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짓궂은 경고2021.03.15.
다 잊어버리겠지. 이클리트는 그녀의 취기를 붙잡고, 처음으로 조금 솔직하게 읊조렸다.
“당신이 예쁘니까. 그런 당신만 보고 있으니까, 그런 겁니다.”
평생 누군가에게 괴물이고, 짐승이며, 소름 끼쳤던 이 눈을 예쁘게 봐주는 당신이기에. 그런 당신만을 보고 있기에. 제 눈이 예쁘다면, 이유는 그것밖에 없었다. 아멜리아는 그의 속삭임에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환하게 웃었다. 그녀의 미소를 따라서 이클리트 역시 살포시 입가로 곡선을 그렸다. 그녀 덕분에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리는 버릇이 생겼다.
‘당신은 모를 겁니다. 당신이 얼마나 많은 순간 날 살게 했는지.’
당신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어도 될 정도로. 아멜리아는 점점 의식이 깜빡거리면서도 그의 미소가 오롯이 보였다. 그 미소가 너무 예뻐서, 그녀는 천천히 손으로 쓰다듬으며 그의 입술에 닿았다. 그 조그만 움직임에 이클리트는 눈가가 파르르 떨리면서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이젠 정말 참기 힘들 것 같았다.
“이제 그만…….”
“계속, 나만 먼저 했어요.”
뜻밖의 말에 이클리트는 그대로 멈춰버렸다. 아멜리아는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며, 취기가 가득 담겨 달콤해진 어조로 속삭였다.
“사랑하는 척해야 하잖아요. 대공 전하도 제대로 해 봐요. 나한테 먼저 입 맞춰 봐. 결혼식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은 빠졌잖아요.”
그의 입술에 닿은 그녀의 손끝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입맞춤 서약에서 그는 그녀를 축복하고, 경애하고, 숭배했지만 사랑의 의미가 담긴 입술엔 끝내 닿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리 거짓이라도 사랑하고 또 사랑해야 하니까…….”
아멜리아가 스르르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이클리트는 손끝이 저릿할 정도로 힘을 꽉 주고서 그저 그녀를 가만히 안아주며 토닥거렸다. 이런 것도 처음이라 어설프지만, 그래도 진심으로 다독이는 손길에 아멜리아는 온몸에 힘이 풀리면서 의식이 완전히 끊겨 나갔다.
“아이참. 자꾸 나만 하게 하고…… 다음엔, 꼭 먼저 해줘요…….”
그녀가 온전히 그의 품에서 잠들어버렸다. 이클리트는 그제야 떨리는 숨을 조금 길게 내쉬었다.
“술은 진짜 마시게 하면 안 되겠네.”
그는 혹여 그녀가 깰까 봐, 조심스럽게 안아 올려서는 침대에 가만히 눕혀주었다. 평온한 표정으로 잠든 그녀를 보면서 이클리트는 머뭇머뭇 그녀의 뺨을 감쌌다.
“거짓이 아니니까. 감히, 너무 사랑하니까.”
호흡에 섞인 짧은 한마디를 내뱉는 것조차, 심장이 타들어 갈 듯 뜨거워졌다.
“먼저 넘어버리면, 그걸로 끝날 것 같지 않아서. 처음으로 날 못 믿겠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끌고 온 건 그대니까.”
뺨에 닿은 손가락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다가 이내 이마에 아주 살짝 입을 맞추며 읊조렸다.
“여기까지만, 욕심낼게요.”
잘 자요. 나의 소중한 제비꽃이여.
*** 이른 아침. 아멜리아는 부스스 눈을 깜빡였다. 어쩐지 몹시 푹 잔 기분에 머릿속이 맑기만 했다.
‘뭐지. 어제 어떻게 된 거지?’
대공 전하를 편하게 쉬게 해 드리려고 내가 술을 마셨지. 그리고 바로 잠들었나? 아멜리아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자 만족스럽게 웃었다.
“오! 바로 잠들었나 봐. 어쩐지 머리가 막 아프거나 그러지도 않고. 오히려 상쾌한데? 술이라는 거 나쁘지 않구나!”
아멜리아가 가뿐하게 침대에서 내려서자, 이클리트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런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어쩐지 몹시 까칠하고 피곤해 보였다.
“대공 전하? 낯빛이 너무 안 좋아요. 설마 안 잔 거예요?”
그녀는 설마, 하며 물었지만 이클리트는 뻑뻑한 눈을 문지르며 짧게 말했다.
“조금 잤습니다.”
“조금? 왜요! 피곤하실 텐데 푹 쉬시지. 전 어제 엄청나게 잘 잤어요.”
“잘, 잤습니까?”
“네! 저 술 센 가봐요. 바로 잠들어서 지금 머리도 안 아프고, 피곤하지도 않고, 아주 좋은데요?”
이클리트는 너무 천진난만한 아멜리아의 말에 순간 울컥임이 치솟았다.
“진심이십니까?”
술이 세다고? 지난밤, 자신에게 얼마나 힘든 고난과 역경을 남긴지도 모른 채, 저렇게 태평하게! 물론 기억 못 하길 바라긴 했지만 그래도 뭔가 살짝 억울했다. 이클리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서는 그녀를 빤히 보았다.
“바로 잠들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잠든 것 같은데?”
“뭔가를 했는데 기억 못 하는 건 아니고요?”
이클리트의 말에 아멜리아는 움찔했다.
‘뭔가를 했다고? 내가?’
하지만 머릿속에 까만 물감이라도 들이부은 것처럼, 아무것도 생각나는 게 없었다.
‘에이,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기억이 안 날까 봐? 그냥 잠들었어. 잠든 거야.’
그녀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에요. 다 기억해요. 분명 그냥 바로 잠들었어요. 아주 곤히. 나중에도 잠 안 오면 종종 마셔봐야겠어요.”
술을 또 마신다는 말에 이클리트의 미간이 진심으로 험하게 굳어졌다. 다른 건 다 참아도, 이 말만큼은 참을 수 없었으니까.
“그렇군요. 다, 기억하시는군요.”
아멜리아는 어쩐지 차가운 그의 목소리에 흠칫했다.
‘뭐, 뭐지? 내가 뭘 잘못했나?’
“그럼 어제 부인께서 앞으로 부부로서 그 역할에 충실히. 뭐든 다 하시겠다고 하신 것도 기억하시겠죠?”
“에이, 당연하죠! 그건 기억해요.”
“그래서 부인께서 앞으로 이런 것도, 잘해보시겠다고.”
‘이런 거? 이런 게 뭔데?’
“우선.”
아멜리아와 마주 서 있던 이클리트가 갑자기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아멜리아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입을 열었다.
“대, 대공 전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이클리트는 여전히 단추를 풀면서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이런 것도 잘해보시겠다면서요. 부부니까. 적어도 첫날밤을 같이 보낸 부부의 모습이 지금은 아니죠.”
“그게 무슨! 꺄아!”
단추를 전부 푼 그의 셔츠 앞섶이 벌어지면서, 그의 맨살이 슬쩍 보였다. 아멜리아는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들지 못했지만, 이클리트는 아멜리아가 남긴 와인병을 들고서는 침대 위에 부어버렸다. 그러자 하얀 시트에 번진 와인이 피처럼 보였다. 와인의 역할은 마미가 처리해줄 첫날밤의 흔적이었다.
“자. 흔적은 남겼고. 그럼 더더욱 의심하지 못하게.”
이클리트가 아멜리아에게 걸어갔다. 아멜리아는 차마 그를 똑바로 보지 못한 채, 뒤로 슬금슬금 멀어졌다.
“저, 저기 대공 전하? 지금 당최 뭐가 뭔지 못 따라가겠어요!”
하지만 이클리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항상 먼저 했으니, 이젠 내가 먼저 해야 한다고. 부인께서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기억하신다면서요.”
“제, 제가요? 아니. 그게 기억나긴 하는데. 제가 그런 말까지는 안 한 것 같은데…….”
뭐지. 뭐야. 내가 대체 무슨 말을 어디까지 한 건데! 뒤로 슬금슬금 밀려나던 아멜리아는 침대 끝에 걸려서는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이클리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서, 침대를 한 손으로 짚은 채 상체를 그녀 쪽으로 완전히 숙였다. 헝클어진 까만 머리카락 너머 짙게 일렁이는 푸른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그녀를 삼킬 듯, 형형하게 빛났다. 아멜리아는 머릿속으로 그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묵직하게 와 닿는 그의 그림자. 나직이 내쉴 때마다 뺨에 닿는 그의 숨결이 너무 아찔해서, 그녀는 파들거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윽고, 이클리트의 목소리가 독처럼 박혀왔다.
“이번엔, 내가 먼저 해볼게요.”
그의 입술이 그녀에게 닿으려는 순간.
“아, 안 돼요!”
당황한 아멜리아가 있는 힘껏 이클리트를 침대로 밀어뜨렸다. 그는 쉽게 무너지면서 피식 웃었다.
“또 덮치는 겁니까? 이건 그냥 습관인가. 그럼 내가 익숙해져야겠죠? 딴 놈들이 익숙해지면 안 되니까.”
“무슨 소리세요! 이건 그냥 실수라고요!”
내가 언제 이렇게 덮쳤다는 거야! 물론 아주 예전에 반가워서 실수한 적은 있었지만! 아멜리아는 얼른 침대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이클리트가 집요하게 그녀의 허리를 감고서는 그대로 볼에 입을 쪽 맞추었다. 그녀는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그대로 굳어졌다. 이클리트는 그런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속삭였다.
“익숙해지셔야죠, 이런 것도. 뭐든 하신다고 하셨으니까. 그렇죠?”
‘진짜 내가 어제 무슨 말을 한 건데!’
그때, 밖에서 하녀들과 마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공 전하, 가주님. 좋은 아침입니다!”
“저희 들어가겠습니다!”
“아, 안 돼. 잠깐만!”
아멜리아가 외쳤으나, 문이 열리면서 하녀들은 굳어졌다. 누가 봐도 아멜리아가 이클리트를 덮치고 있는 모습이었던 것!
“죄, 죄송합니다!”
하녀들은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서 침실을 빠져나갔다. 아멜리아는 황당한 표정으로 외쳤다.
“아니야. 그게 아니라고!”
이클리트는 이제야 만족한 표정으로 그녀의 허리를 놓아주었다.
“이걸로 당분간 부부 사이를 의심할 일은 없겠습니다. 부인께서 저를 몹시 사랑한다고 소문이 나면 몰라도. 역시. 뭐든 하시는군요. 저도 열심히 배워보겠습니다.”
아멜리아는 능청스럽다 못해 얄밉기까지 한 이클리트의 말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는 유유히 몸을 일으켜서는 그녀를 향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앞으로 절대, 제가 없는 곳에서 술은 금지입니다. 절대 안 됩니다, 절대.”
이클리트는 약간 사나울 정도로 쐐기를 박고서 침실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겨진 아멜리아는 여전히 부끄러움이 남아 있는 감정으로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뭐야. 진짜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것도 기억 안 난단 말이야! 잠시 후, 마미가 살며시 들어와서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세상에! 아까 그 모습은 뭐였던 거예요? 적어도 공작가에서는 가주님과 대공 전하의 사이를 전혀 의심하지 못할 걸요? 진짜 야성미 넘치는 대공 전하의 모습이 막막! 설마 진짜 하신 거예요? 가주님 취향이 정말로 그런…….”
“아니야. 아무 일도 없었어! 없었다고! 그건 확실해!”
아멜리아는 울상이 되어서는 다짐했다.
‘이제 두 번 다시 술 안 마실 거야. 절대로!’
침실을 빠져나온 이클리트는 기분 좋게 웃었다. 살짝 짓궂게 군 것 같긴 했지만, 정말로 다시는 술 마실 생각해선 안 되니까. 게다가 당분간은 정말로 사랑하는 부부로 보여야 하니.
“아주 약간만 더, 욕심내겠습니다.”
자꾸만 그의 입가에 참을 수 없는 웃음이 머물렀다. 눈을 뜨고 아침을 맞이한 게 처음으로 너무 즐거워서, 이 즐거움이 몹시 낯설기만 했다. *** 후지아는 피오레 공작가에서 벌어진 일에 분개하며 메사리나를 향해 외쳤다.
“결혼식이 엉망이 될 거라더니.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오히려 더 제대로 가주가 되었잖아. 내일부터 살롱에서 계속 그 계집애 소리만 들을 텐데. 대체 넌 거기서 뭘 한 거니! 메사리나. 메사리나!”
메사리나는 후지아의 고함을 피해 방에 틀어박혔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사람들이 미친 거지. 그런 말도 안 되는 것에 현혹되다니!’
그녀는 한껏 일그러진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아멜리아가 제대로 가주가 된 것보다 더 불안한 게 있었다.
‘불꽃이라······ 아름답군. 너무 갖고 싶을 만큼, 아름다워.’
에드조프가 아멜리아를 보던 그 마지막 시선이 떨쳐지지 않았다. 그에게서 그런 눈빛을 본 건 처음이었다. 무척이나 갖고 싶어 하는 눈빛. 온갖 욕망으로 번뜩이던 그 아찔한 시선.
‘설마 그분이 아멜리아를?’
생각이 거기에서 멈추자, 메사리나는 핏기가 가실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니야. 절대로 아니야. 다른 건 몰라도 그분은 안 뺏겨!’
하지만 대체 뭘까. 아멜리아 주변으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드레스에 피어난 그 꽃. 그건 분명 마법이야. 마법이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어.”
귀족들은 마법 도구라고 말했지만, 마법에 관해 공부했던 메사리나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마법 도구라고 하기엔 드레스에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매개물 없이 마법은 지금으로선 불가능한데.”
현재 마나만을 시전하는 마법이 사라진 건, 정령과 소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령과 소통할 수 있으면, 심장에 무리 없이 매개물이 없어도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그런 정령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건 인간의 탐욕 때문이었다. 전쟁으로 대지에 상처를 내고, 인간 외의 종족을 노예로 부리며 죽이던 인간들은 끝내 정령조차 탐하려고 했다. 정령을 온전히 인간의 소유로 만들려고 했던 것. 정령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과 소통하는 힘이 깃들어 있는 시간의 숲을 봉인했다. 그때부터 세상은 마법을 잃었다.
“저 정도 경지의 마법을 쓰려면, 결국 정령과 소통했던 고대 마법사만이 가능해.”
현재 시간의 숲과 상관없이 정령과 소통할 수 있는 존재가 존재한다면. 정령의 친구라 불렸던 사람. 아니,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괴물이라 불리는 짐승, 수인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