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방아쇠를 걸다.2021.01.18.
“내가 널 울릴 거야. 아주 비참하게 울릴 거라고.”
메사리나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싸늘한 미소를 입가에 드리우며 말을 이었다.
“너한테 주려고 한 걸, 내가 가질 거거든.”
“지금, 무슨······.”
“내일 연회가 몹시, 기대가 된다는 소리야. 그럼 내일 보자.”
아멜리아는 메사리나를 차갑게 지나쳤고, 메사리나는 그런 그녀를 노려보았다.
“설마 바스티얀 대공 전하와 결혼 발표 때문에 저러는 거야? 내게서 빼앗았다고? 아직도 모르는 거야? 이용당한다는 걸? 멍청한 년.”
지금껏 꾹꾹 삼켰던 말이 메사리나의 입술에 잔인하게 눌렸다. 애초에 배신도 미안할 것도 없었다. 에드조프를 사랑한 건 자신이 먼저였다. 그 역시 아멜리아는 그저 이용하는 것뿐이다. 우리의 사랑에 멍청한 저 계집이 걸려든 거다. 가족이 아니라는 말. 당연하다. 처음부터 메사리나는 가증스러운 아멜리아가 싫었으니까.
“추문? 웃기지 마. 내가 진짜 그의 연인이야! 그분이 원하는 걸 내가 주면 돼. 그럼 너 따위 필요 없다고!”
어차피 곧 죽을 목숨이다. 아멜리아가 사라지면, 그 빈자리는 자신의 것이 될 거다. 반드시 체자렛 백작의 완벽한 딸이 되겠다. 피오레 공작가의 가주까지도.
‘네 건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 돌아선 아멜리아의 표정이 얼음보다 차가웠다.
‘더는 약해보이지 마, 절대.’
그들이 자신을 짓밟고 가지려고 했던 모든 것을 이젠 자신이 가질 것이다. 아멜리아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하녀에게 말했다.
“공작 각하를 뵐 것이다.”
아멜리아는 마침내 피오레 공작가의 현가주인 벨반 공작을 만났다. 그녀의 외조부인 벨반 피오레 공작은 제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머스켓티어로 솔라 제국을 지켜낸 장군이었다. 지금은 건강상의 이유로 군부에선 뒤로 물러난 상황이었지만.
“아멜리아.”
벨반의 목소리에 환희가 서렸다.
“이렇게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라도 네 얼굴을 볼 수 있어서 좋구나. 언제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데.”
“그런 말씀 마세요.”
“볼수록 네게서 아일리가 보여.”
벨반은 아멜리아의 모습에서 자신의 사랑스러운 딸, 아일리를 떠올리며 눈가가 붉어졌다. 아마도 그가 그녀를 만나겠다고 한 것은 자신의 딸을 보고 싶었기 때문인 듯했다.
“아일리가 항상 네 걱정을 했을 거다. 내가 널 지켜줬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저는 제가 지켜야죠. 제가 지킬 거예요.”
벨반은 전과 달리 강인해 보이는 아멜리아의 눈빛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 그래서 서둘러 공작가의 후계자를 찾아야하고. 내일 연회가 그래서 중요하지.”
“연회 때문에 말씀드리는데, 지금 공작가에 클리오 대공 전하께서 와 계십니다.”
벨반은 아멜리아의 말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 어떻게 그분이…….”
“제 손님이세요. 내일 연회에서 그분과 제가 중요한 발표를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조금만 시간을 빌려주세요.”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 네가 그분과 대체 무슨…….”
“그건 내일 알게 되실 겁니다. 대공 전하를 정식으로 성 안에 머물게 허락해주세요.”
“만약 머물고 계신다면 그야 당연히 허락해야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아멜리아는 몹시 긴장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도 피오레 공작가의 가주 시험에 참여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혼란스러웠던 벨반 공작의 표정이 완전히 굳어졌다.
“뭐?”
“피오레 공작가를 제가 이어받고 싶어요.”
“무슨 소리냐. 너도 알다시피 피오레 가주는 총을 쓸 줄 알아야 해.”
피오레 공작가는 철저히 실력만으로 가문의 사람을 판단했다. 총을 다루는 것도 그냥 다루는 게 아니라, 가문의 머스켓티어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 만큼 완벽해야 하는 것. 그렇기에 벨반도 아멜리아를 공작가로 데려오고 싶었으나 데려오지 못했던 것이다. 가문의 사람들이 총을 다루기는커녕 약해빠진 아멜리아를 인정할 리 없었으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냥 달라는 게 아닙니다. 남들과 똑같이 시험을 치를 겁니다. 그저 기회를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아멜리아는 벨반에게 간곡히 요청하고서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겨진 벨반은 한숨을 삼켰다.
‘가주 시험을 치르겠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총은 배운다고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타고난 마법이 바탕이 되어야 했다. 마나로 총탄을 만들어 총을 쓰는 이가 머스켓티어였으니까. 그리고 그 마나를 만드는 곳이 바로 심장이었다.
‘심장이 약한 그 아이가 총을 쓸 수 있을 리가 없을 텐데. 게다가 클리오 대공 전하와는 무슨 관계란 말인가.’
정녕 내일 연회에 클리오 대공이 나타난단 말인가. 바스티얀 대공도 참석하는 그 자리에? 벨반은 여러 가지로 엄청난 파란이 불 것을 예감했다. *** 이른 아침, 아멜리아는 몹시 분주하게 몸치장을 하고 있었다. 마미도 그런 그녀의 뒤에서 코르셋을 잡아주었다.
“아가씨,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제가 어제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묻질 못했는데!”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해줄게. 중요한 건, 대공 전하께서 오늘밤 연회에서 날 에스코트해주실 거야.”
“세상에! 진짜요? 그럼 청혼을 받아들이신 거예요?”
“그래, 받아들이셨어.”
마치 다른 사람의 결혼을 얘기하듯, 아멜리아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담담했다. 마미도 그걸 느꼈지만, 애써 티내지 않으며 혼자라도 몸을 들썩였다.
“이번 연회가 어떤 의미로는 사교계를 휩쓸겠네요.”
“그 정도야?”
“당연하죠! 대공 전하께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교계에 얼굴을 보이신 적 없으시니까요.”
“에드조프도 경악하겠네. 내 폭탄 발언에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 돼. 그리고 메사리나도.”
아멜리아는 벌써부터 기분이 짜릿해졌다. 치장을 마친 아멜리아는 이클리트가 머무는 방으로 갈 생각이었다. 마미는 이 점이 살짝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대공 전하라고 하시지만, 아직 결혼도 하지 않으셨는데 아가씨가 직접 챙기시는 건가요? 공작 각하께서 보내신 하녀들도 있잖아요.”
“내 손님이잖아.”
“그렇긴 하지만······.”
그런 저런 말을 하는 사이, 아멜리아는 그가 머무는 방 앞에 당도했다. 그녀는 살짝 잠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어쩐지 조금 긴장되는 듯 싶었다.
‘어차피 진짜 부부가 될 사이도 아닌데.’
아멜리아는 태연하게 문을 두드렸다.
“대공 전하, 아멜리아예요.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오십시오.”
“좋은 아침이에요, 대공······ 악!!”
“어머, 어머!”
문을 연 아멜리아는 경악했고, 마미는 감탄했다. 그가 상의를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서 있었던 것! 막 목욕을 마쳐 젖은 그의 몸은 빛나고 있었다. 비록 상처로 엉망이었지만, 검술과 실전으로 철저히 단련된 매끄럽고 다부진 근육이 움직일 때마다 관능적으로 시선을 홀렸다. 굳어진 아멜리아를 향해 이클리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의아하게 그녀를 불렀다.
“레이디 아멜리아?”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아멜리아는 기겁하며 문을 쾅 닫았다.
“미, 미, 미안해요! 보려고 계속 본 게 아니라······ 아니 들어오라고 하셨잖아요!”
그래, 자신의 잘못이 아니다. 자신이 음란해서 그런 게 아니라 들어오라고 했잖아, 분명! 그제야 이클리트의 목소리가 한껏 난처해졌다.
“아. 미안합니다. 습관이라.”
그는 한숨을 삼켰다. 북부에선 거추장스러운 게 싫어서 자택에 있을 땐 대부분 윗옷을 벗고 생활하는데.
‘남부엔 지킬 예법이 너무 많군.’
마미는 살짝 흥분한 눈빛으로 아멜리아에게 속삭였다.
“와! 보셨어요? 역시 북부령 사내들은 육체가 예술이라고 듣기는 했었는데······.”
“마미, 조용!”
아멜리아는 더 이상 낯부끄러워 여기 있을 수 없었다.
“대공 전하, 정원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녀는 마미를 질질 끌고 갔다. 남자의 벗은 몸을 본 건 처음이라 시야에 자꾸 열기가 몰렸다. 마미의 말처럼 예술품 같은 근육질에······.
‘아니야. 상상하지 마. 음미하지 마!’
벗고 있는 게 습관이라니! 앞으로 하게 될 결혼 아닌 결혼 생활이 살짝 걱정되기 시작했다.
‘나를 황제로 만든다는 건, 그대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책임지고 나를 가르쳐야 하는 일이 될 겁니다.’
‘설마 그게 이런 의미인가? 대체 어디서부터 뭘 가르쳐야 하는 거야!’
아니야. 어차피 이름뿐인 부부잖아.
‘같은 공간에서 생활 할 일은 없을 거야. 그래!’
정원에 당도한 아멜리아는 겨우 그의 모습을 떨쳤다. 마미는 이클리트를 떠올리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몸은 너무 좋은데.”
“마미, 제발 그만해.”
“그렇다고 연회에 벗고 갈 수는 없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순간, 마미의 표정이 비장해졌다.
“이건 중요해요, 아가씨. 대공 전하께선 이제 사교계에 얼굴을 보이셔야 하는데, 솔직히 외모가. 너무 흉악스럽잖아요! 연회에서 안 그래도 시선 집중일 텐데!”
“그런가?”
“여유로울 때가 아니에요. 메사리나 고년한테 밀리지 않게! 바스티얀 대공 전하에게 외모적으로도 완전 꿀릴 수는 없잖아요!”
“클리오 대공 전하께서도 뭐, 나름 괜찮으셔. 야, 야성미가 있으시잖아.”
“아가씨! 이건 덮어놓고 편들 일이 아니에요!”
사실, 아멜리아도 사교계는 잘 몰랐다. 체자렛 백작이 그녀의 외출을 허락하지 않았기에. 마미는 현실을 직시하며 냉정하게 말했다.
“사교계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 줄 아세요? 연회는 단순히 웃고 즐기는 곳이 아니에요. 귀족들의 칼 없는 전쟁터라고요! 특히 조금만 빈틈이 보여도 부인들의 살롱에서 온갖 말로 물어 뜯긴다고요!”
아멜리아는 당황했다. 마미의 입에서 불이라도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
“대공 전하를 황위에 올리시려면 사교계의 권력도 중요해요! 대공 전하께서 그 모습 그대로 연회에 참석하시면, 아가씨의 평판과 명예에도 흠집이 될 거라고요! 찬양은 안 되더라도 비웃음은 막으셔야죠!”
“대공 전하도 그 머리만 좀 어떻게 하시면 괜찮을 거야. 눈은 참 예쁘셔. 그 눈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싶기는 하네.”
“걱정 마세요, 아가씨. 이래봬도 저, 피오레 공작가에서 수년 동안 메이드로 일하면서 나름의 긍지와 실력이 있어요. 제 혼신을 다할게요!”
“그, 그래. 고마워.”
아멜리아는 더는 마미를 건드리면 안 될 것 같다는 기합을 느끼고 말았다. 그때, 때마침 이클리트가 다가왔다. 여전히 머리카락은 지저분하게 내려와 있었지만, 하녀가 준비한 옷을 깔끔하게 차려 입고 있으니 훨씬 근사해 보였다. 물론 스스로는 무척 어색해하고 있었지만. 마미가 눈치 빠르게 자리를 피하자, 아멜리아는 그를 향해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근사하시네요.”
이클리트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옷이 좋으십니까?”
“북부는 그런 옷을 입지 않나요?”
“거긴 척박하고 추운 곳이라 생존이 더 중요합니다. 이런 옷을 입고 있다간 얼어 죽겠죠.”
“아. 그러네요. 하지만 아까는 버, 벗는 게 습관이시라고······.”
“보통 혼자 있을 때는 거추장스러운 게 싫어서. 아까는 미안했습니다. 예법과 매너를 지켰어야 했는데. 연회에선, 노력해보겠습니다.”
순간, 이클리트의 눈꼬리가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딱 봐도 티가 났다. 연회가 끔찍하게 싫다는 게. 숨기지 못한 채 훤히 드러나는 그의 표정이 썩, 귀여워 보였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결혼 발표만 하면 되니까.”
“영애의 명예에 흠집을 내고 싶지 않습니다.”
아멜리아는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마미가 한 말을 들은 거야?’
그녀는 뭔가 미안해져서는 재빨리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무리 하실 필요 없으세요.”
“무리가 아닙니다. 제가 그러고 싶은 겁니다.”
이클리트는 잠시 머뭇거리다 아주 조그맣게 읊조렸다.
“조금은, 근사해 보였으면 좋겠으니까.”
“네? 뭐라고 하셨어요?”
이클리트는 대답 대신 갑자기 아멜리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멜리아는 그 뜨거운 시선에 갑자기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하지만 이클리트는 그럼에도 아멜리아의 눈동자와 자신의 눈동자를 맞추고서 가만히 바라보았다. 결국, 참지 못한 아멜리아가 입을 열었다.
“제,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보고 싶다길래.”
“네?”
“······아닙니다.”
이클리트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휙 돌렸다. 어쩐지 그의 낯빛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 마침내 피오레 공작가의 특별한 연회가 열렸다. 그저 웃고 즐기는 연회가 아닌 만큼, 제국의 권력을 손에 쥔 귀족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연회장 한 가운데엔 황금 테이블이 있었는데, 그 위에 세 개의 총이 놓여 있었다. 바로 가주 후보자로 선택된 이들의 총이었다. 이 성스러운 총으로 가주 시험을 정정당당하게 치르겠다는 의미였다. 연회의 주인공은 단연코 가주 후보자들이었다. 특히나 총술이 뛰어난 체자렛 백작가의 영애, 메사리나가 가장 눈에 띄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 몸선이 아찔하게 드러나는 드레스에 시원스럽게 웃고 있는 그녀는 무척이나 매혹적이었다. 메사리나는 멀리 서 있는 에드조프와 은밀하게 눈빛을 교환하고 있었다. 솔라 제국의 유력한 황위 계승자이자, 은빛 사자로 불리는 에드조프는 사교계에서 항상 시선과 화제를 몰고 다녔다. 귀족들은 어떻게든 에드조프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입안에 꿀처럼 속삭였다.
“이렇게 좋은 날에 대공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공 전하께서도 좋은 소식, 들려주셔야죠.”
에드조프는 그들의 말에 가볍게 웃었다.
“안 그래도 오늘 좋은 소식을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귀족들은 그 말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오! 무엇일지 아주 기대가 됩니다.”
에드조프는 살며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에도 아멜리아가 보이지 않았다.
‘왜 이렇게 늦는 거야. 에스코트도 거절하더니, 설마하니 오지 않는 건······.’
그때, 그의 시선에 만족감이 깃들었다. 드디어 아멜리아가 모습을 보였다. 그것도 몹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보랏빛 머리카락을 우아하게 올려 새하얀 목선이 곱게 드러났고, 싱그러운 녹안에 어울리는 초록색 실크 드레스가 보빈 레이스를 따라 물결치듯 쏟아져 우아했다. 창백하리만큼 하얀 얼굴과 짙고 단정한 눈썹 아래 살짝 휘늘어진 눈매와 복숭아 빛의 입술이 사랑스러웠다. 이런 자리에 잘 나오지 않았으나 제대로 꾸미니.
‘아파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군. 저 정도는 돼야 곁에 둘만 하지.’
에드조프는 곧장 그녀에게 다가갔다. 메사리나는 그 모습에 눈빛이 일그러졌고, 아멜리아는 그저 싸늘하게 입술 끝을 올렸다.
“아멜리아.”
그는 다정하게 그녀를 부르며 당연하다는 듯 그녀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지금부터 모두에게······.”
탁-! 하지만 그의 손이 닿기도 전에, 아멜리아가 그를 쳐냈다.
“허락도 없이 내 몸에 손대지 말아주세요, 대공 전하.”
에드조프는 순간 화가 치밀었지만, 꾹 참고서 나직이 경고했다.
“어리광부리지 마.”
“어리광?”
“아직 화가 덜 풀렸다는 거, 그래. 이해해. 하지만 그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 오늘 연회는 우리에게 중요해.”
그의 사나운 시선 앞에 아멜리아는 태연하게 웃었다.
“중요하죠. 결혼 발표를 해야 하니까.”
“그래, 그러니까······.”
에드조프는 그제야 말을 듣는구나, 싶어 다시 손을 내밀려는 순간. 갑자기 주변이 웅성거렸다.
“어머, 누구지?”
“본 적 없는 분인데. 하지만 너무 잘생겼어!”
아멜리아 역시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리려는데, 에드조프의 표정이 그녀의 시선을 붙잡았다. 그가 핏기 없이 얼어붙어 있었다. 이토록 표정 관리가 안 되는 건 처음이었다.
‘뭐지?’
그때, 누군가 아멜리아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가 움찔 놀라 고개를 든 순간, 시선이 멎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파란색 눈동자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쪽 말고, 이쪽을 봐요.”
“클리오, 대공 전하······.”
분명 그였으나, 그가 아니었다.
선명한 윤곽의 얼굴. 하얗고 투명한 피부. 윤기 있는 까만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위로 올렸고, 날카로운 눈썹 아래 눈시울이 긴 서늘한 눈동자는 고귀하리만큼 짙푸르며 섹시했다. 지금 이 자리에 그는, 위험하리만큼 아름다웠다. 잠시 넋을 놓았던 아멜리아는 애써 정신을 차리며 그를 부르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에드조프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베였다.
“······이클리트······.”
“오랜만에 뵙습니다, 형님.”
지켜보던 이들 모두가 경악했다.
“서, 설마 그 괴물 대공?”
“아니 어떻게 여길!”
에드조프는 턱이 부서져라 힘을 줬다.
“네가 여긴 왜······.”
위태로운 그의 앞에 이클리트는 의연하게 웃었다.
“제 약혼녀를 만나러 왔습니다.”
“뭐?”
“레이디 아멜리아.”
이클리트가 그녀의 이름을 부드럽게 담았다. 아멜리아는 분노하는 에드조프를 바라보며 모두가 들리도록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여러분께 알려드리고 싶은 게 있어, 피오레 공작 각하께 양해를 구하고 잠시 이 시간을 빌렸습니다.”
에드조프는 잔뜩 뒤틀린 시선으로 아멜리아를 보았고, 아멜리아는 그런 에드조프에게 냉소를 그리며 말했다.
“저는 이클리트 라이엇 클리오 대공 전하와 결혼하고자 합니다.”
지켜보던 이들 모두가 숨을 죽였다. 그만큼 아멜리아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크, 클리오 대공이 결혼이라고?”
“잠깐 저 레이디, 체자렛 백작가의 영애잖아.”
“이게 대체 무슨!”
에드조프는 벌겋게 타오른 눈빛으로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를 노려보았고, 메사리나 역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괴물 대공과 결혼? 저게 드디어 미친 거야? 하지만 나로서는 전혀 나쁘지 않은······.’
“그리고.”
아멜리아는 황금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드레스 춤에 숨겨 두었던 은빛 소총을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외쳤다.
“피오레 공작가의 작위를 이어 받고자 합니다.”
“너!!!!”
메사리나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아멜리아는 그런 그녀를 향해 태연하게 웃었다.
“아직은 울지 마. 아직은, 아니야.”
아직 방아쇠는 당기지도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