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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17/199)

17화.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2021.03.01.

결 좋은 호두나무 테이블을 앞에 두고, 아멜리아는 로사 유모에게 편지를 썼다. 그동안 편지는커녕 답장도 하지 못해서 내내 신경 쓰였었다.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종이가 모자랄 지경이지만, 가장 중요한 내용은 하나였다. -유모. 내게 제비꽃의 기적이 일어났어. 내가 결혼하게 됐거든. 그저 축하해줘- 계약 결혼이지만, 굳이 그걸 쓸 필요는 없다. 유모에겐 자신이 행복해하는 모습만 봤으면 하니까. 게다가 사실, 마냥 불행하지 않았다. -날 지켜주고, 지켜봐 주는 건 유모뿐이었는데. 유모의 편지만이 내 편이었는데. 또 곁에 있어 줄 내 편이 생겼어- 비록 서로 이용하는 관계지만. 가족이 되어주겠다고. 마지막까지 편이 되어주겠다고 말해준 사람. 처음엔 정말로 이용 목적만 서로 같다면, 다른 건 중요하지도 원하지도 않았다. 그가 소문처럼 잔인하고 냉혹한 성품이라도. 오직 복수만을 생각하고 견디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소문과 전혀 달랐고, 항상 곁에 있으면서 힘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자꾸 기대게 된다.

1655370154611.jpg‘너무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하지만 이 정도는 이용해도 되지 않을까. 욕심내도 되지 않을까. 그분이 자신에게 힘을 주는 것처럼. 자신도 그분을 반드시 황제로 만들어서 빛나게 할 테니까. 처음 마음먹은 복수와 함께 점점 진심이 되어가는 게 있었다.

1655370154611.jpg‘더는 대공 전하께서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제라도 황자로서, 황자답게. 정말로 황제 폐하가 되셨으면 해.’

아멜리아는 유모가 항상 자신에게 해주는 말처럼, 그녀 역시 꼭 해주는 말로 편지를 마무리했다. -나의 매일은 유모가 있어서 항상 선물처럼 특별해. 편지를 쓰고 있는 이 순간조차도 소중할 만큼. 나의 오늘을 행복하게 해줘서 고마워. 내일도 그럴 거야. 보고 싶어. 항상 아주 많이, 사랑해- 펜을 내려놓는 아멜리아의 눈가가 잔잔하게 떨렸다. 항상 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더욱 유모가 보고 싶었다.

1655370154611.jpg“북부령에 갈지도 모르는데. 그때 유모를 꼭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녀는 편지를 소중히 봉했다. 유모는 마법 통신구가 없으니, 아마 늦게 도착할 거다.

1655370154611.jpg“이미 결혼식 끝나면 도착하겠네.”

그녀는 살짝 긴장된 마음을 다독이며 창가를 응시했다. 그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 하얗고 둥근 지붕의 건물이 보였다. 바로 피오레 저택 안에 마련된 대신전이었다. 내일 저곳에서 결혼식이 거행된다.

1655370154611.jpg“그러고 보니 그 웨딩드레스를 결국 한 번도 못 봤네.”

축복에 행여나 부정 탈 수 있다며, 당일까지 철저히 보관해야 한다는 게 마미의 설명이었다. 공작가는 웨딩드레스 하나도 이렇게 중요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655370154611.jpg“웨딩드레스보단 그 축복의 꽃이 중요하겠지.”

그렇게 귀한 축복이면 다 같이 나누면 좋을 텐데. 사실 처음부터 아멜리아는 이 부분이 살짝 걸렸다. 태양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비추는데, 태양신의 축복을 선택된 귀족만이 누린다니. 어차피 그날 영지민들 대부분이 모인다면 함께 축복을 받아도 되는 거 아닌가? 이름뿐인 백작 영애였던 자신에게 사교계는 영 어려운 곳이다. 하지만 그래도 잘 치러내야 했다.

1655370154611.jpg“결혼식이라…….”

한때는 간절히 바랐으나, 비참하게 잃어야 했던 결혼이라는 것. 결국 이렇게 가짜로 치르긴 하지만, 그래도 맘이 아프지 않은 건 대공 전하 덕분이다. 아멜리아의 시선 끝에 유모가 준 제비꽃과 제비꽃밭에서 가져온 제비꽃이 은은한 향을 풍기고 있었다. 제비꽃은 항상 자신에게 위로였고, 혼자가 아니라는 유일한 다정함이었다. 근데 자꾸만 그에게서 그 제비꽃을 느끼게 된다.

1655370154611.jpg‘설레면 안 되는데, 괜히 들뜨게 돼.’

하지만 이 감정이 나쁜 건 아니니까.

1655370154611.jpg“잘해보자. 어떻게 보면 가주로서 처음 인사하는 자리기도 하니까.”

현재 초보 가주인 아멜리아에게 가장 필요한 건 평판이었다. 황위에 올라야 할 클리오 대공 전하도 마찬가지. 그러니 내일 결혼식을 아주 성대하고 무사히 잘 끝내야만 했다. *** 대신전에서 두 명의 신관이 웨딩드레스에 장식된 축복의 꽃을 마지막까지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16553701546146.jpg“하아. 드디어 끝났군.”

16553701546146.jpg“내일 결혼식까지 끝나야 무사히 끝난 거지.”

16553701546146.jpg“그렇긴 하지만.”

웨딩드레스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온 두 신관 앞으로 머스켓티어 두 사람과 다른 신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16553701546146.jpg“지금부터는 저희가 여길 지키겠습니다.”

머스켓티어의 말에 신관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신관에게 말했다.

16553701546146.jpg“행여 축복의 꽃에 문제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라.”

16553701546146.jpg“예.”

그렇게 두 신관이 사라지고, 남은 한 신관은 묘한 표정으로 웨딩드레스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 결혼식 당일. 초대받은 귀족들이 모두 대신전으로 몰려갔다. 비록 대신전에 들어가진 못하지만, 영지민들도 태양을 상징하는 노란 옷과 카렌듈라 꽃을 들고서 공작가 바깥을 에워싸고 있었다. 모두 새 가주의 결혼을 축하하고, 조금이라도 축복을 받기 위한 걸음이었다. 결혼식에 에드조프 역시 모습을 드러냈다. 황금장식이 멋스러운 벨벳 코트를 입은 에드조프는 따사로운 햇살 아래 은빛 머리카락이 찬란히 빛나며 더없이 우아한 귀공자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역시나 귀족들은 아부와 아첨이 담긴 시선으로 에드조프에게 예를 취했다.

16553701574346.jpg“바스티얀 대공 전하!”

16553701546146.jpg“이렇게 직접 오실 줄 몰랐습니다.”

16553701546146.jpg“저희도 마음이 참으로 불편합니다. 클리오 대공께서 북부를 이렇게 마음대로 비우셔도 되는지. 폐하의 심기가 불편하실 텐데…….”

은근슬쩍 이클리트를 헐뜯는 말에도 에드조프는 지난번처럼 감정을 깊이 드러내지 않고 가볍게 웃었다.

16553701574365.jpg“폐하의 심기가 불편하실 것이 무엇이오. 단지 황자의 결혼일 뿐. 아무것도 바뀔 건 없소.”

에드조프는 폐하의 심기조차 건드리지 못하는 황자일 뿐이라며, 이클리트를 돌려서 낮추었고 귀족들은 그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16553701546146.jpg“물론입니다. 당연하지요.”

16553701546146.jpg“바스티얀 대공 전하께서 폐하의 곁에 계시는 게 더 중요하지요.”

여유롭게 시선을 돌리던 에드조프의 눈길이 멈췄다. 그곳에 메사리나가 있었다. 시험 이후 마주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메사리나는 그를 향해 살포시 웃었으나, 에드조프가 무심히 시선을 돌려버리자 그녀의 눈빛이 굳어졌다. 에드조프는 계속해서 다가오는 귀족들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16553701574365.jpg“잠시 실례하겠소.”

에드조프가 걸음을 뒤로 돌리자, 메사리나가 곧장 그의 뒤를 따라왔다. 인적이 드문 곳에 당도한 에드조프는 메사리나를 보며 차갑게 웃었다.

16553701574365.jpg“내가 그댈 과소평가했었군. 이 자리에 올 줄 몰랐는데. 패자치곤 당당해.”

에드조프의 날카로운 말에 메사리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16553701602204.jpg“그래서. 제게 실망해서 피하시는 겁니까?”

16553701574365.jpg“실망할 것도 없었어.”

단호한 한마디에 메사리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눈물이나 동정으로 그를 잡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그에게 필요한 여인이 되어야 한다. 그가 욕심낼 수 있는 여인이!

16553701602204.jpg“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하나 무너뜨려서 결국엔 제가 전부 제자리로 돌려놓을 겁니다.”

메사리나는 독하게 감정을 삼켰다.

16553701602204.jpg“오늘 여기서 새로운 피오레의 가주는 더럽혀질 테니까. 사람들의 시선과 혀끝과 손가락에.”

에드조프는 메사리나가 이 결혼식에 뭔가를 꾸몄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저 짙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16553701574365.jpg“그래. 그럼 난 그저 즐기면 되겠군.”

에드조프는 메사리나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서 자리를 떠났다. 그 모습에 메사리나는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했다.

16553701602204.jpg‘괜찮아. 이 결혼식은 제대로 치러지지 못해. 아멜리아의 꼴만 아주 우스워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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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53701632108.jpg“가, 가주님…….”

비올렛궁에서 치장을 하고 있던 아멜리아는 마미의 하얗게 질린 표정에 시선이 굳어졌다.

1655370154611.jpg“무슨 일이야? 왜 그래?”

16553701632108.jpg“그, 그게…….”

마미의 말을 들은 아멜리아는 곧장 대신전으로 달렸다. 대신전에는 마미보다 더 사색이 된 신관들과 머스켓티어, 그리고 하녀들이 바들바들 떨면서 서 있었다.

1655370154611.jpg“대체 무슨 소리지? 웨딩드레스가 엉망이 되다니?”

아멜리아의 목소리에 웨딩드레스를 지키던 이들은 더욱 파리해져서는 곧장 그 자리에 엎드렸다.

16553701546146.jpg“죄송합니다! 저희의 불찰입니다. 목숨으로 갚겠습니다!”

1655370154611.jpg“무슨 목숨을 이런 거로…….”

아멜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웨딩드레스를 보관하고 있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 엉망이 된 웨딩드레스가 보였다. 엉망이라기보단, 축복의 꽃들이 전부 뜯겨 있었다.

1655370154611.jpg“하도 귀에 딱지가 앉게 들어서, 실물을 보길 기대했는데. 이렇게 보게 되네.”

잠시 후, 대신전에 도착한 케이트와 이사나의 표정 역시 경악으로 굳어졌다. 아멜리아는 침착하게 신관에게 물었다.

1655370154611.jpg“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16553701546146.jpg“어제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는 멀쩡했는데…….”

1655370154611.jpg“했는데?”

16553701546146.jpg“다, 당직이었던 신관이 한 명 사라졌습니다.”

1655370154611.jpg“사라졌다라…….”

아멜리아는 뒷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1655370154611.jpg‘일부러 망친 거구나. 오늘 결혼식에서 가장 중요한 축복의 꽃만 완전히.’

그녀는 시간을 확인했다. 곧 있으면 결혼식을 시작해야 했다.

1655370154611.jpg“어쩔 수 없지. 이걸 못 입으면 다른 걸 어서…….”

1655370166038.jpg“안 됩니다!”

그때, 케이트가 차갑게 굳어진 표정으로 아멜리아의 말을 단호하게 막았다.

1655370166038.jpg“가주님께서는 이걸 그저 단순히 보통 웨딩드레스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마미. 가주님께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나!”

마미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16553701632108.jpg“죄송합니다.”

아멜리아는 그런 마미 앞을 막고서 케이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1655370154611.jpg“마미에게 그럴 필요 없어. 나도 저 축복의 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인지 계속 들었으니까.”

1655370166038.jpg“들으셨으면서 이러십니까?”

케이트는 결코 물러설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1655370166038.jpg“축복의 꽃 없이는 안 됩니다.”

1655370154611.jpg“하지만…….”

1655370166038.jpg“공작가의 결혼식은 단순한 결혼식이 아닙니다. 하나의 성스러운 의식입니다. 제대로 치러내지 못하면 피오레의 위신이 떨어지고, 명예와 평판에 흠이 갈 겁니다.”

케이트는 완강한 어조로 외쳤다.

1655370166038.jpg“특히, 작위 수여식을 앞에 두고 계신 가주께선 이런 결혼식 하나 제대로 치르지 못한 가주로 소문이 날 거란 말입니다.”

  *** 결혼식이 열리는 피오레의 대신전은 평소엔 둥근 지붕이었지만, 특별한 의식이 있는 날엔 지붕이 열리면서 하늘을 볼 수 있는 구조가 되었다. 언제나 태양신과 함께한다는 의미였다. 대신전 안에서는 귀족들이 모여 있었고, 공작가 바깥에는 영지민들이 웅성였다. 그들의 공통된 관심사는 오직 하나. 오직 이날을 위해 축복의 꽃이 가득 수놓아진 웨딩드레스였다.

16553701546146.jpg“너무 오랜만에 이런 축복 의식에 참여하게 됐네.”

16553701546146.jpg“그러게. 공작가에서 결혼식은 정말 오랜만이니까.”

16553701546146.jpg“물론 남편 되실 분이 좀 그렇긴 하지만.”

16553701546146.jpg“그래도 기대돼. 축복의 꽃이 얼마나 아름다울까. 이번 새 가주에 오르실 분도 엄청나다고 들었는데.”

16553701546146.jpg“피오레에 오랫동안 태양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설렘과 기대가 가득한 분위기 속에서 메사리나는 잔인하게 웃었다.

16553701602204.jpg‘이토록 기대 만발인 축복의 꽃이 망가져서 어쩌나. 후훗.’

지금쯤, 아마 난리가 났을 것이다. 아마 아멜리아는 아주 사소한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보수적인 귀족의 세계에서 이건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

16553701602204.jpg‘이들 모두가 기대하고 있어. 이 기대를 넌 깨뜨리는 거다, 아멜리아. 네가 완전무결한 가주가 아니기 때문에. 가짜이기 때문에. 축복의 꽃 없이 결혼식을 강행해도 문제, 결혼식을 취소해도 문제가 될 거야!’

  ***

1655370166038.jpg“이대로 결혼식을 진행할 수는 없습니다.”

케이트의 말에 신관들이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다.

16553701546146.jpg“그럼 취소하는 건가?”

16553701546146.jpg“차라리 취소가 낫지 않나. 축복의 꽃이 없으면, 자칫하다간 저주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16553701546146.jpg“하긴. 안 그래도 클리오 대공 전하의 결혼 소식에 황제 폐하께서 아무 말이 없으셔서 이런저런 소문이…….”

가만히 듣고 있던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에 대한 말은 참지 못한 채 나섰다.

1655370154611.jpg“클리오 대공 전하와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말을 가려서 하세요.”

16553701546146.jpg“죄, 죄송합니다.”

신관들은 입을 다물었으나, 케이트는 이것이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1655370166038.jpg“아마 다들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1655370154611.jpg“하지만 이번 일이 어떻게 클리오 대공 전하와 관련 있단 말인가!”

1655370166038.jpg“평판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분명 이번 일에 다들 동요하고 말 테니까요.”

케이트의 말에 아멜리아의 눈빛이 점점 더 냉정해졌다.

1655370154611.jpg‘그럼 동요하지 않게 하면 되잖아. 망가진 꽃을 다시 피우면 되잖아.’

16553701745689.jpg“무슨 일이지?”

그때, 이클리트가 뒤늦게 이쪽으로 걸어왔다. 마미는 곧장 그에게 다가가 상황을 얘기해줬으나, 이클리트는 너무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16553701745689.jpg“고작 웨딩드레스 아닌가? 피오레의 이름이 고작 저런 드레스에 흔들린다는 건가?”

이클리트의 말에 케이트의 시선이 차가워졌다.

1655370166038.jpg“클리오 대공 전하, 아무리 대공 전하시지만 피오레를 모욕하는 발언입니다.”

16553701745689.jpg“오히려 그대가 피오레를 우습게 보는 듯한데.”

1655370166038.jpg“대공 전하!”

이클리트는 오직 아멜리아를 보며 날카롭게 말했다.

16553701745689.jpg“평판도 명예도 스스로 빛나야 생기는 것.”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의 말에 멈칫했다. 그가 하는 말은 지난번, 유모가 편지에 적어준 말과 비슷했다.

16553701745689.jpg“애초에 결혼식은 내게 큰 의미가 없다. 해야 한다고 해서 하는 것뿐. 오히려 결혼식 이후가 더 중요하지. 그대도 이 결혼식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의 물음에 엷은 미소를 그렸다.

1655370154611.jpg“아니요. 애초에 그냥 결혼식이고, 웨딩드레스일 뿐이죠.”

16553701574346.jpg“가주님!”

모두가 경악했지만, 아멜리아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1655370154611.jpg“이걸 만들어준 이들, 또 이걸 지켜준 이들, 그대들은 의무를 다했어. 이젠 내 차례다. 결국 평판도, 명예도, 내가 세우고 내가 지켜야 하니까.”

아멜리아는 자신 있게 웃었다.

1655370154611.jpg“그게 가주인 내 의무니까.”

마미는 그녀의 말에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16553701632108.jpg“가주님의 뜻이 그렇다면. 명을 내리세요.”

1655370154611.jpg“예정대로 결혼식은 진행하겠다. 다른 드레스를 가져와. 아무거나 상관없어. 조금이라도 지체하지 않게 서둘러라.”

16553701632108.jpg“명 받들겠습니다, 가주님.”

마미와 하녀, 하인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케이트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멜리아를 보았다.

1655370166038.jpg“가주가 이끄는 첫 의식입니다. 기대만큼 되지 못하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1655370154611.jpg“그대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 하지만 고작 결혼식이야. 가장 중요한 의식을 성공적으로 치르면 되는 거지.”

신관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16553701546146.jpg“아무리 그래도 축복의 꽃 없이는…….”

1655370154611.jpg“누가 꽃이 없다고 했지?”

16553701546146.jpg“……예?”

아멜리아는 이사나를 향해 말했다.

1655370154611.jpg“그대가 해줘야 할 일이 있다. 가능하겠는가?”

아멜리아의 부탁을 이사나가 듣고서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16553701803505.jpg“가능하겠지만. 준비하려면 시간이 조금 필요합니다.”

16553701745689.jpg“그건 내가 맡지.”

이클리트가 앞으로 나섰다. 아멜리아는 잠시 멈칫했지만, 그를 믿었다.

1655370154611.jpg“그럼 그렇게 알고 준비해다오. 오늘, 모두에게 제대로 축복의 꽃을 보여줄 테니.”

  *** 대신전으로 나아가는 문 앞에 선 아멜리아는 떨리는 숨을 삼켰다. 이클리트는 당연하다는 듯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급하게 준비한 드레스라서, 웨딩드레스치고는 조금 초라하긴 했다.

1655370154611.jpg“대공 전하께는 엉망인 모습을 자주 보여주게 되네요. 지난번 훈련 때도 그렇고. 적어도 결혼식에선 예쁜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는데.”

16553701745689.jpg“아름답습니다.”

이클리트는 단호하게 말했다.

16553701745689.jpg“이곳에서 그대가 가장 아름다울 겁니다. 시간도 멈춰버릴 만큼.”

아멜리아는 너무 단호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1655370154611.jpg“시간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정말 시간을 어떻게 끌죠? 물론 내가 이 모습으로 나가면 소란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긴 할 테지만…….”

16553701745689.jpg“말하지 않았습니까. 너무 아름다워서 시간이 멈춰버릴 거라고.”

1655370154611.jpg“네?”

16553701745689.jpg“나만 믿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해요.”

그때, 문이 열리는 나팔소리가 들렸다. 이클리트는 아멜리아의 손을 한번 꽉 잡았다가 놓아주었다. 함께 가는 줄 알고 그녀는 당황했으나, 이클리트의 말을 믿고 홀로 앞으로 걸어갔다. 아멜리아를 기다리던 모든 이들이 밋밋한 웨딩드레스를 보고 당황했다.

16553701546146.jpg“저게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축복의 꽃은? 신관님의 축복은?”

16553701546146.jpg“설마 축복의 꽃이 망가진 건가?”

16553701546146.jpg“정말? 너무 불길한데…….”

16553701546146.jpg“이래서야 피오레 가주의 자질이…….”

날카로운 시선과 혀끝과 손길이 아멜리아에게로 쏟아졌다. 메사리나는 희열에 찬 표정으로 더럽혀지는 그녀를 응시했다.

16553701602204.jpg‘사소한 것 하나가 진창을 만드는 거지. 오히려 사소한 것 하나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면 더더욱 무능하다는 소리를 듣는 거야. 저건 용기가 아니야. 무모함일 뿐이라고!’

아멜리아는 주변의 모든 시선을 무시한 채 더욱 떳떳하게 걸었다. 사실 그녀는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이 상황이 만족스러웠다.

1655370154611.jpg‘이 정도로 소란스러우면 제법 시간 끌겠는데?’

바로 그때.

16553701745689.jpg“소중하고 소중한 나의 꽃이여.”

아멜리아는 귓가에 파고드는 익숙한 속삭임에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주변에서 다른 탄성이 터지기 시작했다.

16553701546146.jpg“세상에!”

16553701546146.jpg“꽃이야! 웨딩드레스에 꽃이 피었어!”

아멜리아의 걸음걸음을 따라, 그녀의 드레스 자락에 푸른빛의 꽃이 우아하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너무 아름답다 못해 성스럽기까지 한 기적에 모두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치,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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