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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그녀가 바라는 황제 (40/199)

40화. 그녀가 바라는 황제2021.05.21.

어둠을 밝히는 건 결국엔 빛뿐이다. 두려움과 공포는 혼자 헤쳐나가긴 버겁다. 아버지에게 버려졌던 자신에게 내민 로사 유모의 손길. 또 한 번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다독여준 대공 전하의 손길까지. 이들에게도 필요하다, 그 손길이. 그걸. 아멜리아는 자신이 하고 싶었다.

16553709770165.jpg“더 자세히 알고 싶어졌어. 루베르에 대해서. 수인도 궁금해졌고.”

라니는 그런 아멜리아가 이젠 신기하기까지 했다. 아무리 말뿐이라고 해도, 이런 말조차 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손을 내미는 척이라도 그들은 하지 않았으니까. 모두가 피하며, 경멸하기만 했을 뿐.

1655370977017.jpg“당신도 귀족이잖아요. 그것도 다섯 공작가의 가주. 아까 당신 사람들도 다 말렸잖아요. 다칠 수 있어요. 그 잘난 이름에 흠이 생길 수도 있다고요.”

16553709770165.jpg“그런 건 겁 안 나. 사실, 난 지금 복수 중이거든.”

1655370977017.jpg“……네?”

16553709770165.jpg“너도 제대로 복수해. 솔라 제국에.”

라니는 일순 당황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진지했다.

16553709770165.jpg“이 제국이 너희를 이용한 거잖아. 그럼 너희도 이용할 건 이용해야지. 선왕께서 악의로 건네준 선의라고 할지라도, 칼자루를 쥐여준 건 마찬가지야. 그렇다면 피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휘둘러야지.”

1655370977017.jpg“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멜리아는 쉽다는 듯 말을 맺었다.

16553709770165.jpg“너희가 바라는 황제를, 솔라에 새로운 황제로 만드는 거야. 루베르는 그걸 선택할 권능이 있어.”

라니는 감히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엄청난 발언에 몸이 떨렸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일단 루베르는 다섯 공작가 중 하나였으니까. 정말로 그들이 바라는 이가 황제에 오르면. 지금 이 끔찍한 차별을 깨부술 수 있다.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다.

16553709770165.jpg“루베르도 나와 함께 황제를 선택하는 거야. 이젠 진짜 루베르 가주를 만나고 싶어졌어. 아니. 만나야겠어.”

1655370977017.jpg“만날 수 있어요?”

16553709770165.jpg“글쎄. 대회의에 온다면? 안 되면 찾아야지. 만약 만나게 되면, 정신 좀 차리라고 내가 말해줄게.”

아멜리아는 선택했고, 결정을 내렸다. 루베르를 취하겠다고. 대공 전하를 황제로 세우기 위해, 이들과 손을 잡을 거다. ***

16553709798065.jpg“하아…… 힘드네.”

이사나는 그답지 않게 지친 표정으로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기 있으니, 이곳의 공기가 그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는 손가락을 까딱이며 음울한 표정을 지었다. 사탕이 간절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달콤한 게 먹고 싶었다. 아프게도 소용돌이치는 제 마음을 진정할 수 있게. 아주 달고, 단 것으로.

16553709798065.jpg“루베르를, 별로 보고 싶지 않았는데.”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온 한마디에 이사나의 입꼬리가 더욱더 무겁게 굳어진 찰나. 갑자기 이사나의 옆으로 아멜리아가 불쑥 나타나선, 그녀 역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사나는 흠칫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16553709798065.jpg“가주님?”

그에 비해, 아멜리아는 몹시 태연했다.

16553709770165.jpg“앉아도 되죠.”

16553709798065.jpg“이미 앉으셨잖아요.”

16553709770165.jpg“물음표로 물은 게 아니라, 마침표로 물은 거예요.”

16553709798065.jpg“하. 그보단 그냥 땅바닥에 그렇게. 드레스 더러워지십니다.”

16553709770165.jpg“이미 더러워져서. 나중에 마미한테 혼나겠다.”

이사나는 너무 아무렇지 않아 하는 아멜리아의 모습에 한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일으켰다.

16553709798065.jpg“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리고 곧장 자신의 윗옷을 벗어 바닥에 깔아주곤, 그 위에 그녀를 앉게 했다.

16553709798065.jpg“나중에 마미한테 핑계라도 되십시오. 노력했는데도 더러워졌다고.”

16553709770165.jpg“이사나 경 옷은 괜찮아요?”

16553709798065.jpg“전 혼낼 사람이 없거든요.”

16553709770165.jpg“서 있지 말고, 앉아요.”

이사나는 엉거주춤하게 서 있다가 이내 살며시 그녀의 옆에 앉았다.

16553709798065.jpg“근데 너무 가까이 계신 거 아닙니까? 대공 전하는요? 아니면 저랑 단둘이 만나고 싶으셨습니까? 그게 제일 좋긴 한데.”

그는 평소처럼 눈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16553709770165.jpg“단둘이 만나고 싶은 건 맞아요.”

생각과 다르게 받아친 말에 이사나는 순간 입술을 물었다. 게다가 아멜리아는 이사나를 아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녹안이 더없이 부드럽게 그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이사나 역시 홀리듯 그녀를 보다가 뭔가 느껴선 안 될 뭔가를 느끼곤 슬쩍 시선을 돌렸다. 생각보다 가깝다. 이 거리. 그래서 괜히, 진짜 떨리는 것처럼 만들었다.

16553709798065.jpg‘그럴 리가 없는데.’

16553709770165.jpg“이제 보니 이사나 경, 눈동자가 예쁘네요.”

아멜리아의 말에 이사나는 애써 이상한 기분을 가다듬었다.

16553709798065.jpg“그래서 잘생겼다고요? 새삼스럽게 그러십니까.”

16553709770165.jpg“핑크색이면, 선홍빛이랑 비슷하네요. 루베르처럼. 분명 저들도 이렇게 예쁜 색인데.”

16553709798065.jpg“…….”

16553709770165.jpg“저들은 붉은색 같다고. 그래서 수인과 비슷하다고. 그렇게 저주받았다고 한데요.”

이사나를 향한 아멜리아의 눈빛이 달라졌다.

16553709770165.jpg“지난번, 루베르를 취하면 독이 든 성배라고 한 게, 이런 이유였나요?”

16553709798065.jpg“그렇죠.”

16553709770165.jpg“이사나 경은 많은 걸 알고 있네요.”

이사나는 아멜리아의 말에 살짝 표정이 굳어졌으나, 이내 말을 이어갔다.

16553709798065.jpg“저는 피오레의 머스켓티어입니다. 단장직에 오르기 전엔, 코드 네임을 가지고 솔라 곳곳에서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여러 가지, 빛과 그림자를 알게 되기 마련이죠.”

16553709770165.jpg“그렇구나. 그럼 내가 더 미안해지네. 내가 아무것도 모르니까, 이사나 경이 진심으로 걱정해준 건데. 참 오만했네요.”

16553709798065.jpg“한 가문의 가주는 그런 겁니다. 설령 몰라도, 쉽게 속을 보이시면 안 됩니다. 상대에게 보여줄 것만 보여주세요. 감출 수 있는 건 완벽하게 감추고. 그러니 가주님은 잘하신 겁니다.”

16553709770165.jpg“내가 이사나 경을 많이 오해했네요. 이사나 경은 진심으로 피오레를 좋아하기에 나한테 이렇게 말해준 건데.”

피오레를 좋아해서? 그래. 당연한 거다. 피오레를 좋아하기에. 아끼고 있기에. 그녀가 피오레를 위태롭게 하지 않길 바라기에. 이사나는 그런 마음으로 아멜리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쩐지 마음 한편이 묘하게 아렸다.

16553709798065.jpg“절 시건방진 놈으로 만들었다가, 또 이렇게 착한 놈으로도 만들고. 사람 마음 참 들썩이게 하시네요.”

16553709770165.jpg“변덕이 심하다고 돌려 말하는 거죠?”

16553709798065.jpg“에이, 설마요. 계속 제 마음을 휘둘렀으면, 하는 거죠.”

아멜리아는 이사나의 농에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16553709770165.jpg“변덕이 심하다고 해도 할 말은 없네요. 사실 계속 망설였어요. 지금 대공 전하의 평판도 완벽하지 않은데, 루베르를 취하면 더 힘들어지지 않을까. 어렵더라도 좀 더 힘 있는 공작가의 손을 잡아야 하지 않을까.”

16553709798065.jpg“……선택하신 거군요.”

낮아진 이사나의 어조 끝에 아멜리아는 단호한 시선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16553709770165.jpg“루베르가 필요해요. 루베르를 품어야 솔라는 진정한 태양의 의미를 완성할 수 있어요.”

16553709798065.jpg“그 길을 가신다면, 기꺼이 따라야죠.”

아멜리아는 조금 가벼워진 표정으로 그를 향해 살포시 웃었다.

16553709770165.jpg“앞으로도 계속 웃으면서 쓴소리해줘요. 맞서볼 테니까.”

16553709798065.jpg“쓴소리라니요. 전 항상 가주님께 달달하고 싶은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그의 윗옷을 집어 들었다.

16553709770165.jpg“이건 마미한테 부탁해서 세탁한 뒤 돌려줄게요.”

이사나는 그 말에 놀라, 윗옷을 붙잡았다.

16553709798065.jpg“아니요,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16553709770165.jpg“이사나 경을 혼낼 사람은 없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있어요.”

아멜리아의 말에 윗옷을 붙잡았던 그의 손가락에 힘이 스르르 풀려버렸다.

16553709770165.jpg“곧 떠날 테니까, 준비 부탁해요.”

그녀가 떠나고, 남겨진 이사나는 뭔가 기분이 이상해졌다. 아까보다 훨씬 더 사탕이 먹고 싶어졌다.

16553709798065.jpg“단 게 먹고 싶은데…….”

분명 먹고 싶은데, 먹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뭔가. 달게 느껴지면 절대로 안 될 것까지 삼켜버릴 것 같아서. 그는 무심코 제 눈매를 더듬으며 낮아진 어조로 읊조렸다.

16553709798065.jpg“눈이 예쁘다니. 그들과 비슷해서, 아주 지긋지긋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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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멜리아는 굳이 이클리트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바람이 부는데, 이상하게 바람이 부는 방향이 그녀를 이끄는 것 같았다.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니, 새벽을 비추는 햇살 아래 그가 있었다. 이름 모를 들꽃을 한껏 안고서. 아멜리아는 절로 미소를 지으며 이클리트에게 다가갔다.

16553709770165.jpg“여기서 뭐 하세요?”

이클리트는 마치 그녀가 올 줄 알았다는 듯, 자연스럽게 한 아름 딴 꽃을 안겨주었다.

16553709911302.jpg“제비꽃은 아니지만.”

그가 가지고 있을 때는 엄청 작은 꽃다발처럼 보였는데, 아멜리아가 받으니 몸집의 절반을 가리는 것 같았다. 대체 언제 이렇게 많이 따셨을까. 아멜리아는 저 큰 덩치로 이걸 하나하나 모았을 모습을 떠올리며 배시시 웃었다.

16553709770165.jpg“꽃은 어디 피어 있어도, 그 어떤 꽃이어도 예쁜걸요. 그때 대공 전하께서 그러셨잖아요. 꽃은 그래서 예쁘고 강하다고.”

16553709911302.jpg“뒷말이 더 중요했는데.”

16553709770165.jpg“네?”

이클리트는 바람에 나부끼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나직이 속삭였다.

16553709911302.jpg“그래서 그대를 닮았다고.”

그의 손길을 따라 아련하게 피어오르는 열기에 아멜리아는 떨리는 숨을 삼켰다.

16553709770165.jpg“꼬, 꽃에 비교할 수 없죠. 나, 지금 많이 엉망인데…….”

16553709911302.jpg“전혀.”

그는 손가락 사이사이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깊게 머금으면서, 그녀의 머리를 다독이듯 쓰다듬었다. 손짓에서도 느껴진다. 그가 그녀를 얼마나 귀하게, 또 소중하게 바라보고 있는지.

16553709911302.jpg“제 눈엔 항상 똑같습니다.”

그의 다정함 속에서 어느새 그녀는 사랑스러움을 더해갔다. 아멜리아는 조금 말을 다듬고 또 다듬고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16553709770165.jpg“대공 전하께,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도 될까요?”

뜻밖의 말에, 이클리트의 손길이 멈칫했다.

16553709770165.jpg“처음, 계약 결혼을 시작했을 때. 대공 전하께서 그러셨죠. 황제가 되어야만 가질 수 있는 게 생겼다고. 그 욕심 때문에 제 손을 잡는 거라고.”

아멜리아의 말에 이클리트의 눈빛이 나직이 떨리다가 이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16553709911302.jpg“그렇습니다.”

16553709770165.jpg“말해주세요. 그 욕심이 무엇인지.”

이클리트는 하고 싶은 무수한 말을 전부 삼킨 채, 한마디를 내뱉었다.

16553709911302.jpg“평범하게. 살고 싶어서.”

욕심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시시하고 평범한 이유. 하지만 그에겐 욕심이어야 하기에, 아픈 이유. 무수히 많은 이유와 상처와 아픔이 저 말 한마디에 꾹꾹 눌려 있는 것 같았다. 얼마나 눌려 있는지,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그렇기에, 이분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

16553709770165.jpg“내 복수를 위해 대공 전하를 황제로 만들 거지만, 대공 전하의 욕심을 반드시 들어줄게요.”

16553709911302.jpg“…….”

16553709770165.jpg“아멜리아 클리오 피오레.”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이클리트가 떨리는 눈을 크게 떴다.

16553709770165.jpg“아직은 제 이름에 황실의 성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반드시. 우리 둘 다 황실의 성을 이어 찬란히 빛날 수 있도록. 그 빛 아래에서 평범하게 살 수 있도록, 그렇게 할 거예요.”

깊이 묻지 않아도. 그래서 답하지 않아도. 서로가 가는 길이 결정되었음을 알았다. 그 길이 얼마나 힘들고, 험할지도 알았고. 하지만 이클리트는 그녀가 어떤 길을 가든 상관없었다. 그녀가 그 길을 바란다면. 그 길을 걸어 황제가 되길 바란다면.

16553709911302.jpg‘그녀가 바라는 황제가 될 것이다.’

황제가 되어야만 가질 수 있는 것. 태어나 처음으로 간절히 바라는 욕심 하나. 그의 눈동자가 짙은 욕망을 품고서 그녀를 삼킬 듯 응시했다.

16553709911302.jpg‘전부, 그대였다.’

그대라는 그 이유 단 하나. 아니, 그의 생의 전부였다.

16553709770165.jpg“대회의가 나 때문에 많이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 사실 황실 사교계는 처음이라서 일단 얌전하게 인사만 할 생각이었는데. 가주처럼. 가주답게 해보려고. 아. 케이트가 엄청 싫어하겠다.”

다른 건 다 괜찮았는데, 케이트의 싸늘한 시선이 벌써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이클리트는 그 모습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16553709911302.jpg“제대로 해치우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16553709770165.jpg“그렇죠. 그건 변하지 않아요.”

아멜리아가 목소리에 힘을 주며 외쳤다. 단단하게 각오해도, 분명 두려움은 있을 것이기에.

16553709911302.jpg“무슨 일이 있어도 꼭, 부인을 지켜주겠습니다.”

반드시 지킬 그의 말에 아멜리아는 이클리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16553709770165.jpg“꼭 지켜주세요, 나를.”

16553709911302.jpg“물론입니다.”

16553709770165.jpg“날 지켜주기 위해, 대공 전하도 다치지 말고요.”

16553709911302.jpg“…….”

16553709770165.jpg“날 지켜주려면, 대공 전하가 다치지 말아야 하잖아요.”

그녀는 그에게 꼭 하고 싶었고, 약속받고 싶은 말을 했다.

16553709770165.jpg“나한테 복종한다고 했죠? 이거, 부탁 아니고 명령이에요. 그러고 보니까, 저번에도 어겼어. 꼭 그렇게 해줘요. 자기 자신도 지키라고요. 안 그러면 내가 대공 전하를 지켜버릴 테니까.”

이클리트는 아멜리아의 말에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16553709911302.jpg“복종, 하겠습니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고, 찰나의 침묵과 함께 적막이 흘렀다. 두 사람은 마치 눈으로 입을 맞추는 것처럼. 점철된 시선 끝에 맹세를 나눴다. 하지만 뒤엉키는 눈빛에 섞인 것이 맹세의 감정뿐만은 아닌 듯했다. 조금 더 은밀하고, 원색적인 그 어떤 갈망. 그의 짙은 눈동자가 농밀한 뭔가를 담고서 그녀의 얼굴을 배회했고, 아멜리아는 그런 그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으며 지난번과 같은 것을 느꼈다. 속이 뜨거워지면서 끊임없이 휘저어지는 감각.

16553709995669.jpg

  자꾸만 허전하고, 부족하여 다른 뭔가를 원하게 되는 기분.

16553709770165.jpg‘다른 뭔가라니. 대체 그게 뭔데?’

매번 정답 없는 혼란에 빠졌지만, 아멜리아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클리트 역시 갖은 감정을 깊이 누르며 시선만을 탐할 뿐이었다. *** 떠날 준비를 마쳤다. 처음엔 그토록 경계하던 마을 사람들도 지금은 한결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들이 떠나는 길을 바라보았다. 소냐는 이클리트와 시선이 마주쳤지만, 이클리트는 말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지만 소냐도 더는 그를 억지로 보지 않았다.

1655370977017.jpg‘언젠가 꼭,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라니는 뭔가 할 말이 있는 표정으로 아멜리아 앞에 섰다.

16553709770165.jpg“왜 그래?”

아멜리아가 먼저 묻자, 라니는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1655370977017.jpg“혹시 루베르 가주를 만나면. 한 방 날려줘요.”

16553709770165.jpg“응?”

1655370977017.jpg“말로만 하지 말고, 아주 시원하게 날리라고요. 제대로 정신 차리게. 같은 가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나?”

16553709770165.jpg“글쎄. 한 번도 사람을 때려본 적은 없는데. 시원하게 한 방 쏴서 날려줄까?”

농담이, 농담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 아멜리아의 모습에 라니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1655370977017.jpg“생각 같아서는 벌집을 만들어도 좋겠지만. 그래도 살아있어야 황제를 선택하죠.”

라니의 말에 아멜리아는 싱긋 웃었다.

16553709770165.jpg“하긴. 그럼 최선을 다해 한 방 날려볼게.”

1655370977017.jpg“……다치지 마세요, 가주님.”

그녀의 진심 어린 응원에 아멜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16553709770165.jpg“안 다쳐, 절대. 나 제법 세다니까. 게다가 약속했어. 함부로 다치지 않기로.”

16553709770165.jpg‘내가 다치면, 대공 전하도 다치니까.’

떠나기 직전, 조그만 손 하나가 아멜리아를 붙잡았다. 그때, 그녀의 손을 잡았던 그 아이였다. 이번엔 피하지 않고, 아이가 직접 그녀의 손을 잡은 것이다.

16553709770165.jpg“와. 이제 일어날 수 있는 거야?”

아이는 수줍게 아멜리아를 보면서 말했다.

1655370977017.jpg“네. 덕분에요. 감사합니다, 가주님.”

그토록 아팠던 아이가 약 하나를 먹고 이렇게까지 좋아진 거였다. 아멜리아는 울컥거림을 꾹 참고서 아이 앞에 주저앉아, 선홍빛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16553709770165.jpg“나도 너한테 고마워. 그래서 너에게 꼭 주고 싶은 선물이 있어.”

1655370977017.jpg“네?”

그녀는 조심스럽게 아이의 뺨을 감싸며 주문처럼 속삭였다.

16553709770165.jpg“아가. 넌 저주받은 게 아니야. 신이 특별히 더 사랑한 거야. 사랑이 넘쳐서, 어여쁜 꽃을 여기에 심어준 거야. 그래서 네 눈동자에 예쁜 붉은 꽃이 피어 있어.”

아멜리아는 로사 유모에게 받았던 편지의 위로를, 이 아이에게도 전해주었다. 아이는 난생처음 들어보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1655370977017.jpg“……정말요? 나, 안 이상해요? 안 징그러워요?”

16553709770165.jpg“전혀. 넌 신의 사랑을 받고 있어. 절대로 저주가 아니야.”

그때, 어디선가 부드러운 바람과 함께 아멜리아가 이클리트에게 받았던 그 꽃이 하늘하늘 떨어졌다. 마치 꽃비가 내리는 것처럼.

1655370977017.jpg“와! 꽃이다. 꽃이야!”

아이들은 탄성을 지르며, 한 치의 구김 없이 환하게 웃었다. 아멜리아는 저도 모르게 이클리트를 보았지만, 그는 그저 등을 보이고 있었다. 아멜리아가 세상을 위해 피우려는 꽃을, 이클리트가 선물처럼 이들에게 보여주며 환한 온기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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