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완벽한 선전포고2021.01.22.
황금 테이블에 그녀가 내려놓은 은빛 소총이 그녀만큼이나 이질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멜리아의 파격 발언에 메사리나뿐 아니라 다른 두 명의 가주 후보도 어안이 벙벙한 상황이었다. 메사리나는 겨우 분노를 눌렀다.
‘날 울릴 거라더니. 미친 거 아니야? 가주가 되겠다고? 총도 못 쓰는 주제에. 저 약해빠진 심장으로 무슨! 하긴, 괴물 대공이랑 결혼할 생각이면 단단히 미치긴 한 거네.’
생각해보니, 자신이 전혀 흥분할 일이 아니었다. 피오레 가주의 자리가 어디 핏줄로 이어받을 수 있던가.
‘오히려 저렇게 멋모르고 설치는 게 나한테 더 유리해. 아멜리아, 네가 얼마나 멍청한 짓을 했는지. 오히려 누가 울게 될지 보자고.’
아멜리아를 지켜보는 이클리트를 에드조프가 뒤틀린 시선으로 노려보며 일부러 그의 시야를 가린 채, 아멜리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총을 든 그녀의 손목을 강제로 잡아당겼다.
“따라 와.”
사람들의 시선이 곧장 그들에게 꽂혔다. 아멜리아는 그의 행동이 의아했다.
‘끝까지 명령이군. 그나저나 보는 눈이 이렇게 많은데, 대놓고 움직이는 건가? 누구보다 평판을 중시하면서?’
에드조프가 아멜리아와 함께 연회장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그 앞을 이클리트가 막아섰다. 에드조프는 그 모습에 참고 있던 분노가 설핏 새어 나왔다.
“감히 누구 앞을 막아.”
하지만 이클리트는 오히려 에드조프가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형님이야말로 제 약혼녀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겁니까? 이렇게 무례하게.”
“네놈이 지금 날 가르치려 들어?”
이클리트의 시건방진 모습에 에드조프는 도저히 이성을 붙잡고 있기가 버거웠다. 에드조프에게 이클리트의 존재는 상상 그 이상으로 피를 식게 했다. 아멜리아는 점점 격해지는 에드조프의 모습에 이클리트를 먼저 말렸다.
“대공 전하, 전 괜찮아요. 잠시 얘기만 할게요.”
“하지만…….”
“내가 혼자 할 일이에요. 대공 전하까지 굳이 나설 필요 없으세요.”
아멜리아의 말에 이클리트는 어쩐지 축 가라앉은 시선으로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놓지 못했다.
“‘굳이’가, 아닌데.”
단지, 보내고 싶지 않은 건데……. 아멜리아가 에드조프와 사라지자, 귀족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수군거렸다.
“뭐지? 바스티얀 대공 전하와도 아는 사인가?”
“알 수도 있겠지. 첫째 영애는 피오레 공작 각하의 외손녀라고.”
“세상에. 배경이 그렇게 든든했다고? 그런데 왜 사교계에선 잘 보이지 않았지?”
“이번 가주 시험, 둘째 영애가 유력하다고 하지 않았나? 이렇게 되면 바뀌게 되는 거 아니야?”
원치 않아도 들리는 말에 메사리나의 속이 뒤틀렸다.
‘어차피 곧 죽을 계집인데 무슨!’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아멜리아는 사교계에 얼굴도 내밀 수 없을 테지만.
‘죽기 전에 여기가 어떤 곳인지 경험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
뭔가를 떠올린 그녀가 싸한 미소를 지었다.
“날 울린다고 했으니까, 울어 줘야지. 사랑하는 언니를 여전히 난 걱정하니까.”
*** 연회장 밖, 발코니로 자리를 옮긴 아멜리아는 자신의 손을 붙잡은 채, 제 앞에 있는 에드조프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이래도 되는 건가요? 나야 대공 전하의 추악한 민낯을 봤다고 해도, 아직 남들에겐 시선 관리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순간, 에드조프가 손에 힘을 가하며 아멜리아를 벽 쪽으로 밀쳤다. 쿵-! 엄청난 충격과 함께 아멜리아가 신음을 내뱉으며 외쳤다.
“지금 뭐 하는!”
하지만 그녀가 빠져나갈 새도 없이, 에드조프가 양손으로 그녀를 가둔 채,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아멜리아는 격하게 날뛰는 그의 시선 앞에 등줄기가 살짝 떨렸다. 이렇게 분노하는 그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를 이렇게 만드는 존재가 이클리트인가. 보는 눈을 의식하지 못할 만큼, 그를 이만큼 자극하고 움직이게 만든다는 건가? 그렇다면.
‘내가 아주 잘 고른 셈이네.’
“보는 눈이 많아도 바로 잡을 건 바로 잡아야지. 내 여자가 어리광도 정도껏 부려야 하는데, 완전히 미쳐 날뛰고 있잖아!”
“누가 내 여자라는 거죠? 청혼은 이미 거절한 거로 아는데. 대공 전하야말로 현실 파악 못 하고 어리광부리고 계시는 거 아닌가요?”
“그래서 그대가 택한 남자가 그 새끼라고? 그 미천한 괴물 새끼?”
“제 남편이 될 사람을 모욕하지 말아 주세요.”
아멜리아의 입에서 나온 남편이라는 말에 에드조프의 시선이 더욱 차갑게 얼어붙었다.
“대체 그 괴물 새끼랑 하려는 게 뭐지? 갑자기 피오레 공작가 작위를 이어받아? 그대가?”
“하려는 거라니요. 그냥 서로 사랑해서 결혼하는 것뿐인데. 작위도 남을 돕지 않고 내가 가져서, 내가 선택할 거예요.”
아멜리아는 싸늘한 시선으로 읊조렸다.
“차기 황제를.”
그녀의 엄청난 한마디에 에드조프는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하, 하하하하하! 아멜리아, 당신 진짜 단단히 미친 거야? 그래서 지금 당신이 피오레 가주가 되어 그 천한 괴물 자식을 황제로 만들 거라고?”
에드조프는 자신이 말하면서도 믿을 수 없는 그녀의 생각에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도 기분 나쁠 지경이었다.
“심장은 쓸모없이 약해빠졌어도, 적어도 멍청하진 않을 거로 생각했는데. 정신 차려, 아멜리아. 그 자식은 황자가 아니야. 괴물이라고. 아바마마께서도 내친 괴물! 그런 놈이 황제라니. 대체 어느 공작가가 그런 놈을 선택한다는 거야!”
“아까 말했잖아요. 내가 선택한다고.”
아멜리아는 자신이 잡고 있던 총에 절로 힘을 주며 말했다.
“당신과 메사리나가 날 기만하며 내게서 전부 빼앗으려 했던 거, 하나도 뺏기지 않고 내가 다 가질 거라고요. 그래서 내가 절대 당신, 황제가 될 수 없게 할 거예요.”
에드조프는 아멜리아의 말을 비웃으며 속삭였다.
“그대가 대체 무슨 수로?”
그는 순식간에 아멜리아가 쥐고 있던 소총을 자신의 머리에 갖다 댔다. 그 모습에 아멜리아의 시선이 잠시 흔들렸다.
“쏴 봐.”
그는 더없이 여유롭게 말했다.
“내게 복수하겠다는 당신 마음, 잘 알겠어. 하지만 굳이 그렇게 어렵게 둘러갈 것 없잖아. 그냥 여기서 날 쏴서 죽여. 그럼 간단해. 내 전부를 빼앗고 싶은 거 아니야? 그럼 가장 소중한 목숨을 빼앗으라고. 혹여 대공을 죽였다고 반역자가 될까 봐 무서운 거라면.”
에드조프는 곧장 품에서 휴대용 필기구를 꺼내 갈겨댔다. 귀족들은 항상 가문의 인장을 품에 지니고 다녔다. 언제 자신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자, 유서야. 여기서 벌어지는 죽음은 그대의 탓이 아닌 내 자살이 될 거야.”
“…….”
“아주 완벽하잖아? 위조도 아닌 내 친필에 인장까지. 그러니까 쏴. 이 총을 쓸 수 있다면 말이야.”
그의 도발에 아멜리아는 속수무책으로 굳어졌다. 에드조프는 그 모습에 더욱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웃음을 그렸다.
“하긴, 그 심장으론 불가능하지. 그 약해빠진 심장은 고작 날 사랑하면서 뛰는 게 전부니까.”
그녀는 총을 쓸 수 없다, 절대. 타고난 마법도 없을뿐더러, 설령 있다고 해도 저 나약한 심장이 마나를 감당할 리 없었으니까.
‘이클리트 그 자식이야 멍청하게 북부에서 나오게 해주겠다니, 덥석 이 여자의 손을 잡은 거겠지.’
한순간이라도 그놈과 같이 숨 쉬고,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다시 똑똑히 제 주제를 깨닫게 해줘야지. 그 녀석은 평생 북부에 갇혀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하니까.’
이글거렸던 에드조프의 시선이 다시금 수그러지면서, 아멜리아의 손을 다정하게 잡으며 아래로 내렸다.
“아멜리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그대가 날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래서 지금 얼마나 배신감에 아프고 슬픈지, 이 모든 것도 사랑으로 이해하고 내가 용서할게. 그러니 얌전히 내 곁에서 황후가 돼.”
에드조프가 손을 뻗어 아멜리아의 얼굴을 감싸고자 했다.
“그저 내 품에 안겨 내게 복종하라고.”
하지만 그녀가 총으로 그의 손을 차갑게 내치며 웃었다.
“볼만하네요, 대공 전하께서 계속 거절당하는 모습.”
“뭐?”
“앞으론 추락하는 모습도 보겠지만.”
아멜리아의 모습에 에드조프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그의 도발에 속수무책으로 굳어진 게 아니라, 애초에 넘어가지 않았다.
“고작 당신 목숨 하나 취하자고 이걸 당기진 않아요. 내가 방아쇠를 당기는 날은, 내가 가주가 되는 순간일 거예요.”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의연하고 냉정했다. 에드조프는 대체 이 여자가 뭘 믿고 이렇게 기고만장한지 알 수 없었다.
‘죽기 전,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는 건가?’
“그리고 내가 지금 누굴 사랑해서 심장이 뛴다면, 당연히 당신이 아니라 클리오 대공 전하겠죠.”
아멜리아가 이클리트를 입에 담자, 에드조프의 시선이 급격히 흔들렸다. 오히려 도발은 그녀가 한 수 위로 부렸고, 그 도발이 에드조프를 제대로 건드렸다. 특히, 그녀의 예상대로.
“황후가 되어도 그분의 곁에서 될 테고.”
“차기 황제는 바로 나다. 그 괴물 자식이 아니라!”
황제에 관해선 더더욱, 그를 뒤흔들 약점이었다. 에드조프는 더는 참지 못한 채 아멜리아의 양어깨를 힘껏 움켜쥐며 외쳤다.
“그놈은 태생부터 나와 달라. 내가 진짜 황자다. 내가 진짜 차기 황제란 말이다!”
“이거 놔요. 놓으란……!”
그때, 누군가의 손이 에드조프의 어깨를 거세게 잡아 그대로 밀쳐버렸다.
“윽!”
순식간에 에드조프가 바닥에 쓰러졌고, 그런 그를 이클리트가 상체가 들썩일 정도로 숨을 삼키며, 온기 없는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의 모습에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클리오, 대공 전하…….”
이클리트는 아멜리아의 목소리에 곧장 그녀에게 다가갔다.
“괜찮습니까? 어디 다치지 않았어요?”
“아, 아뇨. 다치진 않았는데…….”
“이클리트!”
에드조프의 고함이 아멜리아의 목소리를 삼켰다. 이클리트는 턱에 힘을 주고서 가까스로 고개를 돌려,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채 입을 열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에드조프는 분노에 뒤틀린 목소리로 외쳤다.
“너야말로 지금 뭐 하는 짓이지? 감히 누구의 것에 손을 대!”
에드조프가 다시 아멜리아를 잡아끌려는 순간, 갑자기 발코니 주변으로 칼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 바람은 정확히 에드조프의 걸음을 붙잡았다.
“뭐, 뭐야 이 바람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할 만큼, 엄청난 바람이 살벌하게 몰아쳤고, 이클리트 뒤에 선 아멜리아조차 그 바람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갑자기 뭐지?’
공기가 오싹했다. 바람이 살결에 닿을 때마다 칼에 베이듯, 에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이클리트가 제 옷깃을 붙잡게 하면서 나직이 속삭였다.
“미안합니다. 조금만, 참아주세요.”
‘대공 전하?’
이 난리 속에 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그를 중심으로 바람이 형성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러고 보니 이 풍경이 썩 낯설지 않았다.
‘그래. 산에서 갑자기 일어났던 그 이상한 지진…….’
우연히 그때도 그가 있었다. 설마, 마법인가? 마법으로 그가 만들어내는 것인가?
‘아니야. 마법으론 불가능해. 이런 순수 마법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잖아.’
고대엔 가능했으나, 현재 이 땅에서 오직 마나를 운용하여 시전하는 마법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현재의 마법은 마나를 발동시킬 매개물이 필요했다. 그게 바로 총이고, 검이며, 마법 도구였다. 마나만을 운용하고자 하면, 강한 마나를 심장이 버티지 못해 결국 술사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아멜리아는 이클리트를 바라보며 의심의 시선을 거뒀다.
‘지금 그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아. 그러니 마법은 아니야. 그냥 우연이겠지. 그가 고대의 마법사가 아닌 이상…….’
마침내 바람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이클리트는 완전히 힘이 빠져 버린 듯한 에드조프에게 말했다.
“형님의 말을 들어주는 것도 여기까지입니다.”
에드조프는 가까스로 다리에 힘을 주고서 그를 노려보았다.
“뭐?”
이클리트는 아멜리아의 어깨를 감싸 품에 당겼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클리트가 돌아서자, 에드조프가 남아 있는 힘을 겨우 모아 외쳤다.
“아멜리아! 후회할 짓 하지 말고 당장 이리 와! 그 자식은 황제가 될 수 없어. 그저 괴물이라고!”
에드조프의 끔찍한 독설에 아멜리아는 오히려 보란 듯이 이클리트의 팔에 팔짱을 꼈다. 그러자 이클리트의 표정이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붉게 경직되어 눈빛이 떨렸다. 아멜리아는 그런 그를 눈치채지 못한 채, 에드조프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대공 전하의 말을 들어주는 건, 저도 여기까지예요.”
“아멜리아!”
“앞으론 내게 명령하지 말고, 날 원한다면 내게 복종해야 할 거예요.”
복종이라는 아멜리아의 말에, 떨리고 있던 이클리트의 시선이 어쩐지 불만스럽게 가라앉았다. 에드조프는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눈앞에서 제 것을 빼앗긴 기분은 더러웠다. 그것도 이클리트라니!
‘있을 수 없지. 그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네놈한테는 아무것도 안 빼앗겨, 절대!’
*** 발코니를 빠져나온 아멜리아는 이클리트를 향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굳이 그런 말까지 들을 필요는 없었는데. 죄송해요.”
그러나 이클리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멜리아는 그 침묵이 더 미안해서, 그의 표정을 보기 위해 팔짱을 풀려고 했다.
“다음엔 저 혼자서 어떻게든…….”
하지만 아멜리아의 손을 이클리트가 다시금 붙잡았다. 어쩐지 조금 강한 힘으로. 그녀는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혼자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당신 혼자 있지 않아도 되니까.’
“아, 그랬죠…….”
“그러니 같이 있어야죠. 우리가 서로를 이용하기 위해서라도.”
방금 전, 에드조프에게 붙잡혔을 때는 그저 치가 떨리게 싫었는데.
“그러니까 이 손, 멋대로 놓지 말아요. 안 놔줄 테니까.”
그와 맞닿은 손에선 묘한 열기가 맴돌고 있었다.
“여기 있어요, 내 옆에.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