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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황실 무도회 (53/199)

53화. 황실 무도회2021.07.05.

16553714028199.jpg“메사리나 아가씨가 오신대요.”

마미의 말에 아멜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되뇌었다.

16553714028204.jpg“체자렛 백작가 대표…….”

순간, 그녀의 입꼬리가 차갑게 비틀렸다.

16553714028204.jpg‘결국 새어머니가 해내신 건가. 그게 아니면.’

아버지가 자신을 완전히 지워낸 건가. 사실 아버지가 메사리나를 인정하고 믿었다기보다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닐까. 그 이유가 더 설득력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라면 더더욱 마음이 공허했다.

16553714028204.jpg‘이제 정말 나와 아버지의 인연은 끝난 거구나.’

무엇 하나 딸로서 아버지에게 받은 것이 없는데. 그저 버려지고, 또 버려지기를 반복했을 뿐인데. 완전히 끊어진 인연이 슬프다기보다는 허무하고 허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그 시간이 참으로 덧없어졌으니까. 정말이지 아무 의미도 없는 시간이었던 거니까.

16553714028204.jpg‘차라리 빨리 인정하고 이렇게 돼야 했었는데. 그게 날 위해서도, 어쩌면 아버지를 위해서도 옳은 거였어.’

아버지에게 원망도 없었다. 그저 이젠 정말 낯선 타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거다.

16553714028204.jpg‘이걸로 됐어.’

  마미는 가져온 드레스를 주르르 걸어놓고서는 굉장히 고심하고 있었다.

16553714028199.jpg“어떤 드레스가 나을 것 같으세요? 하나 같이 최고의 재봉사들이 오직 가주님을 위해 만든 것들이에요.”

마미의 말에 아멜리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16553714028204.jpg“재봉사가 직접? 하지만 치수를 잰 적이 없는데?”

16553714028199.jpg“지난번에 치수 재셨잖아요. 그걸 미리 보내놨었어요. 황실 무도회 드레스는 직접 치수를 재지 않거든요.”

16553714028204.jpg“뭐? 아니, 왜?”

마미는 아멜리아를 보며 무척이나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16553714028199.jpg“어떤 재봉사에게 의뢰했는지 숨겨야 하니까.”

굉장히 뜻밖의 대답이었다.

16553714028204.jpg“굳이?”

16553714028199.jpg“가주님, 이번 기회에 잘 보고 배우셔야 해요. 황실 무도회는 다른 무도회와 차원이 달라요.”

마미는 어떤 극비사항을 말해주듯, 목소리를 낮추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16553714028199.jpg“일단 다른 귀부인들과 비슷한 드레스를 입으면 곤란해요. 특히, 신분이 높은 귀부인과 드레스가 비슷하면 바꿔 입어야 할 경우도 생기죠.”

황실 무도회에 귀부인들의 기 싸움 같은 예법이었다. 그래서 높은 신분의 귀부인들은 일부러 비슷한 걸 입곤, 서로 그 드레스에 잘 어울린다며 경쟁하기도 했다. 그렇게 경쟁한 드레스는 유행을 타고 제국 전역을 휩쓸기도 하는데, 유행이 되면 나름 명예라고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이건 신분이 같았기에 가능했다. 서로 신분이 다르면, 상황은 판이해졌다. 마음에 안 드는 자신보다 낮은 신분의 영애나 귀부인에게 치욕을 주기 위해, 일부러 비슷한 걸 입고 그 자리에서 벗겨버리기도 했다. 아주 확실하게 힘의 차이를 보여주는 자리인 것.

16553714028199.jpg“가주님보다 신분이 높은 귀부인은 없을 테니까, 드레스 고르는데 어렵진 않았지만. 그래도 헤스틴 가주님과 겹치지 않으려고 정보를 슬쩍 하긴 했어요.”

마미의 말에 아멜리아는 저도 모르게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분과 드레스가 겹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16553714028199.jpg“가장 중요한 건, 황후 폐하와 같아선 안 돼요. 그래서 황금색을 두르는 건 금기죠. 오직 황족의 색이기에.”

16553714028204.jpg“생각보다 엄청 치열하구나. 드레스 하나에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16553714028199.jpg“말씀드렸죠? 이건 전쟁이라고.”

마미는 몹시 엄한 표정으로 말을 맺었다.

16553714028199.jpg“탄일 무도회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실 그건 갑자기 열린 비공식 무도회니까. 이번이 진짜예요. 무조건 메사리나 아가씨보다 눈에 띄어야 해요.”

사실 아멜리아는 별로 신경 쓰이진 않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굳이 질 필요는 없었다.

16553714028204.jpg“마미만 믿어.”

16553714028199.jpg“당연하죠!”

그렇게 마미가 여러 드레스를 고르고 골라, 아멜리아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연보랏빛 드레스를 선택했다. 치장도 그것에 맞게 보라빛이 신비로운 아이올라이트 보석을 위주로 준비했다. 아멜리아는 일단 색상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제비꽃처럼 느껴져서.

16553714028204.jpg‘대공 전하께서도 예쁘게 봐주실까.’

문득, 그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 궁금했다. 다른 누구에게 어떻게 비칠지는 상관없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겐 그래도 예쁘게 보이고 싶었으니까. 그때, 나직이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아멜리아의 심장이 같이 뛰었다. 저 작은 소리 하나에도 누군지 단숨에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순간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조금 전, 자신을 기다리는 대공 전하의 모습을 조금 더 보고 싶었는데, 그가 자신이 왔다는 걸 너무 빨리 알아차리는 바람에 그러지 못해 조금 서운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제 보니 빨리 알아차리는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자신은 그를 사랑하기에,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그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기에 알아차리는 거지만.

16553714028204.jpg‘대공 전하는 어떻게 그렇게 날 잘 찾는 거지?’

그녀의 예상대로 이클리트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오직 그녀만을 보면서 걸어왔다. 눈에 보이는 건, 오직 그녀밖에 없는 것처럼. 아멜리아는 두근거리던 심장이 그를 보자마자 더 강하게 뛰는 걸 느꼈다. 어느새 그녀에게 다가온 이클리트는 살짝 떨리는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16553714086673.jpg“오늘 밤의 시간도 부인 때문에 멈춰버리겠네요. 분명 가장 아름다울 테니까.”

웃음 섞인 그의 다정한 속삭임에 아멜리아도 덩달아 웃었다.

16553714028204.jpg“대공 전하는 가끔 이런 다정한 말을 너무 잘하세요. 진짜 남들이 보면 다 믿겠어요.”

아무 의미 없이 던지는 말에 자꾸 설레게 되니 곤란했다. 이젠 자신에게 아무 의미 없는 말이 아니게 됐으니까.

16553714086673.jpg“전부 진짠데. 어떻게 하면 믿어주려나.”

이클리트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 큰 몸을 구부린 채, 그녀를 보다 가까이에서 바라보며 몹시 진지하게 속삭였다.

16553714086673.jpg“내 눈을 잘 봐요. 부인이 어떻게 보이는지. 지금 난 다른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까.”

16553714028204.jpg“…….”

16553714086673.jpg“엄청 예쁘고 반짝반짝한 게 보입니까?”

16553714028204.jpg“아, 알았어요.”

결국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한 채, 아멜리아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클리트는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며 걸려 있는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아멜리아는 그런 이클리트를 따라 다시 웃을 수밖에 없었다.

16553714028204.jpg‘대공 전하도 날 보면 따라 웃는다지만, 나도 대공 전하를 보면 웃어버리게 돼.’

그는 알까. 그의 미소도 너무 예쁘고, 반짝반짝 빛난다는 걸. 이분이 들어오는 순간, 자신의 시간도 한순간 멈춰버린다는 걸. 그 역시 황실 무도회에 참석하는 만큼, 몹시 근사한 모습이었다. 살짝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위로 올렸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매끄럽게 떨어지는 검은 예복이 우아하면서도 묘하게 섹시했다. 아멜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이클리트의 모습을 훔쳐보다가, 그의 보타이가 살짝 삐뚤어진 것을 발견했다.

16553714028204.jpg“대공 전하, 보타이가 삐뚤어졌어요.”

그러자 이클리트가 장난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16553714086673.jpg“한시도 부인의 손이 안 가면 안 되니까요.”

16553714028204.jpg‘어머, 대공 전하. 보타이가 삐뚤어졌어요. 하여튼, 한시도 제 손이 안 갈 수가 없다니까요.’

  아멜리아는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는 이클리트의 모습에 밉지 않게 웃었다.

16553714028204.jpg“그걸 또 이렇게 짚어주는 거예요?”

그녀는 한 걸음 다가가서는 그의 보타이를 제대로 봐주었다. 이클리트는 그 모습을 그저 물끄러미 응시했다.

16553714028204.jpg“자, 다 됐어요.”

다 됐다는 말에도, 이클리트는 아멜리아를 그저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멜리아는 대답 없는 그의 모습에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는 뭔가를 바라는 것 같은 눈망울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16553714028204.jpg‘뭐지? 왜 저렇게 보는 거지?’

결국, 아멜리아가 먼저 물었다.

16553714028204.jpg“무슨 할 말 있으세요?”

16553714086673.jpg“……다른 할 말 있지 않습니까?”

16553714028204.jpg“제가요? 대공 전하께?”

16553714086673.jpg“그때, 이렇게 해주고 다른 말도 해줬는데.”

16553714028204.jpg“그때?”

아멜리아는 뭐지, 하며 가만히 생각하다가 순간 멈칫했다. 설마…….

16553714028204.jpg“역시, 너무 멋있어요.”

그녀의 간지러운 속삭임에 이클리트는 쑥스러움을 참지 못하곤 슬쩍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미 그의 귓불이 붉게 달아오른 모습이 그녀의 눈에 사랑스럽게 박혀 있었다. 아멜리아는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마구 꼼지락거렸다. 예상치 못한 욕구가 그녀의 머릿속을 꽉 채웠다.

16553714028204.jpg‘귀여워…… 쓰다듬고 싶을 만큼 귀여워. 너무 귀여워!’

내가 이분을 너무 사랑해서 그런 건가. 그래서 모든 행동이 그렇게 보이는 건가? 사랑에 눈이 돌아서 그냥 마냥 귀여운 거야? 뭐가 됐든, 너무 좋았다. 아까는 사랑하는 사람 눈에 마냥 예쁘게 보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그조차 상관없었다.

16553714028204.jpg‘내 눈에 이분이 너무 멋지고 좋은걸. 그걸로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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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멜리아는 이번엔 제대로 이클리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무도회장에 함께 당도했다. 황실 무도회는 여름 궁의 연회 홀에서 열리는데, 높은 아치형 천장 가득 태양을 상징하는 카렌듈라 꽃의 천장화가 웅장하고 압도적이었다. 게다가 사람의 키를 훨씬 넘어서는 대리석 기둥이 주르르 펼쳐져 있었고, 그 아래 얼굴이 비칠 정도로 반들반들한 대리석이 마치 유리처럼 깔려서 허공을 걷는 기분이 들었다. 바로 여름 궁이 자랑하는 하늘의 방이었다. 아멜리아와 이클리트가 모습을 드러내자, 지난번 탄일 무도회와 달리 귀족들이 다투어 그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제대로 인사를 했다.

16553714145682.jpg“클리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16553714145682.jpg“피오레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이클리트는 어색하긴 했지만, 아멜리아의 옆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이것만으로도 제법 의미 있는 성과라고 생각했다.

16553714145682.jpg“공작 각하, 드레스가 너무 아름다우십니다.”

16553714145682.jpg“정말로 너무 우아하십니다, 공작 각하.”

16553714028204.jpg“그리 말해주니, 고맙네.”

마미의 말처럼 영애와 귀부인들은 하나 같이 아멜리아의 드레스를 살피며, 자신과 비슷하지 않음을 안도하고 있었다. 색이나 디자인이 비슷해도 말이 나올 수 있는데, 다행히 디자인도 비슷하지 않았고, 심지어 색상은 아멜리아의 드레스만 유일하게 보라색이었다. 아멜리아는 연회 홀을 쭉 둘러보았다. 아직 다른 공작들은 걸음 하지 않은 듯 보였다. 그러다 아직 비어 있는 황제와 황후의 자리가 눈에 띄었다. 보통 무도회의 마지막쯤 황제와 황후가 함께 등장했지만.

16553714028204.jpg‘아무래도 황후 폐하께선 걸음 하지 못하시겠지.’

아멜리아는 괜스레 이클리트를 살폈다. 하지만 이클리트는 무심한 시선으로 황제의 빈자리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버렸다. 미리 무도회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카마리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16553714175044.jpg“대공 전하, 공작 각하. 오늘 여기서 두 분의 호위를 맡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16553714028204.jpg“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요, 카마리 경. 오늘 무척 근사해요.”

카마리는 드레스 형태의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분위기와 너무 잘 어울렸다.

16553714175044.jpg“감사합니다.”

그런데 어쩐지 카마리는 아멜리아를 몹시 유심히 살펴보는 듯 했다.

16553714028204.jpg“이사나 경은요?”

16553714175044.jpg“바깥 경비를 서고 있습니다. 뭔가 여기 오기 싫어서 저한테 떠맡긴 기분입니다.”

16553714028204.jpg“이사나 경이 무도회를 싫어했던가?”

어느새 카마리는 아멜리아를 대놓고 빤히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이제야 느낀 아멜리아는 움찔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16553714028204.jpg“카, 카마리 경. 나한테 무슨 할 말 있는 거예요?”

16553714175044.jpg“너무 예쁘셔서요.”

16553714028204.jpg“응?”

카마리는 아멜리아를 아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 모습에 아멜리아는 더더욱 몸이 긴장됐다.

16553714028204.jpg“고, 고마워요, 카마리 경.”

16553714175044.jpg“나중에 비결을 알려주십시오.”

16553714028204.jpg“비결?”

16553714175044.jpg“머리카락을 길러야 하나…… 피부에 파르는 뭘 쓰십니까?”

농담이겠지? 하지만 농담치곤 너무 진지했다. 아멜리아는 이클리트를 향해 슬쩍 속삭였다.

16553714028204.jpg“카마리 경 방식의 칭찬이겠죠?”

16553714086673.jpg“아니요. 진심일 겁니다.”

16553714028204.jpg“네?”

그때,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에 몰리면서 루시아가 걸어왔다. 절로 눈이 가는 존재감. 대회의에서도 봤는데, 무도회장에서 보는 그녀는 더더욱 매력적이었다. 하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나는 검은 드레스. 바닥까지 매끄럽게 떨어지는 드레스는 별이 박힌 듯 반짝거렸다. 사실 검은 드레스는 장례식 복장 같아서 이런 무도회장에선 잘 선택하지 않았다. 특히 여인이 입었을 경우, 미망인을 표현하는 것이라 더더욱. 하지만 루시아에겐 더없이 잘 어울렸다. 게다가 어느 누가 헤스틴 가주인 그녀에게 미망인이라고 손가락질할까. 모두가 그녀에게 절로 고개 숙이는 모습을 보니, 아멜리아는 또다시 그녀의 말이 생각났다.

16553714028204.jpg‘누구도 무시하지 못하게. 위험할 정도로 아름다워야 한다는 게 저런 건가.’

그녀는 정말로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무기로 잘 활용하는 듯했다. 루시아는 이클리트에게로 곧장 걸어왔다. 그녀는 아멜리아를 훑어 내리며 붉은 입술을 길게 올렸다.

16553714204084.jpg“다행히 대회의에서 보던 모습보단 조금 나으시네요.”

아멜리아는 루시아의 말에 헛웃음이 지어졌다. 저 도발하는 어조는 여전했다.

16553714204084.jpg“그나저나 이런 무도회에서 대공 전하를 보게 될 줄이야. 너무 신선하네요. 게다가 볼수록 근사해지시고. 더 욕심나게.”

16553714086673.jpg“…….”

16553714204084.jpg“혹시 춤도 추시는 거예요? 엄청 기대되네요. 나한테도 영광이 돌아오려나?”

루시아의 목소리가 이클리트에게 은근히 와 닿았다. 아멜리아는 다시금 기분이 불편해졌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루시아를 불렀다.

16553714204084.jpg“그럼 나중에 또 봐요, 대공 전하. 단둘이 봐도 좋고.”

그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이클리트 가까이로 슬쩍 지나갔다. 그 순간, 이클리트의 발 앞으로 루시아의 부채가 툭 떨어졌다. 아멜리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건 분명.

16553714028204.jpg‘일부러 떨어뜨린 거야.’

하지만 루시아는 짐짓 모른 척 걸음을 옮겼다. 은밀히 사내를 부르는 유혹. 이클리트는 태연하게 부채를 주워들었다. 아멜리아는 저도 모르게 움찔해서는 그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16553714028204.jpg‘설마 대공 전하, 그걸 직접 전해주러 가려는 건…….’

하지만 부채를 집어 든 이클리트는 카마리를 불렀다.

16553714086673.jpg“카마리 경.”

카마리는 이클리트에게 다가와서는 당연하다는 듯 부채를 집어 들고 사라졌다. 그리고 이클리트는 곧장 아멜리아의 손을 잡았다. 아멜리아는 순간 멍해져서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16553714028204.jpg“직접, 안 전해주셔도 괜찮나요?”

16553714086673.jpg“어째서요?”

16553714028204.jpg“네?”

16553714086673.jpg“부인의 것도 아닌데. 카마리 경이 전해줄 거고.”

이클리트는 한순간 거슬렸던 아멜리아의 기분을 순식간에 다시 들뜨게 했다. 이분에게 오직 자신만 특별한 것 같아서. 부인이라는 단어가 그 어느 때보다 그녀를 설레게 했다. 어느새 춤곡이 흘렀다. 이클리트는 슬쩍 주위를 보았다. 다른 남자들이 호시탐탐 아멜리아에게 춤 신청을 하려고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이클리트는 어림없다는 듯, 그녀의 손을 더욱 꼭 잡았다. 탄일 무도회 때처럼 이 손을 다른 이에게 줄 생각은 죽어도 없었다.

16553714086673.jpg“부인, 오늘은 저하고만 춤춰야 합니다, 꼭.”

  *** 루시아는 카마리가 냉랭한 표정으로 건네는 부채를 잡았다. 기다리던 이클리트는 오지 않았다.

16553714204084.jpg“후훗, 하여튼 대공 전하. 빈틈을 안 주시네.”

16553714175044.jpg“이런 거 하지 마시죠. 대공 전하는 절대로 안 넘어갑니다.”

16553714204084.jpg“하지만 피오레 가주님한테는 넘어갔잖아. 가여울 정도로 꼼짝도 하지 않던 아이가.”

그렇게 말하는 루시아의 목소리가 어쩐지 부드러웠다. 루시아는 아멜리아와 이클리트가 다정하게 서 있는 모습을 눈으로 담았다. 어쩐지 그녀의 시선이 어울리지 않게 애틋해졌다.

16553714204084.jpg“둘 다 너무 예쁘고, 근사하네. 너무, 다행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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