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밑바닥에 버려진 이들2021.05.14.
아멜리아의 눈동자가 단단해지더니, 이내 라니에게 걸어갔다. 라니는 갑자기 자신에게 걸어오는 아멜리아의 모습에 움찔했다. 뭔가, 조금 전과 분위기가 달라 보였다.
“뭐, 뭐야?”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제대로 말해.”
“뭐?”
“두 번 묻지 않아. 왜 자갈을 깔고, 귀족들을 이 길로 유인했는지. 그것만 말해.”
뭔가 냉랭한 분위기에 라니는 행여 목소리가 떨릴까 봐, 힘을 주며 말했다.
“우리도 살아야 하니까. 황도로 가는 길목을 막으면서, 하급 귀족들을 약탈했어. 돈이나, 식량이나, 운 좋으면 약을 구하기도 하고.”
“…….”
“약탈은 쉬워. 우릴 벌레 취급하니, 상종하기 싫어해서. 아니면 진짜 저주라도 걸릴까 봐, 다 내놓고 가버렸으니까. 사실 귀족들에겐 푼돈밖에 안 되거든. 우리에겐 귀중한 삶이지만. 포르티셰 공작은 우릴 더럽다고 하면서 여기 가두기도했고.”
“더럽다니…….”
끔찍한 말을 익숙한 듯 덤덤하게 말하는 라니를 보면서, 아멜리아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말했다.
“그럼 나도 그렇게 걸린 거로 하자.”
“무슨?”
아멜리아는 고개를 들고서 저격대에게 말했다.
“저격대 반은 남아서 여길 지켜요. 나머지 반은 식량이나, 구급약품 등을 챙겨서 날 따라오고. 마미, 너도 여기 남아.”
자신이 나설 일이 아니기에, 뒤에서 지켜보던 마미는 남으라는 말에 펄쩍 뛰었다.
“가주님! 저도 갈래요!”
“미안해, 마미. 넌 둥이랑 여기 있어 줘.”
아멜리아는 마미를 다독이며 카마리를 보았다.
“이사나 경과 카마리 경은 나와 함께 마을로 가요.”
“안 됩니다, 가주님.”
하지만 이사나는 아멜리아를 말렸다.
“들으셨잖아요. 저 마을, 포르티셰 공작 각하께서 만든 곳입니다. 가주님이 저길 도와주게 되면, 포르티셰 공작 각하께 도전하게 됩니다.”
포르티셰 공작가는 다섯 공작가 중 가장 보수적인 공작이다. 애초에 루베르 공작가를 인정하지도 않았고, 그렇기에 루베르를 경멸하여 저런 감옥 같은 마을까지 만든 것이다.
“그래서 얼굴도 보지 못한 그 공작 각하가 난 싫어지려고 하네요. 반항하고 싶을 만큼.”
“예?”
“말했잖아요. 도와주는 게 아니라, 내가 아직은 어리숙한 가주라서 저들의 함정에 빠진 거라고. 진짜 저주에 걸릴 것 같으면 이사나 경도 여기 남아요. 대공 전하는 저랑 가실 거죠?”
아멜리아의 말에 이클리트는 당연하게 말했다.
“제 존재 자체가 저주보다 무서워서 말입니다.”
가볍게 말했지만, 그의 표정이 썩 편하진 않았다. 그녀가 뭘 알고 싶어 하는지 알았다. 그렇기에 그녀의 뜻을 따르겠지만, 어쩐지 이클리트의 눈동자에 불안이 서려 있었다. 이건 다른 의미의 불안이었다. 아멜리아는 평소답지 않게 굳어 있는 이사나에게 완강하게 말했다.
“이사나 경이 그랬죠? 나조차 모르는 선택을 하지 말라고. 그래서 내가 제대로 알고 선택하기 위해, 난 저길 가야겠어요. 모든 걸 알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계속 의문이었던 걸 조금은 확인할 수 있겠죠.”
“…….”
“우물 안 개구리로 계속 있을 수는 없으니까. 아무것도 모른 채, 들러리 노릇 하고 싶진 않아요.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이건 부탁 아니고 명령이에요.”
아멜리아는 더는 이사나를 설득하지 않은 채,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 라니에게 말했다.
“자. 어서 날 마을로 안내해. 살고 싶다고 했지? 그럼 넌 그것만 생각하고 대단한 거물을 잡아서 약탈하라고.”
결국,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는 그들을 따라나서게 됐다. 카마리는 표정이 어둡게 굳어진 이사나를 보며 의외라는 듯 입을 열었다.
“설마 진짜 무서운 겁니까? 저주에 걸릴까 봐?”
“아니요. 가주님이 희망을 품고, 그 희망에 걸려든 사람들이 또 저주에 걸릴까 봐 무섭죠.”
어쩐지 이사나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저주는 별 게 아니에요. 선동하고, 선동당하면 그게 저주가 되는 거죠.”
*** 라니는 여전히 아멜리아를 의심스럽게 쳐다보며 말했다.
“마차로는 못 가요. 길이 좁아서. 아주 많이 걸어가야 한다고요. 고귀한 가주님께서 잘 버티고 가려나? 아니면 남편분이 업어주나?”
빈정거리는 말투지만, 그래도 더는 반말하지 않았다. 아멜리아는 그 모습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걱정해줘서 고맙지만, 신경 쓰지 마.”
“하! 걱정은 무슨. 누가 신경 썼다고. 피오레 새 가주가 엄청 이상하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진짜네요.”
“축복의 꽃 때문에 그런가? 여기까지 소문이 퍼졌어? 그럼 황궁에서 나 완전 주인공이겠네. 그건 좀 떨린다.”
“진짜 이상해. 이상하다고.”
라니는 아멜리아를 가로질러 달렸다. 아멜리아는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어쩐지 말이 없는 이클리트를 슬쩍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내 멋대로 결정해서. 많이 힘드시죠?”
이클리트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북부는 여기보다 훨씬 험한 곳이라. 오히려 부인이 걱정입니다. 정말로 제가 업고 갈까요?”
“괜찮아요, 이 정도는!”
그가 말하면 농담이, 농담이 아닌 것 같았다.
“그나저나 대공 전하는 루베르에 대해서 뭘 좀 아시나요?”
루베르 령은 북부에 있었다. 사실 원래 북부의 절반은 멸망한 루베르 공국의 영토였다.
“루베르를 본 적 있어요?”
“아니요. 워낙 폐쇄적인 곳입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북부는 다스리는 곳이 아니기에 굳이 간섭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아. 그럼 가주가 누군지도 모르겠네요.”
“전혀요. 사실 이들은 루베르 령에서 나오지 않는데, 보통은 붙잡혀 나와서 비극적인 삶을 살죠.”
“붙잡혀 나오다니요?”
“탐을 냅니다. 루베르의 저주를 두려워하면서도.”
이클리트의 차가운 한마디에 아멜리아의 눈동자가 떨렸다.
“탐을 낸다고요?”
“보시면, 왜 그러는지 아실 겁니다.”
사실 이클리트는 루베르가 조금 두려웠다. 그들은 너무 많은 걸 알고 있고, 그래서 자신의 비밀이 꿰뚫릴까 봐. 지금도 그런 불안이 들었다. 달이 구름에 가려 사방이 캄캄했다. 마침내 그들은 다 쓰러져가는 마을의 입구에 당도했다. 분위기는 몹시 을씨년스러웠다. 라니는 시니컬한 어투로 내뱉었다.
“조심해요. 진짜 저주 걸릴지도 모르니까.”
“저주는 이미 걸려봐서 괜찮아. 어땠는지 말해줄까?”
마냥 싱긋 웃는 아멜리아의 모습에 라니는 치를 떨었다. 무슨 말을 해도 도통 겁을 내지 않았으니까. 사실 저주받았다는 말이 아멜리아에겐 그리 어색하진 않았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유가 자신이 저주받아서 그런 거라고 하셨으니까. 예전엔 그 말이 아팠지만, 이젠 충분히 괜찮아졌다. 그렇게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집이라고 하기엔 무너질 듯한 곳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살짝 긴장해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이상할 건 없었다. 다들 평범해 보였으니까.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그들에 대한 경계심은 가득했다.
‘여기에 루베르가 살고 있다고? 보면 바로 알 수 있다고 했지만 잘 모르겠는데…….’
그때, 구름에 가렸던 달이 환하게 뜨면서 그녀는 절로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탁, 하고 멈춰버렸다. 아니, 시선을 빼앗겨버렸다. 달빛 아래, 마치 숲의 정령처럼 서 있는 한 여인의 모습에. 흘러내리는 백발 너머, 주름진 얼굴 가득 기이한 문양이 신비롭다 못해 오싹했다. 게다가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선홍빛 눈동자가 오롯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단숨에 깨달았다.
‘루베르…….’
루베르라는 이름에 붉다는 의미가 있는데, 저 눈동자 때문인 듯했다. 라니는 그녀를 보자마자 굳어진 표정으로 달려갔다.
“왜 여기까지 나오셨어요!”
“달이 귀한 손님을 모셔왔으니까.”
“귀하긴 무슨. 우리 함정에 빠진 사람들이에요.”
“뭐든 우연인 인연은 없다.”
그녀는 지팡이를 짚고서 아멜리아에게 다가왔다. 아멜리아는 어쩐지 고개 숙여야 할 것 같아서 숙이려는데, 그녀가 먼저 손을 뻗어 아멜리아의 얼굴을 감싸곤 시선을 마주했다. 가까이에서 바라본 그녀의 눈동자는 더 신비로웠다.
이클리트도 그녀를 경계하긴 했으나, 말리진 않았다. 아멜리아는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
그녀가 먼저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우린 그저 살아가는 자지만, 다들 우릴 루베르라고 부르지요. 하지만 그냥 소냐라고 불러주십시오.”
“루베르.”
멀리서 지켜보던 카마리는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정말 이곳에 루베르가 있었네. 북부에서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그녀의 옆에 있는 이사나의 눈동자가 어쩐지 잘게 떨렸다. 아멜리아는 눈앞의 존재가 믿어지지 않았다. 그저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신비로웠다. 그런데 저주라니. 가당치도 않았다. 소냐는 아멜리아를 꿰뚫어 보듯 바라보며, 그녀의 보랏빛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다가 가슴에 멈췄다.
“가주님은 참으로 예쁜 꽃을 피우고 계시는군요. 너무 예쁘게 피었기에, 슬프게도 오래 보진 못하는군요.”
뭔가 아는 것처럼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아멜리아는 핏기가 가셨다. 지켜보던 이클리트는 아멜리아의 낯빛이 파리해지자 굳어진 표정으로 소냐의 손을 붙잡았다.
“지금 뭐 하는 것이냐?”
그때, 소냐가 흠칫하더니 이클리트의 손을 강하게 떼어냈다. 그리고 그를 보자마자 온몸을 떨면서 납작 엎드렸다.
“어, 어찌 이곳에!”
“할머니!”
갑작스러운 소냐의 행동에 모두가 경악했다. 하지만 이클리트는 그저 입을 꾹 다물고서 그녀를 노려보았고, 소냐는 그 눈빛에 흠칫하여 가빠지는 숨을 겨우 삼켰다.
“왜 그래요? 어디 또 아프세요?”
라니가 그녀를 부축하자, 소냐가 겨우 몸을 일으키며 떨리는 입을 열었다.
“잠시. 현기증이 일었구나.”
“그러게. 나오지 마시라니까!”
“괜찮은가?”
아멜리아 역시 걱정하자, 소냐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이클리트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이사나 역시 뭔가 이상한 듯, 이클리트를 바라보았다.
‘분명 대공 전하를 보고 놀라서 엎드린 것 같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예를 갖추는 것처럼 보였다.
“어디 편찮으신가? 대체 어디가…….”
“아프다고 처음부터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아멜리아의 말에, 그녀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래도 라니는 괜히 화가 났다.
“라니야.”
소냐가 그런 라니를 나무라자, 라니는 음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멜리아는 그녀를 이해하며, 소냐에게 말했다.
“혹시 몰라서 약품을 챙겨왔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감사합니다, 가주님. 하지만 저보다 심한 아이들이 있습니다.”
“환자들을 좀 봐도 되겠는가? 상태를 확인하면 더 도움을 줄 수도 있고…….”
“뭐야. 진짜 저주에 걸리고 싶어?”
라니의 말에 아멜리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주가 아니라 아픈 거야. 아픈 건 치료할 수 있는 거고.”
라니는 아멜리아의 올곧은 눈동자에 멈칫했다. 사실 이런 귀족은 처음이었다. 여기까지 들어온 귀족 자체가 처음이었으니까. 그것도 다섯 공작가의 가주. 자신들을 여기 가둔 것도 다섯 공작가의 가주였는데. 그렇기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라니는 부질없는 희망 하나를 잡아보았다.
“정말로 도와주려는 거라면. 따라오세요.”
*** 소냐와 라니가 그녀를 데려간 곳엔 환자들이 있었다. 환자 중엔 평범한 사람과 루베르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이들 모두, 버려진 사람들이었다. 환자를 본 카마리가 아멜리아에게 말했다.
“제가 좀 살펴보겠습니다.”
“카마리 경이요?”
“약간의 의술 지식이 있습니다. 북부도 치료사를 구하기 힘들어서, 가끔 아픈 동료들을 제가 봐주기도 했습니다.”
“그럼 부탁해요.”
“여기 있는 티어 중에도 의술 지식을 가진 이가 있습니다.”
그때, 마을에 들어온 순간부터 침묵했던 이사나가 나섰다.
“도움이 될 겁니다.”
아멜리아는 이사나가 일부러 저들을 데려왔다는 걸 깨닫고선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다들 부탁해요.”
살펴본 결과, 중병도 있지만 가벼운 병이 대부분이었다. 카마리는 살짝 난색을 보이며 말했다.
“사실 치료사만 있으면 대부분 치료가 됐을 텐데.”
아멜리아는 그 말이 더 가슴 아프게 들렸다. 라니 역시 이를 악물며 일그러지는 표정을 바로잡았다. 남들에겐 쉬운 일이, 자신들에겐 어렵다는 게 그들을 더 비참하게 했다.
“치료사는 정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해?”
“아무도 안 와요. 저주받는다고. 그나마 할머니가 의술 지식이 있으셔서 이어가고 있지만, 이젠 한계죠.”
“대체 루베르를 왜 이렇게까지 차별하는 거지? 선왕께서 공작가의 지위까지 내렸잖아. 황제를 택할 권능까지 주어졌잖아.”
라니는 아멜리아의 헛된 이상에 냉소를 그렸다.
“가주님은 착하시지만,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네요. 하긴. 몰라서 도와주시는 건가. 여기까지 도와준 것도, 그래. 도움 받은 거니까. 전 빚지는 거 싫어하니까, 말씀드리죠.”
라니는 시간이 지나도 절대 없어지지 않는 울분을 누르고 또 누르며 말했다.
“선왕이 루베르에게 공작 작위를 내린 건, 독이 든 선의에요. 시간의 숲을 차지하고 싶어서. 자신들이 지배하고자 던져준 복종을 위한 선의라고요.”
루베르는 태양신이 아닌 정령을 신으로 모시고 살았다. 그렇기에 고대 마법사도 많았고. 물론 지금은 시간의 숲이 봉인되면서, 루베르에도 고대 마법사는 사라지고 말았지만.
“시간의 숲을 얻고자 루베르를 대우해주는 척, 이용하려고 했지만 그게 거부당하니 본성이 드러난 거죠. 특이한 외모에 저주받았다고 손가락질하면서, 한편으론 탐이 나 노예로 삼기도 하고요. 아주 추악해.”
라니의 입을 통해 나온 끔찍한 진실이 아멜리아의 머릿속으로 숨 막히게 파고들었다. 자신이 알고 있고, 배웠던 역사는 그저 승자가 전리품처럼 써 놓은 거짓이었던 거다.
“받는 사람이 선의로 바라지 않으면, 그건 선의가 아닌 악의가 되는 거예요. 애초에 솔라는 루베르를 이용하고자 했던 것뿐. 처음부터 사람 취급하지 않았죠. 지금의 현왕은 더더욱 심하고.”
“그저. 외모가 특이하기 때문에 차별받는 거야?”
이렇게 물어도 되는 걸까. 아멜리아가 머뭇거리자, 라니는 쓰게 웃었다.
“루베르가 차별받는 건, 그들과 어울려 살았기 때문이에요.”
“그들이라니?”
“이 세계가 괴물이라고 말하는 존재. 저주받은 홍안의 계승자.”
라니의 말이 이어지자, 이클리트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리고 절대 나오지 않길 바라는 이름이 나왔다.
“수인.”
“수인…….”
귀에 닿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런 존재가 있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살면서 처음 내뱉어보는 그 오싹한 단어를 아멜리아는 긴장된 어조로 되뇌었다.
“루베르는 정령을 신으로 모시기에, 수인과도 가깝게 지냈어요. 괴물과 어울렸으니, 저주받았다고 한 거고. 어쩌면 반인반수를 낳았을지도 모른다며 멸시당했죠.”
“반인반수라면.”
“수인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예요. 수인도 괴물 취급하는데, 반인반수는 오죽할까.”
“…….”
“사람 취급도 안 하지.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역겨운 짐승일 뿐.”
이클리트는 자신도 모르게 아멜리아의 표정을 살피며 턱 끝이 떨릴 만큼, 힘을 주었다. 아닌 척, 태연하게 서 있으려고 해도 온몸에 피가 식었다. 그녀가 수인도, 반인반수 존재 자체도 모르길 바랐는데. 그래서 루베르와 얽히고 싶지 않았는데. 이들은 꿰뚫어 보니까. 수인의 존재를. 그래서 그 여인도……. 순간, 소냐의 선홍빛 눈동자가 이클리트와 마주쳤다. 그는 눈동자가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역시나 그녀는 자신을 꿰뚫고 있었다. 서늘한 공포가 그를 옥죄었다. 다른 이가 아는 건 상관없었다. 아니, 세상 모든 이가 알아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말하지 마, 제발. 그녀 앞에서. 말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