! 아가씨가 쓰러졌다고 하셔서! 바로 달려오고 싶었는데 연회 준비한다고 이제 들었어요! 죄송해요!”
마미는 아멜리아를 끌어안았고, 아멜리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미 네가 날 발견한 거 아니야?”
“네?”
‘어제, 누가 날 여기로 데려온 거지?’
누군가 자신을 안고서 구해줬는데. 분명 마미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나한테 뭐라고 말도 해준 것 같았는데.’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 말이 참, 따뜻했는데······.
“왜 그러세요, 아가씨? 괜찮으신 거예요?”
마미의 진심 어린 걱정에 아멜리아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이제 아주 건강하거든.”
“네?”
자신의 심장이 건강해진 사실은, 아직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마미, 외조부님은 돌아오셨니?”
“아직이요. 하지만 오늘 중으로 돌아오실 거예요.”
“오시면 내게 바로 알려줘. 드릴 말씀이 있거든. 그리고.”
아멜리아는 에드조프가 준 구혼서를 응시하며 말했다.
“나, 결혼할 거야.”
마미는 아멜리아의 말에 기뻐했다.
“어머나! 바스티얀 대공 전하의 청혼을 받아들이시는 거예요? 너무 잘됐어요! 안 그래도 대공 전하께서 저택에 도착하셨다고 들었는데!”
“대공은 대공인데, 바스티얀 대공이 아니야.”
아멜리아는 에드조프의 구혼서를 붙잡았다.
“북부령 클리오 대공 전하와 결혼할 거야.”
그러곤 망설임 없이 반으로 확 찢었다. 그 모습에 마미가 경악했다.
“누, 누구랑 뭘 하신다고요? 클리오 대공 전하? 설마 그 괴물 대공?!”
아멜리아가 택한 건 에드조프가 증오하는 남동생과의 결혼이었다. 황실의 또 다른 황자지만, 미천한 어머니의 핏줄 때문에 죄인들의 감옥이라 불리는 북부에 버려진 일명 북부의 흑사자. 그를 둘러싼 소문도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전쟁광이라고 불릴 정도로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켜 사방에 피비린내가 끊이질 않고, 성품도 잔인하고 야만적이라 끔찍한 괴물로 불리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자와 지금 결혼이라니!
“아가씨, 거짓말이죠? 청혼은 바스티얀 대공께 받았는데 갑자기 뜬금없이 클리오 대공이라니요!”
아멜리아는 황당해하는 마미에게 모든 사실을 얘기해주었다. 그러자 마미의 표정이 살벌해지면서, 극도의 분개만이 남아 펄쩍 뛰었다.
“세상에. 그런 정신 나간! 어머, 어머, 어머!!!”
“그렇게 됐어.”
“바스티얀 대공께서 그럴 줄 몰랐는데. 어떻게 메사리나 아가씨와! 아니지. 아가씨도 아니지. 천하의 그 못된 년! 어쩐지 처음부터 아주 맘에 안 들었다고요!”
마미는 아멜리아보다 더 치를 떨며 더 험한 말을 하고 싶은걸 꾹 참는 듯 했다. 아멜리아는 그런 마미의 모습에 뭔가 따뜻한 기분이 들었다. 유일하게 자신의 편에 서서 함께 분노해주고, 제 편을 들어주는 거였으니까.
“그런데 대체 왜 클리오 대공 전하와 결혼하신다는 거예요?”
“그 남자가 제일 증오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바로 남동생, 이클리트 라이엇 클리오 대공이야. 클리오 대공이 북부령으로 가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쳤지. 같은 땅을 밟고 있는 것도 치를 떨어한다고.”
“사이가 나쁘다고 듣긴 했었는데. 그래서요?”
“난 그 남자가 내가 느꼈던 고통을, 그 심장이 찢기는 것 같았던 상실감을 똑같이 느꼈으면 해.”
아멜리아의 말에 마미의 표정이 음울해졌다.
“난 아주 완벽한 복수를 원해. 그래서 그가 가장 바라는 욕망을 잃게 만들 거야.”
“그게 뭔데요?”
아멜리아는 아주 굵고 짧게 답했다.
“황제.”
마미는 그 말에 순간 숨을 멈췄다.
“그걸 어떻게······ 설마!”
“그가 끔찍하게 싫어하는 동생에게 황위를 빼앗기면 조금은 내가 느낀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까?”
“그래서 클리오 대공과 결혼을. 하,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요?”
“솔라 제국이라면 아주 가능성이 없지는 않잖아. 황제 폐하께서 황위를 마음대로 물려주시는 게 아니니까.”
태양을 섬기는 솔라 제국은 타제국과 황위 계승이 판이하게 달랐다. 평등하게 비추는 태양의 정신을 빌어, 지금의 솔라를 지키고 있는 다섯 공작가가 황자들의 자질을 황제와 함께 심판하여 그들이 선택해야 황위에 오를 수 있었다. 자신들이 인정하고, 존경할 수 있는 주군이어야 섬길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심판의 날까지 황자의 신분이 아닌 대공의 신분으로 제국을 위해 일하며, 황제의 자질이 있음을 끊임없이 보여줘야만 했다. 현재 에드조프는 공작들의 신망도 두텁고, 황제의 총애도 받고 있었다. 황제가 직접 황도와 가장 가깝고 따뜻한 남부를 다스리게 해준 것도 그러한 총애였다. 반면, 클리오 대공은 솔라에서 가장 춥고 얼어붙은 유배지, 북부로 쫓아내듯 보냈다. 물론 에드조프의 입김이 있었지만.
“다섯 공작가가 클리오 대공 전하를 황제로 선택할 일은 전혀 없을 것 같은데요.”
“적어도 피오레는 그를 지지할 거야.”
“피오레 공작가요? 아무리 공작 각하라도 그건······.”
“내가 그를 황제로 만들 거야.”
아멜리아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선택해서 만들 거라고, 황제로.”
마미는 아멜리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피오레 공작 작위를 받으시려고요?”
“그래. 내가 피오레 공작가의 가주가 되면, 황제를 결정할 권한이 생기니까.”
지금까지 그 남자가 자신을 휘두르며, 선택 당하기만 했지만 이젠 자신이 그 남자의 위에서 선택할 그런 권력을 가져야만 했다.
“하지만 아시잖아요. 피오레 공작가는 머스켓티어 가문이에요. 총을 쓰지 못하면 가주가 될 수 없어요. 가문의 사람들이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앞으로 내가 할 일이 많아질 거야.”
“차라리 공작 각하께 도움을 요청하시면······.”
“아니. 안 그래도 건강이 많이 편찮으시잖아. 마음 쓰게 하고 싶지 않아.”
피오레 공작가의 가주인 벨반 공작은 현재 건강상의 이유로 중심에서 물러난 상황이었다. 그래서 더욱 빠르게 공작가의 후계자를 물색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해. 나한테 권력이 생겨야, 클리오 대공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고 그래야 그를 그 남자와 대항할 새로운 황위 계승자로 만들 수 있어.”
마미는 아멜리아의 속을 완전히 알 수는 없었지만, 무척이나 어렵고 고된 길을 가려고 한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적어도 자신만큼은 그녀를 무조건 믿어주고 싶었다.
“좋아요. 저는 무조건 아멜리아 아가씨를 도울 게요. 그런데 일단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건 결국 클리오 대공 전하와의 결혼이네요. 그분이 이 결혼을 할까요? 그 전쟁에 미친 괴물이······.”
아멜리아는 양피지에 무언가를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일단 구혼서부터 보내는 걸로 시작할래. 마법 통신구가 있겠지?”
통신구를 이용하면 편지를 워프해서 바로 보낼 수 있었다. 문제는 워낙 비싼 고가이기에 귀족이 아니면 살 수가 없었다.
“있긴 있지만······.”
“만나기라도 해야 설득을 하든 말든 할 텐데. 북부로 간 이후로 한 번도 황도에 온 적 없다며.”
“사교계에서 본 적이 없어요. 사실 사람이 맞긴 한가, 싶어요. 얼굴도 제대로 본 사람이 없다니까.”
클리오 대공에 관한 소문은 정말이지 어마어마했다. 괴물이다, 저주받았다, 얼굴이 끔찍하다더라 등등. 말하다보니 마미는 점점 이 결혼이 마음에 안 들었다.
“아가씨, 정말로 그분과 결혼하실 거예요? 아무리 복수를 위해서라고 해도. 성격도 완전 포악하다던데. 얼굴도 엄청 못생겼으면 어떡해요! 아니 분명 못생겼을 거야.”
“외모, 성격은 중요하지 않아. 애초에 감정을 따지는 결혼이 아니니까.”
“아가씨…….”
“중요한 건 나한테 필요한 사람이라는 거야. 일단 어떻게든 만나야겠어. 그래서 저지르는 거야.”
아멜리아는 비장한 표정을 띠었다.
“구혼서를 보내면 기가 막혀서라도 날 만나러 올 테지.”
이 결혼이 계약이라는 사실이 남들에게 알려져선 안 된다. 조금이라도 증거를 남길 수 없으니, 어떻게든 직접 만나서 얘기해야 했다.
“너무 기가 막혀서, 만나자 마자 죽이지 않을까요?”
“에이, 설마. 그래도 대공 전하신데.”
마미의 농담 아닌 농담을 뒤로 한 채, 아멜리아는 간단하게 쓴 구혼서를 꼭 쥐고서 불안한 마음을 다 잡았다.
‘잘될 거야. 할 수 있어. 어떻게든 그 괴물 대공과 결혼하고 만다고!’
*** 북적이는 여관 안에서 검은 로브를 입은 이가 초조하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록 로브 때문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진 않았으나, 이국적인 구릿빛 피부에 얼핏 검붉은빛 머리카락이 보였고, 사납게 치켜뜬 까만 눈동자 아래 깊게 새겨진 흉터가 무시무시했다. 그는 몇 번이고 여관 문 쪽을 힐끔 거렸다.
“대체 어딜 가셔서는 외박이신 거야. 연락도 없으시고!”
그의 목소리에 짜증과 불안이 함께 뒤섞여 있었다.
‘설마 어제 구해준 그 여인과 관련 있는 건가? 아니 대체 그 여인이 누군데 이래?’
그때, 여관 문이 달칵 열리면서 누군가가 들어왔다. 시끌시끌하던 여관이 순식간에 조용해지면서, 들어선 이를 두려움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시커먼 짐승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얼굴을 반쯤 가리는 두건을 쓴 채 태연하게 걸어가는 남자. 누가 봐도 야만적이라 소문난 북부쪽 사람이었다. 남자의 등장에 로브를 쓴 이가 곧장 칼 같은 자세로 경례했다. 그는 말없이 의자에 앉았고, 그제야 사람들도 슬그머니 시선을 거뒀다.
“어제는 대체 어디 계셨던 겁니까!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대공 전하!”
“시끄럽다.”
한 제국의 대공이자, 황자라고는 믿어지지가 않는 야만적인 모습. 그가 바로 북부를 다스리는 흑사자, 이클리트 라이엇 클리오 대공이었다. 북부령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는다는 그가, 잠시 일이 생겨 비밀리에 남부령에 왔던 것이다. 하지만 원래라면 어제 돌아갔어야 했는데, 외박에 이어 아직도 여기에 머물고 있었다. 그의 호위 기사인 카힐로는 도통 이클리트를 이해하지 못했다.
“설마 산에서 구해준 그 여인과 관련 있는 겁니까?”
“카힐로.”
이클리트가 힘주어 그의 이름을 부르자, 카힐로는 움찔하고는 말을 돌렸다.
“아, 아무튼 어서 북부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오늘은 가실 거죠?”
“글쎄.”
“네?”
“한번쯤은 보고 싶어서 봤는데, 있어 달라고 하니까 욕심이 생겨서.”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카힐로는 영문 모를 말을 도통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이클리트는 잠시 멍하니 자신의 손을 응시했다. 그러다 날선 시선으로 카힐로를 응시했다.
“그놈들은 잡았나?”
카힐로는 도적떼를 떠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요란하게 힘을 쓰셨으면서, 살아남았겠습니까? 전부 토사에 깔려서 즉사했습니다.”
“너무 쉽게 죽었군.”
이클리트는 맘에 안 든다는 듯 입술을 비틀었다.
“그런데 그 근방엔 도적들이 없다는데, 좀 이상하긴 하네요.”
“그 말을 들으니까 더 곁에 있어야 할 것 같고.”
“누구 곁에 있으신다는 겁니까? 설마!”
그때, 누군가 이클리트에게 다가와 수군거리며 뭔가를 주었다. 카힐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뭡니까?”
“편지.”
“대공 전하께서 여기 계시는 걸 어떻게 알고요?”
“북부로 오는 모든 편지를 이쪽으로 보내도록 했어.”
“기다리는 편지가 있으신 겁니까?”
편지를 살피는 이클리트의 손가락이 가볍게 떨리더니, 목소리가 잠깐이나마 상기되었다.
“기다렸지, 아주 많이.”
이클리트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카힐로도 곧장 따라 일어났다.
“이제 가시는 겁니까? 바로 말을 준비할까요?”
“그래, 그전에.”
이클리트는 제 차림새를 보고는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카힐로의 로브를 빼앗아 입었다.
“잠깐 빌리겠다.”
“아니, 어디 가세요! 북부령으로 돌아가시는 거 아니십니까!”
“대답하러.”
“예?”
그는 곧장 등을 돌렸다. 굳어 있던 그의 눈매와 입꼬리가 어쩐지 조금, 느슨하게 풀린 듯 보였다. 카힐로는 황당한 표정으로 순식간에 사라진 이클리트의 빈자리를 응시했다.
“대체 왜 이러시는 거야. 무슨 말이라도 시원하게 해주셔야지!”
그러다가 그가 남기고 간 편지를 들어올렸다.
“대체 무슨 편지기에. 뭐야, 그냥 구혼서네. 뭐? 구혼서?!”
편지를 읽은 카힐로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첫눈에 반했습니다. 저와 결혼해주세요, 이클리트 라이엇 클리오 대공 전하. 아멜리아 체자렛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