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이용하는 관계2021.01.15.
그녀는 한숨을 쉬며 어둠이 내린 바깥을 응시했다. 연회 시작 전, 어떻게든 외조부를 뵙고 부탁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결국 외조부께서 공작가에 돌아오지 못하셨다.
“폐하께서 많이 편찮으시다더니, 외조부께서 하실 일이 많으신가보구나.”
그렇다면 더더욱 시간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에드조프가 황위에 오르고 말 테니까. 가장 첫 단추는 그 괴물 대공을 만나야 한다. 일단 만나야 자신이 생각한 방법을 제안할 수 있으니까.
“구혼서를 무시하면 어쩌지? 일단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결혼해야······.”
그때, 등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멜리아는 움찔하며 숨을 삼켰다. 자신의 등 뒤는 창문이었다. 문 열고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창문으로 몰래 들어오는 거면.
‘그 도적들도 수상했는데. 역시 내 목숨을 노리는 건가.’
짐작 가는 구석은 있었다. 사실 목숨을 위협받은 적이 이번 한 번이 아니었다. 지금까진 자신만 참으면 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서 외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더는 안 참아.’
안 그래도 1년뿐인 목숨.
‘복수도 못 하고 죽을 순 없어.’
아멜리아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어머니의 은빛 소총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총구를 겨눈 순간, 그보다 더 빠르게 총구를 움켜쥔 손이 있었다. 아멜리아가 움찔하며 총을 빼앗으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을 만큼 강인한 힘이었다.
‘대체······.’
그녀는 총을 막아선 커다란 손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아멜리아는 떨리는 입술을 겨우 달싹였다.
“······누구?”
“첫눈에 반해 결혼하자면서, 남편이 될 사람 얼굴도 모르는 건가.”
“남편?”
“마음대로 날 남편으로 정했다던대.”
싸늘한 목소리에 아멜리아는 그제야 그가 누군지 깨달았다.
“클리오, 대공 전하?”
아멜리아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총을 내렸다.
“정말 클리오 대공 전하신가요? 하지만 어떻게 여길······.”
설마. 작전이 이렇게 먹힌 건가?
‘너무 기가 막혀서, 만나자 마자 죽이지 않을까요?’
순간, 마미의 목소리가 쓸데없이 기억났다. 그 먼 길을, 이 야밤에. 그것도 창문으로 몰래 찾아온 거라면!
‘정말 날 죽이려고?’
엄청난 긴장감이 피부로도 느껴지는 그때, 음영이 달빛에 사라지며 마주친 시선에 아멜리아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심연처럼 깊고 푸른 눈동자가 그녀에게 오롯이 박혀 있었다.
‘저 파란 눈동자. 너무 예쁘고 신비로웠던······.’
이클리트는 굳어져버린 아멜리아의 모습에 움찔했다.
‘역시, 너무 무섭나?’
북부에선 흔하지만, 남부에선 무서울 것 같은 복장이라 나름 로브로 감춘다고 감췄는데.
‘······로브 말고 다른 걸 입었어야······.’
“당신이죠? 맞죠? 맞는 거죠!”
겁먹기는커녕 아멜리아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이클리트에게 바짝 다가섰다. 그 모습에 오히려 이클리트가 놀라 움찔했다.
“자, 잠깐······.”
“맞죠? 맞죠! 그때 절 도와주셨던!”
이클리트는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당황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다가 일순, 침대에 발목이 걸려 균형을 잃고 말았다.
“어머!”
아멜리아가 곧장 그를 잡아주려고 했지만, 그대로 함께 침대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이클리트는 곧장 숨을 멈췄다. 그녀가 그를 덮친 듯한 모습으로 안겨 있었다.
“역시 맞았네! 그때 절 도와주셨던 그분! 눈동자가 너무 예뻐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으나, 이클리트에게 전혀 들리지 않았다.
몸에 닿은 그녀의 부드러운 몸. 어지럽게 파고드는 향기와 간지럽게 살랑거리는 그녀의 머리카락. 나직이 와 닿는 숨결까지. 온몸의 피가 단숨에 끓으면서, 정신이 아찔해졌다. 하지만 이 천진난만한 아가씨는 그날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다시 만난 그를 반가워하고 있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진 이클리트가 겨우 입술을 달싹였다. 이대로 있다간, 뭐라도 해버릴 것 같았다.
“저기, 영애. 잠깐만······.”
“네? 아!”
그제야 아멜리아는 자신이 그를 덮치고 있다는 걸 깨닫고서 짧게 비명을 질렀다.
“어머, 죄송해요! 나 정말 미쳤나 봐!”
얼굴 끝까지 빨개진 아멜리아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너무 당황한 나머지 순간 발을 헛딛었고, 이클리트가 재빨리 그녀의 허리를 잡아주었다. 일순, 서로의 시선이 그대로 얽혔다. 조금이라도 떨어지려고 했는데, 더 가까워지다니. 아까와 달리 그를 의식하고 있는 그녀를 느낀 순간, 허리에 닿아 있는 그의 손가락이 그대로 타들어가는 듯했다. 이클리트는 경직된 숨을 몇 번이고 삼키며, 겨우 평정심을 유지한 채 차갑게 입을 열었다.
“정말 눈을 뗄 수 없게 하시는군요. 원래 이런 성격인 겁니까?”
냉기가 뒤섞인 나직한 목소리에 아멜리아는 더운 열기를 식히며 재빨리 그에게서 떨어졌다.
“저, 정말 너무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너무 반가워서 이런 무례를······.”
“······반가운 겁니까?”
“당연하죠!”
“어째서?”
“꼭 다시 만났으면 했어요.”
“그렇군요.”
이클리트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자, 아멜리아는 그 미소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자꾸만 이 사람에게 시선을 빼앗긴다. 아멜리아는 애써 정신을 차리며 물었다.
“근데 정말로 클리오 대공 전하신가요?”
이클리트도 겨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렇습니다.”
믿을 수가 없다.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 클리오 대공이었다니. 굉장히 좋은 사람인데, 왜 그런 사악한 소문이 생긴 거지? 겉모습 때문인가?
‘하지만 눈은 너무 예쁜데. 피부도 참 하얗고. 저 덥수룩한 머리카락만 좀 어떻게 하면 제법 근사할 것 같은데.’
“영애는 얼굴도 전혀 모르는 사람한테 첫눈에 반하고, 결혼하자고 청혼하신 겁니까?”
“아! 구혼서를 벌써 받으셨나요?”
“그 비싼 통신구까지 사용했던데.”
“그건 그런데······ 남부령에 계셨던 것 같은데, 어떻게 벌써 받으셨죠? 전 분명 북부령으로 보냈는데?”
정곡을 찌르는 아멜리아의 말에 이클리트는 멈칫했지만, 태연하게 말을 돌렸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닌 듯한데요.”
“그렇죠. 그게 중요한 건 아니죠.”
마침내 이렇게 만나게 됐으니까. 아멜리아는 무척 긴장됐다. 이제 그를 잘 설득해야만 했다. 그래도 소문처럼 무시무시한 것 같지는 않으니까. 게다가 우연이긴 해도 인연도 있고 말이다.
‘아주 사소한 거라도 붙잡고 얽혀야 하니까.’
아멜리아는 긴장한 기색을 지운 채, 이클리트에게 정중하게 예를 다했다.
“그날 저를 도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클리오 대공 전하. 한 번의 우연이 이런 특별한 인연이 될 줄 몰랐네요.”
“인연?”
“갑자기 이런 구혼서를 받으셔서 놀라셨을 거예요. 하지만 이 구혼서가 평범한 구혼서가 아닌 목적이 있다는 거, 알아차리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이렇게 한밤중에 은밀히 제 방으로 오신 거겠죠.”
아멜리아의 말에 이클리트는 묘한 표정을 띠며 물었다.
“그래서 거짓으로 청혼까지 하면서 나와 결혼해야 할 목적이 대체 뭡니까?”
한껏 낮아진 그의 음성에 아멜리아도 머릿속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나는 바스티얀 대공에게 복수하고 싶어요.”
“······.”
“대공 전하도 바스티얀 대공을 싫어하잖아요. 같은 황자인데 당신만 그 얼어붙은 땅에 쫓겨나 있는 게 억울하지 않으세요?”
“그래서?”
“대공 전하의 자리를 찾을 수 있게 해줄게요.”
아멜리아가 그를 설득할 제안은 이거였다. 이 사람도 황자인데. 그런 질 나쁜 소문에 갇혀 그 땅에 버려져 있는 게 억울할 테니까. 에드조프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자신만큼이나 깊을 테니까. 분명 그도 황제가 되고 싶을 테니까!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결혼해요, 우리. 서로가 원하는 걸 위해, 이용하자고요. 제가 대공 전하가 황제가 될 수 있도록 도울게요. 누구도 대공 전하의 이름을 더는 우습게 여기지 않도록, 제 옆에서 가장 찬란한 태양이 되어주세요.”
꽤 충격적인 말을 던졌음에도 침묵만이 흘렀다. 어떻게든 속내를 파악하고 싶었지만, 그의 표정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적어도 어이없다던가, 기막히다는 반응이라도 나와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면 아예 무시하는 건가? 만약 여기서 설득하지 못하면······.’
“그러죠.”
이클리트의 너무나도 짧고 간단한 대답.
“네. 쉬운 결정은 아니시겠죠. 그러니까······ 네?”
순간, 아멜리아는 멍해졌다. 그런 그녀를 향해 이클리트는 역시나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영애와 결혼하겠습니다.”
오히려 아멜리아가 평정심을 잃었다.
“진짜요? 이렇게 쉽게?”
“서로 이용하자면서요. 목적이 있는 결혼 아닙니까? 버림받은 황자가 미워하는 형제에게 복수하고 살아남으려면 황제가 되어야죠. 게다가.”
일순, 차분한 어조가 사라지고 섬뜩하리만큼 차가운 목소리와 시선이 닿자, 그녀의 등줄기가 서늘하게 떨렸다.
“욕심이 하나 생겼습니다.”
“욕심?”
그가 그녀를 아주 빤히 바라보았다.
“황제가 되어야만 가질 수 있는 게 생겼거든요. 그러니 지금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죠. 오히려 내가 더 간절히 바랍니다, 당신의 손을.”
오롯이 박히는 그의 눈빛에서 황위를 향한 강렬한 욕망이 보였다. 이클리트가 그를 향해 내밀었던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나를 황제로 만든다는 건 그대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책임지고 나를 가르쳐야 하는 일이 될 겁니다.”
순간 그의 손에 힘이 가해지고, 아멜리아는 묘한 오싹함을 느꼈다.
“그게 무엇이든, 나는 한 번 시작하면 도중에 멈추지 않고 끝까지 하고 말 거고.”
“…….”
“그런 나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숨 막힐 만큼 강렬한 목소리와 짙푸른 눈동자가 오직 그녀를 담고서 휘몰아쳤다. 분명 그녀가 복수를 위해 그를 이용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역으로 그에게 삼켜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리는 것 같았지만.
‘그는 내가 왜 바스티얀 대공에게 복수하려고 하는지 묻지 않았어.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는 거겠지. 지금 필요한 건 서로가 가진 욕망. 오직 황제.’
이 사람은 나를 이용하고, 나도 이 사람을 이용하고. 아멜리아는 떨리는 숨을 삼키며 그와 맞닿은 손에 힘을 주었다.
“당연하죠. 나도 바라는 바예요. 대공 전하를 반드시 황제로 만들겠어요.”
그래. 그런 계약 관계면 충분해. 아멜리아의 대답에 이클리트는 묘하게 벅차 오른 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부터 뭘 해야 하는 겁니까?”
“내일 밤, 피오레에서 연회가 열리는 건 아시죠?”
“피오레 공작가의 새 가주 후보를 소개하는 자리 아닙니까.”
“네. 그래서 대부분의 귀족들이 모일 거예요. 거기서 결혼 발표를 하죠.”
“그리고 당신도 새 가주 후보로 소개되겠군요.”
거기까지 말하지 않아도, 이클리트는 상황을 빠르게 파악했다.
“그렇게 되도록 해야죠.”
“다행입니다.”
“네?”
“그 무서운 자리에 당신 혼자 있지 않아도 되니까.”
생각지도 못한 말에 아멜리아는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마미의 목소리가 적막감을 깨뜨렸다.
“아가씨, 저예요. 들어가도 될까요?”
“그래, 들어와.”
아멜리아는 그에게서 겨우 시선을 뗄 수 있었다.
“아가씨, 내일 아침에······ 어머! 당신 누구야!”
마미는 아멜리아와 함께 있는 이클리트를 보고 흠칫 놀랐다.
“마미, 무례함을 사과하고 예를 갖춰. 클리오 대공 전하시니까.”
“예? 크, 클리오 대공 전하요? 아니 어떻게. 아니지. 클리오 대공 전하.”
마미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대공 전하를 정중하게 모셔. 이분도 내일 연회에 참석할 손님이시다.”
“물론입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이클리트가 마미를 따라나서며 짧게 말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네. 내일 봬요.”
이클리트가 사라지고, 아멜리아는 침대 위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하아······ 잘된 거지, 이거?”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벌어졌다.
“하나는 넘겼고, 이제 가장 중요한 하나가 남았나.”
가주 후보로 인정받고, 시험을 통과해서 피오레 공작가의 가주가 되어야 한다.
“무서운 자리······.”
문득 그가 한 말이 떠올랐다. 맞는 말이었다. 총을 다루지 못하는 이가 가주가 되겠다며 나선 자리에 얼마나 날카로운 시선과 모진 말이 그녀를 뒤흔들지 뻔 하니까.
‘당신 혼자 있지 않아도 되니까.’
“그렇지만 정말, 혼자가 아니네.”
그저 목적에 의한 계약 관계일 뿐인데. 정말로 오롯이 제 편이 생긴 것 같아서, 묘하게 위안이 되었다. *** 방을 빠져 나온 이클리트는 온몸으로 뻣뻣하게 내려앉았던 긴장을 그제야 풀어냈다.
“하아······.”
카힐로가 봤다면 믿지 못했을 만큼, 그답지 않게 나약한 한숨이었다.
“대, 대공 전하?”
마미가 걸음을 멈춘 그를 겁먹은 눈빛으로 살폈고, 이클리트는 그 시선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며 잊고 있었던 로브로 다시 모습을 꼼꼼하게 감췄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날 무서워하지 않았지.’
그저, 반갑다고 했다. 그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어. 걸음을 옮기려던 그가 반쯤 열린 창문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에 다시 멈췄다. 그는 창틀에 시든 꽃을 발견했다. 바람을 타고 와, 뿌리를 내렸다가 시든 모양이었다. 이런 들꽃이 쉽게 피어나는 따뜻한 남쪽령. 얼어붙은 그 땅에 버려지듯 쫓겨난 이후, 두 번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죽을 때까지 그곳에 스스로를 내버려둘 생각이었다. 자신이 세상에 나타나면, 너무 시끄러운 일 투성이었으니까.
“결국 당신이 날 움직이게 하는 군요, 레이디 아멜리아.”
하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를 보고, 목소리를 들은 그 순간 이미.
‘거부 따윈, 불가능해.’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겨 자리를 떠났다. 그런데 그가 보고 있었던 시들었던 꽃이 다시 생생히 피어 있었다. *** 아멜리아는 마미를 기다렸다. 분명 경악스러운 호기심을 품고서 쫓아올 테니까. 하지만 아멜리아를 찾아온 사람은 마미가 아니었다.
“아가씨, 계신가요?”
공작가의 하녀가 고개를 숙이며 그녀에게 예를 갖췄다.
“아멜리아 체자렛 아가씨를 뵙습니다.”
“누구지?”
“저는 공작 각하께서 보내셨습니다.”
아멜리아는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외조부, 아니 공작 각하께서 돌아오셨니?”
“네. 아가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 잘됐네. 나도 공작 각하를 뵙고······.”
“언니.”
그때, 낯익은 목소리가 아멜리아를 꿰뚫었다. 그녀는 떨리는 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메사리나, 그녀였다.
“······미안한데 잠시 자리를 비켜다오.”
갑자기 한층 차가워진 아멜리아의 목소리에 하녀는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사라졌다. 아멜리아는 먼저 등을 보이며 메사리나에게 말했다.
“들어와. 들어와서 얘기해.”
“행복하길 바란다면서!”
아멜리아가 곧장 걸음을 멈추었다. 메사리나는 그런 아멜리아에게 서서히 다가오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 그 어디에도 미안한 감정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아멜리아를 원망하는 듯 했다.
“언니가 항상 나한테 말했잖아요. 내가 행복해지길 바란다고!”
아멜리아는 겨우 남아 있는 감정을 끌어 모으며 말했다.
“너는 내게 단 한순간도 미안하지 않는 거니?”
제발 한 번이라도 용서를 빌어주길 바라면서! 하지만.
“언니를 속인 건 미안해요. 하지만 내가 대공 전하를 빼앗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애초에 내가 먼저였으니까. 대공 전하는 오직 날 사랑하셨으니까! 우리가 사랑한 게 언니한테 사과할 일은 아니잖아요!”
“······.”
악을 쓰던 메사리나는 어느새 이해해달라는 듯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대공 전하를 행복하게 해주면 되잖아요. 언니도 대공 전하의 행복을 바라지 않아요? 언니의 빈자리를 내가 채우면 되는 거잖아요!”
아멜리아는 메사리나의 말에 냉소가 스쳤다.
“메사리나, 네 잘못을 날 위해서라고 포장하지 마. 역겨우니까.”
“어, 언니?”
메사리나는 난생 처음 보는 아멜리아의 냉랭한 모습에 움찔하고 말았다.
“그렇게도 부르지 말고. 우리가 단 한순간도 가족이 아니었다는 거, 이젠 나도 아니까.”
상처 받지 않았다. 실망감도 없었다. 오히려 스스로에게 질렸다. 그걸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뭘 기대한 걸까. 이 아이도 그 남자랑 똑같은데. 아주 끼리끼리 만난 건데.
“우리가 정말 가족이었다면, 내가 죽고 난 뒤에 행복을 비는 게 아니라 내가 죽지 않고 살길 빌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런데 넌 너무 당연하게 내가 죽기를 기다리고 있잖아. 내가 사라져야, 그 남자와의 사랑이 구역질나는 추문이 아니게 될 테니까.”
추문이라는 말에 메사리나는 이를 악물었다.
“추문, 아니에요.”
“내일 열릴 연회에서 네가 그 남자 옆에 설 수 있어? 그 남자가 바라지 않잖아. 그게 추문이야.”
아멜리아는 분노로 경련하는 메사리나 앞에 예전처럼 숨기고 참는 거 없이 똑바로 말했다.
“한때 네가 행복해지길 바란다는 건 진심이었어. 그래서 충고 하나 해줄게. 그 남자, 너무 믿지 마. 너조차 이용하는 거니까.”
“······아니야. 그분은 날 사랑해요.”
“너도 어느 정도 느꼈잖아. 그래서 그 자리에서 도망친 거 아니야? 내가 이용이었다면, 넌 그저 장난감이었어.”
“그분이 사랑하는 건 나야!”
아멜리아의 말에 메사리나의 눈가에 참을 수 없는 광기가 서렸다.
“널 사랑한 적, 한 순간도 없었다고! 사랑할 수가 없지. 어차피 곧 죽을 년 주제에!”
이성을 잃은 메사리나의 입술이 추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저게 그녀가 꾹꾹 숨겨두었던 본심인 것이다.
‘아무도 내가 살길 바라지 않지.’
그렇다면 자신도 더 이상은 이들의 행복을 바라지 않는다.
“메사리나, 내일 연회에 너무 꾸미고 오지 마. 아주 추해질 거니까.”
두 번 다시, 웃지 못하게 만들 거다.
“내가 널 울릴 거야. 아주 비참하게, 울릴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