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고작 조금 되돌려줬어2021.07.12.
“예법에 따라, 무릎 꿇어 사죄하라.”
이클리트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메사리나는 이클리트의 말에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사실 이 와인은 여차하면 아멜리아에게 실수인 척, 뿌려서라도 드레스를 벗기기 위해 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기다니. 실수든 아니든, 감히 대공의 몸에. 그것도 황자의 몸에 피를 냈으니, 당연한 예법이긴 했다. 가볍게 넘기면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무릎 꿇고 사죄하라고? 다들 보고 있는데? 그것도 아멜리아, 저 계집 앞에?’
이클리트 앞에 무릎 꿇는 건, 아멜리아에게 무릎 꿇는 것과 마찬가지. 메사리나는 있을 수 없는 굴욕과 수치심에 몸이 제멋대로 굳어졌다. 아멜리아는 생각지도 못하게 나선 이클리트의 모습에 그제야 깨달았다.
‘날 말리신 게 아니야.’
이클리트가 그녀 대신 받아내고 있는 거다. 그가 너무 다정해서 잠시 잊고 있었지만, 사실 그는.
“역시 괴물 대공 전하…….”
“냉정하시네요. 아무리 그래도 실수인데…….”
“그래도 레이디 메사리나가 잘못했지. 황자 전하의 몸에 피를 낸 거야.”
수군거리는 목소리에 가득 베인 감정은 공포였다. 전쟁광이자, 냉혹하고 잔인하기로 소문난 북부의 흑사자로 통하는 그다. 평판이 더 달라질 것도 없었다.
‘그런데 대체 메사리나가 와인잔을 떨어뜨릴 걸 어떻게 아신 거지?’
이클리트는 굳어져 버린 메사리나를 향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사죄하지 못하겠는가? 그럼 혹, 일부러 날 해치려고 한 것인가?”
“그, 그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죄하지 못할 이유가 없을 텐데. 곧, 황제 폐하께서 걸음 하실 거다. 계속 소란을 이어가고 싶다면 굳이 말리지 않겠다.”
자비 없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메사리나를 이를 악물었다. 누구도 그녀를 도와주지 못한다. 게다가 정말로 이대로 버틸 수도 없었다. 그럴 만한 권력이 그녀에겐 없었다.
‘바스티얀 대공 전하께도 폐를 끼칠 수 있어.’
메사리나는 천천히 몸을 굽히기 시작했다. 바닥엔 쏟아진 와인이 흥건했다. 그녀는 그 위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메사리나의 드레스가 와인 때문에 엉망진창으로 더럽혀졌다. 하지만 그보단 사방에서 날아오는 시선이 마치 오물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메사리나는 수치심에 바들거리는 입술을 겨우 열었다.
“클리오 대공 전하께 크나큰 실수를 범했습니다. 용서를 구합니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이클리트는 그런 메사리나를 보며 더욱 잔인하게 읊조렸다.
“목소리가 가까운데.”
메사리나는 온몸에 힘을 주고서 완전히 몸을 바닥에 엎드렸다. 끔찍한 기분이 자꾸만 그녀의 숨을 막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건, 오롯이 박히는 그의 차가운 시선. 이클리트의 서슬 퍼런 존재감이었다. 그는 그렇게 메사리나에게 똑똑히 그녀의 위치를 깨닫게 했다. 너 같은 건 감히 아멜리아의 평판에 티끌만 한 흠집도 낼 수 없다고. 이는 수군거렸던 다른 귀족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지켜보던 아멜리아가 살며시 이클리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조금 안타까운 목소리로 이클리트를 다독였다.
“대공 전하, 대공 전하께 큰 무례를 저질렀지만 제 하나뿐인 동생입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사과를 받아주세요.”
메사리나는 아멜리아의 동정이 귓가에 닿자 더더욱 끔찍해졌다. 이클리트는 그런 아멜리아를 향해 언제 그랬냐는 듯, 온화한 시선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의 부탁이니, 기꺼이.”
이클리트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고, 아멜리아가 메사리나를 감싸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일어나, 어서. 이제 괜찮아.”
메사리나는 한껏 입술을 깨문 채 그녀의 손에 의해 일어섰다. 그리고 핏발 서린 시선으로 아멜리아를 노려보며 그녀의 손을 치워내려는 순간.
“그래도 가족이라고 피오레 공작 각하께서 도와주시네.”
“소문에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야.”
“그러게. 꽤 다정해 보이잖아.”
갑자기 뒤바뀐 분위기에 메사리나의 눈빛이 떨렸다. 아멜리아는 그런 그녀를 보며 싸늘하게 읊조렸다.
“여기서 내 손을 치워내면 누가 불리할까?”
그녀는 메사리나의 손을 더욱 꽉 붙잡았다.
“내가 말했지? 손을 잡는 것도, 떼는 것도 내 허락이 필요할 거라고.”
“……아멜리아.”
“난 너처럼 착한 척할 생각 없어. 내가 여기서 악녀라고 한들, 감히 날 건드리지 못해. 그런 이미지는 네가 필요하겠지. 아무것도 없이 약해빠진 넌, 착해야만 하겠지.”
“…….”
“네 본 모습을 보여주면 넌 추락이니까.”
메사리나는 분하고 억울한 시선으로 제 앞에서 살포시 웃고 있는 아멜리아를 노려보았다. 결국, 그녀는 아멜리아가 내민 손을 치워내지 못했다.
“이 상태로는 무도회를 계속 즐길 수 없지. 곧 폐하도 알현해야 하는데. 같이 나가자. 내가 도와줄게, 메사리나.”
메사리나는 아멜리아의 말에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고마워요, 언니.”
“괜찮아, 메사리나. 넌 내 동생이니까.”
아멜리아는 메사리나가 했던 가증스러움을 그대로 되돌려준 채,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그러자 곧장 카마리가 다가왔다.
“호위하겠습니다.”
하지만 아멜리아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요, 카마리 경. 금방 다녀올 거니까, 괜찮아요.”
“하지만…….”
“바로 앞이에요. 게다가 황궁이잖아요. 별일 없을 거예요.”
카마리는 아멜리아의 말에 하는 수 없이 뒤로 물러났다. 무조건 따라나서기엔 아멜리아와 메사리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으니까. 그렇게 상황은 메사리나가 지난날 뒤집어씌웠던 아멜리아의 잘못된 평판만 오히려 제대로 벗겨낸 채 끝났고, 두 사람은 다정한 척 홀을 빠져나갔다. 이클리트는 메사리나가 쏟은 와인잔을 잠시 보다가, 걸음을 옮겨 그녀와 같은 와인을 에드조프에게 권했다.
“한잔하시겠습니까, 형님.”
에드조프는 처음으로 자신을 먼저 찾아온 이클리트의 모습에 냉소를 그렸다.
“네가 처음으로 주는 술인데, 기꺼이.”
“사과의 의미로 드리는 겁니다.”
“사과?”
“형님의 여인에게 너무 과한 처사인 듯해서.”
이클리트의 발칙한 도발에 에드조프의 시선이 사납게 빛나며 뒤엉켰다. *** 아멜리아는 메사리나를 데리고 홀을 빠져나와, 복도 끝에 있는 인적 드문 방으로 들어갔다.
“여기 있어. 마미를 불러서 다른 드레스를…….”
하지만 메사리나는 아멜리아를 밀쳐내며 외쳤다.
“착한 척 안 한다더니, 역겹게.”
아멜리아는 메사리나의 말에 차게 웃었다.
“착한 척이 아니지. 네가 했던 짓, 고작 조금 되돌려준 거야. 그리고 역겹다고? 고작 이 정도 일에 역겨움을 느끼니? 그럼 그때 나는 어땠을까.”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난 잘못한 거 없어. 바스티얀 대공 전하께서 네가 아닌 날 사랑한 게 대체 무슨 죄라는 거야? 난 사과할 거 없다고!”
“그래, 사과하지 마. 나도 네 사과, 고작 이런 거로 안 받아.”
아멜리아는 비웃음 섞인 어조로 속삭였다.
“체자렛 백작가 대표라. 그래서 네 어머니와 넌 꿈에 부풀어 있겠구나. 과연 아버지가 너한테 백작가를 주실진 모르겠지만.”
“더는 너에게 아버지가 아니지. 아버지도 너 같은 딸, 더는 입에도 담고 싶어 하지 않아 하셔.”
“나도 마찬가지야. 그나저나 너는 참 오래 발버둥 쳐야겠구나. 이 사람에게도, 저 사람에게도 사랑받기 위해서. 지금 넌 뭐 하나 가진 게 없으니. 이제 그만 가져가라고 준 바스티얀 대공조차도.”
그녀의 입에서 에드조프의 이름이 나오자, 메사리나는 손톱이 부러질 듯 힘을 주었다.
“오늘 그분이 날 에스코트해준 거 못 봤어?”
“그건 그냥 기본 매너잖아. 넌 아직 바스티얀 대공의 비밀스러운 정부 아니야? 아, 정부조차 못 되나?”
“건방 떨지 마! 너도 뭣 하나 떳떳하지 못한 주제에!”
“내가?”
“지금 너한테 벌어지고 있는 무수한 일, 전부 뭔가가 있어. 우연히 가능할 수 없는 일이야. 심장이 나아? 마법을 써? 네가 날 잘 알듯이, 나도 널 잘 알아. 싫던, 좋던 우린 자매로 한집에서 살았으니까.”
아멜리아는 점점 섬뜩하게 일그러지는 메사리나의 표정을 의연하게 바라보았다.
“비밀로 감추는 건, 밝혀지면 좋을 게 없다는 거야. 너도 봤다시피, 사람들은 헐뜯는 걸 좋아해. 특히 위에 있는 사람이 몰락하는 걸 더더욱 좋아하지. 두고 봐. 철저히 파헤치고 말 테니까. 그래서 피오레 가주로서도, 대공비로서도 널 추락시킬 거야!”
“그래서 너도 그 가증스러운 가면을 잘도 쓰고 있구나. 하지만 메사리나, 너라고 밝혀지면 안 되는 비밀이 없을까.”
아멜리아는 메사리나의 드레스를 훑어보며 말했다.
“너랑은 계속 드레스로 얽히는구나. 하긴 전부 다 네가 먼저 시작한 짓이지.”
“무슨 헛소리야.”
“지난번 웨딩드레스 망친 거, 반드시 갚아준다는 얘기야. 난 이제 받은 만큼 되돌려줄 거거든. 오늘보다 더 잔인하게, 혓바닥과 시선으로 난도질당해 봐.”
아멜리아는 메사리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짧게 읊조렸다.
“네가 신성회 신관까지 끌어들이면서 저지른 짓 말이야.”
순간, 메사리나의 표정 하얗게 굳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신관까지 끌어들이다니. 네 어머니처럼 멍청하기 그지없으니까, 아주 제 무덤을 파는구나.”
아무리 신관이 메사리나의 유혹에 넘어가서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해도, 그 시작이 메사리나라는 게 신성회에 밝혀지면, 가만두지 않을 거다.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신성회는 신관의 권한인 축복의 꽃을 아멜리아가 피운 사실을 항의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나, 나라는 증거 있어?”
“아직은 없어. 하지만 곧 생기겠지. 누구의 비밀이 먼저 밝혀져서 추락하게 되는지, 어디 보자고.”
아멜리아의 여유로운 미소에 메사리나의 입술이 비틀리는 순간. 악-! 갑자기 밖에서 들리는 끔찍한 비명에 아멜리아와 메사리나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뭐지?’
아멜리아는 뭔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메사리나 역시 주춤하며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아멜리아는 긴장된 숨을 삼키며, 드레스를 허벅지까지 올렸다. 그러자 허벅지에 채워져 있던 홀스터에서 리볼버가 반짝였다. 그녀는 리볼버를 장전하고서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복도 가득 굉장히 짙은 안개가 시야를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다. 마치, 안개가 황궁이 먹혀버린 것 같았다.
“이게 대체…….”
오늘 이상할 정도로 안개가 자욱하다고 느끼긴 했지만, 이건 좀 심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안개를 만든 것 같아.’
그때. 악-! 복도 끝에서 한 번 더 비명이 울렸다. 이게 사람의 목소리인지, 아닌지 알 수 없을 만큼 기괴했다. 아멜리아는 온몸으로 소름이 돋았지만, 재빨리 비명이 들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개가 너무 자욱했다. 몇 번이고 눈을 깜빡여도 시야가 흐릿할 정도로. 아멜리아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거기 누구 있어요? 괜찮아요?”
그때, 발밑으로 물컹이는 무언가가 기분 나쁘게 밟혔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그러자 그녀의 시야 가득 붉은 액체가 흥건하게 보였다.
“피?”
순간, 자욱한 안개에서 뭔가 하얀 형체가 쓱 하고 스쳐 지나갔다. 섬뜩하게 파고드는 공기. 분명 뭔가가 이 안개 속에 숨어 있다. 아멜리아는 걸음을 멈추고서 숨을 죽였다. 그리고 또다시 뭔가가 움직인 순간, 그녀는 재빨리 방아쇠를 당겼다. 탕-! *** 에드조프는 이클리트와 잔을 부딪치며 싸늘하게 읊조렸다.
“네가 황자라는 권력을 휘두를 줄도 알고. 황궁에 돌아오니 뭐라도 된 것 같아? 난생처음으로 생일을 챙겨 받으니 그런 건가. 그래서 아멜리아가 네게 케이크는 준 거야?”
이클리트는 그의 입에서 아멜리아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나오자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에드조프는 여유롭게 이클리트를 자극했다.
“이제 케이크는 잘 만드나? 내게 준 건 항상 서툴렀는데. 답례로 꽃을 주도록 해. 내가 주는 꽃을 가장 좋아하긴 했지만. 힌트를 주자면, 그녀는 제비꽃을 가장 좋아했어.”
에드조프는 이클리트가 절대로 이길 수 없고, 넘볼 수도 없는 그녀와의 시간을 속삭였다. 하지만 그 시간이라면 이클리트 역시 가지고 있었다. 역시나 에드조프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
“알고 있습니다. 그녀가 제비꽃을 좋아한다는 걸. 그녀에게 제비꽃은 그녀의 어머니와 로사 유모가 전하는 위로였으니까.”
이클리트는 더는 에드조프가 가진 과거에 흔들리지 않았다.
“형님이 준 제비꽃은 버려지고 밟혔지만. 그녀에게 형님은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녀는 제게 제비꽃이 되어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지금 그녀와 함께 있는 건 자신이었으니까. 앞으로 함께 할 사람도 자신이었다.
‘내게 약속했어. 앞으로도 계속, 생일을 축하해줄 거라고. 그 무지개를 계속 선물해줄 거라고.’
그녀의 내일을 함께 할 사람은 자신이다. 그렇기에 이클리트는 그녀의 오늘도 내일도 지켜야만 했다. 더는 과거에 흔들리지 않도록. 과거에 아파하지 않도록. 에드조프는 이클리트의 시건방진 모습에 피처럼 붉은 와인잔을 흔들었다.
“두 번 다시 너와 이 잔을 부딪칠 일은 없겠군. 괴물 새끼가 주는 술을 어디 믿을 수가 있어야지.”
“걱정 마십시오. 그런 짓은 안 합니다. 훗날을 위해, 굳이 손을 그렇게 더럽히진 않을 테니까.”
“훗날? 하! 이클리트. 네가 정말 뭐라도 된 것 같아서 지금 감히 훗날을 들먹여? 그녀는 내게 복수하려고 널 이용하는 것뿐이야. 너 역시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때,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벌컥 문이 열리면서 근위병들이 우르르 들이닥쳤다. 이클리트는 뭔가 불길한 느낌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에드조프는 근위대장을 향해 외쳤다.
“대체 무슨 일인가?”
근위대장은 주춤하고 있는 귀족들을 보며 말했다.
“갑자기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부디 기사들을 따라서 침착하게 이곳에서 대피해주십시오.”
“대피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바스티얀 대공 전하, 지금 황궁 안으로 맹수들이 탈출했습니다. 벌써 몇몇이 당했는데…….”
근위대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클리트가 무섭게 홀을 빠져나갔다. 아멜리아, 그녀가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