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그대에게 복종하리라 (7/199)

7화. 그대에게 복종하리라2021.01.25.

연회장으로 돌아오자, 사람들의 시선이 아까와는 미묘하게 다른 온도로 닿았다.

16553698193402.jpg‘뭐지? 에드조프 때문인가?’

이클리트 역시 어긋난 온도를 느끼며 아멜리아의 손을 더 꽉 잡아주었다. 그녀는 단단히 잡아주는 그의 온기가 위안이 되어, 저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지 않았다.

16553698193402.jpg‘그래, 혼자가 아니지. 곁에 있으라고 했으니까.’

그때, 메사리나가 눈물을 글썽이며 아멜리아에게 다가왔다.

16553698193414.jpg“어, 언니. 아무리 제가 미워도 그렇지…… 흡!”

예쁘게도 똑 떨어지는 눈물에 아멜리아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이 분위기를 만든 건 메사리나의 짓인 듯했다.

16553698193402.jpg‘그래. 네가 가만있을 리가 없지.’

메사리나는 애처로운 몸짓으로 아멜리아를 향해 울먹였다. 물론 울음 섞인 목소리치고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어찌나 똑 부러지는지 몰랐다.

16553698193414.jpg“비록 제가 친동생은 아니지만, 언니를 친언니라 생각하며 의지하고 좋아했어요. 언니가 제게 추천서를 써준 것도, 언니가 절 가족으로 받아들여 준 것 같아서. 그게 마냥 좋아서 노력했는데…… 여전히 전 가족이 될 수 없나요? 그래서 이러시는 거예요?”

사교계에 익숙한 메사리나는 순식간에 아멜리아의 평판에 흠집을 내며, 가십을 좋아하는 부인들에게 먹잇감을 살살 던졌다.

16553698193426.jpg“어머, 보기엔 착해 보이는데.”

16553698193426.jpg“레이디 메사리나가 마음고생이 심했나 봐.”

16553698193426.jpg“하긴, 끼리끼리겠지.”

16553698193426.jpg“맞아. 괴물 대공과 결혼하는 것만 봐도…….”

16553698193402.jpg‘이게 마미가 말한 말로 물어 뜯긴다는 상황인가?’

본디 사람은 칭찬보단 뒷말이 쉬운 법이니까. 아멜리아의 눈엔 그저 우습고 유치할 따름이었다.

16553698193414.jpg“아무리 절 미워해도 이건 너무하세요. 저한테만 뭐라고 하면 되는데, 이 많은 사람을 기만하는 건 아니지 않나요?”

일순, 메사리나의 목소리가 달라지면서, 주변 분위기가 변했다. 그녀는 눈물 마른 시선으로 다른 가주 후보자들을 가리켰다.

16553698193414.jpg“여기 계신 분들은 전부 진심으로 피오레의 정신을 존경하며, 가주의 자리를 이어받고자 하세요. 언니의 이런 행동은 이분들을 모욕하는 거예요.”

뻔뻔한 가식 속에 메사리나의 본심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16553698193414.jpg“언니, 이러지 말고 그냥 저한테만 뭐라고 하세요. 언니가 아무리 원해도 피오레 가주가 될 수 없다는 건, 누구보다 언니가 더 잘 알잖아요!”

참고 있던 아멜리아의 입꼬리가 차갑게 뒤틀렸다.

16553698193402.jpg‘날 협박하고 싶은 건가?’

메사리나의 말에 귀족들은 동요했다.

16553698193426.jpg“뭐지? 왜 할 수 없다는 거지?”

16553698193426.jpg“실력이 없는 건가?”

16553698193426.jpg“하긴, 둘째 영애는 몰라도 첫째 영애에 대해선 알려진 게 없긴 하지?”

16553698193426.jpg“별 볼 일 없어서 그런 거 아니야?”

메사리나는 아멜리아를 향해 눈물 젖은 시선으로 말했다. 아량을 베푸는 거야. 여기서 더는 말하지 않을 테니, 스스로 물러나서 자존심은 지켜. 그렇지 않으면 시한부 심장이라는 사실을. 실력도 뭣도 없다는 걸 터트릴 테니까! 그때, 연회장의 거대한 문이 열리면서 케이트 집사와 벨반 공작이 함께 나타났다. 벨반은 어수선한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의연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16553698223139.jpg“이런, 내가 너무 늦었군.”

귀족들 모두가 벨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벨반은 그들을 뒤로하고, 곧장 이클리트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16553698223139.jpg“클리오 대공 전하, 이리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벨반이 이클리트에게 깍듯하게 예를 갖추니, 주변 귀족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누구도 그를 대공 취급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는 대공이기 이전에 이 나라의 황자다. 사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에게 고개 숙이고, 예를 갖춰 인사해야 했다. 마음만 먹었다면 이클리트가 이 자리에 있는 모든 귀족에게 황실 모독죄를 물어 벌할 수 있었다. 이클리트는 고개 숙인 벨반을 향해 짧게 말했다.

16553698252692.jpg“공의 귀한 시간을 내어주어 고맙소.”

16553698223139.jpg“아닙니다. 오히려 대공 전하께서 이리 써주시니, 제가 더 영광이지요.”

벨반은 그제야 아멜리아를 보며 말했다.

16553698223139.jpg“시간을 충분히 주고 싶었는데, 내가 괜한 배려를 한 것 같구나.”

16553698193402.jpg“아닙니다, 공작 각하.”

아멜리아는 신경 써준 그에게 정말 고마웠다. 사실 이 정도까진 바라지 않았는데. 이클리트의 권위까지 지켜주시다니.

16553698193402.jpg‘아직은 내가 하지 못하는걸, 외조부께서 해주셨구나.’

16553698223139.jpg“자, 그럼.”

벨반이 케이트에게 손을 내밀자, 케이트가 준비해 온 가문의 장총을 아멜리아에게 건넸다.

16553698223139.jpg“정식으로 그대들에게 소개하겠소. 아멜리아 체자렛, 그녀는 피오레의 네 번째 가주 후보요.”

아멜리아는 차분하게 벨반이 건네는 장총을 붙잡았다. 지켜보던 귀족들은 벨반이 이렇게까지 소개했기에 좀 전의 일은 잊고 약간의 기대감을 품기 시작했다.

16553698193426.jpg“공작 각하께서 이렇게 밀어주시잖아. 실력이 있으니까 그렇겠지.”

16553698193426.jpg“그래, 아까는 뭔가 착오가 있었던 거야.”

삽시간에 분위기가 바뀌자, 메사리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나섰다.

16553698193414.jpg“총을 쓰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시험을 치를 수 있는 거죠?”

메사리나의 말에 귀족들이 다시 멈칫했다.

16553698193414.jpg“언니는 타고난 마법이 없어요. 설령 있다고 해도, 이런 말 하기 마음 아프지만, 심장이 약한 언니는 마나를 사용할 수 없어요. 자칫하다간 죽을 수 있으니까!”

아멜리아의 진실에 벨반은 이번만큼은 나설 수 없었다.

16553698193414.jpg“언니, 언니를 위해서예요. 언니가 위험해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여기서 그만 해요, 제발!”

메사리나가 아멜리아를 잡으려는 순간, 그 앞을 이클리트가 막아섰다. 한마디도 없이 그저 그의 싸늘한 시선이 메사리나에게 닿자, 그녀는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의 뒤에 숨지 않고 제대로 나섰다.

16553698193402.jpg“우려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저는 아직 가주 후보일 뿐, 가주가 아닙니다. 그리고 정식으로 똑같이 시험을 치를 겁니다.”

그리고 곧장 벨반에게 받은 장총을 제대로 장전하고서 똑바로 고쳐 잡았다. 흐트러짐 없이 꼿꼿한 자세와 군더더기 없는 동작에 메사리나는 살짝 놀라고 말았다. 총을 다뤄본 적이 없는 사람은 장전과 함께 자세를 잡는 것조차 어려웠으니까.

16553698193414.jpg‘언제 저런걸. 하긴. 어설프게 자세라도 배웠겠지. 지금 이 상황은 무마해야 하니까. 쓰지 못하면 자세가 무슨 소용이야. 곧 죽을 목숨인데 마법을?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불가능해.’

아멜리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감정적인 메사리나와 달리 의연한 모습으로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줬다.

16553698193402.jpg“누구도 제가 가주가 되는 데 이의 없도록, 오직 실력으로 이어받을 겁니다.”

16553698193414.jpg“언니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정말 그러길 바라요.”

메사리나는 더 이상 말을 보태지 않았다. 자존심이라도 지킬 기회를 찬 건 아멜리아니까.

16553698193414.jpg‘거짓으로 허세 떨 수 있는 것도 여기까지지.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추락할 테니까.’

대충 상황이 정리되자, 벨반은 마지막 말을 전했다.

16553698223139.jpg“시험은 앞으로 4일 후. 언제나 그렇듯 총술을 다룰 것이오.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가문의 티어들에게 인정받을 만큼의 완벽한 실력을 보여야 할 것이오.”

지금껏 온화했던 벨반의 목소리에 날 선 위엄이 서리며, 공기가 긴장감에 팽팽하게 흘러갔다.

16553698223139.jpg“그 자리에 노력은 필요 없소. 이미 완성된 자신을 보여야 할 뿐.”

아멜리아는 벨반의 말에 장총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16553698223139.jpg“일주일 뒤, 황궁에서 다섯 공작가가 참여하는 대회의를 소집하오. 그때 새로운 가주가 피오레의 이름을 걸고 참석할 것이고. 부디 태양 아래 새로운 꽃이 피길 바라오.”

메사리나는 아멜리아를 지나치며 짧게 속삭였다.

16553698193414.jpg“언니는 날 빛나게 하는 들러리 노릇이나 해.”

그녀는 대답조차 없는 아멜리아에 만족하며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16553698193414.jpg‘차라리 잘됐어. 이번 일이 아버지의 귀에도 들어갈 테니까.’

바스티얀 대공이 아닌 클리오 대공과의 결혼이라니. 혈통을 중시하는 아버지가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잘만 하면.

16553698193414.jpg‘체자렛 백작가도, 이 피오레 작위도 내 것이 되는 거야. 내가 완벽하게 아멜리아의 모든 걸 차지하는 거라고.’

16553698310414.jpg

  *** 벨반은 고단한 숨을 쉬며 아멜리아에게 다가왔다. 이클리트는 그런 벨반의 모습에 잠시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녀의 앞에 다가온 벨반의 시선이 아련하게 흔들렸다. 장총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마치 아일리가 살아서 그의 앞에 있는 것 같았으니까.

16553698223139.jpg“아멜리아, 네가 아일리의 딸이기에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네가 인정받아야 한다, 여기 있는 모두에게.”

16553698193402.jpg“알고 있습니다. 제 어려운 부탁 들어주셔서, 그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16553698223139.jpg“그리고 결혼은…….”

벨반은 끝까지 묵묵히 아멜리아의 곁에 있어 준 이클리트를 떠올렸다. 이 무섭고 힘든 자리에 이 아이가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클리오 대공 덕분인 것 같았다. 물론 대체 결혼이라니, 이 무슨 엄청난 일인가 싶었지만.

16553698193402.jpg“그렇게 되었어요.”

아멜리아의 짧은 대답에 벨반은 길게 묻지 않았다. 모든 것이 이 아이의 선택일 테니. 뭔가가 이 아일 변화시키고 있었다.

16553698193402.jpg‘저는 제가 지켜야죠. 제가 지킬 거예요.’

분명 그 말과 관련 있을 거다. 문제는 체자렛 백작과 황실이 이걸 받아들일 지였지만.

16553698223139.jpg‘그 또한 이 아이와 대공께서 해결해야겠지.’

  *** 파란이 몰아친 연회를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는 시선들이 있었다. 바로 피오레의 머스켓티어들이었다. 이들이야말로 새로운 가주가 자신들의 새로운 주인이 되기에, 아멜리아의 등장에 다들 우려스러운 시선을 띠었다. 하지만 그중에서 너무나도 태연하게 방실거리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연분홍빛 머리카락이 결 좋게 찰랑거리고, 그 아래 휘늘어진 눈동자가 더없이 온화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제복을 갖춰 입은 풍채는 무척 단단해 보였다. 그는 피오레 가문의 티어를 이끄는 단장, 이사나였다. 이사나는 연회장을 빠져나가는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를 눈으로 좇으며 속삭였다.

16553698340703.jpg“가주 시험이 꽤 재미있어지겠네. 그 천재 머스켓티어 아가씨의 딸이라.”

천재라 불렀던 머스켓티어, 아일리. 체자렛 백작과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충분히 차기 가주 후보였다. 물론 가문이 아닌 결혼을 택해 마지막은 불행했지만.

16553698340709.jpg“그분이 천재였으면 뭘 합니까? 그 핏줄이 제대로 이어지지 못한 모양인데. 심장도 약하다고 하고.”

부단장인 칼렌이 투덜거렸으나, 이사나는 끝까지 생글거렸다.

16553698340703.jpg“그래도 총 잡는 자세는 완벽하던데?”

16553698340709.jpg“그야 예전에 배웠겠죠.”

16553698340703.jpg“굳이 써먹지도 못하는걸?”

이사나는 어느새 난간에 턱을 괸 채, 이미 사라진 아멜리아의 빈자리를 응시했다.

16553698340703.jpg“그저 잘 흉내 낸 건지, 아닌지는 4일 후면 밝혀지겠지. 하지만 만약 레이디 메사리나의 말대로 집안 싸움에 감히 피오레를 모욕하는 거라면.”

일순, 헤실거리던 그의 눈매가 일자로 굳어지며 서늘한 어조가 새어 나왔다.

16553698340703.jpg“모욕한 값을 제대로 치르면 그만이지.”

  ***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와 함께 연회를 빠져나왔다. 이미 그 자리에서 해야 할 건 다 했기에, 굳이 끝까지 자리를 지킬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머무는 곳으로 돌아가지 않고 후원에서 걸음을 멈췄다.

16553698193402.jpg“하아! 그래도 한고비 넘겼네요. 아닌가. 이제 시작인가?”

이클리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이 초목과 꽃으로 가득한 피오레 후원인데, 이곳만 풀 한 포기 하나 없이 삭막했다. 아멜리아는 의아해하는 이클리트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16553698193402.jpg“여기 이상하죠?”

16553698252692.jpg“후원이 아닌 겁니까?”

16553698193402.jpg“후원이긴 한데, 여기만 다 시들었네요.”

그녀의 눈빛에 일순 커다란 그리움이 일렁였다.

16553698193402.jpg“여긴 어머니가 생전 좋아하셨던 제비꽃밭이에요.”

이클리트는 아멜리아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16553698193402.jpg“예전에 딱 한 번 온 적 있었는데, 어머니가 무척 좋아하셨던 표정이 생생하게 남아 있어요. 물론 지금은 이렇게 황폐해졌지만. 외조부님께서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됐나 봐요.”

그녀의 눈동자가 아쉬움에 젖어 흔들리자, 이클리트의 표정 역시 어둡게 가라앉았다.

16553698193402.jpg“그래도 이렇게 터라도 남겨놓으셨으니까, 나한테는 어머니를 떠올리는 곳이에요.”

아무리 괜찮은 척, 강한 척하려고 해도 두려웠고, 힘들었다. 앞으로는 더 그럴 것이고. 그래서 아멜리아는 이곳에서 항상 강하셨던 어머니의 기운을 얻고 싶었다. 차갑게 부는 밤바람에 황량한 흙냄새가 진하게 풍겨 더욱 빈자리를 느끼게 했다. 이클리트는 못마땅한 시선으로 그녀를 흔드는 바람을 바라보다 이내 손으로 슬쩍 바람을 걷어냈다. 그러자 갑자기 바람이 방향을 바꿔 아멜리아를 비켜서 불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제 윗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아멜리아는 그의 행동에 멈칫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16553698193402.jpg“고, 고마워요.”

16553698252692.jpg“아닙니다.”

16553698193402.jpg“이제야 말하는데, 오늘 너무 근사하세요.”

아멜리아는 완전 놀라울 정도로 변한 이클리트를 바라보았다.

16553698193402.jpg“아까 진짜 깜짝 놀랐었거든요. 마미가 대공 전하를 많이 괴롭혔겠어요. 안 그래도 연회 같은 거 싫어하시는데.”

이클리트는 덜덜 떨면서도 최선을 다했던 그 조그만 하녀를 떠올렸다.

16553698252692.jpg“괜찮았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고마웠죠.”

16553698193402.jpg“네?”

16553698252692.jpg“조금은 어울렸습니까?”

16553698193402.jpg“조금이라뇨. 엄청 어울려요.”

아멜리아는 이 밤하늘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그의 푸른 눈동자를 홀릴 듯 응시했다.

16553698193402.jpg“역시, 이 눈이 너무 예뻐요.”

차가운 듯하면서도 이따금 말도 안 될 정도로 다정하게 휘늘어진다.

16553698252692.jpg“조금이라도 그대 맘에 들어 다행이군요.”

지금. 지금처럼 다정하게 웃는……. 아멜리아는 순간, 기분이 묘해졌다. 그의 다정해진 눈동자에 누가 있는지 훤히 보였으니까. 모른 척할 수도 없을 만큼, 아멜리아가 담겨 있었다.

16553698193402.jpg‘그, 그냥 마주 보고 있으니까 그런 거겠지.’

하지만 이상하게 자꾸 그와 시선이 마주친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그의 시선은 올곧게 그녀를 향했다. 아멜리아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차가웠던 그녀의 뺨 위로 미열이 돌았다. 자꾸 이상해지는 기분에 아멜리아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16553698193402.jpg“대공 전하께선 제가 왜 바스티얀 대공에게 복수하려는지, 묻지 않으세요?”

사실 그에게 에드조프와의 안 좋은 모습을 들켰으니, 어느 정도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클리트는 단호하게 말했다.

16553698252692.jpg“알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16553698193402.jpg“네?”

16553698252692.jpg“서로의 목적만 챙기면 되는 거 아닙니까? 나는 황제, 영애는 복수.”

16553698193402.jpg“아, 그렇긴 하죠.”

16553698252692.jpg“그대가 말하고 싶지 않다면,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걸 상기시켜서 아픈 게 싫습니다. 그대의 몸도 마음도 전부.”

아멜리아의 숨이 다시금 느리게 흘렀다. 그는 마치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자신을 이해하고 곁에 있었다. 분명 말로는 서로 이용하고 있다고 하는데.

16553698193402.jpg‘왜 저렇게 나한테 다정한 거지?’

왜 자꾸 자신만 그에게 받는 기분이 드는 걸까. 아멜리아는 달뜬 온기를 삼키며 물었다.

16553698193402.jpg“대공 전하께선 황제가 되고 싶다면서, 왜 아무것도 아닌 절 택한 거죠?”

정말 그가 황위를 탐낸다면. 그토록 욕심난다면, 자신을 택한 건 너무 도박이지 않은가.

16553698252692.jpg“그대가 날 택했으니까.”

16553698193402.jpg“…….”

16553698252692.jpg“내겐 영애뿐이었습니다. 날 선택해준, 유일한 공작인 당신이.”

16553698193402.jpg“아직은 공작이 아니잖아요.”

16553698252692.jpg“그대라면 반드시 피오레를 잇겠지.”

갑자기 변한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확고했다. 귓가에 닿은 순간, 심장이 떨릴 만큼.

16553698193402.jpg“어,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요?”

16553698252692.jpg“믿어, 그대를. 그뿐이야. 그러니 끝까지 날 책임지고, 떠나지 마.”

그녀를 향한 푸른 눈동자가 강하게 타오르며, 아멜리아는 그 시선에 빨려들 것 같았다.

16553698252692.jpg“아까 형님에게 그댈 원한다면 복종하라고 했었지.”

16553698193402.jpg“그건 하도 나한테 명령하고 그러니까 화가 나서…….”

16553698252692.jpg“하지만 난 싫었어.”

16553698193402.jpg“네?”

16553698252692.jpg‘그대가 선택하고 원하는 건 오직 나였으면 하니까.’

가장 하고픈 진심은 삼킨 채, 이클리트가 그녀에게 성큼 다가섰다. 훅하고 밀려든 그의 체향에 아멜리아는 일순 경직되고 말았다.

16553698252692.jpg“기사들은 주군을 택할 때 의식을 치르지. 제대로 된 맹약을 하면서.”

16553698193402.jpg“매, 맹약이요? 하!”

이클리트가 그녀의 하얀 손목을 살포시 붙잡았다. 아까도 분명 닿았는데, 지금은 뭔가 느낌이 달랐다. 손에 닿자마자 녹아내릴 듯 뜨거워서 절로 호흡이 가빠졌다. 달빛이 그의 까만 머리카락 위로 눅진하게 쏟아져 내렸다. 마치 한 마리 우아하고 위험한 짐승처럼. 어느새 그는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서 하얗고 말랑한 살결에 까칠한 입술을 댔다.

16553698252692.jpg“날 황제로 만들어줄 그대를 원하기에, 그대에게 복종하리라.”

16553698451078.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