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피의 결투2021.06.04.
이클리트가 목검을 들자, 지켜보던 귀족들의 시선이 굳어졌다. 목검과 진검이라니! 아멜리아 역시 하얗게 질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심장이 그야말로 아래로 쿵, 하고 떨어지는 듯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야!’
데릭은 고작 목검을 들고 여유 부리는 이클리트의 모습에 피가 끓었다.
“목검이라니. 절 우습게 여기시는 겁니까?”
모두가 경악한 가운데, 당사자인 이클리트만이 표정 변화 없이 덤덤했다.
“무슨 검을 잡든, 그건 내 마음 아닌가?”
데릭은 절로 이를 악물었다. 이클리트 라이엇 클리오 대공. 전장의 흑사자, 모든 전쟁을 피로 물들이며 승리했다고 듣긴 했다. 하지만 데릭은 모든 소문엔 과장이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전쟁터에서 소문은 더더욱. 직접 눈으로 본 이는 별로 없으니 말이다.
‘천한 피가 흐르는 괴물 대공이니, 이런 소문이라도 부풀려서 조금이라도 명예를 지키려고 했겠지.’
사실 여기서 보니 실상 별거 아닌 것처럼 보였다. 피오레 가주가 오지 않았다면, 누구도 클리오 대공을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테니까.
‘꼴에 사내라고, 허세를 부리는 거야. 하지만 그 같잖은 허세 때문에 오늘 제대로 무릎 꿇게 해주마.’
데릭은 칼자루를 더욱 꽉 붙들고서 말했다.
“목검을 선택한 건 대공 전하십니다. 전 봐주지 않을 겁니다. 제 명예와 제 주인의 명예를 지켜야 하니 말입니다.”
이클리트는 기합이 단단히 들어간 데릭을 보며 무심히 입을 열었다.
“네가 가장 지키고 싶어 하는 건 그 기사도인가.”
“검을 쥐는 자로서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가. 그럼, 그것도 꺾어야겠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며, 여유를 부리는 이클리트의 모습에 데릭의 분노가 점점 쌓여가기만 했다. 그때, 지켜보던 알렉드라가 그들 사이로 나섰다. 알렉드라는 애써 데릭을 나무라는 척, 운을 띄웠다.
“데릭. 대체 오늘 같은 좋은 날에 뭐 하는 것이냐. 여긴 무도회장이다. 그것도 황자 전하의 탄일을 축하하는 자리인데.”
데릭은 결코 물러설 생각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말리진 말아 주십시오. 이는 정식 결투입니다.”
알렉드라는 이클리트를 보며 물었다.
“대공 전하도 그리 생각하십니까?”
“이미 서로의 심장은 던져졌다.”
결투를 이어가겠다는 이클리트의 의지. 알렉드라는 애써 입꼬리를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난감하군요. 아무리 그래도 대공 전하와 피의 결투라니…….”
아멜리아는 눈에 훤히 보였다. 이 말도 안 되는 결투를 기회로 여기고, 즐거워하는 저들의 시선이!
‘안 돼. 이건 말려야 해. 절대로 안 돼!’
아멜리아가 알렉드라에게 달려가려고 했지만, 이클리트가 먼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대공 전하.”
이클리트는 손에 힘을 준 채 단호하게 말했다.
“이젠 제 차례입니다.”
그의 완고한 시선에서 절대로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 읽혔다. 이토록 단호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결투는! 그때, 에드조프가 상황을 정리했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선 곤란하고, 훈련장에서 정식으로 치르도록 하지.”
알렉드라는 에드조프의 말에 손뼉을 쳤다.
“아, 그리하면 되겠군요. 저희가 마음대로 말리기엔, 대공 전하께서 결정하신 일이니. 함부로 결투를 무효로 하는 것도 선을 넘는 일이지요.”
데릭은 이클리트 앞에 짧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럼 바로 훈련장에서 뵙겠습니다.”
알렉드라는 데릭과 등을 돌리면서, 일순 표정에 희열이 젖어 들었다. 그는 데릭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으며 읊조렸다.
“반드시 이겨라, 데릭. 아주 완벽히 짓밟아버려. 어디 하나 병신 만들어도 상관없다. 이건 피의 결투니까. 자기 입으로 하겠다고 했으니, 다쳐도 어찌할 도리가 없겠지.”
데릭은 알렉드라의 말에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물론입니다. 반드시 이길 겁니다. 절대 질 리가 없으니까요.”
“그래. 네가 질 리가 없지. 네 검엔 마나가 담겨 있으니까.”
알렉드라가 확신에 차서 속삭이는 말을 에드조프가 얼핏 듣게 되었다.
“사교계 입성이 처음이라 널 전혀 모르겠지. 그러니까 저런 허세를 떨 수 있는 거야.”
데릭은 검날에 마나를 불어넣어 검술을 행하는 소드마스터였다. 아멜리아와 같은 마법사인 것이다.
“아무리 괴물 대공이라도, 소드마스터의 검을 저딴 목검으론 이기지 못하지. 잘하면 여기서…….”
알렉드라는 애써 말을 아꼈고, 에드조프의 입가엔 짙은 미소가 그려졌다.
‘개죽음당할 수도 있겠군. 아주 괴물다운 죽음이야.’
*** 정원 근처에 있는 훈련장에 도착한 이클리트는 아멜리아와 함께 잠시 대기실에 머물고 있었다. 이클리트는 몹시 난감한 표정으로 아멜리아를 힐끔거렸다. 그녀는 누가 봐도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냉랭한 공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클리트는 아까 데릭의 앞에서는 그리도 단호하고, 여유로웠건만. 아멜리아의 앞에서는 연신 안절부절못하다가 몹시 긴장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부인.”
이클리트의 목소리에 아멜리아는 치미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서 언성을 높였다.
“이게 뭐예요? 왜 이러시는 거예요? 분명 자신을 지키라고 했죠. 그런데 피의 결투라니! 그것도 그 목검으로?”
“…….”
“안 돼요. 이렇게는 못 해요. 제가 검을 빌려올게요.”
아멜리아가 걸음을 옮기자, 이클리트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붙잡았다.
“괜찮습니다. 전 이걸로 할 겁니다.”
말도 안 되는 고집에 아멜리아의 목소리에 화가 섞이다가 이젠 애원이 뒤엉켰다.
“다치면 어떡해요! 왜요. 대체 왜 이렇게 하는 건데요!”
떨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그에게 잔뜩 화를 내고, 억지를 부리면. 그러면 이분이 들어줄 것 같아서 그렇게라도 말리고 싶은데. 그렇게는 또 할 수가 없었다. 이분의 뜻이 너무 확고해서. 억지로 그 뜻을 꺾어버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클리트도 그런 아멜리아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읽고서, 그녀의 양어깨를 조심스럽게 잡곤 눈을 마주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말갛게 그녀에게 닿았다. 이 위험한 상황에서, 저토록 걱정 없이 맑은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아멜리아는 헛웃음이 그려졌다. 이 와중에도 그의 눈동자는 아름다웠으니까.
“그렇게 보고 있지만 말고, 날 안심시켜줘요.”
조금은 풀린 목소리에 이클리트는 긴장했던 숨을 내쉬며 말했다.
“오늘 무도회에서 보여준 선물. 날 위한 거죠. 부인께서 내 명예를 지켜주려고.”
“진심이기도 했어요.”
“알아요.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예요. 나도 참을 수 없었어요. 당신의 명예가 다치는 거.”
이클리트의 말에 아멜리아는 대충 상황 파악을 했다.
‘데릭, 그자가 나에 대해서 뭐라고 한 거구나.’
“그런 거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그런 것보다 전 대공 전하가 훨씬 중요하니까…….”
“그러니 날 믿고 지켜봐 줘요. 그리고. 사과도 하고 싶으니까.”
“사과라니?”
이클리트는 사실 이게 제일 중요했다. 내내 신경 쓰였으니까. 아멜리아와 마주했던 그의 눈동자가 가볍게 떨리면서 목소리가 축 가라앉았다.
“화났잖아요, 나한테.”
“아…….”
“내 사과 방식이 일방적이라 미안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밖에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이 결투에서 이기면, 사과라고 받아줘요, 제발.”
아멜리아는 내내 불안해했던 이클리트를 떠올렸다. 사실 정말로 화가 났었다.
“내가 뭐 때문에 화났는지 아시는 거예요?”
“아까. 내가 너무 고집부리고, 감히 욕심내서…….”
“그런 거 아닌데.”
뜻밖의 대답에 이클리트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그게 아니라면 뭐지?
“그, 그럼…….”
그가 몹시 흔들리면서 다른 이유를 찾으려고 눈을 굴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멜리아는 웃음이 새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미워할 수가 없다. 조금이라도, 화를 낼 수 없게 한다. 왜 이리도 이분은 점점 사랑스러워지는 걸까. 오직 자신의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걸까? 점점 어쩌지 못할 만큼.
‘나도 모르게 꼭, 안아버리고 싶을 만큼.’
아멜리아는 뜨거워진 손길로 그의 옷매무새를 바로잡아주었다.
“나중에 내가 다 말해줄게요. 그러니까 그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과해주세요.”
“…….”
“그전에. 내 명령 기억하죠? 다치지 마요, 꼭.”
아멜리아가 그 어느 때보다 무섭게 명령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이클리트는 그 모습에 엷은 미소를 그렸다.
“안 다칠 겁니다. 그리고 반드시 이길 거예요.”
“져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
“……나 때문에, 대공 전하가 다치는 게 싫어요. 그래서 안 다치고 이겼으면 좋겠어요.”
애써 괜찮은 척하던 아멜리아의 표정이 한순간 허물어졌다. 이클리트는 그 모습에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미안합니다. 이런 표정 짓게 만들어서. 내가 훨씬 더 강했어야 했는데. 그래야 부인께서 아무 걱정 않고 기다렸을 텐데.”
이클리트의 말에 아멜리아는 어림없다는 듯 말했다.
“아무리 대공 전하께서 강하다고 해도, 난 걱정할 거예요. 어떻게 걱정 안 할 수가 있어요.”
아멜리아의 말에 이클리트는 무척 생소하다는 듯 멈칫했다. 모두가 그를 상처 주고 아프게만 했는데. 걱정해주는 누군가. 조금이라도 다칠까 봐, 조마조마해주는 누군가. 그 걱정이 주는 따스함이 그에겐 너무 낯설기만 해서, 또 한 겹의 감정이 그의 심장으로 내려앉는다. 자신도 모르게 눈가가 뜨거워질 만큼. 말도 안 되는 감정이 넘쳐서.
‘이러니까 내가 그대를 위해 뭐든 할 수밖에 없어.’
이 마음이, 주체가 되질 않으니까. 아멜리아는 이클리트가 잡고 있는 목검을 계속 불안하게 보면서 슬그머니 손을 뻗었다.
“역시 적어도 진검으로 하면 안 될까요?”
하지만 이클리트는 그녀의 손을 살짝 피하며, 목검을 고집했다.
“그건 좀 잔인할 것 같아서. 역시 목검이 좋습니다.”
“네?”
“되도록 잔인한 건 부인이 보지 않는 곳에서. 피 같은 무서운 거, 안 보게 하고 싶은 제 욕심이에요.”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감이 안 잡혔다. 어쩐지 위험한 말인 것 같기는 한데.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씀하시니까. 또 엄청 위험한 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냥 건투를 빌어주세요.”
이클리트는 살짝 쑥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기사가 레이디를 위해 결투에 나서면, 레이디가 해주는 게 있다던데.”
“아!”
아멜리아 역시 들어보기만 했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터라 약간 쑥스러운 마음으로 그가 들고 싸울 목검에 짧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부디 이분을 지켜주기를.”
“……목검이 부럽네요.”
“네?”
“답례로 받으면 되니까, 나는. 지금은 참을게요.”
밖에서 신호가 들렸다. 이클리트는 그녀가 기도해준 목검을 소중히 쥐고서 일부러 가볍게 말했다.
“해치워버릴게요.”
그러곤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짝 쓰다듬어주고서 걸음을 옮겼다. 아멜리아는 여전히 불안했지만, 그래도 두 손을 꼭 모으고서 주문처럼 되뇌었다.
“믿어. 대공 전하가 이길 거야. 반드시 해치워버릴 거야.”
이클리트는 훈련장으로 걸어가면서, 품에서 작은 원형 모양의 통을 꺼냈다. 그가 항상 품에 지니고 있는 것. 그 안에는 무척이나 소중한 편지가 있었다. 그는 그 통을 살짝 쥐며 읊조렸다.
“이기겠습니다, 반드시.”
사실 이클리트는 좋았다. 그녈 위해 싸울 수 있어서. 지금껏 그냥 아무 이유 없이 검을 들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마음껏 그녀에게 맹세할 수 있었다. 그녈 지키기 위해, 이 검을 드는 거라고. 그러니 충분히 행복했다. 물론 행복과 반대로.
“용서는 못 하지만.”
*** 갑자기 시작된 결투. 귀족들은 흥분에 찬 시선으로 훈련장에 모여 있었다. 사실 무료한 귀족들의 유흥 중에 검투가 가장 인기 있었다. 그런데 이번 결투는 무려 포르티셰 공작의 애제자와 괴물로 불리는 클리오 대공의 결투다. 돈 주고도 하지 못할 구경인 셈이다.
“포르티셰 공작 각하의 제자가 이기지 않을까?”
“당연하지. 목검과 진검이라고.”
“괴물 대공이라고 하지만 역시 그렇지?”
귀족들 대부분은 데릭이 이길 거로 생각했다. 알렉드라도 그 분위기에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데릭이 질 리가 없지. 오히려 저 괴물을 어디까지 망가뜨려도 되나, 그걸 즐겨야 한다고.’
마침내 데릭과 이클리트가 마주 섰다. 데릭은 여전히 목검을 들고 있는 이클리트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
“결국 안 바꾸셨군요.”
“바꾼다고 한 적 없다.”
“정말 후회하지 마십시오.”
“후회하지 않는다. 내 판단이 옳을 테니.”
심판을 맡은 기사가 붉은 깃발을 올렸다. 그렇게 결투가 시작되고, 데릭의 검에서 푸른 검기가 서슬 퍼렇게 흘러나왔다. 바로 마나가 깃든 검, 세이버였다. 귀족들은 감탄을 터트렸다.
“오오. 세이버라니! 소드마스터였어.”
“포르티셰 공작 각하의 애제자야. 생각해보면 당연한 거라고.”
“그럼 이거 진짜 위험하겠는데?”
아멜리아는 주변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무시한 채, 오직 이클리트만을 바라보았다. 데릭은 세이버를 이클리트를 향해 겨누며 말했다.
“소드마스터라고 말하지 않은 게, 비겁한 건 아니죠? 자기 전술을 숨기는 건 당연한 게 아닙니까.”
“당연하다. 그래서 나도 내 전술을 말하지 않았으니까.”
이클리트는 목검을 쥔 손에 가볍게 힘을 주었다.
“어디 하나 부러뜨릴 거라고 말이야.”
그가 먼저 순식간에 움직였다. 눈으로 좇아가기 버거울 정도로 빠른 움직임. 데릭은 당황했으나, 집중했다.
‘소문이 완전히 과장된 건 아닌 모양이지? 하지만.’
목검이 그것도 세이버를 이길 리가 없었다. 부딪히는 순간, 목검은 부서진다. 데릭은 세이버를 고쳐 잡고서 정면으로 파고드는 목검과 그대로 부딪혔다. 챙-! 모두가 목검이 부서질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 이게…….”
이클리트의 목검이 세이버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데릭은 너무 놀라, 저도 모르게 칼날이 흔들렸다. 귀족들은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알렉드라 역시 이를 악물고서 파들거렸다. 저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고작 목검이, 마나를 휘두른 검과 어떻게 제대로 겨눈단 말인가!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데릭은 이클리트의 무거운 검에 겨우 칼자루를 움켜쥐고 있었다. 제대로 겨누는 것도 모자라, 그 힘이 어마어마했다. 마치 이 목검이 무쇠라도 되는 것처럼! 하지만 이클리트는 너무나도 여유롭게 목검을 휘두르며 말했다.
“살아있는 나무는 무쇠만큼 단단하지. 수백, 수 천 년 동안 온갖 풍파를 견뎌내는데, 얼마나 강할까.”
“무슨 헛소리야.”
이클리트는 한 번 더 세이버와 강하게 부딪히며 불안해하는 데릭의 시선 앞에 싸늘하게 읊조렸다.
“지금 이 목검의 나무가 살아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맞으면 굉장히 아프고.”
그는 목검의 방향을 순식간에 틀어서는 데릭의 손목을 향해 힘껏 휘둘렀다. 퍽-!
“악!!!”
둔탁한 소리와 함께 데릭은 비명을 지르며 세이버를 놓쳐버렸다. 그 찰나의 일격에 손목이 부러진 것 같았다. 데릭은 세이버를 다시 올리지 못한 채, 하얗게 질려선 바들거렸다. 이클리트는 그런 그에게 다가왔다.
“대, 대체…….”
“아직이다. 어서 세이버를 들어. 벌써 이러면 곤란하지. 단숨에 죽이기 싫어서 목검을 든 건데.”
“……뭐?”
“지금 내 손에 검이 들렸다면, 넌 바로 죽었을 거다. 하지만 쉽잖아. 그냥 죽는 건.”
이클리트는 직접 세이버를 들고 데릭에게 건넸다.
“자, 결투를 계속 진행할까?”
여유 섞인 그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데릭은 세이버를 제대로 쥐지 못한 채, 온몸을 죄이는 섬뜩한 공포에 질렸다. 저자가 목검을 든 이유. 그는 아주 천천히. 천천히. 자신을 망가뜨릴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