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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 (33/199)

33화.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2021.04.26.

안쪽에 갇혀 있던 밀수꾼들은 또다시 폭발음과 함께 뚫려버린 입구를 보며, 아멜리아의 어마어마한 힘 앞에 전의를 상실하고 그대로 항복했다. 저격대는 밀수꾼들을 제압했고, 이사나와 카마리가 궤짝을 확인했다. 생각대로 밀주가 대량으로 담겨 있었다. 여기가 진짜 본거지였던 것.

16553707640764.jpg“제대로 찾긴 찾은 것 같은데.”

이사나는 밀주를 살피면서도 뭔가 영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16553707640764.jpg‘애초에 정확히 뭘 찾아야 하는지 모르고 움직이고 있어. 이 밀주의 목적이 뭔지 모르고 있다고.’

  이클리트는 밀거래단의 우두머리를 잡고서 싸늘한 어조로 읊조렸다.

16553707640779.jpg“이 밀주로 뭘 하려고 했지?”

우두머리는 무슨 당연한 걸 묻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16553707640785.jpg“북부에서 유행하는 밀주라기에, 비싼 가격에 팔려고 거래한 것뿐입니다. 남부에서 북부 독주는 인기가 좋으니까. 하지만 허가받으려면 오래 걸리고, 밀주가 더 돈이 되니까.”

16553707640779.jpg“고작 그런 이유로 시간을 끌었나? 함정까지 파면서?”

16553707640785.jpg“밀수꾼에겐 당연한 거 아닙니까? 거기 도박장에서도 거래가 이뤄지는데, 갑자기 들이닥쳐서 다들 이쪽으로 피한 겁니다. 그러려고 시간 끈 거고.”

이클리트는 너무 판에 박힌 대답에 눈에 힘을 주었다.

16553707640779.jpg“그렇다면 저 여우를 데려간 이유는 뭐지?”

16553707640785.jpg“저 여우는 우리도 모릅니다. 그냥 우리 앞에 쓰러진 거라. 가죽이 탐나서 데려오긴 했는데. 빌어먹을. 아주 재수가 없으려니까.”

16553707640779.jpg“이 밀주를 너에게 처음 유통한 자를 말하라.”

16553707640785.jpg“그건 우리도 정말 모릅니다. 여러 사람 걸쳐서 받은 거라. 아, 근데 이 밀주를 주기적으로 사는 사람은 있습니다.”

16553707640779.jpg“그게 누구지?”

16553707640785.jpg“얼굴은 모릅니다. 밀거래 특성상, 상인도 거래자도 신상을 감추는 게 불문율이라. 근데 그날은 처음으로 그쪽에서 먼저 그 과수원 근처에서 거래하자고 했습니다.”

16553707640779.jpg“먼저 제안했다?”

16553707640785.jpg“예. 근데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여우를 발견한 거고.”

이클리트는 우두머리의 말에 멈칫했다. 하필이면 문제의 과수원 근처에서 거래하기로 했는데 나오지 않았다. 결국 일은 벌어졌고. 이클리트는 자꾸만 정확한 목적을 잡지 못하고 헛도는 지점이 신경 쓰였다.

16553707640779.jpg‘대체 그 과수원에서 뭘 하려고 했던 거지?’

결국, 그들은 밀수꾼을 소탕하는 거로 이번 사건을 일단 마무리해야 했다. 저격대가 이들을 전부 잡아서 중앙청에 넘겨 더 조사하겠지만, 새로운 정보는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슈란은 마침내 끝이 보이는 상황에 안도하며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여우를 꼭 안았다.

16553707640785.jpg“다행이다. 진짜 다행이야.”

16553707640764.jpg“그쪽이 무사한 것도 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슈란은 갑자기 불쑥 나타난 이사나의 모습에 당황했다. 하지만 이사나는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걱정했다.

16553707640764.jpg“이런. 여우가 정신을 못 차리네요.”

16553707640785.jpg“많이 다쳤어요. 아무래도 정신적인 충격도 있었을 거고…….”

16553707640764.jpg“그렇구나. 아무리 봐도 작은 여우인데, 이런 여우가 그런 짓을 했다니 믿어지지 않네요. 사람들은 전부 늑대라고 생각하는 것 같던데.”

16553707640785.jpg“평소엔 엄청 착해요! 그때는 저 술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예요.”

16553707640764.jpg“그렇죠. 그래서 우리가 확실하게 조사할 거예요. 그런데 흥분 상태가 되면 힘도 세지나 보네요. 자물쇠를 이 녀석이 부쉈다고 하던데.”

슈란은 이사나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16553707640785.jpg“아니에요. 이 녀석에게 문을 열어준 건 저예요. 자물쇠를 부순 적은 없어요.”

16553707640764.jpg“아. 그렇구나. 하긴. 녀석이 부쉈다기엔 좀 이상하긴 했어요.”

슈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사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16553707640785.jpg“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16553707640764.jpg“그런 얘기는 우리 가주님에게 하세요. 가주님이 정말로 구하고 싶어 하셨으니까.”

슈란은 아멜리아를 떠올렸다. 피오레에 새로운 가주가 올랐다는 얘기는 들었다. 그녀가 영지민 모두에게 축복의 꽃을 보여줬다는 얘기도. 물론, 자신 같은 하찮은 일꾼은 공작가 근처도 가지 못해서 보진 못했지만. 하지만 이렇게 실물을 보게 될 줄이야.

16553707640785.jpg“좋으신 분이네요, 새 가주님은.”

16553707640764.jpg“그럼요. 좋으신 분이시지죠. 아직은.”

슈란은 이사나의 묘한 어조에 고개를 들었지만, 이사나는 그저 엷은 미소를 그리며 걸음을 옮겼다. 슈란과 멀어진 이사나의 입가에 미소가 굳어졌다.

16553707640764.jpg‘역시 자물쇠는 짐승의 짓이 아니었군. 처음부터 사람의 흔적이라고 생각했어. 문제는.’

분명 주인이 보여준 자물쇠는 망가져 있었다. 하지만 순순히 열어줬다는데, 망가질 일이 뭐가 있는 거지? 그럼 자물쇠를 부순 사람은 우물에 밀주를 푼 사람인가? 그렇다면 시간 순서가 안 맞는데. 게다가 과수원에 여우 발자국은 없었어. 그 난리를 쳤다면, 분명 발자국이 남아야 하는데. 끝까지 찾아본 결과, 발견된 건 양 발자국과 두 명의 사람 발자국.

16553707640764.jpg‘거의 지워져서 파악하긴 힘들지만, 하나는 일꾼일 거고 하나는 밀주를 푼 사람이겠지. 하지만 여우는 없어.’

여우와 양은 발 모양이 달라서, 헷갈릴 수도 없고. 하지만 범인이라는 여우는 저렇게 떡 하니 있고. 현장에서 저 여우 털도 발견됐긴 했는데.

16553707640764.jpg‘하. 미치겠네. 분명 뭔가가 이상한데.’

이사나는 이클리트와 시선이 마주쳤다. 두 사람의 눈동자는 같은 고민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이사나는 이클리트에게 다가왔다.

16553707640764.jpg“역시 이상하다고 생각하시네요.”

16553707640779.jpg“…….”

16553707640764.jpg“인신매매도 아니고. 밀수꾼이 진짜 가축을 도둑질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지금으로선 정말 저 밀주로 여우를 난폭하게 만들기만 한 것 같은데. 대체 육식계 짐승에게서 뭘 확인하고자 하는 걸까요?”

이사나의 날카로운 한마디에 이클리트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이사나는 그런 이클리트의 조그만 감정 변화를 눈치챘다. 하지만 이클리트는 곧장 표정을 바로 하며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16553707640779.jpg“저들이 만나려고 했다던 거래자를 어떻게든 파악해서 추적하라.”

16553707640764.jpg“……알겠습니다.”

이클리트는 그대로 돌아섰고, 이사나는 묘한 시선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16553707640764.jpg“대체 어느 포인트에 반응한 거지? 짐승에게서 뭔가를 확인하려고 한다는 것? 설마, 대공 전하는 그게 뭔지 알고 계시는 건가?”

1655370772542.jpg

  *** 이클리트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멜리아는 슈란과 함께 있었다. 카마리도 저격대와 정리한다고 몹시 바빠 보였다. 이클리트는 아주 은밀하게 궤짝 하나를 열어서 제대로 밀봉된 밀주 하나를 슬쩍 품에 넣었다. 밀주를 잡은 그의 손끝이 어쩐지 조금 창백하게 떨리고 있었다. *** 슈란은 아멜리아에게 깊이 고개 숙였다.

16553707640785.jpg“정말로. 정말로 감사합니다, 가주님.”

16553707725431.jpg“그렇게 고마워할 일이 아니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고, 오히려 무사해서 내가 더 고마워.”

아멜리아는 비록 밀주 밀거래의 뿌리를 파헤치진 못했지만, 그래도 사람이 다치거나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16553707640785.jpg“저기, 혹시…….”

16553707725431.jpg“왜 그러지?”

슈란은 주춤거리면서 안고 있던 여우를 보였다.

16553707640785.jpg“사실 이 아이, 아직 다쳐서 회복이 다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데리고 가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양을 해친 건 사실이라서. 마을 사람들이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죽을 테고.”

아멜리아는 슈란의 말을 이해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눈을 뜨고 있었지만, 온몸이 굳어진 것처럼 경직돼서는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게 안쓰러웠다.

16553707640785.jpg“그래서 부탁드립니다. 상처가 치유될 때까지만 가주님이 돌봐주시면 안 될까요? 정말 순하고 착합니다. 진짜입니다!”

그녀는 오히려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16553707725431.jpg“당연하지. 내가 잘 돌봐준 뒤에, 다시 숲으로 보내줄게. 걱정하지 마. 오히려 나한테 맡겨줘서 고마워.”

걱정했던 슈란은 아멜리아의 승낙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고마워했다.

16553707640785.jpg“정말로 감사합니다, 가주님! 소문대로 너무 좋으신 분이세요. 지난번 축복의 꽃을 모두가 볼 수 있었다고 가주님을 칭송했었거든요.”

16553707725431.jpg“하하. 아니야. 그렇게 좋은 말 들을 정도는. 하지만 그런 말이 부끄럽지 않게, 노력할게.”

슈란은 여우를 아멜리아에게 보였고, 아멜리아는 아주 조심스럽게 여우를 안았다. 역시나 하얗고 부들부들한 털 때문에 그녀는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역시 경계심을 풀지 않은 듯, 그녀의 품에서 눈에 보일 정도로 온몸을 떨며 근육이 잔뜩 굳어져 있었다. 아멜리아는 그 모습에 마음이 쓰였다.

16553707725431.jpg‘버려진다고 생각하나 봐. 그 기분, 나도 알 것 같아.’

슈란은 자신을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숙여버린 여우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리곤 천천히 손을 뻗어 여우를 쓰다듬었다. 어쩐지 그의 손에 힘이 가해지고, 그럴수록 여우의 떨림이 더 커졌다.

16553707640785.jpg“걱정하지 마. 이분이 잘 돌봐주실 거야. 넌 착해. 착한 여우야. 날 잊지마. 알겠지?”

여우는 더욱 아멜리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멜리아는 슈란의 염려와 여우의 마음을 헤아리며, 다독였다.

16553707725431.jpg“상처가 회복되면, 어쩌면 너한테 다시 돌아갈지도 모르겠다. 널 엄청 좋아하는 것 같아. 이렇게 헤어지기 싫어하는 걸 보니 말이야.”

16553707640785.jpg“그러게요.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계속 제가 데리고 있을 수는 없죠. 언젠가는 야생으로 돌아가서 제 역할을 해야 하니까.”

이클리트가 아멜리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멜리아는 그에게 여우를 보여주며 말했다.

16553707725431.jpg“제가 데려가서 치료해주기로 했어요.”

그는 그녀의 말에 살짝 걱정됐다.

16553707640779.jpg“그래도 야생에서 살았고 아직 밀주의 기운이 남아…….”

하지만 아멜리아가 여우를 더없이 소중히 품고서 다정하게 속삭였다.

16553707725431.jpg“걱정하지 마. 이제 아플 일 없을 거야. 내가 잘 지켜줄게.”

그녀가 너무 좋아했기에. 게다가 여우에게서 어쩐지 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서. 이클리트는 살짝 걱정되었지만,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멜리아는 공작가에서 보낸 마차를 타고 돌아가기로 했다.

16553707640785.jpg“가주님,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16553707725431.jpg“너도 다친 것 같은데. 마을로 돌아가는 거면 태워다 줄 수 있어.”

16553707640785.jpg“아니요. 괜찮습니다. 여기가 제 고향인걸요. 금방 갈 수 있습니다.”

16553707725431.jpg“그래도…….”

16553707640785.jpg“말씀만으로 감사합니다. 가주님이야말로 조심히 가세요.”

아멜리아는 슈란이 극구 손사래를 치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16553707725431.jpg“그래. 언젠가 또 인연이 되면 보자.”

16553707640785.jpg“예. 꼭, 다시 만나고 싶어요.”

  슈란은 안도의 숨을 내쉬고서 저택에서 벗어나 마구 달렸다. 아멜리아 앞에서 연신 순수하게 웃고 있던 그의 표정이 점점 싸늘하게 가라앉더니, 이내 입꼬리가 비열하게 뒤틀렸다.

16553707640785.jpg“아아. 진짜 더럽게 힘들었네.”

16553707640785.jpg“수고했다.”

그가 걸음을 멈추자, 어둠 속에서 한 그림자가 걸어 나왔다. 로브를 워낙 깊숙이 쓰고 있어서 그런지,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체구가 작고, 내뱉은 목소리가 여인의 발성이었다. 그림자는 슈란에게 묵직한 금화 주머니를 건넸다. 그는 주머니의 묵직함에 만족한 듯 웃으면서도 밉지 않게 툴툴거렸다.

16553707640785.jpg“이번엔 진짜 힘들었어. 저 여우 새끼가 진짜 날 죽일 뻔했다니까!”

16553707640785.jpg“밀주에 제대로 반응하는 거지.”

16553707640785.jpg“그런데 피오레 새 가주,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진짜 끝내주네. 까딱하다간 온몸이 다 찢겨서 죽는 거 아니야?”

16553707640785.jpg“성가신 계집이긴 하지만, 아직 신경 쓸 정도는 아니야. 어쩌면 우리가 저 계집을 가져야 할지도 모르고.”

16553707640785.jpg“저 여우는 저렇게 보내도 되는 거야? 공방으로 보내야 하는 거 아닌가?”

16553707640785.jpg“저건 저기서 할 일이 있어.”

슈란은 그림자를 슬쩍 떠보듯 말을 이었다.

16553707640785.jpg“저격대 단장 말이야. 제법 예리하더라고. 자물쇠만 아주 집요하게 물어보던데? 이러다간 전부 내가 꾸민 짓인 거, 눈치채려나?”

과수원에서 벌어진 밀주 사건의 범인은, 슈란의 자작극이었다. 밀주를 푼 것도. 밀수꾼을 끌어들인 것도 모두. 물론, 어느 정도 여우가 한 짓도 맞았지만. 그림자는 슈란의 말에 이를 악물며 돈을 더 건넸다.

16553707640785.jpg“그러니 넌 피오레령을 떠나야겠다. 잡히기 전에 사라져.”

16553707640785.jpg“그거야 당연하지.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게 또 헌터의 자질이니까.”

16553707640785.jpg“짐승들을 계속 사냥해. 그러면 언젠가 빼앗긴 태양은 우리가 손에 넣을 테니까.”

슈란은 어둠 끝에 희미한 불빛을 띠고 있는 마을을 보며 싱긋 웃었다.

16553707640785.jpg“그보단 돈이나 계속 두둑하게 줘. 다른 건 내 알 바 아니니까.”

슈란은 여유롭게 손을 흔들고서 사라졌다. 그림자는 그런 슈란의 뒷모습을 보다가 저택이 있는 방향을 서늘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16553707640785.jpg“슬슬 눈치채려나. 하긴, 눈치챈다고 해서 어쩌겠어.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절대 모를 텐데.”

아니, 어쩌면 이클리트, 그 불쌍한 아이는 뭔가를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그의 인생 전부를 누군가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을.

16553707640785.jpg“우리가 정식으로 만날 곳은 황궁인가.”

  ***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는 무사히 공작가로 돌아왔다. 먼저 소식을 들은 마미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가, 아멜리아의 여우를 보고 깜짝 놀랐다.

16553707857875.jpg“어머! 세상에 너무 예뻐요! 진짜 미호네요.”

16553707725431.jpg“많이 지쳤어. 구급상자랑 먹을 거 좀 줄래?”

16553707857875.jpg“네. 알겠어요.”

아멜리아는 곧장 여우를 데리고 침실로 갔다. 여우는 여전히 불안한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까보다는 한결 나아진 것 같았다. 착하기도 착했고. 이클리트는 혹시라도 공격성을 드러낼까 봐 계속 지켜보았지만, 아멜리아를 해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마미는 쟁반에 이것저것을 챙겨 가져왔다.

16553707857875.jpg“가주님, 이거요.”

16553707725431.jpg“고마워. 뒤엔 내가 알아서 할게.”

16553707857875.jpg“하실 수 있으세요?”

16553707725431.jpg“괜찮아. 경계가 심해서 아직 사람이 많으면 불안한가 봐. 나도 친해져야 할 것 같고.”

16553707857875.jpg“알겠어요. 고생하셨어요, 오늘.”

비록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지 못했지만, 마미는 깊이 묻지 않고 돌아섰다.

16553707725431.jpg“자, 그럼!”

아멜리아는 멀뚱하게 서 있는 이클리트를 보며 싱긋 웃었다.

16553707725431.jpg“대공 전하, 부탁할게요.”

16553707640779.jpg“네?”

아멜리아는 여우를 냅다 이클리트에게 안겼다. 이클리트는 당황하여 여우를 안은 채 움찔거렸다.

16553707640779.jpg“부, 부인?”

16553707725431.jpg“잠시만 안고 있어 주세요. 옷만 갈아입고 나올게요.”

16553707640779.jpg“하, 하지만…….”

이클리트는 힘을 줄 수도, 그렇다고 힘을 안 줄 수도 없이 어정쩡하게 굳어졌다. 아멜리아는 그 모습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덩치는 배나 크면서, 작은 여우 한 마리에 어쩔 줄 몰라 하니 말이다.

16553707725431.jpg“괜찮아요. 그냥 가만히 안고 있으면 돼요.”

16553707640779.jpg“이런 작고 약한 건, 어렵습니다. 다치게 할 것 같아서…….”

16553707725431.jpg“그러다 나중에 아이는 어떻게 안으려고 그러세요? 아빠가 되어줘야 하는데.”

순간, 아멜리아는 자신이 말하고도 뭔가 기분이 묘해졌다. 갑자기 아빠라니 무슨! 이클리트 역시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다른 의미로 몸이 굳어졌다. 어색한 공기가 미묘한 열기를 품고서 넘실거렸다. 아멜리아는 재빨리 웃으며 걸음을 돌렸다.

16553707725431.jpg“하하하. 그, 그럼 좀 부탁할게요. 얼른 옷만 갈아입을 테니까.”

16553707640779.jpg“……예.”

아멜리아가 떠나고, 남겨진 이클리트는 품 안에 얌전히 있는 여우를 보며 낯선 단어를 떠올렸다.

16553707640779.jpg‘아이…….’

일순, 그의 표정이 무섭게 가라앉았다.

16553707640779.jpg“내겐, 필요 없어.”

이 끔찍한 핏줄을 물려줄 수는 없으니까. *** 소파에 여우를 내려놓은 아멜리아는 계속 여우와 눈을 마주했다.

16553707725431.jpg“착하다, 착해. 괜찮아. 괜찮다니까.”

그녀는 군데군데 나 있는 상처 위에 약을 바르고 부드럽게 매만져주었다. 여우는 계속해서 아멜리아의 시선을 피하고 또 피했지만, 그녀가 자꾸 눈을 맞추고 다정하게 속삭이니, 점차 그 온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16553707725431.jpg“그래, 괜찮아. 이제 아프지 않을 거야. 넌 예쁘고 착한 아이니까. 내가 널 무사히 숲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줄게. 좋은 날만 가득할 수 있게. 그런 내일을 만날 수 있게.”

토닥이는 그녀의 손길을 따라서 여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떨림도 많이 잦아들었고, 표정도 많이 좋아진 것 같았다. 아멜리아는 그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하며 계속 여우만 보면서 이클리트에게 속삭였다.

16553707725431.jpg“이제 좀 덜 무섭나 봐요. 이것 보세요.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요. 진짜 사랑에 빠질 것 같아!”

이클리트는 너무 좋아하는 아멜리아의 모습에 살짝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녀는 아까부터 계속 그 여우를 품에서 떼어놓지 않은 채, 끊임없이 다정하게 쓰다듬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조금도 이클리트를 쳐다보지 않았다. 뭔가 너무 조용하다 싶었던 아멜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이클리트가 아주 빤히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너무 뜨거운 눈빛에 아멜리아는 떨리는 미소를 그렸다.

16553707725431.jpg“대공 전하, 하실 말씀 있으세요? 왜 그렇게 빤히 저를…….”

16553707640779.jpg“……아닙니다.”

이클리트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리려던 순간.

16553707725431.jpg“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네. 대공 전하도 다치셨네요!”

그녀는 곧장 그에게 다가가선 울상을 지었다. 칼에 스쳤던 뺨의 작은 상처. 사실 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16553707725431.jpg“괜찮으세요? 대체 언제 이렇게!”

16553707640779.jpg“괜찮…….”

곧장 대답하려던 이클리트는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조그맣게 속삭였다.

16553707640779.jpg“……조금. 아픈 것 같기도 하고.”

16553707725431.jpg“진짜요? 당장 치료사를…….”

그때, 아멜리아의 옷소매를 이클리트가 살며시 움켜쥐며 나직이 속삭였다.

16553707640779.jpg“부인께서, 치료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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