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악녀라는 오명 (54/199)

54화. 악녀라는 오명2021.07.09.

이클리트는 한시도 아멜리아의 곁을 비우지 않으며, 다른 남자들의 시선을 경계했다. 아멜리아는 그런 이클리트의 극진한 보살핌 아래 홀 중앙에 서 있었다. 이클리트는 살며시 상체를 숙이며,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16553714344654.jpg“피오레 공과 춤출 수 있는 영광을 제게 주시겠습니까?”

아멜리아는 그 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하며 살포시 손을 잡았다.

16553714344661.jpg“제게도 같은 영광을 주시죠.”

그녀는 이클리트와 손을 잡고서 마주 섰다. 이렇게 마주 보고 서 있으니, 새삼 처음 그를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그땐 대공인 줄도 모를 만큼, 너무 자유분방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누가 봐도 부족함 없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대공의 모습이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그는 노력한 것이다.

16553714344661.jpg‘날 위해서 애써주시는 거야.’

아멜리아는 그런 이클리트가 정말 고맙고, 좋았다. 음악이 흐르고, 아멜리아와 이클리트가 함께 움직였다. 지난번 탄일 무도회와는 느낌이 달랐다. 그땐 서로의 감정이 다른 의미로 어지러웠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잡고 있는 이 손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흐르는 음악이 느려졌으면 싶기도 했다. 조금 더 오래오래, 이렇게 함께 춤추고 싶었으니까. 이클리트는 몹시 능숙하게 그녀를 리드하며 그녀에게 바짝 다가섰다.

16553714344654.jpg“부인, 저만 보세요.”

다정한 목소리가 아멜리아의 눈앞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클리트는 붙잡은 손에 조금 힘을 주며, 더 깊이 속삭였다.

16553714344654.jpg“나만 보고, 나만 따라와요.”

그의 속삭임을 따라서, 정말로 그를 따라가고 오직 그만 바라보았다. 오롯이 그에게 빠져 있다 보니, 아멜리아는 조금 용기가 생겨서 입을 열었다.

16553714344661.jpg“대공 전하. 지난번에 대공 전하의 곁에 계속 있어 줬다는 사람 말이에요.”

16553714344654.jpg‘언제나 나의 내일이었던 아주 소중한 사람.’

  이클리트는 아멜리아가 무엇을 묻는지 깨닫곤 고개를 끄덕였다.

16553714344654.jpg“네.”

16553714344661.jpg“그 사람이. 헤스틴 공인가요?”

아주 잠깐 입안이 타들어 갔지만, 이클리트는 곧장 고개를 가로저었다.

16553714344654.jpg“아닙니다. 헤스틴 공은. 사실 날 도와준 은인입니다.”

16553714344661.jpg“은인이요?”

이클리트는 살짝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16553714344654.jpg“언젠가 말해줄게요.”

그는 자신의 얘기를 거의 해주지 않았다. 아멜리아 역시 그의 과거보단 현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게다가 카힐로가 너무 많은 걸 알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했었으니. 그래서 아멜리아는 그저 기다리기로 했다.

16553714344661.jpg‘언젠가 말해준다고 하셨으니. 그저 기다리고 있으면, 꼭 말해주실 거야.’

그리고 가장 알고 싶어 했던 걸 확실하게 알게 돼서 편해진 것도 있었다.

16553714344661.jpg‘헤스틴 공은 아니었어.’

아멜리아는 그 사실에 완전히 기분이 풀어졌다. 이클리트는 어쩐지 휘늘어진 아멜리아의 표정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16553714344654.jpg“근데, 그건 왜 물었던 겁니까?”

16553714344661.jpg“아…… 그냥. 대공 전하는 헤스틴 공과 애매한 친구라고 하셨지만, 제가 보기엔 가까워 보였거든요.”

16553714344654.jpg“신경 쓰입니까?”

16553714344661.jpg“네?”

16553714344654.jpg“신경 쓰이면 좋겠는데.”

16553714344661.jpg“…….”

16553714344654.jpg“난 신경 쓰이니까, 항상.”

훅 밀려든 속삭임에 아멜리아는 멈칫했다. 하지만 음악이 끝났다. 이클리트는 아멜리아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는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아멜리아 역시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마주 인사했다. 그때, 갑자기 주변으로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멜리아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에드조프가 메사리나를 에스코트하며 홀 안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

16553714344661.jpg‘드디어 나타났구나.’

그런데, 메사리나를 본 아멜리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어 수군거리는 귀부인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박혔다.

16553714400911.jpg“어머, 레이디 메사리나의 드레스가…….”

16553714400911.jpg“피오레 공작 각하의 드레스랑 비슷하네.”

16553714400911.jpg“그러고 보니 두 사람 의붓 자매라면서?”

더없이 화사하게 웃으며 등장한 메사리나의 드레스가 아멜리아의 것과 유사했다. 특히나 색상이 보라색이라서 더더욱 그렇게 보였다. 현재 이 무도회에서 보라색을 입은 사람은 아멜리아밖에 없었으니까.  

16553714400981.jpg

  메사리나 역시 아멜리아를 보며 잠시 멈칫했다. 어느새 에드조프를 붙잡은 그녀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사실 그녀가 이 드레스를 고른 이유는 에드조프 때문이었다. *** 메사리나는 무사히 황궁에 도착했다. 사실 그녀도 황궁에 온 건 처음이었다. 황실 무도회가 오랜만에 열리는 것이기도 했고, 여름 궁에서 열리는 공식 무도회는 초대받기가 까다로웠다. 특히, 체자렛을 대표하는 자리에 아버지는 자신을 보낸 적이 없었으니.

16553714400985.jpg‘하지만 이번엔 달라. 제대로 체자렛의 이름을 이어받아서 난 여기 초대된 거야.’

메사리나는 일부러 더욱 고개를 뻣뻣하게 든 채, 걸음을 내디뎠다. 처음 보는 황궁은 그야말로 시야를 압도했다. 이토록 아름답고 멋진 곳을 곧 바스티얀 대공 전하께서 가지실 거다.

16553714400985.jpg‘그럼 난 황후가 되어 이곳의 주인이 될 테지.’

어느새 메사리나의 안광 위로 번뜩이는 욕망이 스쳤다. 일단 그녀는 에드조프를 만나고자 했다. 무도회 시작 전에 반지를 전해주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16553714400985.jpg‘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어.’

메사리나는 황궁 시녀에게 돈을 두둑하게 쥐여주곤, 자신이 왔다는 걸 에드조프에게 은밀히 알렸다. 분명 그에게서 연락이 올 테고, 그럼 자신이 만나러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16553714400997.jpg“메사리나.”

메사리나는 직접 자신을 만나러 와준 에드조프의 모습에 감격했다.

16553714400985.jpg“대공 전하! 제가 만나러 가도 되는데 이렇게 직접…….”

16553714400997.jpg“그댄 황궁 안을 잘 모르잖아. 괜히 눈에 띄면 곤란하지.”

조금 차가운 에드조프의 목소리에 메사리나는 움찔했다. 공식적인 자리는 몰라도, 사적인 자리에서는 최대한 관계를 숨기려고 하는 에드조프의 모습에 메사리나는 조금 서운했지만, 이해했다.

16553714400985.jpg‘아직은 때가 아니니까. 하지만 내가 백작가를 이어받으면, 대공 전하의 곁에 당당히 있을 수 있어.’

메사리나는 애써 환하게 웃으며 에드조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16553714400985.jpg“탄일 축하드려요. 맞혀서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16553714400997.jpg“그래도 꽤 즐거운 탄일이었어. 원하는 걸 보았으니까.”

메사리나는 뭔가 즐거워 보이는 에드조프의 표정이 의아했지만, 그가 좋으면 자신도 그저 좋았다. 그녀는 반지를 주기 위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16553714400985.jpg“대공 전하, 대신 제가 드릴 것이…….”

16553714400997.jpg“이만 가봐야겠다. 무도회 준비에 소홀함이 없어야 하니.”

16553714400985.jpg“아! 많이 바쁘시죠? 죄송해요.”

에드조프는 무심한 시선으로 메사리나를 보다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감쌌다. 그 작은 손길에 메사리나의 얼굴이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

16553714400997.jpg“오늘 밤, 그대의 에스코트는 내가 하도록 하지.”

16553714400985.jpg“정말이요? 너무 기뻐요!”

에드조프는 기뻐하는 메사리나를 빤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16553714400997.jpg“드레스 색은 어떤 거로 골랐지?”

16553714400985.jpg“흰색과 푸른색을 섞었어요. 황실 무도회니까, 좀 더 우아할 수 있도록.”

다른 무도회는 몰라도 황실 무도회에서 드레스의 색상이 중요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메사리나도 다른 이들과 겹치지 않도록 꽤 신경 썼다. 그런데 에드조프는 메사리나의 말에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16553714400997.jpg“그대에게 별로 안 어울려.”

16553714400985.jpg“네?”

16553714400997.jpg“보라색이 괜찮아. 요즘 그 색이 좋거든.”

그저 무심히 스쳐 간 말이었지만, 메사리나에겐 처음으로 에드조프가 자신을 소유하는 듯한 어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곧장 드레스 색상을 보라색으로 바꾼 것이다. 게다가 에스코트하기 위해 배웅 나온 에드조프의 부토니에르에는 낯선 제비꽃이 있었다. 지금껏 그를 알면서 저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분이 꽃을 가져오다니.

16553714400985.jpg‘분명 날 위해 준비하신 거야. 역시 드레스를 바꾸길 잘했어!’

에드조프의 손을 잡고서 무도회에 들어서기 전까지, 그녀의 기분은 최고였다. 그런데 아멜리아가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에드조프의 시선이 곧장 아멜리아를 향하자, 메사리나의 표정이 파르르 떨렸다.

16553714400985.jpg‘설마 아니겠지. 보라색이 좋다는 이유가 설마…… 아니야.’

메사리나는 아멜리아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에드조프를 손으로 더욱 꽉 붙들었다. 그때, 누군가 메사리나에게 춤 신청을 했다.

16553714400911.jpg“레이디 메사리나, 그대와 춤출 수 있는 영광을 제게 주시겠습니까?”

16553714400985.jpg“아니요, 저는…….”

16553714400997.jpg“마음껏 즐기도록 해요, 레이디 메사리나.”

메사리나는 거절하려고 했지만, 에드조프가 그녀의 손을 떼어낸 채 등을 돌렸다. 그녀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그의 뒤를 쫓았다. 에드조프는 곧장 아멜리아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녀의 심장이 점점 더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메사리나는 하얗게 질린 입술로 끊임없이 되뇌었다.

16553714400985.jpg“아니야. 아닐 거야. 절대, 아니야…….”

  *** 에드조프는 곧장 아멜리아에게 다가왔다. 이클리트는 굳어진 시선으로 아멜리아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아멜리아 역시 에드조프와 더는 부딪히고 싶지 않아서, 이클리트와 돌아서려는 순간. 에드조프가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서는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6553714400997.jpg“피오레 공.”

16553714344661.jpg“…….”

에드조프는 더없이 우아한 미소를 그리며,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16553714400997.jpg“피오레 공과 춤출 수 있는 기쁨을 주시겠습니까? 제국의 대공으로서 새로운 피오레의 가주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청합니다.”

그는 일부러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대공으로서 청했다. 그녀가 거절하기 어렵게.

16553714400997.jpg“손을 잡고 싶으면, 허락을 구하라고 했잖아? 이제 나만큼 그대도 보는 눈을 중시해야지.”

이클리트를 황제로 만들 거라면. 아멜리아는 이를 악물고서 에드조프의 손을 붙잡았다. 이클리트의 표정에 균열이 일었으나, 그녀를 위해 소란을 피울 수 없었다. 서로 스치는 이클리트와 에드조프의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이클리트는 점점 있을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에드조프를 보면서 분노를 잔뜩 삼켰다.

16553714344654.jpg‘설마, 아니겠지.’

  에드조프는 아멜리아와 마주 섰다. 아멜리아는 단 한 순간도 에드조프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하지만 느껴졌다. 오롯이 저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끔찍한 시선이. 이윽고, 음악이 흘렀다. 아멜리아는 이 순간을 끝내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지만, 에드조프가 그녀를 바짝 당겨 안으며 속삭였다.

16553714400997.jpg“박자를 맞춰.”

16553714344661.jpg“…….”

16553714400997.jpg“춤은 서툰 건가? 그건 또 몰랐네.”

16553714344661.jpg“원래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지 않나요?”

아멜리아가 차갑게 속삭이자, 에드조프는 더욱더 깊이 입꼬리를 올렸다.

16553714400997.jpg“하지만 이건 알아.”

에드조프는 자신의 부토니에르에 있는 제비꽃을 그녀에게 건넸다. 아멜리아는 그의 모습에 눈빛이 차갑게 흔들렸다.

16553714344661.jpg“뭐 하는 거예요?”

16553714400997.jpg“내게 원했잖아. 이 제비꽃.”

16553714344661.jpg“이젠 아니라는 걸 알 텐데. 대체 왜 이러는 거죠? 정말 나한테 관심이 생긴 건가요?”

16553714400997.jpg“관심이 아니라, 널 다시 가져야 이클리트가 완전히 망가져.”

섬뜩하게 파고드는 목소리에 아멜리아는 이를 악물며 그가 준 제비꽃을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에드조프는 억지로 그녀의 손에 쥐여준 채, 그녀의 손을 힘껏 움켜쥐었다.

16553714344661.jpg“놔요.”

16553714400997.jpg“아직 음악이 끝나지 않았어. 움직여.”

16553714344661.jpg“그만두라고 했어요.”

16553714400997.jpg“움직여, 아멜리아.”

다시금 자신을 억지로 취하려고 하는 에드조프의 모습에 아멜리아는 입꼬리를 차게 올리며 그대로 에드조프의 발을 강하게 밟아버렸다.

16553714400997.jpg“윽.”

에드조프는 순간 터진 비명을 삼켰다. 하지만 드레스 자락을 핑계로 아멜리아는 에드조프의 발을 더욱 세게 밟으며 싱긋 웃었다.

16553714344661.jpg“움직이라고 해서 움직였는데, 마음에 드시나요?”

16553714400997.jpg“아멜리아.”

16553714344661.jpg“내게 명령하지 마. 당신은 날 가질 수 없고, 그분을 망가뜨릴 수도 없어. 내가 그분을 지킬 테니까.”

마침내 음악이 끝나고, 아멜리아는 곧장 제비꽃을 바닥에 버렸다. 그러곤 더없이 우아하게 웃으며 살포시 몸을 숙였다.

16553714344661.jpg“미안합니다, 대공 전하. 제가 춤에 서툴러서요. 제 남편에게만 익숙하답니다.”

16553714400997.jpg“…….”

16553714344661.jpg“설령 실수해도, 제 남편은 다 받아주거든요. 그래서 오직 남편만 믿고 있죠. 그러니 두 번 다시, 이런 자리는 없었으면 합니다.”

돌아서는 아멜리아는 야무지게 제비꽃을 지르밟고서 사라졌다. 에드조프는 아멜리아의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 메사리나와 비슷했지만 분명 달랐다. 메사리나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그녀에게 보라색이 더 잘 어울렸으니까. *** 메사리나는 눈앞이 자꾸만 흔들렸다. 아니겠지, 했다. 절대로 아닐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에드조프는 아멜리아에게 제비꽃을 주었다. 자신에게 보라색을 입힌 이유도. 저 제비꽃도 애초에 정말로 아멜리아에게 주려고…….

16553714400985.jpg‘대체, 왜?’

아멜리아가 피오레 가주가 되어서? 그래서 다시 원하시는 거야?

16553714400985.jpg‘안 돼. 싫어. 더는 대공 전하를 저 계집이랑 나누고 싶지 않아!’

일단, 저 눈에 거슬리는 드레스부터 벗겨내고 말 것이다. 메사리나는 와인잔을 움켜쥔 채, 미소를 띠며 아멜리아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아멜리아가 입을 열기도 전에 해사한 어조로 속삭였다.

16553714400985.jpg“오랜만이에요, 언니. 잘 지내셨죠? 너무 보고 싶었는데. 아무리 우리가 조금 다툰 채 헤어졌다고 해도, 한 번을 보러 안 와주시고. 서운해요.”

아멜리아는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예전처럼 아는 척하는 메사리나의 가증스러운 표정을 바라보았다.

16553714400985.jpg“저 사과하고 싶어요. 제가 언니한테 많이 잘못한 거겠죠. 비록 제가 졌지만, 그래도 언니가 피오레의 가주가 되신 거 진심으로 축하하고 싶었어요. 언니도 절 용서해주셨다고 믿었고요. 그래서 화해의 선물로 이 드레스를 주신 거 아닌가요?”

메사리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영문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일순, 이쪽을 주시하던 부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16553714400911.jpg“어머, 피오레 공이 선물한 드레스였어?”

16553714400911.jpg“사이가 안 좋은 건가?”

16553714400911.jpg“그때 얼핏 들었어요. 피오레 공작 각하께서 레이디 메사리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16553714400911.jpg“아, 그래서 저 드레스를 일부러 보낸 거구나.”

16553714400911.jpg“피오레 공작 각하. 의외로 무섭네요.”

아멜리아는 순간 냉소가 그려졌다. 메사리나는 사교계를 너무 잘 알았다. 그래서 부인들이 무엇에 관심 있어 하고, 무엇을 헐뜯고 싶어 하는지. 그 욕망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자신이 용서를 바라는 메사리나에게 저 드레스를 선물로 줬다. 그런데 자신이 메사리나와 비슷한 드레스를 입고 왔다. 높은 신분의 귀부인이 자신보다 낮은 신분의 귀부인과 비슷한 드레스를 고르는 이유는 단 하나. 치욕을 주기 위한 것.

16553714344661.jpg‘결국 난 여린 의붓여동생을 악랄하게 괴롭히는 악녀 언니, 인 건가?’

지난 연회에서, 자신이 메사리나를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고 괴롭힌다는 소문이 사교계에 돌았다. 그 또한 메사리나가 만들어낸 거지만. 그녀는 그 소문을 이렇게 확실하게 더 부추기고 있었다.

16553714344661.jpg‘이렇게 사교계에 내 평판을 확실하게 흠집 내겠다고?’

메사리나는 가련한 표정을 띠며, 눈빛에 칼을 품었다.

16553714400985.jpg‘알아들었으면 당장 그 드레스 벗어. 바스티얀 대공 전하가 좋아하는 색은 내가 가질 거야. 그분이 원하는 건 오직 나여야 한다고!’

16553714344661.jpg“레이디 메사리나, 그대가 내게 용서를 구하니. 사죄를 받도록 하지.”

메사리나는 아멜리아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16553714400985.jpg“뭐?”

하지만 아멜리아는 의연한 표정으로 손짓했다.

16553714344661.jpg“그러니 이 자리에서 내게 정식으로 고개 숙여 사죄하렴.”

고개 숙이라는 말에 메사리나는 파들거리는 눈빛으로 나직이 읊조렸다.

16553714400985.jpg“미친 거야? 내가 여기서 고개 숙여 사죄하면, 네 평판은 끝이야. 악녀라는 오명이 남는다고. 그냥 순순히 그 드레스 바꿔 입고 물러나.”

16553714344661.jpg“그래서?”

16553714400985.jpg“뭐?”

16553714344661.jpg“사과는 네가 하겠다며. 그러니 난 그 사과, 받겠다는 거야. 정식으로.”

아멜리아는 메사리나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16553714344661.jpg“착각하는 모양인데, 난 착해질 생각 없어. 내가 예전에 나 같아?”

여기서 평판에 오점이 생긴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다. 더는 메사리나에게 휘둘릴 수 없으니! 그때, 이클리트가 메사리나 쪽으로 다가왔다.

16553714344654.jpg“무슨 일입니까, 부인?”

아멜리아는 순간 놀랐다.

16553714344661.jpg‘대공 전하?’

그가 막아설 줄은 몰랐기에.

16553714400985.jpg‘역시. 대공비가 악녀라는 평판은 좀 그런가.’

메사리나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이클리트에게 예를 갖추려고 했다.

16553714400985.jpg“이클리트 라이엇 클리오 대공 전하를 뵙…….”

그때, 메사리나가 딛고 있던 땅이 한순간 흔들리며 그녀가 들고 있던 와인잔을 떨어뜨렸다. 쨍그랑-! 그 바람에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그대로 튀어, 메사리나와 가까이에 있던 이클리트의 손등에 피를 냈다.

16553714344661.jpg“대공 전하!”

아멜리아는 경악하며 이클리트의 손을 살폈다.

16553714344661.jpg“괜찮으세요?”

메사리나는 당황스러웠다.

16553714400985.jpg‘뭐지. 아까 그건? 지진이야? 근데 나만 느낀 거야?’

그녀는 떨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16553714400985.jpg“죄,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제가 실수를…….”

16553714344654.jpg“감히 대공의 몸에 상처를 냈는데, 그저 말로서 사죄하는가?”

16553714400985.jpg“……예?”

순간, 오싹한 목소리가 메사리나에게 뚝 떨어졌다. 이클리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냉랭한 시선으로 제 발아래를 가리켰다.

16553714344654.jpg“예법에 따라, 무릎 꿇어 사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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