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놀랐고, 믿어지지가 않았어2021.02.08.
적절하게 쏟아지던 비가 멎으면서, 그토록 자욱했던 구름도 사라지고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마치 새로 피어난 꽃을 반겨주는 것처럼. 기묘할 정도로 날씨마저 그녀의 편이었다. 누구도 먼저 입을 떼지 못해서, 고요하고 적막한 가운데. 아멜리아는 웃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뻐서. 처음으로 자신은 이 나약한 심장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한 채, 백작가에 갇혀 지내던 레이디가 아니었다. 마침내 스스로 뭔가를 해낸 것이다.
‘그래. 내가 했어. 해냈다고!’
떨리는 숨이 목 끝까지 차오르며 아멜리아는 환희로 부들거리는 손에 힘을 주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 건강해진 심장은 조금 특별해졌다. 1년이란 유효기간만 신이 주신 게 아니었다. 마탄을 무한으로 만들어도 지치지 않는 엄청난 마나를 심장에 깃들게 했다. 게다가 속성 마법을 연달아 시전할 수 있는 마법 능력까지. 죽음만을 기다리던 시한부 레이디에게 새 삶뿐만 아니라 능력까지 더해준 것이다. 물론 이 능력엔 대가가 필요하지만. 기한은 딱 1년뿐이고. 그래도 그녀에겐 충분했고, 간절했다. 처음부터 그녀는 엄폐술도, 저격술도 필요 없었다.
‘연발이 가능하니, 원거리보단 단거리가 유리했지.’
오히려 엄폐술과 저격술이 다소 미숙했기에 원거리가 그녀에겐 힘들었다.
‘대신 검과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체력과 민첩함이 필요했어.’
아멜리아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귀족들 사이로 그를 찾기 시작했다.
‘대공 전하 덕분에 가능했어.’
하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있었던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뭐지?’
아멜리아는 살짝 굳어진 시선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디 가셨지?’
이상하게 그에게 보여주고 싶었고, 이상하게 그와 이 기쁨을 나누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아멜리아는 그가 몹시, 보고 싶었다. 아멜리아가 이클리트를 찾기 위해 막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마침내 엄청난 환호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세상에! 이건 최고야!”
“레이디 아멜리아!!!”
모두가 아멜리아의 이름을 불렀다. 굳이 심판하지 않아도 이미 결과는 정해진 듯했다. *** 경기장 가득 몰아치는 아멜리아의 이름에 이사나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하늘을 응시했다.
“괴물 대공과 괴물 가주. 누가 부부 아니라고 할까 봐, 날씨도 이렇게 도와주네.”
이사나의 속삭임에 굳어 있던 메사리나가 흠칫했다. 칼렌도 이제야 정신을 차리며 입을 열었다.
“가, 가주요?”
“당연하지. 저 모습을 보고도 몰라? 저 많은 귀족이 다 인정했잖아. 오직 실력으로. 우리의 새로운 주인은 정말 괴물일 거야. 그 어떤 머스켓티어가 와도 못 이길…….”
“웃기지 마!”
완전히 무너진 메사리나의 목소리가 이사나의 모든 말을 부정했다.
“아멜리아가 가주라고? 저 계집은 곧 죽어. 죽는다고. 시한부라고!”
인정할 수 없었다. 누가 가주라는 건가. 도대체 저 다 죽어가는 계집이 어째서! 뭔가가 잘못됐다.
‘내가 가주야. 내가, 내가 피오레 가주라고!’
“저 계집이 무슨 속임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이건 아니야.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이사나는 가면 하나가 완전히 벗겨진 듯, 분노하는 메사리나를 한숨을 쉬며 바라보았다. 옆에서 칼렌도 움찔하며 슬그머니 이사나의 뒤에 숨었다. 메사리나 체자렛. 사교계에 소문으로는 무척이나 청초하고 우아하며 사랑스러운 이미지인데. 지금 보니 소문은 믿을 게 못 됐다. 애당초 레이디 아멜리아가 레이디 메사리나를 구박한다고 들었는데.
‘저 모습을 보니 완전 반대 같은데?’
여자는 천의 얼굴을 가졌다고 제랄드가 그러더니, 완전히 사실이었다. 이사나는 제 귀를 피곤하게 하는 메사리나의 징징거림을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심판관으로서 다시 심판해.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내가 아멜리아의 가족이야. 동생이라고. 처음 태어난 순간부터 시한부였는데 어떻게 저게 가능하다는 거야!”
“그럼 이제 시한부가 아닌 모양이죠.”
“뭐?”
이사나는 메사리나를 향해 싱긋 웃었다.
“기적처럼 심장이 다 나았나 보지. 물론 가족들에게 말하지 못할만한 사정이 있었던 것 같고.”
메사리나는 이사나의 말에 멈칫했으나 물러서지 않았다.
“후, 훈련도 제대로 안 했어.”
“무슨 훈련을 하든 작전을 세운 그 사람 마음이죠.”
“그래서. 저게 가능하다고? 말도 안 돼. 인정할 수 없어. 뭔가 수를 쓴 거야.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어. 나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이사나는 안타깝다는 듯 웃으며 흐트러진 자신의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
“평범한 티어는 불가능하죠. 노력하면 되는 것도 지금은 필요 없습니다. 이 자리는 노력이 아닌 결과를 보여야 하니. 당신의 패배입니다, 레이디 메사리나.”
그는 마지막으로 망토를 두른 채, 심판석을 빠져나갔다. 칼렌도 눈치를 살피며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 홀로 남겨진 메사리나의 움켜쥔 손바닥을 타고 주르르 피가 흘러내렸다. 그에 따라 그녀의 입술이 하얗게 짓이겨졌다.
“뭔가 잘못됐어. 아니야. 말도 안 돼. 아멜리아가 가주라고? 내가 졌을 리가 없어!”
*** 그녀를 향해 쏟아지는 환호성에 아멜리아는 점점 머리가 아파졌다. 저들의 손바닥을 뒤집는 듯한 거짓된 축하와 허황한 관심을 바란 게 아니었다. 그녀가 바라는 관심과 축하는 따로 있었으니까.
‘어디 계시는 거지? 내가 여기 있는데, 마음대로 떠났을 리 없고. 무슨 일이 있으신가?’
아멜리아는 걱정되는 마음에 다시 걸음을 돌렸다. 그런 그녀의 앞으로 이사나가 걸어왔다. 시험 전 봤던 모습과는 묘하게 달랐다. 제대로 복장을 갖추고 있었고, 한 손에는 장총도 들고 있었다. 게다가 피오레의 모든 머스켓티어들과 함께였다. 아멜리아는 멈칫했고, 환호하던 귀족들도 점점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사나는 그녀와 적정 거리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여전히 해맑게 웃으며 그녀에게 예를 갖추었다.
“레이디 아멜리아.”
“무슨 일이지?”
“시험은 종료되었습니다. 레이디 아멜리아께서 그림자 기사를 전원 사살하셨기에, 우승에 경의를 표합니다.”
우승. 그 한마디가 처음으로 조금 실감 났다.
“저희 티어들은 레이디 아멜리아를 저희의 새로운 주인으로 인정하고 따를 것입니다.”
말을 맺은 이사나는 아멜리아 앞에 장총을 세우며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뒤에 있던 다른 티어들도 아멜리아에게 예를 갖추며 고개를 숙였다. 물론 따로 작위 수여식이 있겠지만, 가문의 티어들은 시험에서 승리한 이를 곧장 새로운 가주로 인정하고, 지키고 따르겠다는 맹약을 보였다. 관중으로 지켜보고 있는 모든 귀족에게 보여주는 거였다. 피오레의 새로운 가주가 선택되었고, 이제부터 그 권능이 부여된다고 말이다. 아멜리아는 숨이 무겁게 치밀었다.
‘드디어 시작인가.’
고개 숙인 티어들 너머로 메사리나의 모습이 보였다. 아멜리아는 일부러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대들의 맹약을 피오레의 새로운 가주로서 기꺼이 받겠노라.”
아멜리아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메사리나의 표정이 뒤바뀌었다. 결국, 견디지 못한 메사리나가 경기장을 떠났다. 아멜리아는 그런 메사리나를 뒤따라가서는 눈물이 잔뜩 고여 있는 메사리나를 쳐다봤다. 메사리나는 아멜리아에게 무슨 말도 하지 못한 채, 파들거리는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두 눈동자에 가득 걸린 눈물에 아멜리아는 절로 입꼬리가 휘늘어졌다.
“네가 진심으로 우는 모습을 이제야 보는구나. 생각보다 훨씬 초라한 꼴이네.”
매번 제 앞에서 울었던 눈물은 온통 거짓투성이였다. 하지만 지금 보는 눈물은 증오와 시기가 뒤엉킨, 진심 어린 눈물이었다.
“아멜리아…….”
메사리나는 겨우 목소리를 읊조렸다.
“대체 무슨 속임수를 쓴 거야. 네가 이럴 순 없어. 이럴 리 없지. 남들은 몰라도 나는 아는데. 넌 죽어야 하잖아. 그래야 하잖아!”
“아! 그게 있었지. 미안하네. 나 때문에 부인들 앞에서 네가 거짓말쟁이가 되게 생겼잖아. 네가 원하면 해명해줄게.”
“뭐?”
“심장이 다 나아버렸거든. 그래서 나, 안 죽어.”
아멜리아의 말에 메사리나는 헛숨을 삼켰다.
“마, 말도 안 돼…….”
“그러니까 그 바람조차 내가 가져갈게.”
아멜리아는 메사리나의 어깨를 저번처럼 꽉 잡고서 토닥였다.
“하나하나 전부 다 내가 가져갈 거야. 네가 빼앗으려고 했던 거, 이번엔 네가 제대로 다 뺏겨 봐. 아니다. 애당초 네 것이 아니지. 전부 제자리를 찾아가는 거지.”
“너!”
메사리나가 아멜리아의 손을 떼려고 했지만, 아멜리아는 더욱 세게 그녀를 붙잡았다.
“아직은 아멜리아 체자렛이지만, 다음엔 아멜리아 피오레야.”
“…….”
“그러니 그 시선도, 말도 봐주지 않을 거야. 제대로 내게 예를 갖춰. 내게 손대는 것도, 심지어 그 손을 떼는 것도 내 허락이 필요할 거다.”
바들거리는 메사리나 앞에 아멜리아는 가볍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 하나 줄 건 있다. 바스티얀 대공. 이제 너 가져.”
아멜리아는 메사리나의 손을 차갑게 쳐내고는 걸음을 당겼다. 남겨진 메사리나의 눈가에 고였던 눈물이 끝내 주르르 흘러내렸다. 처음, 아멜리아의 앞에 보인 눈물. 그건 결국 분노이자 원망이며 또 다른 복수의 시작이었다.
‘다 나았다고? 그 심장병이? 말도 안 돼. 마법이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도 아니고. 분명 뭔가가 있어.’
“그래, 제자리를 찾아가야지. 네가 죽음으로써 끝나게 될 그 제자리를, 반드시 찾아가야지.”
*** 메사리나를 뒤로 한 채, 아멜리아는 잠시 걸음을 머뭇거렸다. 이대로 관중석으로 갈 수는 없었다. 지금 가면 혼란스러워질 것 같았으니까.
“어디 계시지? 호네스 궁에 계시나? 일단 마미를 찾으면 될 것 같…….”
돌아서서 달리려던 아멜리아가 우뚝 멈췄다. 그녀의 시선 끝에 로브를 입고 서 있는 이클리트가 보였다. 이상하게 아멜리아와 묘하게 거리를 둔 채로. 하지만 아멜리아는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채 곧장 표정이 환하게 변했다. 그저 마음이 들떴다. 시험을 끝내고, 처음으로 솔직하게 이겼다는 감정을 그대로 보이고 싶었다.
“대공 전하! 제가 이겼어요!”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에게 달려가서는 외쳤다.
“제대로 봤어요? 어때요? 놀랐어요? 대공 전하께서 가르쳐준 대로 진짜 해냈어요! 정말 대공 전하가 아니었으면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물론 아직 체력이 완벽하진 않았지만. 그래서 그런데 앞으로도 도와줄 수 있죠? 진짜 선생님으로 모실 테니까!”
마치 자랑하듯 말하는 아멜리아 앞에 이클리트는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내가 이겼어요. 가주가 됐다고요. 아까 티어들도 그렇고. 이제 시작이에요. 내가 대공 전하를 이제 온전히 빛나게 할 테니까…….”
아멜리아는 이제야 그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대공 전하?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불안으로 흔들리자, 이클리트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제대로 봤고, 많이 놀랐습니다.”
그녀는 움찔했다. 혹시, 그가 기분 나빠하는 건 아닐까. 자신을 믿는다고는 했지만, 시험 전날까지 자신은 총을 쓰지 않았다. 분명 불안하고 걱정했을 텐데. 적어도 그에겐 전부 말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자신에게 이런 능력이 있다는 걸.
‘설마 내가 대공 전하를 못 미더워서 그랬다고 생각하진 않으시겠지?’
“대공 전하, 혹시 제가 제대로 말하지 않아서 기분 나쁘신 건…….”
“아니요. 오히려 지금도 조금 믿어지지 않아서요.”
“아! 제가 가주가 된 거요? 사실 저도 아직은 좀 얼떨떨한데…….”
좁히지 않았던 거리를 이클리트가 단숨에 좁히고서 그녀의 한쪽 뺨을 감쌌다. 그 손길에 따라 아멜리아는 그의 얼굴을 보려다 멈춰버렸다.
“더는, 아프지 않은 겁니까?”
뜻밖의 말에 아멜리아의 시선이 떨렸다.
“……네?”
“심장이, 아프지 않아? 죽지 않는 거야? 그래?”
“……안 아파요, 이제. 죽지도 않고요, 나.”
아멜리아에게 닿은 그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그 떨림을 느낀 아멜리아가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본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의 손끝을 타고 눈동자가 젖은 채 흔들리고 있었다. 몹시 슬퍼 보이면서도, 기뻐 보이고. 너무 벅차고 애틋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보고 있는 자신조차도 그 감정에 동요되어 심장이 마구 저렸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그녀에게로 밀려들었다.
‘대체, 왜…….’
“한 번만 안겠습니다.”
무슨 말을 할 새도 없이 이클리트가 아멜리아를 꽉 끌어안았다. 정말로 빈틈없이, 그의 가슴과 그녀의 가슴이 맞닿아 서로의 심장 소리가 온몸을 채우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너무 당황했지만 차마 그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필사적인 그의 몸짓이 뭔가를 확인하듯 간절했다. 이윽고 그의 목소리가 귓가로 젖어 들었다.
“다행이야. 정말. 더는 아프지 않아서…… 진짜로 괜찮아져서. 너무 놀랐어.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았어…….”
그는 자신이 해낸 그 능력에 놀란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주에 오른 것이 믿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심장이 건강해진 것에. 더는 아프지 않은 것에. 자신이 죽지 않는다는 그 사실에 안도하고 있었다. 그 감정에 아멜리아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그에게 한 번도 자신의 심장에 대해서 제대로 말해본 적이 없었다. 많이 아프다는 것도.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도.
‘대체 왜. 당신이 뭔데. 왜 당신이 이렇게 안도해? 왜 좋아하는 건데? 가족조차 날 버렸는데. 내가 죽기를 바라는데. 아무도, 아무도 관심이 없는데 도대체 당신은 왜…….’
겨우 고개를 든 이클리트가 오롯이 아멜리아를 보며 웃었다. 몹시,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왜 이렇게까지, 내가 살아 있음을 기뻐하는 건데…….’
묘하게 익숙한 온기. 낯설지 않은 느낌. 특히, 이 제비꽃 향기가. 아멜리아는 울컥울컥 치미는 숨을 겨우 모아 속삭였다.
“대체 당신, 누구예요?”
“…….”
“혹시 예전부터 절, 알고 계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