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태양에도 그늘이 있다2021.05.10.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주르르 멈춰 있는 고급 마차들을 힐끔거렸다. 그러자 호위병들이 그들에게 손사래를 쳤다.
“신경 쓰지 말고, 갈 길 가라.”
“예, 예.”
하지만 그들은 저 마차들이 왜 멈춰 있는지 다 알고 있었다.
“쯧쯧. 그놈들이 또 저런 짓을 한 모양이네.”
“벌써 몇 번째야?”
“이래서 없는 것들은 상종을 말아야 한다니까.”
“저주받을까 봐 가까이 가질 못하니, 계속 저러는 거잖아. 아니 대체 왜 안 죽는 거야? 목숨도 질겨서는.”
뭔가 기묘한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은 케이트가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게 무슨 말이지?”
“예?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괜히 높으신 분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까 봐, 얼른 자리를 떠버렸다. 하지만 연신 뒤를 힐끔거리면서 자기들끼리 속삭였다.
“혹시 저분들, 다른 쪽 길로 가진 않겠지?”
“설마. 거긴 위험한데. 아시겠지.”
“그렇겠지? 높으신 분들이 알아서 하겠지?”
“괜히 봉변당할라. 신경 쓰지 말자고.”
케이트는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아, 다른 쪽 길로 사라진 아멜리아를 떠올렸다.
‘별일 없으시겠지.’
아무리 아직은 믿음직한 가주가 아니더라도, 피오레의 가주는 가주였으니까. *** 마차는 한참 달렸으나, 벌써 바깥으로 어스름이 내리고 있었다. 미리 경고한 대로, 길은 조금 험했지만 견딜 만했다. 아멜리아는 둥이를 끌어안고 있었고, 이클리트는 어쩐 일인지 아멜리아의 맞은편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뭔가 이렇게 무방비한 그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아서, 아멜리아는 걱정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많이 피곤하신가 봐.’
하지만 걱정이 점점 신비함으로 바뀌었다가 다른 감정으로 녹안이 짙어졌다. 그녀의 시선이 그의 얼굴을 그리듯,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선 굵은 얼굴인데도 마냥 거칠게 느껴지지 않았다. 서늘한 눈썹을 타고, 우뚝한 콧날을 지나 굳게 다물고 있는 입술에 닿은 그녀의 시선이 괜스레 붉어져서는 떨리는 숨을 삼켰다. 아멜리아는 마치 못된 짓이라도 한 것 마냥 더위를 느끼며 곧장 시선을 위로 올렸다. 미동도 없이 닫혀 있는 그의 눈을 보자 묘하게 아쉬움이 돌았다. 처음 본 순간부터, 이분의 눈동자를 좋아했다. 푸르게 휘몰아치는 눈동자가 오롯이 자신을 응시할 때면, 등줄기가 가볍게 떨리면서 속이 이상해졌지만. 어느새 그런 느낌마저도 좋을 만큼, 그의 눈은 아름다웠다. 아멜리아는 점점 깊어지는 시선으로 그를 더더욱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마 내뱉지 못할 말을 속으로 속삭였다.
‘대공 전하. 전하. 저를, 봐주세요.’
그 순간, 이클리트가 눈을 뜨고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의 속마음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대, 대공 전하? 아니. 그게. 대공 전하의 눈동자가 예뻐서, 보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녀는 괜히 제 발 저려서 횡설수설했으나, 이클리트는 뭔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쉿.”
“예?”
아멜리아는 그제야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다. 아니, 뭔가 주변 공기가 무거웠다.
“아까 그 자갈, 함정인 듯합니다.”
“함정이요?”
그때였다. 탕-! 차가운 총성 소리. 저격대가 움직인 것이다.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는 심각한 표정으로 마차 밖으로 나왔다. 이미 멈춘 마차 주변으로 연막탄이 자욱하게 깔려 있었고, 저격대가 바람의 마탄으로 그 연막을 치우고 있었다. 어느새 주변으로 마차를 포위하는 발걸음 소리가 섬뜩하게 들렸다. 이클리트는 곧장 검을 들고서 아멜리아의 앞으로 나섰고, 그녀 역시 리볼버를 꺼내 그의 뒤를 지켰다. 숨 막히는 적막 속에 누군가 움직이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렸다. 아멜리아는 애써 긴장한 기색을 숨기며, 서서히 사라지는 연기 속에 드러나는 이들을 보고자 했다.
‘누구지? 대체 이런 함정까지 파서 황궁으로 가는 길을 막는 이들은!’
*** 포위당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카마리는 검을 들고 이사나의 곁을 지켰다. 이사나는 그 모습에 피식 웃고 말았다. 이 여자는 정말로 자신을 지키겠다는 그 말을 이행할 생각인 듯했다.
“이쪽 길로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포위당했습니다.”
카마리의 싸늘한 한마디에 이사나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주 적당히 날도 저물어 있었다. 여기에 연막탄까지 합세하니, 시야를 가리기에도 딱이었다. 그는 여유롭게 말했다.
“애초에 이 길로 저들이 안내한 거겠죠? 우리가 잘 차려진 사냥감이라는 건데. 불쌍하네요.”
“우리가 말입니까?”
“당연히.”
이사나는 제대로 장총을 장전하고서 싸늘한 저격용 미소를 지었다.
“저 도적들이.”
*** 이클리트는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는 아멜리아에게 속삭였다.
“포위한 수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대공 전하는 보이세요? 그러고 보니 제일 먼저 알아차리셨죠?”
“느낌으로.”
사실 마차에서 이클리트는 잠든 게 아니었다. 모든 신경을 바깥에 집중하고 있었다. 바람의 움직임을 지배하여 거기에 실려 오는 냄새나 공기의 움직임을 미묘하게 잡아내고 있었던 것. 그때, 사라지는 연기 너머로 뭔가가 보였다. 가장 먼저 발견한 이클리트의 눈빛이 미묘해졌고, 아멜리아 역시 당황하다가 이내 목소리를 높였다.
“전원, 총을 내려!”
아멜리아의 외침에, 주변에 있던 저격대가 멈칫하며 총을 내렸다. 연기가 사라지고, 도적들이 보였다. 아니. 이들은 도적이 아니었다. 다들 농기구를 들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저격대를 향해 떨리는 목소리에 힘을 주며 외쳤다.
“가진 거 전부 내놔!”
“안 그러면. 여길 지나가지 못할 거다!”
“우리한테 다가오면, 저주에 걸릴 거야!”
그들은 겁도 없이 아멜리아와 이클리트에게 달려왔다. 하지만 그들이 미처 다가서기도 전에, 이사나와 카마리가 쉽게 제압했다. 이클리트 역시 들었던 검을 다시 칼집에 채우고서 아멜리아의 곁으로 갔다. 굳이 자신이 나설 일이 아닌 것 같았다. 그녀 역시 리볼버를 다시 내려놓았다. 포위당했다고 생각했으나, 전부 제압하고 보니 대략 열 명도 채 되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제압한 자신들이 악역처럼 느껴졌다. 저격대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인원으로, 게다가 더 말도 안 되는 농기구를 무기랍시고 들고 뭐 하려고 한 걸까? 일단 상황 파악을 위해, 아멜리아가 걸음을 옮겼다. 이클리트는 그런 그녀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그때, 웬 여자가 그런 그녀를 막아서며 외쳤다.
“가까이 오지 마. 가까이 다가오면 너희들 다 저주받을 테니까!”
지저분한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묶고, 역시나 투박한 옷을 입은 여자는 앙칼진 시선 가득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아까부터 계속 들린 한마디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주?”
“왜 모르는 척이야? 너희 귀족 나부랭이들이 그랬잖아. 우리보고 저주받았다고! 그러니까 가까이 오지 마. 저주 내릴 거야. 가진 거 다 내놓고 썩 꺼지라고!”
악을 쓰는 여자의 모습에 아멜리아는 점점 더 의구심이 커졌다.
“누가 너희보고 저주 걸렸다고 했어?”
보기엔 그냥 평범한데.
“우리가 아픈 이유가 다 저주 때문이라고 그랬잖아!”
“아프다고? 아프면 치료를 받아야지. 어디가 아픈데?”
아멜리아는 손을 뻗어 여자의 깡마른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자 여자가 흠칫하며 외쳤다.
“왜, 왜 이래!”
여자가 아멜리아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려고 하자, 이클리트가 무서운 시선으로 여자의 손을 꽉 붙들었다. 여자는 그의 무서운 기세에 공포를 느끼며 굳어졌다. 하지만 아멜리아가 곧장 이클리트를 말렸다.
“괜찮아요, 대공 전하. 일단 이들의 얘기를 들어보는 게…….”
“라니! 그만해라, 라니!”
그때, 중년 남성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다. 그러자 이클리트에게 잡혔던 여자가 손을 확 뿌리치고서 남성에게 달려갔다. 아무래도 그녀의 이름이 라니인 듯했다.
“여기 왜 오셨어요! 우리가 알아서 한다니까!”
“이제 이런 짓은 그만해. 귀족들을 상대하다가 정말로 죽는다니까!”
“이렇게 안 해도 우린 죽어!”
라니가 악을 썼지만, 중년 남성은 라니를 무시한 채 살짝 겁에 질린 표정으로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러다가 마차의 문양을 보게 된 남성은 사색이 되어선 그대로 바닥에 엎드렸다.
“피, 피오레 공작 각하!”
가문의 문양을 알아보는 남성의 등장에 이클리트는 다시 경계했다. 아무리 봐도 소작인이 아닌 여기저기 떠도는 방랑자들 같은데, 가문의 문양을 알아본다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이 녀석들이 무식하고 철이 없어서 감히 피오레 공작 각하께 이런 무례를!”
남성의 말에, 라니와 함께 나섰던 이들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피, 피오레 공작? 포르티셰 공작과 같은?”
“라니. 너무 거물이 걸렸잖아. 잔챙이 귀족만 걸릴 거라며!”
원망 섞인 말에 라니는 살짝 당황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돼, 됐어. 겁먹지 마. 오히려 잘됐지. 그자와 같은 공작이라는 거잖아. 높을수록 가진 게 많을 거야. 가진 게 많을수록 우릴 무서워한다고. 그자처럼.”
정확히 말하자면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더럽게 여기는 거지만. 아멜리아는 이들에게 뭔가 사정이 있다는 걸 확신하고서 그나마 대화가 통할 것 같은 남성에게 말했다.
“솔라리스로 가던 도중, 자갈 때문에 통행을 방해받았는데. 이들의 짓이냐?”
남성은 눈을 질끈 감고서 죽어라 빌었다.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그만두라고 해도 영 말을 듣질 않아서. 이번 한 번만 봐주시면 제가 주의시키겠습니다. 공작 각하,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그만두면! 이대로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을 거야?”
그때, 라니가 남성의 말을 가로막고서 다시 아멜리아에게 나섰다. 아멜리아는 차분하게 라니를 지켜봤고, 라니는 그 눈빛에 살짝 움찔했지만, 일부러 더 목소리를 높였다.
“우릴 여기 가둔 건 귀족이야. 당신 같은 공작이라고. 우릴 여기 가뒀으니까, 뭐 어떻게 먹고 살든 우리 마음 아니야?”
“뭐 하는 거냐. 라니를 어서 끌어내!”
남성은 서둘러 라니를 물러나게 했다.
“이거 놔. 놓으라고. 내가 뭐 잘못 말했어? 놔!”
라니는 발버둥 치면서도 절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겁먹었어도, 눈동자엔 증오와 분노가 가득했다. 그 감정이 저 아이를 여기까지 이끄는 것이다. 뭔가 사연이 있지만, 쉽게 말해줄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이대로 넘어가기에도 찜찜했다.
“날도 저물었고, 쉴 곳이 필요한데.”
아멜리아의 말에 이클리트는 뭔가를 깨달았다.
“마을로 안내해줄 수 있겠나?”
그 말에 남성의 표정이 더욱 더 어둡게 굳어졌다.
“아, 안 됩니다. 공작 각하께서 어찌 누추한 저희 마을에…….”
“이건 부탁이 아니고 명령인데.”
“예?”
“귀족이 가는 길을 방해한 건, 내가 그냥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지만. 명령까지 거절하면 조금 곤란해. 내 체면이 말이야.”
아멜리아의 목소리가 조금 낮게 울리자, 남성은 바들바들 떨면서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하, 하지만 공작 각하 같으신 분이 저희 마을에 오시면. 벼, 병에 걸리실 수도 있고. 저주에도…….”
‘또다. 또 같은 말이야.’
아멜리아는 더더욱 확신했다.
‘이 마을에 뭔가가 있어.’
그녀는 처음부터 공작가를 두려워했던 남성을 떠보기 위해,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줬다.
“설마 그 마을에 루베르 공작령 사람이 있는 것이냐?”
그때, 멀리서 사태를 지켜보던 이사나가 그답지 않게 차가운 목소리를 냈다. 이사나의 말에 저격대조차 표정이 굳어졌다. 이클리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멜리아만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루베르라니?”
갑자기 그들이 왜 나오는 거지? 이사나는 대답 없는 그들을 보며 아멜리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저들이 이토록 반성하니, 가주님께서 자비를 베푸시고 어서 돌아가시죠. 서둘러 솔라리스로 가셔야 합니다.”
아멜리아는 뭔가 아는 듯, 태도가 이상한 이사나에게 물었다.
“이사나 경은 뭘 아는 거죠?”
그녀가 뭘 묻는지 알면서도 이사나의 대답은 질문의 핵심을 비껴갔다.
“이곳을 확인해본 결과, 포르티셰 공작령입니다. 자칫 포르티셰 공작 각하의 심기를 거슬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뭘 했다고 그분의 심기를 거슬리게 한다는 거죠? 그렇게 날 협박하는 건가요, 이사나 경?”
“가주님!”
“협박이 아니면 이유를 말하고, 설명해요. 내가 말했죠. 인형 취급하는 거, 잘 안다고. 아무것도 모르게 하면서 날 끌고 가려 하지 마요. 알려줄 게 아니면, 알려달라고 안 할 테니까, 방해하지 말고.”
이사나는 완강한 아멜리아의 모습에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여긴 아마, 포르티셰 공작 각하께서 지정하여 봉쇄한 마을일 겁니다. 환자가 있어도 치료사가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함부로 탈출하지도 못하게 한.”
너무 끔찍한 말에 아멜리아는 눈을 크게 떴다.
“아니, 대체 왜…….”
“솔라의 그림자니까.”
이클리트의 목소리가 섬뜩하게 번졌다.
“저주받은 루베르는 태양신의 가호 아래, 치료받을 수 없습니다.”
또다시 저주라는 말이 흐른다.
“하지만 루베르라면, 루베르 공작령 사람들이잖아요. 근데 왜 치료받을 수 없다는 거죠? 아니, 그보단 대체 저주라니…….”
“루베르가 루베르 공작령에서만 사는 건, 자신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루베르를 벗어나면, 솔라의 차별을 받으니까. 솔라에게 루베르는 저주받은 이방인입니다.”
이사나가 말했던 것과 비슷한 얘기가 이클리트의 입에서 나왔다. 아멜리아는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너무 다른 진실에 뭔가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분노와 부끄러움이 치밀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면서. 인형 취급하지 말라고 큰소리친 건가. 이렇게 우물 안 개구리로 있었으면서?’
그건 누구도 아닌, 자신을 향한 분노였다. 그 분노 앞에 아멜리아의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 단단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