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대회의2021.06.28.
아스란의 시선이 루베르 공작이 앉아야 할 빈자리로 향했다.
“이번에도 루베르 공은 오지 않았군.”
기분 상했던 알렉드라는 화풀이하듯, 날카로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너무 봐주시는 겁니다. 감히 황명을 어긴 채, 대회의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다니. 루베르 공작이 누군지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우릴 얼마나 우습게 여기면.”
아스란은 그런 알렉드라를 다독였다.
“대회의의 참석은 자유지. 그렇기에 항상 참석해주는 공들에게 감사할 뿐.”
“자유라곤 하나, 폐하의 명입니다. 제국민으로서 어찌 폐하의 명을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포르티셰 공작가의 기사들이 솔라를 위해 얼마나 희생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그렇기에 솔라의 태양이 오랫동안 제국민들을 지켜주는 것이지.”
“그리 말씀해주시니 황공할 따름입니다, 폐하.”
아까는 그리도 살얼음판을 걷는 듯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 척척 말이 맞아가면서 칭찬하기 바빴다. 아멜리아가 그 분위기를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고 있자, 루시아가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정신없죠? 폐하께선 한도 끝도 없이 기 싸움하지 않으세요.”
“아…….”
“적절하게 설탕을 주면서 분위기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 걸 참 좋아하신답니다. 정말 악취미지.”
루시아는 손으로 턱을 괸 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사내로서는 영 싫어. 난 튕기려면 확실하게 튕기거나, 다정하려면 완전 내 발밑에 있는 게 좋아. 저런 변덕은 너무 싫다고.”
아멜리아는 그렇게 말하는 루시아도 만만치 않다고 여겼다. 감히 한 제국의 황제를 고작 취향에 맞는 남자와 비교하다니 말이다. 그때, 온화한 표정으로 침묵하던 헤이츨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헤스틴 공은 새 애완남은 찾으셨습니까? 저번엔 데리고 다니던 시종이었던가.”
루시아는 헤이츨의 빈정거림에 붉은 입꼬리를 더욱 길게 올렸다.
“어머, 내 사생활이 관심이 많네. 고서 괴짜인 줄만 알았더니, 그런 가십거리도 읽으시나 봐. 내용 상관없이 글자라면 다 좋나? 아니면 사실 카르티아 공도 나한테 관심 있었어요?”
“…….”
“공도 무릎으로 나한테 기어와 볼래요? 그럼 또 모르지. 내가 귀엽게 관심 가져줄지. 괴짜는 잠자리도 책 읽듯이 따분하게 하려나?”
“공의 피부에 글자라도 새겨 있다면 모를까, 관심 없습니다.”
“나도 고리타분한 괴짜는 싫어. 전혀 귀엽지가 않잖아.”
그냥 듣기에도 민망한 수위 높은 농담이 몹시 살벌하게 오갔다. 폐하께서도 카르티아 공작에 관해선 별다른 말이 없기에, 카르티아 공작은 조용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거다. 정말이지 이 자리엔 하나 같이 정상은 없었다.
“자자, 인사는 이쯤하고. 대회의 안건을 올리겠다.”
아스란은 목소리에 힘을 주고서 이들에게 말했다.
“국경에서 프리메 제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전갈이다. 프리메가 주변 공국과 동맹이라도 맺지 않도록 유심히 살펴야 할 것이다.”
지난번, 벨반 공작이 제국 정세를 알려주면서 우려했던 부분이 역시나 대회의 안건으로 올라왔다.
“특히, 우리와 가까운 동맹국의 공국을 빼앗겨선 안 된다. 그리되면 정말 전쟁이야. 다섯 공작가는 각 공작령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남부는 걱정이 되지 않지만, 문제는 북부로군.”
아스란이 북부를 언급하며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아멜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북부를 다스리는 건, 클리오 대공 전하시니까. 루시아는 아스란의 눈빛을 여유롭게 받아쳤다.
“절 믿으십시오, 폐하.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클리오 대공 전하께서 나서실 겁니다. 단 한 번도 북부에서 벌어진 전쟁의 승기를 놓치지 않으신 분이 아니십니까. 아무리 폐하께선 끊임없이 부족하다고 하셔도 말입니다.”
“그런 클리오 대공이 현재 남부에 머물고 있으니 문제지.”
“도움이 필요하면 보내주실 거죠, 피오레 공? 남편이기 이전에 북부를 다스리는 대공 전하시니까.”
아멜리아는 조금이라도 이클리트에게 흠이 될까 우려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물론입니다. 또한 피오레도 도울 것입니다. 블러드 아이리스가 끊임없이 국경을 살피고 지킬 테니, 염려 놓으십시오. 혹여 무슨 일이 생겨도 발 빠르게 움직일 그들입니다.”
“어머, 든든해라. 티어의 정보력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죠.”
루시아의 말에 알렉드라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아스란은 여전히 아멜리아를 바라보며 묘한 어조로 운을 띄웠다.
“프리메가 원하는 건 분명 시간의 숲이다. 비록 그곳이 봉인되어 있다고 해도, 절대로 프리메에게 시간의 숲을 빼앗길 수는 없지. 시간의 숲은 반드시 솔라가 가져야 해. 그래야 가장 큰 영광을 얻게 될 거야.”
시간의 숲 때문에 양 제국이 위태로운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매번 전쟁을 준비하는 줄 몰랐다.
‘그 숲의 힘이 그토록 탐나는 건가. 정령들도 그저 쉬고 싶어서 숲을 봉인하는 최후의 방법을 쓴 것 같은데.’
아멜리아는 뭔가 상황이 안타까웠다.
“가장 좋은 방법은 봉인을 풀 열쇠를 찾아서 차지하는 것이지만.”
“열쇠의 단서는 오직 선택 받은 수인만이 가지고 있다지 않습니까.”
헤이츨의 말에 아스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인이 사라졌으니, 참으로 어렵지.”
아멜리아는 어쩐지 계속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아스란의 시선을 느꼈다.
‘수인…….’
이 단어를 여기서 또 듣게 될 줄이야.
“사라진 수인을 찾는 것보다는 그들과 가까웠던 루베르의 도움을 받는 것이 가장 좋은데.”
혼잣말처럼 흩어진 아스란의 말에 아멜리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알렉드라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 루베르가 협조적이지 않으니 문제지요. 정말 하나 같이 마음에 안 들어. 솔라 제국민으로서 솔라를 위해 하는 일도 없이. 쯧!”
그는 대놓고 루베르에게 적의를 드러냈다. 사실 알렉드라로서는 다섯 공작가에 루베르가 얽히는 게 끔찍했다. 이참에 공작가 작위를 완전히 박탈하고, 녀석들을 쓸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놈들은 이방인, 죄인일 뿐이야. 절대 같은 솔라의 제국민이 될 수 없다고.’
알렉드라는 숨기고 있었던 본성을 드러냈다.
“혹시라도 루베르가 프리메와 내통하면서 정보를 흘리고 있다면? 사실 그들은 반군이 되기 쉽지 않습니까.”
확인되지 않은 말을 공식적인 자리에서 쉽게 내뱉는 알렉드라를 보면서 아멜리아는 점점 더 피가 차갑게 식었다.
‘그래서 그런 말도 안 되는 마을을 만들어 루베르가 죽길 기다린 거야?’
그들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이용하기 위해 사로잡았다가, 이용하지 못하니 이제 와서 반군으로 만들어? 아스란은 점점 날카로워지는 알렉드라를 달래는 듯하면서도 어조는 그렇지 않았다.
“반군이라니. 가당치 않아. 루베르가 협조적이지 않은 건, 황제인 내가 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한 탓이지. 설령 그들이 반군이 된다고 해도, 짐의 잘못이 커.”
“그게 어찌 폐하의 탓입니까! 차라리 이번 기회에 제대로 루베르를…….”
“저희가 루베르를 믿지 못하니, 루베르도 저희를 믿지 못하고 도와주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그때, 참고 있던 아멜리아가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리고 분위기가 순식간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 싸늘하게 굳어졌다. 루시아는 그 모습에 속으로 짙은 미소를 그렸다.
‘어머, 얌전한 레이디가 벌집을 건드리네. 다치고 싶나 봐.’
안 그래도 아멜리아가 눈엣가시였던 알렉드라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피오레 공은 그게 무슨 말이지?”
“루베르가 프리메와 내통한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아니면 정황이라도 있습니까?”
“뭐?”
“아무것도 없으면서 루베르를 이렇게 의심하고 있는데. 솔라 제국민으로 인정조차 하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그들이 저희를 돕는다는 겁니까.”
“우리가 제국민으로 인정하지 못한 것이 뭐지? 다섯 공작가로 인정해주다 못해, 잃었던 영토까지 공작령으로 돌려주고는 모여 살 수 있게 해줬는데.”
“그래서 그 영토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가둔 채, 차별하고 배척하는 겁니까? 그들을 반군으로 내몰고 있는 게 대체 누굽니까. 진정한 솔라는 시간의 숲을 얻는 것이 아니라, 태양처럼 평등해지는 겁니다.”
“감히 이제 고작 가주에 오른 레이디가 솔라 제국을 논하는 것인가. 그것도 폐하 앞에서!”
일순, 아스란의 곁에 있는 거울 벽이 웅성거렸다. 신성회와 장로회도 아멜리아의 발언에 반응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다리에 힘을 주고서 앞으로 나아가 아스란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그녀가 이번 대회의에 참여한 가장 큰 목적은 하나. 얻어야 할 것도 하나였다.
‘루베르 가주를 만나지 못하게 됐으니, 라니와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해.’
“폐하! 포르티셰 공작령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 아십니까?”
아스란은 아멜리아의 패기에 눈가에 미소가 서렸고, 알렉드라는 점점 더 사납게 날뛰었다.
“지금 그게 대체 무슨 막말이더냐!”
“솔라리스로 오던 도중, 우연히 그들의 처절한 외침을 듣게 되었고, 너무나도 끔찍했습니다. 포르티셰 공께서 루베르를 차별하여 짐승처럼 가둬둔 그 마을. 그들은 모두 병든 채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마을엔 루베르뿐만 아니라 솔라 제국민들도 있다. 가둔 것이 아니라 보호하는 것이지.”
알렉드라의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아멜리아의 낯빛에 핏기가 사라졌다.
“보호?”
“그래. 그들이 걸린 병은 전염병이야. 전염병의 기본은 한곳에 모으는 것이지. 다수를 위한 소수의 약간의 희생을 그리 표현해선 안 돼.”
“전염병이라고요? 그 병은 치료사만 부르면 치유 가능한 병이라고 했습니다.”
“피오레 공이 치료사인가? 그리고 치료사들이 가지 않겠다고 한 곳이야. 그들을 내가 억지로 떠밀어야 하나? 그들의 목숨은 목숨이 아니야?”
“포르티셰 공은 지금 생명을 두고 말장난을 하십니까?”
“말장난이라니. 나야말로 지금 피오레 공의 이 건방진 태도를 어디까지 봐줘야 하지?”
알렉드라는 서슬 퍼런 시선으로 아멜리아에게 다가갔다.
“그곳은 내 영지고, 내 권한이다. 내가 무슨 판단을 내리든, 피오레 공이 신경 쓸 일이 아니지. 감히 내 권한에 도전하는 것인가?”
아멜리아의 악다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 마을에 루베르만 있지 않다는 걸 이런 식으로 이용하는 것인가. 이런 식으로 정당화를 해?
‘라니가 알게 되면 얼마나 억울해할까. 자신들이 이 더러운 명분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그럼 그 전염병 걸린 모두를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뭐?”
아멜리아는 아스란을 향해 간곡하게 청했다.
“폐하, 부디 명을 내려주십시오. 그들을 피오레 공작령으로 데려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애초에 루베르의 차별을 단숨에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적어도 그들만이라도. 라니와 그들만이라도 자신이 구할 수 있도록! 하지만 재미있게 지켜보던 아스란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며, 냉정한 목소리가 아멜리아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피오레 공, 공의 안타까운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나, 이건 포르티셰 공작령의 일이다. 포르티셰 공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짐도 어쩔 수 없다.”
“당연히 허락할 수 없습니다. 제 영지의 사람들이고, 제가 통제할 일입니다. 그들은 제 통제 아래 보호받고 있는 것입니다!”
알렉드라는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아멜리아를 쳐다보았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레이디라서 이렇게 감정적으로 나오는 모양인데, 다 배워가는 과정이니 제가 이해하고 넘어가겠습니다. 하지만 또다시 저를 불쾌하게 만든다면, 피오레 공께선 제게 정식으로 사과해야 할 겁니다.”
아멜리아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아니, 입을 막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으니까. 애초에 차별이 아니라고 교묘하게 말하고 있으니. 치미는 분노에 아멜리아는 손바닥에 손톱이 박힐 정도로 꽉 힘을 주었다. 그런데 이클리트가 끼워준 부드러운 장갑의 감촉이 느껴지면서 통증 대신 안온함이 그녀를 진정시켰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내렸다.
‘대공, 전하…….’
지켜보던 아스란이 이제야 둘 사이를 제지했다. 사실 제지라기보단, 아멜리아에게 내리는 또 다른 경고였다. 그때, 그 검을 하사한 것처럼.
“이번 대회의의 안건은 이게 아니니, 포르티셰 공과 피오레 공은 그만하라. 피오레 공은 새로 가주에 올라 마음이 앞서는 건 이해하겠으나, 그대에게 내린 나의 특별한 검을 기억하라.”
아멜리아는 섬뜩하게 파고드는 아스란의 눈빛을 바라보았다.
‘날 선 칼날. 함부로 나서서 서로 피 볼 일 없게끔 하자는 그 경고.’
“뜻을 이루고 싶다면, 그에 걸맞은 공을 세우고 황명을 바라도록.”
아멜리아는 무거운 숨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아직 내가 너무 약하다는 거구나. 내가 지키고 싶은 걸 지킬 힘이, 없는 거구나.’
그녀는 이 자리에서 철저히 깨달아야 했다. 자신이 한 맹세. 약속. 복수. 그런 걸 지키고, 하기 위해선.
‘힘이 필요해. 지금보다 훨씬 더.’
오늘처럼 이렇게 아무 말도 못 하고 비참하게 고개 숙이지 않기 위해선! 대회의가 끝나고, 아스란은 홀을 빠져나갔다. 루시아는 잔뜩 지친 표정의 아멜리아를 보며 참고 있었던 궐련 파이프를 꺼냈다.
“하아. 대회의가 끝나면 내 예쁜 기가 빨리는 기분이야. 이거라도 하나 피우지 않으면 영 힘을 못 쓰겠단 말이지. 피오레 공도 하나 드릴까요? 아, 참고로 이건 대공 전하께서 키우신 담배는 아니에요.”
그녀가 싱긋 웃으며 궐련 파이프를 건넸지만, 아멜리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맙지만, 괜찮아요.”
이런 상황에서도 도발하는 건가?
“새 가주님은 참 힘드시겠네. 아주 어마어마한 걸 건드리려고 하시니까.”
루시아는 눈으로 싱긋 웃으며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자욱한 연기와 함께 알싸한 향기가 감돌았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던 그 독특한 향기가 바로 이것인 듯했다.
“하지만 가주님, 그럼에도 예쁜 얼굴로 무도회에서 봐요. 지금 표정, 너무 지쳤어. 미소를 무기로 세워서 끝까지 예쁘게 있으라고. 약해 보이면 바로 물어뜯기니까.”
새어 나오는 연기가 점점 독해지면서, 그녀가 내뱉는 말에서도 어딘지 모르게 독기가 느껴졌다.
“예쁜 게 무기가 되기도 해요. 독버섯이 왜 제일 화려하고 예쁘겠어? 예쁘면 방심하고, 방심하면 죽이기 쉽지.”
“…….”
싱긋 웃던 그녀의 미소가 일순 날카로워졌다.
“범접할 수 없이 예뻐서 다가오질 못하게 해야지. 감히 고개 들고 볼 수도 없게. 그렇게 내 발 아래 무릎 꿇도록. 알겠죠?”
독하게 번지는 루시아의 말이 어쩐지 따가우면서도 묘하게 그녀의 심장에 박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