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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그에겐 통하지 않는 미소 (52/199)

52화. 그에겐 통하지 않는 미소2021.07.02.

아멜리아가 마지막으로 홀을 빠져나오자, 알렉드라가 벽에 몸을 기댄 채, 그녀를 응시했다. 그를 보자마자 아멜리아는 표정이 얼어붙었지만, 억지로 고개를 끄덕인 채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알렉드라의 차가운 한마디가 그녀의 발목을 붙들었다.

16553713714975.jpg“주제 없이 나대지 말고, 얌전히 있어.”

같은 공작가의 가주로서 너무나도 무례한 발언이었다.

16553713714985.jpg“설마 지금 제게 하신 말씀인가요?”

16553713714975.jpg“더한 말도 못 할 것 같아? 어린 게 갑자기 어울리지도 않은 자리에 올라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꼴이니. 그래서 무도회에서 그런 시건방진 짓을 했겠지.”

16553713714985.jpg‘대신 누군가 잘못한 문제를 예쁘게 바로 잡을 수 있는 곳이잖아요. 그래서 아주 기대가 크답니다.’

16553713714985.jpg“아, 그거.”

16553713714975.jpg“누군가의 잘못된 문제라니. 거긴 포르티셰 령이다. 루베르 가주라면 모를까. 건방지게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야.”

아멜리아는 대놓고 드러내는 적의 앞에 엷은 미소를 그렸다.

16553713714985.jpg“잘못이라는 생각은 하시나 보네요. 이렇게 발끈하시고.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면, 포르티셰 공의 말처럼 그저 보호하는 것이라면, 굳이 이렇게 나설 필요 없으신 거 아닌가요?”

16553713714975.jpg“하!”

16553713714985.jpg“그것도 이리 예의 없고 무례하게. 설마 찔리시나요?”

16553713714975.jpg“가시만도 못한 것에 찔려서 따끔하기밖에 더 할까. 설마 성녀라도 되려고? 그렇게 하기엔 신성회도 그댈 못마땅하게 여기던데.”

알렉드라는 아멜리아 앞에 위협적인 어조로 경고했다.

16553713714975.jpg“네가 같잖은 재주로 축복의 꽃을 피워서 사람들을 현혹할 수 있을진 몰라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아. 억울하고, 분해도 권력 앞에선 참아야지. 자제해야 한다고. 마음껏 화내고, 소리치고 싶으면 여기까지 와라. 여기까지 오고 나서 설쳐. 아니면 믿을 구석이 있어서 그러는 건가? 설마 클리오 대공?”

16553713714985.jpg“누굴 믿다니요. 그저 제 이름을 거는 거죠.”

아멜리아는 더는 알렉드라 앞에 주춤거리지 않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차피 부딪힐 수밖에 없는 관계다. 절대로 가까워질 수 없다면, 확실하게 위협이 되어야 한다.

16553713714985.jpg“이번 대회의에서 제가 너무 무모했다는 건 인정합니다. 피의 결투에서 공도 누굴 탓하지 않았죠. 그냥 약해서 대공 전하께 졌다는 걸.”

졌다는 말에 알렉드라의 안광에 살기가 스쳤다.

16553713714975.jpg“내가 지지 않았다.”

16553713714985.jpg“그렇죠. 그냥 가장 아끼는 제자가 진 거지. 그래서 그 자리에서 바로 제자를 버리신 거고.”

아멜리아는 자꾸만 치솟는 그를 향한 경멸을 최대한 눌렀다.

16553713714985.jpg“저도 지금은 누굴 탓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움직이면, 조금씩 달라지겠죠. 움직여서 제가 피오레 가주가 되었으니까. 움직여서 클리오 대공 전하는 차기 황위 계승자가 될 테고.”

알렉드라는 아멜리아의 말에 멈칫했다. 클리오 대공이 차기 황위 계승자라고?

16553713714975.jpg‘설마 이 계집이 루베르를 걸고넘어진 이유가…….’

16553713714985.jpg“한낱 가시는 그저 따끔하지만, 계속 놔두면 꽤 아픕니다. 방심하다가 급소를 찔리면 죽을 수도 있는 거고.”

16553713714975.jpg“…….”

16553713714985.jpg“오늘, 여러 가르침 감사합니다, 포르티셰 공. 다음엔 부디 이기는 모습만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멜리아는 입꼬리를 길게 올리며 차갑게 돌아섰다. 알렉드라는 이를 한껏 물고서 분노로 경직된 숨을 삼켰다.

16553713714975.jpg‘저 건방진!’

하지만 그러다가 너무 기가 막힌 상황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16553713714975.jpg“루베르를 이용해서 클리오 대공을 황제로 세우려는 건가. 저 계집이? 웃기는군. 고작 총질 좀 한다고 황제를 세워?”

그것도 그 천한 핏줄의 클리오 대공을? 황후의 핏줄인 바스티얀 대공이 버젓이 살아 있는 한, 절대로 클리오 대공이 황제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솔라 제국의 황위 계승이 다른 제국과 다르다고 해도, 다섯 공작가가 클리오 대공을 밀어줄 리가 없으니까.

16553713714975.jpg“그것 때문에 루베르를 원하겠지. 하지만 그들은 절대 움직이지 않아. 게다가 루베르를 취한다는 건, 다른 귀족들과 장로회. 신성회까지 전부 적으로 돌리는 셈이다. 움직여도 달라지는 건 없어. 오히려 빠르게 추락할 뿐!”

  아멜리아는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에 끝까지 힘을 주었다. 조금이라도 흔들리지 않게. 조금도 위태로워 보이지 않게. 다른 건 몰라도 루시아의 이 말만큼은 옳은 듯했다.

16553713714985.jpg‘상대에게 못나 보일 필요는 없지.’

케이트의 당부도 그러했다.

16553713714985.jpg‘약한 모습을 보일 필요도 없어. 동정은 아무 힘이 없으니까. 오히려 약점만 될 뿐.’

자신은 아직 완전한 패자가 아니다. 이제 시작일 뿐.  

16553713770732.jpg‘뜻을 이루고 싶다면, 그에 걸맞은 공을 세우고 황명을 바라도록.’

16553713714985.jpg“그래. 뭐든 해서 가져봐야지.”

작은 돌이 만들어낸 물보라는 약해도, 그 물보라가 거세지면 결국 폭풍이 되기 마련이다. *** 대회의가 끝나고, 밤이 찾아왔다. 하지만 황궁은 이 밤이 더욱 분주하고 화려할 것이다. 황실 공식 무도회가 시작될 테니. 에드조프는 밤보다 더 어두운 시선으로 창문을 응시했다. 달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묘하게 안개가 자욱하게 번져 있으니, 더더욱 달이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곧, 달 없는 밤이 시작될 거다. 불안했던 그의 눈빛에 안도가 스몄다.

16553713770744.jpg‘그나마 그게 오늘이 아니라서 다행인가.’

에드조프는 대회의에서 벌어진 일들을 들었다. 아멜리아가 풋내기 가주라 그런 소란을 피웠다는 날 선 소문. 그녀는 아무래도 루베르를 끌어들여서 이클리트를 황제로 세울 모양이다.

16553713770744.jpg‘버리고 가야 할 것을 끌어안고 가겠다니. 물론 이클리트가 황제가 되려면 그 길밖에 없겠지만.’

괴물이기에, 괴물을 데리고 가는 수밖에 없나.

16553713770744.jpg‘그래도 이클리트의 정체가 밝혀지면 그조차 끝이지.’

그 어떤 선택을 해도 이클리트가 황제가 되는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는 황실 무도회에 갈 준비를 끝냈다. 보통 시녀들이 시중을 들지만, 오늘은 에드조프가 직접 옷을 갈아입으며 곁에 사람이 오지 못하게 했다. 달이 거의 보이지 않는 이런 날엔 괜히 마음이 불안해져서, 누구도 자신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그는 옷소매의 단추를 마지막으로 채운 뒤, 탁자에 놓인 제비꽃을 조심스럽게 들고서 부토니에르에 끼웠다. 입고 있는 화려한 의복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수수한 제비꽃. 에드조프는 거울을 통해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을 바라보다 입꼬리를 올렸다.

16553713770744.jpg“꽤 괜찮군.”

하지만 이상하게 그는 이 모습이 퍽 마음에 들었다. 그가 마지막 준비를 마치고 방을 빠져나갔다. 탁, 하고 문이 닫히고 어둠만이 가득한 빈방 창가에서 까만 새 한 마리가 푸드덕 날아올랐다. 그러다가 또 한 마리, 또 한 마리. 갑자기 동시에 새 떼가 하늘을 까맣게 메우더니,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어느새 안개 속에서 기이한 새들의 울음소리가 날카롭게 밤을 찢고 있었다. 더없이 섬뜩하고 기괴한 울음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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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궁 무도회를 위한 막바지 음식 준비로 요리사의 지시 아래 시녀들은 더욱더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입이 모인 곳이니, 온갖 소문이 수다 속에 오고 갔다.

16553713798162.jpg“이번 무도회에선 어떤 드레스가 유행이 하려나.”

16553713798162.jpg“너무 오랜만에 열리는 황실 무도회잖아. 드레스 경쟁도 엄청 치열할걸?”

16553713798162.jpg“그래서 그런지, 공국에서 선물도 많이 들어왔어.”

16553713798162.jpg“어머, 그래? 하긴. 황후 폐하께서 무도회에 나오지 않으시니, 황실 무도회가 뜸하긴 했지.”

16553713798162.jpg“무슨 선물이야? 넌 본 거야?”

16553713798162.jpg“엄청 희귀한 거.”

16553713798162.jpg“희귀한 거?”

호기심을 자극하는 말에 그녀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16553713798162.jpg“엄청 진귀한 짐승이야.”

16553713798162.jpg“진짜?”

16553713798162.jpg“담비랑 늑대도 얼핏 봤어. 게다가 흑표범도 있다더라. 엄청 근사하대.”

16553713798162.jpg“와, 그렇게 비싼 짐승을 보내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 신기하네.”

16553713798162.jpg“그러게. 특히 담비 털이 그렇게 고급스럽다며? 나도 한 번 보고싶…….”

16553713798162.jpg“악!”

그때, 뒤에서 앙칼진 비명이 들리자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16553713798162.jpg“왜 그래? 무슨 일이야?”

16553713798162.jpg“쥐, 쥐!”

16553713798162.jpg“뭐!”

갑자기 그녀들의 발밑으로 쥐가 한두 마리씩 나타나더니, 이내 여기저기 모습을 보이며 날뛰기 시작했다.

16553713798162.jpg“악! 얼른 죽여! 잡아!”

보통은 쥐들이 숨어 있는데. 겁 없이 모습을 드러낸 쥐들의 움직임은 몹시 난폭해 보였다. 시녀들은 영문 모를 쥐의 습격에 경악하며, 시종들을 부르거나 빗자루로 후려치는 등, 소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소동 너머로 둥이가 낮게 눈을 빛내며 스르르 모습을 감췄다. *** 아멜리아는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서, 별궁에 도착했다. 그리고 너무 당연하다는 듯, 이클리트가 별궁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조금 더 자신을 기다리는 그의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그는 그녀가 이 공간에 나타나자마자, 고개를 번쩍 들고서 엷은 미소를 지었다. 마치 그녀를 품은 공기마저 그가 느끼고 있는 것처럼. 그녀 역시 그를 보자마자 지쳤던 마음이 눈 녹듯 녹아버렸다.

16553713714985.jpg“걱정돼서 기다린 거예요? 나 생각보다 엄청 괜찮았어요. 솔직히 조금 힘들긴 했는데, 오히려 의지력, 전투력 완전 상승이에요. 대공 전하께 말한 것처럼 해치워버리진 못했지만, 나름 선방을…….”

그녀의 바로 앞으로 다가온 이클리트는 갑자기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입꼬리를 꾹 눌렀다. 당황한 아멜리아는 움찔하며 눈을 크게 떴다.

16553713714985.jpg“대, 대공 전하? 뭐 하시는 거예요?”

16553713860133.jpg“그렇게 억지로 웃지 않아도 됩니다.”

훅 파고드는 목소리에 아멜리아는 일순 심장이 울컥거렸다.

16553713714985.jpg“내가. 억지로 웃는 것 같아요?”

16553713860133.jpg“부인이 얼마나 예쁘게 웃는지 모르죠? 웃을 때마다 환하게 빛나는데, 지금은 아닙니다.”

몹시 진지한 그의 말에 아멜리아는 입꼬리가 간질거렸다.

16553713714985.jpg“그럼 지금은 안 예쁘다는 말이네요?”

16553713860133.jpg“지쳐 보여요, 지금은.”

잘 웃고 있는 줄 알았더니. 그래서 감추고 있는 걸 들키지 않을 줄 알았는데.

16553713714985.jpg“……날 너무 잘 알지 말라니까.”

결국, 아멜리아의 그럴싸한 표정이 스르르 사라져버리고 만다. 루시아가 말했던 그 미소는 이클리트에겐 소용없었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만들어진 모습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 힘들게 뛰어가다가, 주저앉지 않도록. 잠시 쉬어갈 수 있게, 그런 기댈 곳을 그가 만들고 만다. 허물어진 표정 끝에 새어 나오는 그녀의 고단함을 엿본 이클리트의 표정도 덩달아 어그러졌다. 계속 불안하고 걱정했었는데. 이렇게 조금이라도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게 되니.

16553713860133.jpg“힘드네, 생각보다.”

이클리트는 손을 뻗어서는 그녀를 꽉 안아줬다. 겨우 다독이는 분노가 울컥울컥 치밀었다. 그녀를 힘들게 하는 것들을 없애버리겠다고. 그녀를 아파하는 것들을 모조리 치워버리겠다고. 감히 누구 하나 그녀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이 목숨을 깎고 또 깎아서라도 지켜야 하니까. 그렇게 이생을 바치겠다고 맹약했으니까.

16553713860133.jpg“……대회의에서, 같이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16553713714985.jpg“아니에요. 같이 있었어요.”

아멜리아는 이클리트가 끼워주었던 장갑을 살포시 보였다.

16553713714985.jpg“이게 얼마나 큰 힘이 됐는데요. 진짜 대공 전하께서 내 손을 꼭 잡아주고 있는 것 같았어요.”

대회의장에서 자신도 모르게 손이 떨려서 힘을 꾹 주려고 하면, 이 부드러운 장갑 때문에 아프지 않았고, 오히려 기운 낼 수 있었다.

16553713714985.jpg“그러니까 그렇게 나 쳐다보지 마요.”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의 입꼬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16553713714985.jpg“지금 대공 전하의 표정은 얼마나 이상한지 알아요?”

16553713860133.jpg“아마 부인의 표정을 닮았을 겁니다.”

그의 말에 아멜리아는 설핏 웃어버렸고, 이클리트도 그제야 따라서 웃었다.

16553713714985.jpg“그럼 지금은 내가 웃어서?”

16553713860133.jpg“나도 웃을 수 있죠.”

16553713714985.jpg“뭐야, 진짜. 마치 대공 전하의 감정을 내가 마음대로 가지고 흔드는 것 같잖아요.”

농담처럼 말했지만, 이클리트는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았다. 사실이 그랬으니까. 까르르 웃는 그녀의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이클리트의 심장을 들뜨게 했다. 지금도 매 순간, 순간. 저 웃음 하나에 시작된 마음이었다. 눈을 뜨는 것처럼 너무나도 당연하게 사랑하고 있었다.

16553713860133.jpg“오늘처럼 힘들 때, 날 먼저 생각해줘요.”

16553713714985.jpg“지금도 제일 먼저 생각해요.”

아멜리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16553713714985.jpg“나도 모르게 너무 많이 기대고 있었나 봐요. 그래서 가끔은, 대공 전하께 미안해요. 나도 대공 전하를 지켜줘야 하는데.”

16553713860133.jpg“……어쩌나.”

16553713714985.jpg“네?”

이클리트는 다소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16553713860133.jpg“그냥 괜찮다고 말해야 하나, 더 미안하게 해야 하나.”

오롯이 눈을 맞추며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가 어쩐지 오싹하면서도 묘하게 홀려드는 느낌이었다.

16553713860133.jpg‘나한테 좀 더 기댔으면 하니까. 그대에게 유일무이한, 그런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됐으면 하니까.’

점점 짙어지는 욕망이 그런 욕심을 일으킨다. 그의 손길이 조금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조금 힘을 주었다. 그 힘에 그녀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지며, 한쪽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하얀 목덜미가 드러났다. 이클리트는 저 하얀 목덜미에 그 증거로 제 흔적을 한껏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누르며 겨우 입꼬리를 올렸다.

16553713860133.jpg“내가 점점 나빠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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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멜리아는 자신에게 못 박혀 있는 그의 눈동자가 어쩐지 어둡게 일렁이는 걸 느꼈다. 조금은 무서우면서도 훑어 내리는 아찔한 전율이 썩, 기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또다시 선을 넘으면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때처럼 그렇게 될 수는 없었기에. 아멜리아는 떨리는 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16553713714985.jpg“곧 마미가 와요. 황실 무도회를 준비해야 하니까.”

그녀의 속삭임에 이클리트 역시 가까스로 이성을 챙겼다. 그는 몹시 진지하고 진심인 표정으로 말했다.

16553713860133.jpg“마지막까지, 해치워봅시다.”

16553713714985.jpg“하핫, 나중에 봐요.”

이클리트가 떠나고, 아멜리아는 겨우 떨리는 숨을 가다듬었다. 그러다 그가 떠난 바닥에 뭔가가 떨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작은 원형 모양의 통이었다.

16553713714985.jpg“뭐지?”

아멜리아는 그것을 줍고선 이리저리 돌려봤지만, 안이 보이지 않았다.

16553713714985.jpg“대공 전하께서 떨어뜨리셨나?”

그녀는 뭐가 들었는지 몹시 궁금했다. 보기엔 평범한데. 그녀는 손가락으로 연신 열까, 말까, 망설이다가 이내 고개를 휙 돌렸다.

16553713714985.jpg“아니지. 남의 것을 함부로 막 열어서 확인하는 건 품위 없는 행동이야.”

나중에 대공 전하를 만나면 돌려드려야겠다, 생각하며 통을 서랍에 소중히 넣어두었다. 잠시 후, 마미가 한껏 기합이 들어간 표정으로 들어왔다.

16553713952166.jpg“가주님! 또 한 번 제가 솜씨를 발휘해야겠네요!”

그런데 마미의 뒤로 시녀들이 아주 줄줄이 드레스 상자와 보석 상자, 구두 상자에 이어 갖은 화장품을 들고서 들어오고 있었다.

16553713714985.jpg“대체 이게 뭐야. 왜 아까보다 더 힘이 들어가 있는 거야?”

아멜리아는 어마어마한 행렬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마미가 곧 전쟁이라도 치를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16553713952166.jpg“당연하죠. 오늘 체자렛 백작가 대표로.”

16553713714985.jpg“…….”

16553713952166.jpg“메사리나 아가씨가 오신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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