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무사히 여정 시작?2021.05.07.
이사나는 남게 된 칼렌에게 당부했다.
“내가 없으면 네가 단장이나 마찬가지다. 피오레를 잘 지켜.”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때, 그들에게로 카마리가 걸어왔다. 칼렌은 카마리가 대공 전하의 사람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뭔가 가까이하기 어려웠다.
“함께 가시는 건가요?”
이사나가 다정하게 물었고, 카마리는 순간 붉어진 얼굴을 감췄다.
“나 또한 대공 전하와 가주님을 지켜드려야 합니다. 덤으로. 그쪽도 지켜주겠습니다.”
“저요?”
“티어는 근거리에 약하지 않습니까. 지난번 빚, 이렇게 갚는 겁니다.”
“그런 거라면, 안 그러셔도 되는데.”
“부끄러워 마십시오. 이 정도는 남자가 받아들여도 됩니다. 한동안 같이 지낼 텐데, 좀 더 적극적이어도 괜찮습니다. 뭐, 소극적인 것도 그거대로 귀엽긴 하지만. 그래도 난 적극적인 게 좋습니다.”
이사나와 칼렌은 카마리의 말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아니 대체 무엇을?”
카마리는 이사나를 위아래로 쳐다보았다. 공식 제복을 갖춰 입은 그의 모습은 평소보다 훨씬 더 근사했다. 그녀는 주인의 의지를 배신한 채, 절로 그쪽으로 눈이 가는 걸 겨우 다스리며 말했다.
“내 이름. 뭐라고 했습니까?”
이사나는 갑자기 묻는 말에 당황하지 않고 답했다.
“카마리 경.”
부드러운 어조에 감겨 나오는 이름에 카마리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풀어지고 말았다.
“생각보다 더 괜찮네. 이름 불러주는 거…….”
이사나 역시 뜻밖의 모습에 속삭였다.
“당신도 괜찮네요.”
“뭐가 말입니까?”
“웃는 거.”
훅 파고든 목소리에 카마리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얼굴이 붉어지면서, 뒷걸음질 쳤다. 그 모습에 이사나는 진심으로 웃음이 나올 뻔했다. 의외로 귀여운 모습이 있어서.
“저, 적극적이지 않은 게 나은 것 같습니다. 아. 대공 전하께서 부르시나. 그럼 전 이만.”
도망치듯 가버리는 카마리의 모습에 칼렌은 더더욱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사나에게 말했다.
“조심하십시오. 진짜 이상한 여자입니다. 아무리 봐도 그렇습니다!”
“그런가. 난 의외라서 재미있는데.”
“예? 하긴. 단장님도 한 이상하시긴 하죠.”
“이상이라니. 난 그게 매력인데?”
이사나는 능청스럽게 말하면서 카마리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했다.
“나한테 반한 건가. 아님 내가 반했다는 설정인가. 근데 뭘 했기에, 서로가 반한 거지?”
*** 출발 준비가 끝나고, 피오레 공작가 사람들이 전부 나와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를 배웅했다.
“몸조심하세요, 가주님!”
“무사히 다녀오세요, 대공 전하!”
마차에 올라탄 아멜리아는 친근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 무사히 잘 다녀올게!”
이클리트는 아닌 척하면서, 그들에게 짧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어쩐지 이 광경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고, 다녀오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이게 집이라는 걸까.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이렇게 가슴 벅찬 느낌일까. 아멜리아는 살며시 이클리트를 보았다.
‘대공 전하도 나와 비슷한 마음이겠지?’
그도 자신과 같았으면 했다. 피오레 공작가를 돌아갈 집으로 생각해주길. 조금은 그렇게 마음을 채워서, 외롭지 않길 말이다. 순간, 아멜리아와 마주친 이클리트는 당연하게 눈매를 풀었다.
“얼른 해치우고 돌아오죠.”
조금은 장난스럽게 말해주는 그의 배려에 아멜리아는 완전히 긴장을 풀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꼭 다시 여기로 돌아와요.”
출발은 뭉클하고 썩 괜찮았다. 그런데. 아주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아멜리아는 조금 떨리는 시선으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이클리트를 힐끔거렸다. 마차는 그녀에게 익숙했다. 하지만 남자와 단둘이 마차를 타는 건 처음이었다!
‘마미랑 탔을 때는 몰랐는데, 여기가 이렇게 좁은 곳이었어?’
새삼, 이 갇혀 있는 공간이 의식되어 미칠 것 같았다. 특히 이렇게 마주 보고 있으니, 그의 시선이 닿는 게 저릿할 정도로 잘 느껴졌다. 아멜리아는 그를 한껏 의식한 채, 호흡 하나도 조심스럽게 내쉬며 어떻게든 다른 곳에 신경을 집중하려고 했다. 그래서 걸려든 게 바로 그녀의 품 안에 있는 여우였다. 아멜리아는 도저히 녀석을 공작가에 혼자 놔둘 수가 없었다. 이제야 막 경계를 풀고 친해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 아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지, 뭐야. 아무리 봐도 너무 예쁘고 귀여워!’
그녀는 여우에게 온 신경을 쏟았다. 그러니 절로 그녀의 시선을 여우가 독차지하게 되었고, 이클리트는 절로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특히, 녀석이 뭔가 아는 것처럼 그녀의 품으로 파고들면서 자리 잡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그녀를 쳐다봐도, 아멜리아는 여우에게서 눈길 한번 떼지 않았다.
“아, 하지 마. 간지러워.”
여우가 그녀의 품에서 움직이자, 아멜리아가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가 여우가 포로롱 고개를 들었다. 아멜리아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그 노란 눈망울에 흠뻑 빠져버렸다.
“여우 눈은 원래 이런가. 진짜 너무 예뻐!”
아멜리아가 고개를 살짝 숙이자, 여우가 재빨리 그녀의 뺨을 핥았다.
“하핫, 간지럽다니까.”
그러다가 여우가 그녀의 입술을 핥으려는 순간, 이클리트의 눈매가 험악하게 굳어지며 결국 잔뜩 으르렁거리고 말았다.
“그놈.”
“네?”
아멜리아는 귀에 박히는 낯선 목소리에 움찔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휘둥그레진 눈망울을 본 순간, 이클리트는 겨우 울컥했던 감정을 눌렀다.
“……이름은, 지었습니까?”
“아! 둥이요. 둥이. 귀염둥이를 줄인 거예요!”
아멜리아는 곧장 해사하게 웃으며 여우를 자랑했다.
“진짜 너무 예쁘고 착한 거 있죠? 그 밀주라는 게 정말 무서운 것 같아요. 이런 아이를 그렇게 위험하게 만들다니. 대체 왜 그런 걸 만들었을까요?”
아멜리아의 말에 이클리트의 눈빛이 낮게 흔들렸다.
“글쎄요. 계속 찾아봐야죠. 대체 목적이 뭔지.”
끝까지 도도하게 아멜리아의 품을 차지하고 있는 여우를 쳐다보던 이클리트가 슬쩍 물었다.
“근데 그 총은 왜 가져오신 겁니까?”
아멜리아의 옆에 장총보단 조금 작은 크기의 총이 있었다. 하지만 진짜 총은 아닌 모형이었다.
“장총에 익숙해지려면 자세부터 잘 잡아야 한다고 해서 틈틈이 연습하려고요. 이사나 경이 추천해줬어요. 황궁에서 다녀오면 본격적으로 티어에게 배워보려고요.”
“총 잡는 거 보여주세요.”
이클리트의 말에 아멜리아는 순간 열기가 올랐다.
“좀 쑥스러운데…….”
“총 든 부인의 모습, 멋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더 부끄러운데…….”
요즘 들어서 그를 너무 의식했다. 평소 자신이 하던 것도. 너무 사소하고 태연했던 모든 것이, 이상하게 그가 얽히면 묘한 기분이 들어서 이상했다. 아멜리아는 간지러운 마음을 겨우 잡고서, 둥이를 옆에 내려놓은 뒤 제대로 총을 장전했다.
“이 정도? 하핫. 아직은 살짝 어색하죠?”
아멜리아는 그의 시선이 깊어지자, 재빨리 총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이클리트는 불쑥 한마디를 했다.
“한 번 더 잡아줘요. 계속 보고 싶어.”
“네?”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아멜리아의 옆에 있던 둥이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둥이가 이클리트를 보면서 이를 드러냈다.
“끄르릉!”
“안 돼, 둥아!”
아멜리아는 처음으로 이를 드러낸 둥이를 보고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못써. 나빴어!”
아멜리아가 혼내자, 둥이가 꼬리를 축 내리고 풀 죽은 표정으로 반대편으로 가 앉았다. 그러곤 이클리트를 원망하듯 노려보았다. 이클리트는 그런 둥이를 보며 의젓하게 말했다.
“아직 어린 녀석 같은데, 너무 그러지 말아요. 난 괜찮으니.”
“착한 녀석인데, 죄송해요. 대공 전하.”
아멜리아는 풀 죽은 둥이를 보며, 나긋나긋한 어조로 달래주었다.
“대공 전하와도 사이좋게 지내야지. 친해지면 좋잖아. 얼마나 멋있고 좋으신 분인데. 너도 분명 좋아하게 될 거야.”
둥이를 다독이는 말에, 심장이 떨린 건 이클리트였다. 아멜리아 역시 자신이 내뱉고도 뭔가 부끄러운 말에 붉어진 얼굴을 감추며 재빨리 총을 잡았다.
“자, 자세 어때요? 제 손이 좀 작아서 자세가 잘 안 잡히나, 싶긴 한데…….”
이클리트는 아멜리아의 옆에서 조금 흐트러진 자세를 고쳐 주었다.
“저도 총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허리가 움직이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총구가 흔들릴 테니까.”
그가 손가락으로 살짝 굽어진 그녀의 허리를 눌러주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등을 감싸 자세를 잡아주며 속삭였다.
“이렇게.”
“오, 확실히 조금 더 편한 것 같아요.”
“멋집니다, 아주.”
귓가에 가깝게 파고드는 그의 목소리에 아멜리아는 갑자기 제 손등을 감싸고 있는 그의 손길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지난번, 그 아찔했던 기억까지 함께. 입술에 닿았던 손가락. 아니. 깨물렸다. 그때 그 통증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도저히 가볍게 떨쳐낼 수 없었던 느낌. 그만큼 강렬했고, 너무 이상했는데. 분명 그랬는데, 기분 나쁘지 않았던 건. 온몸이 바짝 조이면서 오히려 조금 더 다른 걸 바랐던…….
‘바라다니. 뭘?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아멜리아는 머릿속이 화르르 달아오르면서 절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클리트는 어딘가 경직된 듯한 그녀의 모습에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를 마주했다.
“왜 그러십니까? 어디 불편해요?”
“그게…….”
아멜리아는 절로 시선이 그의 입술을 향하자, 이상할 정도로 고개를 휙 돌리며 말했다.
“대, 대공 전하는 손이 참 크시네요.”
“부인 손은 작고 사랑스럽습니다.”
“사랑스럽진 않아요. 요즘 아주 거칠어졌어요.”
다른 레이디에 비해, 손에 상처도 생기고 굳은살도 박였다. 틈틈이 연습한 탓이었다. 물론 아멜리아는 그런 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인형처럼 백작가에 갇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지내던 모습보다 훨씬 좋았으니까. 하지만, 그에게 너무 못나게 보이진 않을까. 그게 살짝 걸렸다. 그러나 아멜리아의 그런 생각 따위, 이클리트는 너무 쉽게 지워버렸다.
“말했잖아요. 항상 멋있다고.”
이클리트는 그녀의 손을 아주 소중히 감쌌다.
“언제나 예쁘고, 사랑스러워요. 이곳이 북부였다면 항상 잡고서 따뜻하게 해줬을 겁니다.”
쉼 없이 쏟아지는 달콤한 말에 아멜리아는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하지만 그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클리트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그녀를 잡고 있었으니까. 마치 그녀의 시선을 온통 독차지하려고 작정한 것처럼.
‘황도에 도착할 때까지 이러고 가는 건 아니겠지? 나 진짜 심장 아픈데. 아파서 터질 것 같은데!’
심장의 꽃잎이 쉼 없이 떨어지고 있는 거 아니야? 그때, 마차가 크게 덜컹거렸다. 휘청거리는 아멜리아를 이클리트가 곧장 안아주었다 얌전히 자고 있던 둥이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서 바짝 털을 곤두세웠다. 결국 마차가 멈춰버렸다. 이클리트는 굳은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 생겼나?”
“잠시 여기 계십시오. 확인해보겠습니다.”
이클리트가 마차 밖으로 나왔다. 아멜리아도 그냥 있을 수는 없어, 둥이를 진정시키고, 뒤따라 나왔다. 그런 그들에게로 이사나와 카마리가 난처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사고가 생겼습니다.”
카마리의 말에 아멜리아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고라니요?”
이사나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길에 자갈이 쏟아져 있습니다.”
“자갈?”
황당한 소리에 아멜리아와 이클리트가 현장으로 가보니, 아주 가관이었다. 길가에 주먹만 한 자갈이 아주 끝도 없이 흩어져 있었다.
“아니, 대체 이게. 누가 일부러 이런 거예요?”
당황해하는 그녀에게 이사나가 한숨 섞인 어조로 말했다.
“그건 모르겠습니다. 근데 형태로 봐선 자연적인 현상은 아니죠. 문제는 저걸 다 치우려면 제법 시간이 걸린다는 거고. 무시하고 가기엔 바퀴가 손상될 테고,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이클리트는 서늘한 눈빛으로 자갈을 치우기 시작하는 티어들을 보며 말했다.
“그래서 결론은?”
“치우기를 기다린다면 기다릴 수도 있지만…….”
이사나가 주저하자, 어느새 나타난 케이트가 대신 말을 이었다.
“그만큼 솔라리스에 당도하는 것이 늦어질 겁니다.”
케이트의 말에 아멜리아가 되물었다.
“여기 말고 다른 길은 없나?”
그는 다른 방향을 보며 말했다.
“여기서 돌아서 가는 길이 있습니다. 하지만 길이 좀 험합니다. 그래서 보통 황도는 이 길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고민할 것도 없이 결정했다.
“피오레 가주로서 첫 대회의인데, 늦으면 곤란해. 차라리 고생을 좀 하는 게 낫지. 하지만 폐하께 전하는 선물에 흠이 생기면 곤란하니까, 선물을 실은 마차와 몇몇은 남아서 안전한 길로 가지.”
“호위를 둘로 나누시겠다는 겁니까?”
“가능할까요, 이사나 경?”
“당연히 가능해야 할 거라고 들리네요.”
“이사나 경을 믿는다는 소리죠.”
이사나는 아멜리아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사실 호위는 크게 걱정 안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주님을 지킬 분이 계시니. 그리고 알게 모르게 저격대가 멀리서 호위하고 있었고. 그저 걸리는 건.
‘대체 저 황당한 자갈은 뭘까, 하는 거지.’
이클리트도 이사나와 같은 생각으로 의심스럽게 자갈밭을 바라보았다. 아멜리아는 끝까지 표정에 여유를 지키며, 케이트에게 말했다.
“케이트는 여기 남아서 폐하의 선물을 관리하도록. 설령 늦더라도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마미, 넌 나랑 가자.”
“예, 가주님.”
“자. 그럼 결정됐으니까, 빠르게 움직이죠.”
아멜리아는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하고 움직였다. 케이트는 제법 빠른 판단과 추진력을 보이는 가주의 모습에 우려된 마음을 아주 조금 덜었다. 물론 아주 완벽하지도 않았지만.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는 다시 마차로 돌아갔다. 그녀는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서 리볼버를 챙겼다.
“연습하다가 실전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뒤에서 아멜리아의 결정을 그저 지켜보던 이클리트가 이번만큼은 힘주어 말했다.
“그 총, 쓸 일 없게 할 겁니다.”
“나도 쓸 일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마차는 궤도를 벗어나 알 수 없는 길을 향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