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벼랑 끝에 사자들2021.03.22.
카힐로가 공작가를 나서려고 할 때, 아멜리아가 카힐로를 불렀다.
“카힐로 경!”
카힐로는 뜻밖의 목소리에 멈칫하며 제 앞으로 달려온 아멜리아를 향해 곧장 예를 갖추었다. 아멜리아는 그런 카힐로를 보며 헐떡이는 숨을 삼켰다.
“하아, 하아! 다행이다. 아직 안 갔네요…… 계속 찾고 있었는데…….”
카힐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아멜리아를 보필하는 하녀들이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부르시면 제가 갔을 텐데요.”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아멜리아는 겨우 숨을 누르고서 카힐로를 똑바로 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대공 전하를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지 잘 알겠어요.”
“예?”
“대공 전하께서 혼자가 아닐 수 있게. 지금껏 같이 있어 준 거잖아요.”
“그런 거창한 의미가 아닙니다. 단지 제 주인이시니까…….”
“그래도 같이 있어 준 건 달라지지 않아요. 모든 걱정과 염려가 그게 다가 아닌 것 같으니까.”
그래. 절대로 그게 다가 아니다. 그 모든 것이 의무였다면, 피오레 가주에게 그런 무례한 말을 하면서 목숨 걸 이유는 없으니까. 그는 대공 전하께 가족인 거다.
“진심이었던 당신에게 아무 말도 못 하고 보내는 건 아닌 것 같아서. 나도 진심을 담아 얘기해야 할 것 같아서요.”
아멜리아는 카힐로에게 아무 말도 못 해준 것이 계속 신경 쓰였었다.
“대공 전하는 이제 내 남편이에요. 물론 서로 이용하는 관계지만, 그래도 같은 길을 가기로 했어요. 그러니 그 길의 끝까지, 내가 지켜요.”
카힐로는 지키겠다는 아멜리아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가 조금은 서늘한 어조로 되물었다.
“대공 전하의 비밀이 신경 쓰이지 않으셨습니까? 어쩌면 그 비밀이 몹시 무서운 걸지도 모릅니다. 가주님을 다치게 할지도 모르고요.”
“아닐 거예요.”
“어떻게 그리 확신하시죠?”
“그런 분이 아니시니까.”
“…….”
“대공 전하께서 절 아프게 하거나, 상처 내진 않으실 거예요."
아멜리아는 무척 단단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오히려 내가 그분을 아프게 하거나, 상처 주지 않기를 바라요.”
“…….”
“카힐로 경이 그랬죠. 그 비밀을 끝까지 비밀로 둬야, 대공 전하를 지킬 수 있다고. 그럼 난 아무것도 몰라도 상관없어요. 얼마 되진 않았지만, 함께했고 앞으로 함께 할 대공 전하가 더 소중해요. 지금 대공 전하의 모습을 믿고 있고요.”
아멜리아는 카힐로를 향해 엷은 미소를 그렸다.
“그러니까 걱정 말아요. 알려고 안 할 테니까. 이 말을 하고 싶었어요. 당신도 확답을 받아야 더는 걱정 안 할 테니 말이에요.”
카힐로는 제 앞에 흐트러짐 없이 당당하게 서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처음엔 그분을 말릴 수 없다면, 이 여자라도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온실 속 화초 같은 여인이 대공 전하의 발목을 잡고 약점이 되어, 그분을 위험하게 만들 수는 없으니까. 적어도 가만히 있으라고. 그런 경고라도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자신의 생각이 잘못된 것 같았다. 이분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하고 단단했다. 특히,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에게 하고픈 말을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
‘결국엔 그 마음도 움직이고 말이지.’
하긴, 애초에 모두의 의심을 깨부수고서 당당하게 피오레의 가주가 된 여인인데. 평범한 여인은 절대 아니지.
“다치지 마십시오.”
“알아요. 내가 다치지 않아야 대공 전하도…….”
“아니. 가주님 본인을 위해서도, 다치지 마십시오.”
“아…….”
카힐로는 정식으로 무릎을 꿇고서 아멜리아에게 예를 갖췄다.
“그날의 무례는 용서하십시오. 당신도 저의 주인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그게 무엇이든, 지켜드리겠습니다.”
아멜리아는 카힐로의 맹약에 긴말 없이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카힐로는 큰 욕심을 한 번 품어봤다. 대공 전하의 욕심이, 욕심이 아니기를. 그분도 사랑하고, 사랑하며 정말로 평범하게 사셨으면 좋겠다고.
‘지금이라도, 그분도 행복해지셨으면 좋겠어.’
폐하께서도 비밀이 드러나지 않길 바라시니, 함부로 움직이진 않으실 거다. 가장 문제는.
‘바스티얀 대공.’
물론 그자 역시 폐하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함부로 움직이진 않겠지만. 그때도 그랬지만, 그가 가장 의문인 건.
‘폐하의 측근조차 알지 못하는 대공 전하의 비밀을 바스티얀 대공은 대체 어떻게 알게 된 걸까?’
카힐로는 그 부분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 에드조프가 솔라 제국의 황궁인 솔라리스 궁의 황실 도서관을 찾았다. 원래는 현자들이 사용하는 곳인데, 이곳이 비어 있다는 건 폐하께서 계신다는 뜻이다. 아스란은 예전부터 지식과 배움을 사랑했다. 그가 원하는 모든 힘이 지식에 있다고 믿었으니까. 에드조프는 언제나 그렇듯, 단정한 표정으로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도서관 앞에 섰다. 그러자 아스란의 직속 책사인 에리얼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들어가 보십시오.”
에드조프는 스르르 열리는 문 안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디뎠다. 황실 도서관 안은 마치 거대한 숲을 보는 듯, 책이 천장부터 바닥까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게다가 책이 상할 수 있다며, 최소한의 햇빛만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렇기에 약간은 음산한 기운도 감도는 그곳에, 책에 파묻혀 있는 아스란이 있었다. 에드조프는 조용히 아스란의 앞에 섰다. 그는 에드조프가 왔음에도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병환이 깊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선 전혀 기백이 떨어지지 않았다. 연륜보다 수려한 얼굴과 백발 사이로 온기 한 점 없이 푸른 눈동자는 여전히 건재하게 살아 있었으니까. 에드조프는 아스란 앞에 무릎을 꿇고서 돌려 말하는 것 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본론을 말했다.
“이클리트가 새로운 피오레의 가주와 결혼했습니다. 이걸 그냥 지켜보고 계실 겁니까?”
“…….”
“무려 다섯 공작가 중 군부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피오레와의 결혼식이었습니다.”
“나서지 않는다.”
아스란은 여전히 에드조프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서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다섯 공작가의 결혼은 그들이 결정하고 누릴 권한이다.”
“그러시군요.”
에드조프는 온화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그 순간.
“다만 내가 궁금한 건, 갑자기. 그것도 새로운 가주가 왜 그놈에게 관심이 생겼나, 하는 것이지. 체자렛 백작가의 영애라고 했던가.”
아스란이 드디어 책장 너머로 에드조프를 응시했다.
“엄청난 마법까지 가지고 있다지. 네가 체자렛 백작가와 친하다고 들었는데. 최근에 꽤 들락날락했다고 말이야. 그처럼 대단한 여인을 빼앗긴 거냐? 어떤 하찮은 것에 정신 팔려서?”
에드조프는 아스란의 말에 처음으로 표정이 흔들렸다. 아멜리아와 연인이었다는 사실은 사교계에선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이었다. 메사리나를 애인으로 뒀던 것도 마찬가지. 훗날 행여 이상한 소문으로 말 돌지 않도록. 그저 체자렛 백작가와 연이 있는 것처럼 꾸몄는데.
‘역시 알고 계셨나.’
황실에 이런저런 일이 겹쳐, 황제의 권한이 다소 약해진 듯 보였지만 실상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독한 발톱을 차분하게 감추고 한 걸음 뒤에서 지켜보고 있을 뿐. 그렇기에 에드조프는 여전히 아스란 앞에서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뺏긴 적 없습니다.”
“이러다 황위도 빼앗기겠군.”
“빼앗기지 않습니다.”
에드조프는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절대, 황제 앞에서는 철저히 가면을 써야 했다.
“반드시 네가 황제가 돼라.”
아스란은 마치 에드조프를 아끼고 믿는 듯 말했으나, 그저 에드조프를 도발하고 있었다.
“그놈 하나 어떻게 하지 못하면, 나도 네가 황제가 되는 걸 바라지 않는다.”
에드조프는 알고자 했던 아스란의 의중을 읽어냈다.
‘결국 끝까지 나서지 않으실 생각이시군.’
이클리트의 말에 혹시나, 했으나. 역시나였다. 아스란은 이클리트의 정체가 드러나는 걸 극도로 꺼리고 있었다.
‘적어도 폐하께서 움직여서 그 사실이 밝혀질 일은 없겠군.’
하긴, 그게 밝혀지는 건 에드조프로서도 위험하긴 했다. 사실 그도 이클리트가 수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싶지 않았다. 원치 않게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에드조프 역시 고통받고 있었으니까.
“이만 가보겠습니다. 부디, 강건하시길.”
에드조프가 사라지자, 아스란이 그제야 책을 완전히 내려놓았다. 그는 냉랭한 시선으로 싸늘하게 읊조렸다.
“멍청한 것. 그나마 믿을만한 핏줄이 저 정도밖에 되지 않다니. 이상해. 나를 전혀 닮지 않았어.”
그토록 완강하던 아스란의 눈빛이 아주 살짝 흔들리며 한마디가 나직이 흩어졌다.
“클로에도. 닮지 않았고.”
아스란은 떨리는 시선으로 손에 들렸던 책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 책은 시간의 숲에 관한 책이었다.
“내 숨이 다하기 전에 열쇠를 찾아야 하는데.”
이젠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린 수인을 다시 찾아서 열쇠를 만들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이클리트…….”
아스란의 입가로 이름 하나가 잔인하게 짓눌렸다. 북부에 숨어, 죽을 때까지 거기서 망가질 거라 여겼던 놈이 세상으로 나왔다. 뭔가 조금씩 변하는 건가? 그 변화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져다줄지.
“대회의가 기다려지는군.”
*** 도서관을 빠져나온 에드조프의 표정에 미소는 사라졌다. 다른 말은 다 참아도, 이클리트가 황제가 될 거란 말은 참을 수 없다.
‘그 자식은 여전히 더러운 짐승새끼일 뿐이야. 피오레와 결혼했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게다가 빼앗기다니. 아멜리아, 그 여자는 여전히 제 것이다. 단 한 번도 빼앗긴 적은 없다.
“하지만 녀석의 시건방진 꼴을 계속 볼 수는 없지.”
어쩌면 이게 다 다섯 공작가에 너무 많은 권능이 주어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더욱 강력한 황권을 만들어야 해. 그런 황권을 가진 황제가 되어야 해.”
‘그래야 내가 살아남는다.’
일순, 에드조프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걸음을 옮기던 에드조프가 역대 황제의 초상화가 그려진 복도 앞에 멈췄다. 텅 빈 복도에는 지키는 기사들도 없었다. 묘하게 차가운 바람이 불고, 그 바람에 에드조프는 온몸이 시렸다. 겉으로는 황제의 사랑을 차지하고 있는 은빛 사자라 불리지만, 그 역시 언제 어떻게 벼랑 끝에 떨어질지 모른다. 그가 딛고 있는 이 황궁에서 한 번도 마음 편한 적이 없었으니까.
‘살고 싶습니다. 아니 살아야겠습니다. 제대로. 평범하게. 그걸 위해 권력을 쥐어야 한다면 기꺼이.’
그놈이 살기 위해 황제가 되려고 한다면, 자신 역시 살기 위해 황제가 되고자 한다.
“나는 황제가 될 거다. 이 황궁의 주인이 될 거야. 내가. 진짜 주인이.”
고개 돌린 에드조프는 누군가를 발견하곤 표정이 섬뜩하게 굳어졌다. 복도 끝에 웬 여인이 있었다. 쥐를 닮은 잿빛의 지저분한 머리카락과 탁하게 흔들리는 황금빛 눈동자. 전체적으로 굉장히 야위고, 기분 나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미소만큼은 해사하게 그리며, 넉살 좋게 에드조프에게 다가갔다.
“유모의 얼굴도 한 번 안 보고 그냥 가십니까? 꽤 오랜만에 오셨으면…….”
짝-!
“감히 내 몸에 손대지 마라.”
그녀의 손가락이 고작해야 에드조프의 옷깃 하나에도 닿을 새 없이 내쳐졌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싱긋 웃었다. 그녀는 에드조프의 유모인 키르케였다. 하지만 자신의 유모를 응시하는 에드조프의 시선은 경멸만이 가득했다. 키르케는 다시 한번 에드조프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대공 전하. 제 손은 계속 대공 전하께 있으니. 저는 항상 대공 전하의 편입니다. 그러니 이클리트의 정체도 대공 전하께 알려드렸지요.”
“닥쳐!”
이클리트의 정체를 에드조프에게 알려준 사람은 바로 키르케였다. 하지만 그가 결코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을 끄집어낸 사람도 키르케였다. 키르케는 형형하게 번뜩이는 안광으로 에드조프를 바라보았다.
“그 ‘공방’도 계속 열려 있습니다. 오직 대공 전하를 위해서.”
순간, 음산하게 번지는 키르케의 속삭임에 에드조프는 더욱 얼어붙은 어조로 말했다.
“누가 마음대로 움직일 줄 알고? 날 이용할 생각 마라. 난 이 나라의 고귀한 황자니까.”
에드조프는 더는 같은 공기로 숨쉬기조차 싫다는 듯, 돌아섰다. 키르케는 그런 에드조프의 뒷모습을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여전히 귀여우시군. 그래요. 고귀한 황자 전하시지요. 나의, 황자 전하.”
*** 에드조프의 걸음이 황후궁 앞에 멈췄다. 그토록 굳어 있던 그의 눈매가 처음으로 처연하게 가라앉았다. 한때 이곳은 웃음과 따스함이 끊이질 않았다. 지금은 버려진 곳처럼 굳게 닫혀 있지만. 에드조프는 떨리는 숨을 삼키며, 닫혀 있는 문에 손을 댔다. 문틈 사이로 스산한 냉기와 함께 희미한 여인의 비명이 들렸다.
“데려와! 데려오란 말이야! 데려오라니까!”
악에 받친 목소리가 저주처럼 울리다가 순식간에 멎어버린다. 바로 클로에 황후의 절규 어린 비명이었다. 원래는 더없이 다정하기만 하셨던 분인데. 이 세상 모든 따뜻함을 가졌던 분이신데……. 미쳐버린 그녀는 이 감옥 같은 황궁에 갇힌 채 껍데기만 황후로 남겨져 있었다. 에드조프는 눈을 질끈 감고서 이를 악물었다.
‘어마마마께서 저리되신 건 전부 그 짐승 자식 때문이야. 나는 절대 널 용서 못 한다, 절대.’
네놈한테는 그 어떤 것도 빼앗기지 않아. 황위에 오르는 그 날, 네놈의 육신을 갈기갈기 찢어 진정 짐승의 먹이로 던져 주리라. 네놈에게 어울리는 최후를 맞이하게 하리라. 어마마마의 한을 풀어드리고, 나는 다시 어마마마께 돌아갈 거야.
“기다려주세요, 어마마마.”
***
“황궁에서 칙서가 당도했어요.”
마미의 말에 아멜리아는 살짝 긴장한 채 칙서를 확인했다. 그건 바로 대회의 초대장이었다.
“드디어 왔네. 다섯 공작가 전부를 만날 기회가.”
“그러네요. 이제 시작이네요.”
피오레의 건국을 도왔다는 다섯 공작가. 검의 가문, 포르티셰. 총의 가문, 피오레. 현자의 가문, 카르티아. 치유의 가문, 헤스틴. 마지막으로 모든 것이 베일에 싸여 있는 가문, 루베르. 사실 마지막 가문인 루베르는 솔라의 건국을 함께하진 않았다. 오히려 솔라를 원망하고 있는지 모른다. 솔라가 침략하여 삼킨 공국이었으니까. 거대한 제국이었던 솔라 앞에 공국은 처절히 저항했으나, 전쟁에서 지고 말았다. 하지만 공국은 솔라에게 충성하지 않았고, 끊임없이 반란군이 튀어나왔다. 선왕은 무의미한 반란을 멈추기 위해 공작가의 지위를 내렸다. 황제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줌으로써, 솔라에 주인 의식을 심어주고자 했던 것. 비록 반란은 멈췄으나, 루베르 가문은 공국민들과 함께 자신들의 영지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현 가주가 누군지도 모르는, 완전히 베일에 싸여 있는 곳.
“루베르는 한 번도 솔라의 황제를 선택한 적이 없었어. 루베르의 선택이 없어도 나머지 공작가들이 한 명의 황자를 황제로 결정했었으니까.”
마미는 아멜리아의 말에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겠네요.”
“그래. 우린 루베르의 선택이 필요해.”
또 다른 군부인 포르티셰 가문은 무척이나 보수적이다. 그러니 황후의 핏줄인 에드조프를 황제로 택할 것이다. 카르티아 역시 에드조프에게 호의적이고.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건 아직까진 중립을 지키고 있는 헤스틴. 그리고 루베르의 선택이 반드시 필요하다.
“대회의에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단 가봐야지. 적어도 헤스틴 가문의 가주는 만나야 하니까. 듣자 하니 헤스틴 가주는 나랑 같은 여자라고 하던데.”
“저도 함께 가야죠.”
그때, 이클리트가 밀크티를 아멜리아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아멜리아는 밀크티를 보며 몹시 좋아했다.
“와! 감사해요.”
“대공 전하, 그런 건 제가 해도 되는데!”
마미는 당황했으나, 이클리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앞으로 부인이 마실 차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
“예?”
“무척 잘하셔. 진짜 너무 맛있거든.”
마미는 이 모습이 너무 낯설고 놀라웠다. 괴물 대공이라 불리는 이분이 아가씨를 위해 직접 차를 내리신다고? 그것도 맛있어?
‘정말 서로 계약관계 맞아?’
적어도 대공 전하께서는……. 마미는 몹시 수상한 시선으로 이클리트를 응시했다.
“그런데 황궁에 같이 가신다고요?”
“오랜만에 가고 싶습니다.”
“진짜요?”
아멜리아는 살짝 놀랐다.
‘오히려 피할 거로 생각했는데.’
“반가운 이도 있고.”
‘응?’
뜻밖의 말에 아멜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가운 이라고? 누구? 황궁에 그런 사람이 있어? 잠깐. 설마 대공 전하께서 마음에 품었다는…….’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아멜리아는 괜스레 기분이 가라앉아서는 찻잔을 내려놓다가 실수로 쏟고 말았다.
“어머!”
이클리트는 굳어진 시선으로 재빨리 아멜리아의 손을 붙잡았다.
“괜찮으십니까? 뜨겁진 않고요?”
“아, 괜찮아요. 식었어요.”
“가만히 계세요, 가주님!”
탁자에 쏟아진 밀크티가 금방이라도 그녀의 드레스로 흘러내릴 것 같았다. 마미가 재빨리 손수건을 가져오려고 하는데, 이클리트가 소매로 그냥 쓱 닦아버렸다.
“대공 전하!”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의 행동에 당황했지만, 이클리트는 무심히 말했다.
“빨리 안 닦으면 드레스가 더러워질 것 같아서…….”
“드레스는 그냥 빨면 되죠! 어떡해. 소매가 더러워졌네.”
그녀가 속상해하며 이클리트의 손을 붙잡자, 그는 엷은 미소를 그렸다.
“괜찮습니다. 이것도 그냥 빨면…….”
“괜찮지 않아요!”
갑자기 마미의 목소리가 엄격하게 울렸다.
“그건 예법이 아니에요, 대공 전하. 아무리 가주님을 위해서라지만 그렇게 하시면 안 돼요!”
“아, 미안하군.”
“황궁에 함께 가신다면서요. 분명 대회의 끝에 무도회가 있을 거라고요. 황실 예법을 익히셔야 해요!”
이클리트는 그 큰 덩치를 아래로 축 늘어뜨리며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멜리아는 그 모습이 묘하게 귀여워선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꾹 눌렀다.
“예법이 조금 서툴긴 하시지만, 괜찮아. 같이 배우면 되니까. 저도 도울게요, 대공 전하.”
아멜리아가 이클리트를 다독였으나, 마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가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주님은 춤을 전혀 못 추시잖아요!”
“그, 그건…….”
마미는 지난번처럼 의지를 불태웠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피오레의 메이드로 일하면서 숱한 귀족 예법을 익혔답니다! 이제부터 두 분 다 특훈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