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욕심이라는 감정2021.01.29.
“그대에게 복종하리라.”
그의 목소리가 마치 짐승의 이빨처럼 그녀의 몸 안으로 깊숙이 박혀 아찔한 전율을 일으켰다. 아멜리아는 떨리는 숨을 겨우 삼켰다. 심장이 따가울 정도로 술렁였다.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강렬한 기분. 에드조프를 사랑하면서도 심장이 이렇게 뜨거워진 적은 없었는데······. 아니, 이보다 뜨거운 말을 살아생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멜리아는 고요하게 저를 삼키고 있는 그를 보며 겨우 생각을 떠올렸다.
‘이토록, 황제를 원하는 건가.’
애써 쥐어짠 생각이 그리로 튀자, 바람 소리가 고막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이클리트는 자신이 말했으면서, 그녀만큼이나 긴장해서는 목구멍이 뜨겁게 따끔거렸다. 하지만 어딘가 후련한 표정으로 은근슬쩍 그녀의 손을 한 번 더 세게 잡으며 말했다.
“맹약도 끝냈으니, 이만 돌아갈까요?”
아멜리아는 겨우 의식을 되돌리며, 그가 준 옷을 벗어주려고 했다.
“그, 그럴까요? 마미가 엄청 궁금해하겠네. 아! 이 옷 입으세요. 전 괜찮아요.”
하지만 이클리트는 옷을 다시 걸쳐주며, 오히려 떨어지지 않게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덕분에 그가 그녀를 품에 안은 꼴이 되었고, 감정의 잔재가 남아 있던 터라 아멜리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대, 대공 전하?”
“입고 있으세요. 바람이 찹니다.”
그가 말하는 것치고는 바람이 덜 부는 것 같았다.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부는 것 같은데?
“그렇게 많이 불지는 안…….”
하지만 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이클리트가 슬쩍 손짓했다. 그러자 반대 방향으로 불던 바람이 다시 제대로 그녀를 향해 불기 시작했다. 아멜리아는 갑자기 거세진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그의 옷깃을 꽉 붙잡았다.
“아니네요. 많이 부네요. 하하하!”
그녀는 당황스러웠다.
‘뭐야. 왜 갑자기 바람이 이쪽으로 불지?’
마치 그 발코니 때처럼. 정말로 그가 일부러? 하지만 이클리트는 짐짓 모른 척하면서, 오히려 아멜리아를 나무랐다.
“아무리 남부령 바람은 북부령보다 덜 차갑다고 해도 방심해선 안 됩니다. 감기 걸리니까. 곧 시험도 치러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자기 관리도 실력입니다.”
아멜리아는 괜한 생각을 버렸다.
‘그래. 우연이지. 우연인 거야. 이런 마법이 가능할 리가 없는데 왜 자꾸 이상한 생각을! 바람이니까. 제멋대로 부는 거겠지.’
아무래도 이렇게 안겨 가는 게 너무 쑥스러워서 괜한 쪽으로 생각이 튀는 듯했다.
“굳이 이렇게 안 하셔도 되는데. 옷만 빌려주셔도 돼요. 그렇게 춥지는 않아요.”
“일부러 이러는 겁니다.”
“네?”
이클리트는 당연하다는 듯 목소리에 힘을 줬다.
“이제 우릴 주목하는 시선이 많아질 겁니다.”
“그렇겠죠. 그렇게 요란하게 결혼 발표를 했으니.”
“영애께서 더 잘 아시겠지만, 우린 누구보다 다정한 사이로 보여야 합니다. 서로 미치게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가 되어야 하니까. 그래서 구혼서에도 첫눈에 반했다고 적으신 거 아닙니까? 혹시라도 누가 봐서 의심하지 않도록.”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의 말에 그제야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여야 했다. 절대 남에게 정략이니, 계약이니 하는 걸 들켜선 안 된다는 뜻. 귀족 간의 정략혼은 흔했지만, 그들의 사정은 달랐다. 이클리트는 황제가 되어야 하고, 아멜리아는 그를 황제로 만들어야 하니 말이다. 안 그래도 그의 위상은 에드조프보다 불안하고 약한데, 황위에 오르기 위해 피오레 공작가를 이용했다는 소문으로 번지면 사교계에 좋을 게 없었다. 이후 황위에 올라서도 마찬가지였고. 다섯 공작가를 모욕했다는 흠이 생길 수도 있었으니까.
‘내가 이분을 사랑해서 지지하고 믿어줬다는 스토리로 가야 안전해.’
다행히 자신과 에드조프가 연인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었다. 자신이 백작가에 거의 갇혀 있었던 것도 이유였지만, 에드조프가 은밀하게 만나러 왔던 것도 있었다.
‘혹시라도 내가 일찍 죽었을 때, 그 뒤처리를 위해서였겠지.’
그만큼 평판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설령 그가 이 결혼을 의심해도, 증거가 없으면 어찌할 수 없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남들 눈에 빈틈을 보여선 안 된다. 이클리트는 아멜리아가 어디까지 생각하는지 파악하고선 엷은 미소를 지었다.
“우린 마지막 순간까지 그 누구보다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부부여야 합니다.”
그의 목소리가 다시금 아멜리아를 간지럽게 했다. 분명 맞는 말인데, 왜 이렇게 위험한 느낌이 드는 걸까?
“그, 그래요. 당연하죠.”
“그럼 계속 제 품에 안겨서 가실까요?”
“네. 그럼 부탁할게요.”
어쩌다 보니 아멜리아는 부탁이라 말하며 그의 품에 어설프게 안겨야만 했다. 그때, 이클리트는 살짝 고민하며 말을 덧붙였다.
“차라리 안아 올릴까요, 저번처럼? 그럼 더 사랑하는 사이로 보일 텐데.”
“아니요! 지금이 좋아요. 지금이 딱! 아직은 저희가 결혼한 사이는 아니잖아요?”
안아 올린다니!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서 그렇게 갈 수는 없었다. 아직 거기까진 감당 못 하겠다고! 이클리트는 펄쩍 뛰는 아멜리아를 보며 인심 쓰는 척 손을 내밀었다.
“그럼 손이라도 잡고 가죠.”
“손은 괜찮아요, 손은!”
안아 올리지 않는 것만 해도 어딘가, 싶어 덥석 그가 내민 손을 잡은 아멜리아는 곧장 후회했다. 맞닿은 손이 왠지 모르게 너무 뜨거워서 기분이 또 이상해지고 만 것이다! 아멜리아는 뭔가 자꾸 부끄러운 마음에 슬쩍 그의 가슴에 얼굴을 숨겼다. 이클리트는 만족한 표정으로 짧게 속삭였다.
“아직은, 이 정도만.”
‘아직은?’
더 위험한 말이 스친 듯했으나, 길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까 저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뭘요?”
“영애가 예쁘고 멋있었다고.”
끝끝내 아멜리아의 머릿속을 그는 완전히 휘젓고 말았다. 어느새 바람이 다시금 그들을 피해 저 멀리 불고 있었다.
*** 이른 아침, 어제 연회에서 벌어진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아멜리아가 머무는 곳을 옮기기 위해 밖을 나선 순간, 하녀와 하인들의 시선이 전부 그녀를 향했다. 물론 감히 간 크게 직접적으로 수군거리진 않았으나, 눈빛이 참으로 많은 얘기를 했다. 그리고 그 얘기는 결코 좋은 얘기는 아니었다.
“아가씨, 짐은 전부 먼저 그쪽으로 옮겨뒀어요.”
“고마워, 마미.”
그녀는 더 이상 이곳의 손님이 아닌 가주 후보이기에, 다른 후보들처럼 시험날까지 훈련장과 가까운 호네스 궁에서 머물러야 했다. 마미와 호네스 궁에 당도하자, 그 앞에 집사장 케이트가 서 있었다. 마미는 절로 고개를 숙였고, 아멜리아 역시 살짝 긴장한 눈빛으로 케이트를 응시했다.
“아멜리아 체자렛 아가씨를 뵙습니다.”
“연회에선 제대로 인사도 못 했군, 케이트.”
“한낱 하인을 굳이 챙겨주실 필요 없습니다.”
“한낱 하인이라니. 피오레에서 그대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집사장 케이트는 오랜 시간 피오레 가문을 모신 사람으로, 그보다 여기서 오래 일한 하인이 없었다. 그만큼 피오레의 산 역사인 셈. 군더더기 없는 자세만큼, 흐트러짐 없이 올린 백발에 일 센티미터도 어긋남 없이 잘린 콧수염과 티 하나 없는 외알 안경 너머 깐깐한 눈매가 그의 성품을 말해주는 듯했다. 케이트는 긴말 없이 다시금 아멜리아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편하게 머물다 가십시오. 계시는 동안, 마미가 아가씨를 모실 겁니다.”
일순, 케이트의 목소리가 차갑게 박혔다.
‘머물다 가라는 건, 결국 머물지는 말라는 거군.’
역시 그는 다른 이들이 눈빛으로 말하는걸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다. 중요한 가주 시험을 귀족들의 입방아에 올린 걸 몹시 못마땅해하는 것이다.
‘내가 절대로 가주가 될 리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고.’
아멜리아는 태연히 웃었다.
“역시 그대는 한낱 하인이 아니군.”
“…….”
“걱정 마. 내 집처럼, 편하게 머물 테니.”
그녀의 대답에 케이트의 눈썹이 꿈틀했지만, 별다른 말 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마미는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죄송해요, 아가씨. 케이트 집사장님이 워낙 원리 원칙을 지키시는 철두철미한 분이시라······.”
“난 괜찮아. 환영받을 거라 생각 안 했어. 일단은 이게 맞는 거니까.”
“다들 아가씨에 대해 말이 많아요. 아무래도 메사리나, 그게 안 좋은 소문을 퍼트린 것 같아요. 아가씨가 총을 쓰지 못한다고······.”
“부인들의 살롱에서 내가 가장 뜨거운 주인공이 된 건가?”
“아가씨!”
그저 웃기만 하는 아멜리아를 마미는 걱정했다. 괴물 대공과 결혼하는 별난 영애라는 얘기는 무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주 시험은.
“정말 어떻게 하실 거예요?”
마미는 아멜리아가 웃음거리가 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마냥 느긋하게 말했다.
“말했잖아. 정정당당하게 시험을 치를 거라고.”
“아가씨······.”
“일단 대공 전하를 뵈어야겠어. 누굴 소개해준다고 하셨거든. 나도 부탁드릴 게 있고 말이야. 그나저나 마미, 진짜 대단하더라. 연회에서 대공 전하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어.”
아멜리아의 칭찬에 마미는 내심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사실 놀랐어요. 육체미뿐만 아니라 외모까지! 아가씨 말대로 야성미가 있으시네요.”
마미의 말에 아멜리아는 저도 모르게 어젯밤 묘했던 기분이 떠올라 얼굴이 붉어졌다.
‘설마 또 그의 맨살을 볼 일은 없겠지?’
벗는 게 습관이라고 하시지만, 고치시겠지. 고치실 거야. 암! *** 아멜리아의 우려와 달리, 어제처럼은 아니더라도 제대로 갖춰 입은 이클리트와 이클리트 만큼이나 인상 있는 남자가 다소 멍한 눈빛으로 서 있었다.
“제 호위 기사이자 클리오 대공가의 기사 단장, 카힐로 웨일 입니다.”
아멜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카힐로에게 손을 내밀었다. 귀족 레이디의 기본 인사 예법이었으니까.
“아멜리아 체자렛이에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카힐로는 지금도 믿어지지 않아서 정신을 못 차리다가, 애써 그녀의 손을 잡고서 손등에 입을 맞추려는 순간. 이클리트가 잽싸게 아멜리아의 손을 낚아챘다. 카힐로는 경악했고, 아멜리아는 그저 의아하게 이클리트를 바라보았다.
“대공 전하?”
“인사는 이쯤하고. 이것도 제비꽃의 일종입니까?”
“제비꽃이요?”
이클리트가 아멜리아를 자연스럽게 창가로 데려갔다. 창틀에 보라색 꽃이 피어 있었다.
“어머! 이런 곳에 꽃이 피었네. 제비꽃은 아니지만 예쁘네요.”
“역시 아니군요.”
“꽃을 좋아하시나 봐요. 이런 들꽃에도 관심 있으시고.”
이클리트는 아멜리아를 빤히 바라보며 나직이 속삭였다.
“네, 좋아합니다. 아주 많이.”
아멜리아는 그의 다정한 대답에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뭐, 뭐야. 내가 왜 두근거리는 거야!’
멀리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카힐로는 놀라 자빠질 것 같았다.
‘설마 지금 나의 주군인 대공 전하께서. 질투하신 거야?’
여기 오기 전, 모든 설명을 들었다. 들어도 믿을 수가 없었다. 대공 전하께서 황위를 원하신다니. 그로 인해 체자렛 백작가 영애와 결혼하신다니. 서로 이용하는 관계라니!
‘근데 저게 이용하는 거라고?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잖아.’
아까 제 손을 쳐낸 것도. 저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데려간 것도!
‘인사조차 못 하게 하는 거잖아!’
처음엔 못 알아봤는데, 저 여인이 누군지 알겠다. 산에서 힘까지 써가며 구했던 그 여자가 확실했다.
‘대체 체자렛 백작가의 영애와 무슨 인연이 있으신 거야!’
그때, 노크와 함께 마미가 들어왔다.
“아가씨,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아멜리아는 마미의 말에 멈칫하곤 자연스럽게 등을 보였다.
“잠시 실례할게요.”
아멜리아가 사라지자, 이클리트는 곧장 윗옷을 벗어냈다.
“역시 남부 의복은 답답하고 조여. 익숙해져야 하는데······.”
“익숙해질 필요 없습니다. 대공 전하는 당장 북부로 돌아가셔야 하니까요.”
“돌아가야지, 한 번은. 일단 네가 먼저 가서 수습하고 있어. 결혼식 이후에 상황 봐서 한 번은 갈 테니까.”
“그런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결국 터져버린 카힐로는 이클리트 앞에 무릎을 꿇고서 진지하게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아시면 그냥 넘기지 않으실 겁니다. 제일 잘 아시겠지요. 대공 전하께서 남부로 오신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격해진 카힐로와 달리 이클리트의 표정은 덤덤했다.
“잘 알지. 몹시 시끄럽고, 소란스러워질 테니. 그게 싫어서 평생 북부에 있으려고 했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하지만 그런 거 별로 상관없을 만큼, 머물고 싶어졌다.”
뜻밖의 말에 카힐로의 심장이 서걱이며 목소리가 격해졌다.
“대공 전하, 부디 생각을 돌리십시오. 황위라니요! 오히려 황궁이라면 치를 떠시면서. 황실이 대공 전하께 어떻게 했는데! 어떤 취급을 당하셨는데! 대체 저 여인이 뭐라고!”
“입조심하라고 했다, 카힐로.”
이클리트의 표정이 순식간에 섬뜩해지며, 카힐로의 입을 막았다.
“이제 곧 내 아내이자, 피오레 공작가의 가주가 될 분이다.”
카힐로는 경직된 숨을 삼켰다. 과거의 금기를 입에 담은 것보다, 그 여인이 중요하단 말인가.
“선택했다, 이미. 곁에 있기로. 절대로 떨어지고 싶지 않으니까.”
“대공, 전하······.”
서늘했던 이클리트의 눈매와 입꼬리가 자신도 모르게 부드럽게 휘었다.
“처음으로 욕심을 내게 만들어. 한 번 닿으니 절대 눈을 떼고 싶지 않다고 말이야.”
욕심이라는 말에 카힐로의 눈빛이 부서질 듯 흔들렸다. 지금까지 아무 의미 없이 그저 존재하기에 살았던 분인데. 그런 분이 욕심을 말하고, 그 욕심으로 그 여인을 원하는 거라면.
‘막을 수 없다. 오히려 앞으로가 무서워. 처음 품은 욕심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니까.’
그저 ‘그 힘’ 이 폭주하지 않기를 바랄 뿐. 그로 인해 황실에 들키지 않기를 바랄 뿐. *** 밖으로 나온 아멜리아는 곧장 손을 내밀었다.
“도착했니?”
마미는 품에서 편지 하나를 꺼냈다.
“네. 체자렛 백작가에서 도착했어요.”
“눈치챈 사람은 없겠지?”
“네. 아무도 몰라요. 아가씨가 단단히 준비하셨으니까.”
“고마워, 마미.”
아멜리아는 떨리는 시선으로 체자렛 백작가에서 온 편지를 응시했다.
‘올 것이 왔구나.’
바로 이번 연회에서의 소식을 들었을 아버지의 편지. 아멜리아는 긴장된 손끝으로 편지를 열었다. 하지만 편지를 확인한 그녀의 표정이 완전히 굳었다가 이내 허무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날 아주 버린 건가.”
“아가씨?”
편지 내용은 분노도 뭣도 없었다. -수습하기 전까지, 돌아오지 마라- 단 한 줄의 내용. 이토록 엄청난 일을 저질렀지만, 반응은 없었다. 반응도 그만큼의 애정이다. 얼마나 자신이 싫고 미우면 반응조차 아까운 걸까. 아멜리아는 편지를 꽉 움켜쥐었다가 이내 후련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수습하라 하셨으니, 수습해야지. 먼저 피오레 가주 자리부터.”
*** 불만 속에 카힐로는 일단 북부로 돌아갔다. 이클리트는 카힐로를 이해했다. 무엇을 걱정하고 불안해하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자신도 황실로 돌아가는 게 끔찍하게 싫었다. 여전히 그때의 기억은 그의 정신을 마모시켰으니까. 하지만.
‘황제가 되어야지. 평범하고 조용하게 살려면. 이젠 정말 살아야겠으니까.’
어차피 시끄러워질 거라면, 그녀로 인해 엉망진창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돼.’
다른 건 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런데 딱 하나. 그녀의 심장. 어느 날 갑자기 멈춰버릴지도 모르는 그 심장.
‘내 심장을 줄 수 있다면. 내가 대신 죽어줄 수 있다면.’
“그런 방법이 있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반드시.”
일순, 이클리트의 눈빛이 무서울 정도로 까맣게 일렁이던 순간.
“대공 전하, 사실 제가 부탁드릴······ 악!”
다시 돌아온 아멜리아는 윗옷을 벗고 있던 이클리트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조금 전까지 차가웠던 이클리트의 표정이 한순간에 무너지면서, 그는 곧장 윗옷을 걸쳤다.
“미안합니다. 영애께서 돌아가신 줄 알고······.”
목 끝까지 붉어진 아멜리아는 겨우 이클리트와 눈을 마주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대공 전하, 아무리 습관이라도 오, 옷은 잘 갖춰 입으셔야 해요!”
“알겠습니다. 낮에는 꼭 입어야죠.”
낮에는? 밤에도 잘 갖춰서 입어야지!
‘대체 예법을 어디서부터 가르쳐야 하는 거야!’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아멜리아는 겨우 정신을 차리며 진지하게 말했다.
“부탁드릴 게 있어요. 사실 좀 어려운 부탁인데······.”
“하겠습니다.”
“예? 아니 그래도 부탁이 뭔지는 듣고······.”
“들을 필요 없습니다. 뭐든 따를 테니까.”
이클리트 사전에 아멜리아의 부탁을 반대하는 단어는 없었다, 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