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총성 속에 피는 꽃2021.02.05.
하늘에 구름이 가득해 태양이 삐져나올 틈이 없었다. 음울한 대기가 긴장감을 더욱 키웠다. 하얗게 질린 손끝은 몇 번이고 식은땀에 주먹을 쥐게 한다. 아멜리아는 가까스로 눈에 힘을 주며 속삭였다.
“괜찮아. 다 괜찮아. 할 수 있어. 노력했잖아.”
하지만 몇 번이고 되뇌는 말이 자꾸만 비집고 들어오는 두려움에 허물어진다.
‘그래도 실수하면?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고 끝나버리면…….’
속수무책으로 흔들리는 불안감에 아멜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때, 노크와 함께 마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아멜리아는 저도 모르게 이클리트를 떠올리며 고개를 휙 돌렸다.
“대공 전하께서 오셨니?”
홀로 들어온 마미는 살짝 당황한 표정을 띠며 말했다.
“네? 아, 아니요. 그러고 보니 대공 전하께서 아침부터 안 보이신다고 하녀들이 그랬어요. 혹, 선약을 하셨나요?”
“아, 그래. 아니야. 아무것도.”
아멜리아는 묘하게 실망해선 다시 고개를 돌렸다.
‘뭐지. 뭘 기대한 거지. 그분이 응원해주길 바란 건가.’
말도 안 되는 기대감이 혼자 사그라졌다. 매번 필요할 때, 항상 곁에 있었기에. 그러다 보면 안정이 되어서. 자신도 모르게 이런 기대감을 품었나 보다.
‘근데 아침부터 어딜 가신 거지? 설마 시험 시작까지 볼 수 없는 건가?’
“마미 넌 무슨 일이야?”
“로사 유모님 편지가 왔어요.”
“편지? 정말?!”
로사 유모의 편지라는 말에 아멜리아의 표정이 곧장 환해졌다. 마미는 아멜리아가 좋아하는 모습에 안도했다.
“시험 때문에 너무 긴장하고 계실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유모는 항상 신기해. 필요할 때마다 이렇게 편지를 보내주셔.”
“그러게요. 그럼 전 나가 있을게요. 천천히 읽으세요.”
그녀는 편지를 소중히 끌어안았다. 역시나 싱싱하게 피어 있는 제비꽃도 함께였다. 아멜리아는 미소를 그리다가 문득 의아했다.
‘근데 유모는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지? 마미가 말했나? 내가 말한 기억은 없는데…….’
지난번 받은 편지에 정신이 없어서 답장을 보내지 못했으니까.
‘뭐, 마미가 말했겠지.’
아멜리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서둘러 편지를 열었다. 편지는 언제나 그렇듯, 아멜리아에게 용기를 주고 있었다. -아가씨. 스스로 빛나야 위엄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절대 약해지지도, 흔들리지도 말고 자신을 믿으세요. 아가씨는 뭐든 잘 해내실 거니까.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언제나 제가 아가씨 곁에 있을 겁니다. 소중하고 또 소중한 나의 제비꽃이여- 유난히 이번 유모의 편지는 오늘 상황과 딱 들어맞는 것 같았다.
“유모는 정말 뭐든 다 아는 것 같아. 대공 전하도 그러시는데…….”
또다시 불쑥, 그가 떠올랐다. 그도 자신을 다 아는 것처럼 이해하고, 믿어주니까.
‘왜 자꾸 생각나는 걸까.’
요 며칠 훈련 때문에 계속 붙어 있기는 했지만. 어느 순간, 그의 존재가 이렇게 커져 버린 걸까? 뭔가 심장 한쪽에 알듯 말 듯 한 감정이 스치려고 하자, 아멜리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니까.”
그녀의 목소리가 냉랭하게 선을 그었다.
“서로 이용해야 하니까. 그래서 자꾸 생각하는 거야. 서로를 믿어야 이용할 수 있으니까.”
아멜리아는 다시금 편지를 쥐었다.
“스스로 빛나야 위엄을 세운다.”
지금은 누구보다 나를 믿어야 한다. 그래야 복수를 완성할 수 있으니까. 아멜리아는 떨리는 시선으로 활짝 피어 있는 제비꽃을 응시했다.
‘그 외 다른 감정은 필요 없어.’
그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멜리아는 마미가 다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마미, 지금…….”
하지만 눈이 마주친 것은 마미가 아닌 이클리트였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에 오롯이 그녀를 품고 있었다.
“마미를 기다린 겁니까? 불러줄까요?”
그렇게나 다짐했는데, 아멜리아는 불쑥 솟아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이상하게 너무 반가운 이 마음을.
“아뇨. 대공 전하도 기다렸어요.”
아닌 척, 슬쩍 흔들리는 그의 눈빛에 깃드는 쑥스러움이 결국 아멜리아의 입꼬리를 건드리고 만다.
“드디어 오늘이네요. 훈련 도와줘서 너무 고마워요,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이죠. 엄청 열심히 도와주고 가르쳐줬잖아요. 이 은혜를 다 어떻게 갚나?”
“그럼 가주가 된 뒤에, 정식으로 상을 줘요.”
가주가 될 거라 확신하는 그의 말에 아멜리아는 그토록 긴장했던 심장이 평온해졌다.
“걱정 안 돼요? 결국 훈련에서 한 번도 총을 쓰지 않았잖아요.”
“어떻게 해야 진짜 내 말을 믿을까.”
“네?”
“그댈 믿는다니까. 반드시 당신 옆에서 내가 찬란히 빛날 수 있도록, 그렇게 해줄 거잖아.”
오히려 평온해진 심장이 다른 감각으로 두근거렸다. 이클리트는 탁자에 놓인 제비꽃을 보며 입을 열었다.
“피오레 가문의 상징을 알고 있습니까?”
“꽃이잖아요. 사실 좀 의외긴 했어요.”
“무엇이?”
“군부의 한 축을 이루는 가문인데, 상징이 꽃이라니. 예쁘긴 하지만, 나약해 보이잖아요. 또 다른 군부인 검의 가문, 포르티셰 공작가는 민첩하고 강인함을 상징하는 매인데.”
“본디 가장 아름다운 것이 가장 치명적이고 위험하죠.”
이클리트는 침대에 놓여 있던 보라색 로브를 집어 들고는 그녀의 앞에 섰다.
“꽃은 아름답지만, 강합니다. 당신처럼.”
그가 로브를 그녀에게 입혀주며, 살짝 끌어당겼다. 아멜리아는 저도 모르게 그에게 이끌려 그의 시선에 강하게 뒤엉켰다. 숨 막히게 밀려드는 그의 향기. 그때도 느꼈지만, 제비꽃 향이 묻어난다. 아멜리아는 어쩐지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이클리트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그 움직임을 따라 그의 손끝이 그녀의 뺨을 스쳤다. 마치, 얼굴을 감싸 안아준 것처럼. 이윽고 그의 목소리가 강하게 울렸다.
“그러니 제대로 보여줘요, 당신의 꽃을. 너무 보고 싶으니까.”
보고 싶다는 그의 말에, 아멜리아는 정말로 제대로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보고 있어요. 아주 놀라운 구경을 시켜줄 테니까.”
한 점처럼 남아 있던 두려움이 전부 사라진 채로.
“항상 놀라고 있습니다.”
‘그대를 보고 있는 매 순간, 순간을.’
*** 피오레의 거대한 돔형 경기장에 수많은 귀족이 모여 있었다. 하늘처럼 높은 관중석 아래로 마치 숲 하나를 통째로 옮겨놓은 듯한 경기장이 보였다. 머스켓티어가 제대로 몸을 엄폐할 수 있도록 꾸며진 공간. 이곳에서 티어들은 실력을 겨루고, 시합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은 여기서 피오레의 새로운 가주가 결정된다. 경기장 한쪽 대기실에 네 명의 가주 후보가 섰다. 이중 가장 관심을 받는 후보는 메사리나와 아멜리아였다. 메사리나는 매끈하게 떨어지는 검은 드레스에 강렬한 붉은 머리카락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그에 비해 아멜리아는 평민들이나 입을 법한 바지 차림에 이클리트가 입혀준 보라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 메사리나는 그런 아멜리아의 모습에 비웃음을 그렸다.
‘추락할 때 추락하더라도, 레이디의 품위는 지켰어야지.’
그때, 시험의 심판자를 맡은 이사나가 걸어 나왔다. 가주 시험엔 현 가주는 참석하지 않았다. 새로운 가주를 결정하는 중요한 자리인 만큼, 이들에게 부담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피오레 티어를 이끄는 단장, 이사나 블란입니다.”
이사나는 상큼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그럼 시험 규칙을 설명하겠습니다. 간단합니다. 이곳 경기장 곳곳에 포진된 100명의 그림자 기사를 사살하시면 됩니다. 시간은 단 30분. 가장 많이 사살한 티어가 승리할 겁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많이 죽이기만 하면 되는 건가?”
아멜리아의 질문에 이사나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총을 활용해서 어떤 방법으로든 죽이시면 됩니다.”
“엄폐하지 않아도?”
“그건 상관없습니다.”
아멜리아의 말 같지도 않은 질문에 메사리나는 기가 막혔다.
‘엄폐하지 않고 어떻게 공격한다는 거야? 막상 닥치니까 불안하겠지. 그래서 시간 끄는 거고.’
“자. 그럼 더 궁금한 점 없으시죠? 그럼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아, 혹시 몰라 하는 말이지만 아무리 마법으로 만들어진 그림자 기사라도 그들이 휘두르는 칼에 맞으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조심해서 싸워주세요.”
살벌한 경고치고는 그의 목소리가 한없이 유쾌 발랄하기만 했다. 시험 순서가 정해졌다. 메사리나가 세 번째, 아멜리아가 가장 마지막으로 결정됐다. 메사리나는 아멜리아를 비웃었다.
“낄 데 안 낄 데 구분 못 한 대가를 어디 한 번 치러 봐.”
그러자 아멜리아가 메사리나의 어깨를 토닥이며 속삭였다.
“나도 그때 그 말 아직 유효해.”
“무슨?”
“너, 내가 울릴 거라고.”
*** 메사리나는 주위를 살피며 경기장 뒤편으로 걸어갔다. 그때,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당겼다. 어둠 속에서 그녀를 품에 안은 이는 에드조프였다.
“대공 전하.”
메사리나는 상기된 표정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고, 에드조프는 그런 메사리나에게 깊이 입을 맞추며 나직이 속삭였다.
“반드시 이겨라. 다음엔 피오레 가주가 된 널 안고 싶으니까.”
에드조프의 손길이 그녀의 옷깃을 벗겨낼 듯 위태롭게 움직이며 자극했다. 메사리나는 안달 난 표정으로 그에게 애원하며 속삭였다.
“걱정 말아요. 반드시 이길 테니까. 이겨서, 피오레를 당신의 손에 쥐여줄게요. 내 것이 곧 대공 전하의 것이니까.”
그녀는 에드조프를 보다 깊이 붙잡으며 차마 내뱉지 못할 말을 삼켰다.
‘아멜리아가 줄 수 있는 건 나도 줄 수 있어요. 그러니 이젠 나만 사랑해줘요…….’
*** 시험이 시작되고, 지켜보는 귀족들의 환호성이 북처럼 울리고 있었다. 이미 두 명의 가주 후보가 시험을 마친 상황. 30분 동안 그림자를 각각 10명, 15명을 쓰러뜨린 상태. 하지만 한 명은 그림자 기사에게 발각되어 부상을 입은 상황이었다. 마침내 메사리나의 순서. 하지만 사방이 고요했다. 귀족들은 몸을 바깥으로 쭉 빼고는 오페라글라스를 들고 경기장을 응시했다. 바로 그때. 탕-! 숲 전체가 들썩일 만큼, 엄청난 바람이 일면서 그림자 기사가 찢긴 채 죽었다. 귀족들은 굉장한 위력에 숨을 멈추었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한 번 더. 탕-!
“세상에…….”
“엄청 빠르잖아?”
감쪽같이 몸을 숨긴 채, 사방에서 총성이 빠르게 울리고 있었다. 그만큼 메사리나가 엄청난 속도로 마탄을 시전하고 있는 것이었다.
“와, 대단하네요. 레이디 메사리나.”
심판석에서 칼렌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흔적도 없이 죽어가는 그림자 기사를 봤다.
“10분도 안 돼서 벌써 10명이 죽었어요. 훈련 때보다 더 대단한데요? 바람의 마탄도 그때보다 위력이 더 굉장하고.”
이사나는 눈으로 시험을 심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명중률도 좋고.”
“역시, 레이디 메사리나가 저희의 새로운 주인이 되겠어요.”
“한 명 남았잖아.”
칼렌은 이사나의 말에 혀를 찼다.
“단장님은 아직도 레이디 아멜리아를 믿으세요?”
“믿는 게 아니라, 궁금한 거지. 정말로 그 훈련의 결과가 ‘그것’ 일지.”
마침내 30분이 흘러, 시험이 종료되었다. 그제야 메사리나가 어깨에 장총을 멘 채, 여유롭게 경기장을 걸어 나왔다. 귀족들은 너무나도 완벽하게 시험을 마친 그녀를 향해 감탄하며, 승자를 향한 꽃을 던졌다.
“레이디 메사리나!”
“굉장해요!”
“레이디 메사리나가 피오레의 새로운 가주가 되겠는데?”
메사리나는 살짝 가쁜 숨을 내쉬었지만, 이내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서 여유롭게 웃었다.
‘이겼어…….’
30분에 20명을 사살한 그녀의 실력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승리를 확신한 메사리나의 시선 끝에 아멜리아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손에 쥔 것은 장총이 아닌 리볼버 두 자루. 메사리나는 순간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하! 리볼버? 너무 창피해서 자살이라도 하려는 건가. 기권이야?”
지켜보는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머스켓티어는 장총밖에 못 쓰는 거 아닌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아멜리아는 모든 이들의 수군거림을 뒤로 한 채, 경기장 한가운데에 섰다. 여전히 하늘엔 구름이 가득했고,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신기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진짜 숲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네.’
아직 시작하지 않아 그림자 기사는 보이지 않았지만, 괴괴한 고요 속에 살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마침내, 시험의 시작을 알리는 뿔피리가 울렸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엄폐조차 시도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꼼짝없이 서 있었다. 지켜보던 메사리나가 어깨를 마구 들썩이며 겨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새어 나오는 이 쾌감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게 적당히 나댔어야지. 그냥 아무것도 모른 채, 죽을 때 죽었으면 좋았잖아.’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그림자 기사들이 아멜리아를 발견하고 말 것이다.
“복수도 힘 있는 사람이나 하는 거야. 넌 아무 힘이 없어, 아멜리아.”
망신을 넘어 그림자 기사에게 비참하게 당하는 꼴을 보고 싶었지만, 메사리나는 이쯤에서 품위를 챙겨야 할 것 같았다. ***
“저럴 줄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감히 성스러운 가주 시험을 이렇게 망치다니. 공작 각하의 명성에도 흠집이라고요!”
칼렌이 분개하며 뛰었지만, 이사나는 그저 여유롭게 사탕을 입에 물고서 아멜리아를 지켜봤다.
“그런가. 그 훈련은 아무것도 아니었나. 그저 피오레를 우습게 여긴 것뿐인가.”
“이사나 경.”
그때, 메사리나가 이사나를 찾아왔다. 원래 심판석엔 공정성을 위해 후보자들이 찾아와선 안 됐다. 칼렌은 멈칫한 표정으로 메사리나를 말렸다.
“레이디 메사리나, 여기 이렇게 함부로 막 오시면…….”
“나는. 괜찮지 않나요?”
하지만 메사리나는 냉한 어조로 칼렌을 막았다. 마치, 벌써 가주라도 된 것처럼. 이사나는 그 모습에 여전히 사탕을 입에 문 채, 예를 다했다.
“레이디 메사리나, 그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사랑하는 언니가 다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서요. 집안 싸움에 피오레를 끌어들인 건, 내가 사과하죠. 그러니 시험을 중단…….”
“30분이 안 지났습니다, 레이디 메사리나.”
“하지만 의미가 없는…….”
“피오레의 성스러운 가주 시험입니다. 누구도 마음대로 멈출 수는 없습니다.”
이사나는 눈웃음을 띠며 서늘하게 속삭였다.
“피오레 공작 각하의 명이나, 당사자가 포기하지 않는 한, 절대.”
메사리나는 이사나의 건방진 태도에 이를 악물었다.
“그래요. 내가 아직은, 가주가 아니니까.”
“그러니 지켜보시죠.”
*** 기대했던 귀족들도 점점 실망감과 분노를 표출했다.
“뭐 하자는 거야. 겁먹고 그냥 벌벌 떨고만 있잖아.”
“레이디 메사리나의 말이 사실이었네.”
“괜히 시간 낭비나 하고. 공작 각하만 우스워졌잖아. 쯧쯧.”
너무나도 당연한 상황에 에드조프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뭣 모르는 온실 속 화초라지만, 이렇게까지 어리광부려서야. 이클리트, 그 덜떨어진 자식까지 끌어들이고는.”
더는 볼 필요 없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그 괴물 자식을 찾아내서 돌려보내야……. 탕-! 순간, 있을 수 없는 총성이 울렸다.
“드디어 시작하는 건가?”
“그럼 뭐해. 저런 리볼버 따위로. 게다가 저 귀한 마탄으로 어딜 쏘는 거야?”
귀족들은 별거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에드조프는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
‘총을 쐈다고? 아멜리아가?’
하늘을 향해 총을 쏜 아멜리아가 눈썹을 찌푸렸다.
“여기 서 있으면 그림자 기사들이 알아서 올 줄 알았더니. 너무 늦잖아. 찾아다니긴 귀찮은데. 게다가.”
‘어서 보여주고 싶어…….’
그때, 그녀의 곁으로 살짝 바람이 불었다. 어쩐지 익숙한 향을 품고서. 아멜리아는 혹시나, 하며 바람이 부는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수많은 귀족 사이에 로브를 입은 이클리트, 그의 모습이 보였다. 아멜리아는 저도 모르게 살포시 웃고 말았다.
‘이상하게 날 부른 것 같았어.’
멀리 있어도 자신을 보고 있는 그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보여줄게요, 내가. 그러니까 잘 보고 있어요.’
내가 피울 첫 번째 꽃을. 그때, 나무가 마구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그림자 기사들이 아멜리아를 향해 우르르 몰려오기 시작했다.
“왔다.”
그녀는 태연하게 리볼버를 들었다. 탕-! 다시 울린 총성. 그림자를 맞추긴 했지만, 이미 많은 그림자 기사가 아멜리아를 포위하고 있었다. 귀족들의 표정에도 불안이 서렸다.
“저렇게 한가운데서…….”
“당하겠는데?”
그런데. 탕-! 탕-! 타당-! 총성이 끊임없이 공기를 흔들었다. 아멜리아는 그림자 기사들이 휘두르는 검을 완벽하게 피하며, 그들의 머리와 가슴을 향해 마탄을 연발로 쏘기 시작했다. 정말로 쉼 없이, 그녀의 리볼버가 불을 뿜어내고 있었다. 지켜보던 이들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그야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칼렌은 절로 온몸이 떨렸다.
“저, 저건. 어떻게 저런 일이…….”
아멜리아가 총을 쏜 순간부터, 메사리나의 눈동자가 부서질 듯 흔들리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저 계집이 어떻게…… 곧 죽을 심장으로, 어떻게…….”
끊임없이 울리는 총성에 이사나는 아멜리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전율이 일만큼, 극도의 흥분이 그를 덮치고 있었다. 그녀의 훈련을 보고 설마설마했었지만.
“저건 천재가 아닌 그냥 괴물인데?”
쉼 없이 마탄을 쏘던 아멜리아의 표정이 난감해졌다.
‘하나씩 해치우자니, 역시 너무 힘드네.’
아무리 ‘특별해진 심장’이라도 체력은 아직 완전하지 않았기에.
‘예쁜 곳을 망쳐서 미안하긴 하지만.’
아멜리아는 날아오는 검을 피하며, 그림자 기사 발목에 바람의 마탄을 쐈다. 그러자 바람이 순식간에 거대한 사슬이 되어 기사들의 움직임을 묶어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부 태워버리는 수밖에.”
그녀는 리볼버 두 개를 모아 그대로 불의 마탄을 쐈다. 쾅-!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화염의 소용돌이가 순식간에 경기장 전체를 휩쓸었다. 공기마저 태울 듯한 강렬한 열기. 모든 이들의 숨소리조차 태워버린 듯, 침묵했다. 그럴 수밖에. 연발로 쏘는 것도 모자라, 속성 마법을 하나도 아닌 동시에 두 개나 시전 했으니까. 얼어붙어 있던 귀족들이 겨우 입을 뗐다.
“레, 레이디 아멜리아는?”
“불길이 너무 심해서 안 보이는데…….”
“어, 비가.”
불지옥 같은 풍경 위로, 때마침 비가 쏟아졌다. 모든 것을 휩쓸어버린 그 폐허 속에 아멜리아가 서 있었다. 고작 10분. 아니, 기다린 시간을 제외하면 단 5분. 그림자 기사 100명, 전원 사살. 이 괴물 같은 결과 앞에 그녀는 그저 웃었다. 총성 속에 가장 강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운 채로.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