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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그녀를 사랑한다 (60/199)

60화. 그녀를 사랑한다2021.07.30.

방으로 돌아온 에드조프는 분노를 삭이지 못한 채 외쳤다.

16553716245989.jpg“술 가져와, 당장!”

얼마 지나지 않아서, 키르케가 와인을 들고서 들어왔다. 에드조프는 키르케의 모습에 헛웃음을 띠며 말했다.

16553716245989.jpg“오늘 정말 미치겠네. 네가 왜 들어오는 거지? 다시는 이 황궁에서 내 눈에 띄지 말라고 했을 텐데.”

16553716245999.jpg“…….”

16553716245989.jpg“나가, 당장. 사람 불러서 끌려나가고 싶지 않으면!”

키르케는 돌아서는 에드조프를 향해 연민을 담아 속삭였다.

16553716245999.jpg“이대로 전부 빼앗길 겁니까? 그 자리, 지키셔야지요.”

에드조프는 키르케의 속삭임에 움찔했다.

16553716245999.jpg“이 유모가 다 가지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이 유모는 다 알고 있어요.”

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에드조프와의 간극을 좁히며 끊임없이 그의 위태로운 감정을 자극했다.

16553716245999.jpg“아무것도 아닌 클리오 대공이 돌아왔습니다.”

16553716245989.jpg“돌아오다니. 아무도 그놈을 인정하지 않아.”

16553716245999.jpg“애초에 북부에 버려졌던 황자입니다. 황궁에 발을 디딘 것부터 시작인 거지요.”

키르케의 걸음이 가까워지고 있었으나, 에드조프는 예전처럼 그녀를 거칠게 밀어내지 않았다.

16553716245999.jpg“황자 전하의 여인을 대공비로 세우고, 귀족들이 그를 향해 고개 숙였습니다. 그게 시작 아닙니까? 부정한다고 아닌 것이 되는 건 아닙니다. 그건 어린아이 같은 발상이에요.”

어린아이라는 말에 에드조프가 날 선 시선으로 키르케를 노려보았다.

16553716245999.jpg“황후 폐하께서 찾으신 것도 클리오 대공이고.”

16553716245989.jpg“기억을, 못 하시는 거다.”

16553716245999.jpg“왜 하필 그 짐승을 기억할까요? 그 피오레 가주조차도 그 짐승을 원하고.”

16553716245989.jpg“나를 향한 복수 때문이야. 그녀에겐 나밖에 없어!”

16553716245999.jpg“그래서 그렇게 계속 핑계 대면서 지켜만 보실 겁니까? 원래대로 돌아가고 싶으세요?”

겨우 참고 있던 에드조프는 키르케의 한마디에 순식간에 그녀의 목을 비틀어버릴 듯, 졸랐다.

16553716245989.jpg“원래대로 돌아가다니. 무엇이? 여기가 내 자리인데. 애초에 전부 다 내 것인데. 뭐가 돌아간다는 거야!”

광기 어린 비명 앞에 키르케는 숨이 넘어가라, 섬뜩한 웃음을 지으며 간사한 혀를 놀렸다.

16553716245999.jpg“전부, 원래대로.”

그녀는 소름 끼칠 정도로 메마른 손을 올려 에드조프의 뺨을 감쌌다.

16553716245999.jpg“클리오 대공은 짐승답게 죽고, 피오레 가주와 황후 폐하를 온전히 손에 넣으셔야지요. 그게 대공 전하가 바라는 원래의 모습이니까.”

너무나도 달콤한 꿈을 속삭이는 키르케 앞에, 에드조프는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을 스르르 풀렸다. 그는 알았다. 이 여자가 얼마나 무서운 여자인지. 그렇기에 결코 헛으로 내뱉는 말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 여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16553716245989.jpg“……그 ‘공방’에서, 뭘 하는 거지?”

키르케는 마침내 흔들린 에드조프를 보며 더욱 다정하게 혀를 늘렸다.

16553716245999.jpg“오직 황자 전하를 위한 힘을 기르고 있지요. 오직 황자 전하를 위해 움직일 병기입니다. 선택만 하세요. 죽을 때까지 황자 전하를 위해 움직일 테니. 길들인 짐승은 그렇게 쓸모가 있습니다. 절대 남의 손을 타지 않는, 오직 주인에게만 복종합니다.”

16553716245989.jpg“그게, 가능하다고?”

16553716245999.jpg“예.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의 소란이 정말로 다 우연일까요?”

에드조프는 황궁 안을 날뛰었던 짐승들을 떠올렸다.

16553716245989.jpg‘설마…….’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 여자는 정말 끔찍한 짓을 하고 있었다. 악은 가장 친절하고, 가장 원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항상 앞서간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피도 눈물도 없이 잔인해지는 것. 눈앞에 이 여자가 그랬다. 악랄하기를 넘어 몹시 위험한 여자. 이 황궁에서 유모로 모습을 감추고, 수년 동안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마녀니까. 이 마녀의 복수는 자신이 움직여야 성공한다. 하지만 이 마녀의 복수가 결국은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것이다.

16553716245989.jpg‘솔라 제국의 황제를 바꾸는 것. 내 손에 이 제국을 쥐여주는 것.’

오직 그걸 위해 자신을 키웠으니까. 불안하게 흔들리던 에드조프의 시선이 차츰 차갑게 가라앉았다.

16553716245989.jpg‘내가 이용당하는 게 아니야. 내가 이 여자를 이용하는 거다.’

에드조프는 눈을 내리깔면서 키르케를 향해 명령했다.

16553716245989.jpg“감히 유모 주제에 날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냐.”

키르케는 기꺼이 에드조프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에드조프는 그런 키르케의 어깨를 지그시 밟으며 입술을 비틀었다.

16553716245989.jpg“내가 널 사용해주는 거다. 그걸 명심해.”

16553716245999.jpg“물론입니다. 저는 황자 전하를 위해 무엇이든 할 겁니다. 절 남김없이 이용하세요. 그래서 이 제국을 손에 넣으세요. 이 유모는 오직 그것만을 원합니다.”

16553716245989.jpg“그래. 다 내 것으로 만들 거다. 그걸 방해하면, 전부 죽여 버릴 거야.”

특히, 아멜리아. 떠올리는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그녀를 향한 감정이 새카만 집착으로 번져갔다. 자신을 잃을 정도로 그녀를 바라고, 떠올리게 된다. 이걸 굳이 말로 표현해야 한다면.

16553716245989.jpg‘사랑…….’

낯선 단어를 삼키는 순간, 숨이 뜨거워졌다. 에드조프는 결국 그 감정을 깊이 새겼다. 그녀를 사랑한다. 남김없이, 그녀의 전부를 다 가지고 싶기에. 그녀의 팔다리를 꺾어서라도 옆에 둘 수 있다면. 오직 자신을 위해 존재하도록 만들 수 있다면.

16553716245989.jpg‘그게 사랑이라면, 아멜리아. 난 그댈 사랑해. 그러니 너도 다시 날 사랑해야 해.’

죽여서라도 널 가져야겠으니까. 결국 에드조프는 키르케의 그 시커먼 손을 붙잡았다. *** 키르케가 자신의 방이 있는 지하실로 내려갔다. 그곳엔 온갖 술병이 나뒹굴고 있었는데, 바로 이클리트가 찾아 헤매며 단속하던 밀주였다. 그때, 키르케에 눈에 띈 것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피 묻은 흰털이었다. 그녀는 털을 집으며 차갑게 웃었다.

16553716245999.jpg“좀 반항하긴 했지만, 아직은 쓸모가 있으니까. 녀석 덕분에 일이 수월했지.”

달 없는 밤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16553716245999.jpg“다들 내게 고마워해야 해.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죄다 만나게 해줬잖아.”

그녀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제 손을 잡았던 에드조프의 손을 떠올렸다.

16553716245999.jpg“드디어 내 손에 들어왔구나. 이제 시작이야.”

지하실 벽, 낡은 창가에서 황제의 침전이 있는 탑이 보였다. 키르케는 그 탑을 섬뜩한 눈으로 노려보며 읊조렸다.

16553716245999.jpg“아스란, 네놈의 태양은 거짓이야. 내가 그 태양을 완전히 불태워주마. 네 핏줄로 이 제국을 진창으로 만들 거야. 그게 내 복수다. 네놈도 가장 소중한 걸 잃어봐야 해. 그것도 네 손으로! 훗날 자신의 실수에 얼마나 몸부림칠까!”

에드조프를 움직이는데 가장 쓸 만한 건, 클로에 황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멜리아, 그 피오레 가주 계집도 아주 쓸 만해졌다. 이클리트와 에드조프를 동시에 움직이게 만드니까.

16553716245999.jpg“그녀가 두 황자의 약점이구나. 두 황자를 파멸시킬.”

아멜리아를 지하실로 이끈 건 키르케였다. 안개로 길을 열어둔 것도. 봉인된 지하실을 해제시킨 것도. 이 달 없는 밤을 만든 장본인이 그녀였기에. 전부 에드조프를 손에 넣기 위한 함정이었다. 에드조프의 욕망을 광기화 시켜, 자신의 손을 잡도록 유혹해야 했으니까. 지금까지는 순조롭게 다 성공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게 있었다.

16553716245999.jpg‘감정 없는 짐승에 불과한 클리오 대공에게 그 계집이 어떤 존재인지도 알고자 했지만.’

그 지하실에서 흑표범의 사체를 본 키르케의 눈빛은 떨렸었다. 지금도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16553716245999.jpg“목이 꿰뚫렸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검이 꿰뚫었다고 여길 테지만, 아니다. 검에 베였다면, 베인 상처가 깔끔해야 했다. 하지만 무자비하게 파헤쳐진 상처는 절대로 검에 당한 것이 아니었다.

16553716245999.jpg“마치 거대한 새의 발톱이 단숨에 목덜미를 끊어놓은 듯 보였어.”

게다가 끊임없이 자신이 뿌린 안개를 건드리려고 했던 기묘한 힘까지. 피오레 가주에게 엄청난 마나가 있긴 했지만, 그녀가 했다기엔 그 힘은 너무 야만적이고. 클로에 황후도 말이 안 되고.

16553716245999.jpg“분명 수인의 힘에 당한 것 같은데…….”

16553716245999.jpg‘설마, 클리오 대공인가.’

아니, 클리오 대공일 수 없었다. 왜냐면.

16553716245999.jpg“수인이 아니니까. 클리오 대공은, 인간일 텐데…….”

아스란의 진짜 아들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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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동이 벌어지고, 하루 동안 꼬박 아스란은 에리얼과 이번 사태를 수습했다. 특히나 프리메 제국에 이 소식이 전해지지 않도록, 공국에서 온 손님들의 입도 철저히 막았다. 에리얼은 상황을 체크하며 물었다.

1655371635771.jpg“아무래도 무도회를 다시 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대로 황궁의 문을 닫으면 더 수상하게 여길 겁니다.”

16553716357713.jpg“그렇겠지. 하지만 아무 명분 없이 여는 건 더 수상한데.”

1655371635771.jpg“일단 다섯 공작가에서 나서서 무도회 규모를 좀 더 키우는 게…….”

그때, 시종장이 조심스럽게 아스란에게 고개를 숙였다.

1655371635771.jpg“폐하, 피오레 공작가의 집사장이 폐하께 뜻을 전하고자 합니다.”

16553716357713.jpg“피오레 공작가? 뭘 전하고 있지?”

1655371635771.jpg“폐하의 뜻을 전해 받고자 한다고 합니다.”

아스란은 시종장의 말에 날카롭게 웃었다. 그때의 공을 치하하라는 건가. 아주 발 빠르게 움직이는군. 황제의 치하를 받으면, 사교계에서 평판과 명예가 달라진다. 그것은 곧 권력이자, 힘이 된다. 특히나 하룻강아지 가주에겐 이보다 큰 힘은 없을 터. 하지만 이걸 이렇게 쉽게 가져가겠다고?

16553716357713.jpg‘순순히 내줄 수는 없지. 안 그래도 이번 일에 포르티셰 공작의 심기도 불편한 상황이니까.’

아스란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16553716357713.jpg“이번 일은 조용히 수습해야 한다. 그러니 피오레 가주도 이해할 테지. 치하는 따로 하겠다고 전하라.”

조용히 따로 하겠다는 건, 결국 황제의 치하를 공식적으로 하지 않겠다는 것. 그건 큰 의미가 없었다. 그 순간.

16553716386933.jpg“저를 구했다면서요.”

뜻밖의 목소리에 아스란이 굳어졌고, 에리얼과 시종장도 눈을 크게 뜨다가 이내 고개를 조아렸다. 아스란은 긴장된 숨을 삼키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클로에가 태연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16553716357713.jpg“클로에…….”

그녀는 주변의 반응에 의아한 표정을 띠며, 아스란에게 다가갔다.

16553716386933.jpg“소동이 있었다면서요. 그것 때문에 내가 쓰러진 거라고, 쉐리가 그러던데?”

쉐리는 클로에를 모시는 시녀장이었다.

16553716386933.jpg“절 위험에서 구했다면서요. 그럼 당연히 제대로 치하하셔야죠. 그렇지 않으면 제가 뭐가 되는 거죠? 아니면 제가 이 제국에서 그 정도 위치밖에 되지 않는 건가요?”

클로에가 조곤조곤 아스란을 압박했다. 예전과 같은 모습에 에리얼과 시종장의 눈빛이 나직이 가라앉았다.

16553716386933.jpg“이미 끝난 무도회를 아무 명분 없이 다시 여는 것보다는, 폐하의 치하를 성대하게 열어서 폐하의 자애로움을 보이세요. 솔라와 황실을 위한 귀족에게 그만큼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면, 폐하를 향한 충성심도 굳건해지실 거예요.”

클로에는 아스란의 손을 잡고서 엷은 미소를 지었다.

16553716386933.jpg“제가 도울게요, 폐하. 모두가 보는 앞에서 피오레 가주를 제가 치하하겠어요. 쓰러진 제 모습에 귀족들도 많이 놀랐을 테니, 제가 무사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좋지 않겠어요?”

그녀의 미소와 목소리에 아스란은 금방이라도 눈빛이 무너질 듯 흔들렸다. 결국, 한껏 잠긴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16553716357713.jpg“그렇게, 하겠소.”

16553716386933.jpg“감사해요, 폐하.”

16553716357713.jpg“시종장은 피오레의 집사장에게 이 뜻을 그대로 전하라.”

1655371635771.jpg“예, 폐하.”

에리얼은 집사장과 함께 물러났다. 잠시, 두 분 만의 시간이 필요할 테니. 모두가 빠져나가고, 아스란은 최대한 클로에를 자극하지 않으며 말했다.

16553716357713.jpg“그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하오.”

16553716386933.jpg“아니에요, 폐하. 폐하께선 괜찮으신가요? 그런데 제가 많이 위험했나요? 에리얼도 그렇고, 시종장도. 제가 깨어난 모습에 너무 놀라네요. 아까 쉐리도 그랬는데.”

결국 참지 못한 아스란이 클로에를 꽉 끌어안았다.

16553716357713.jpg“아니오.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었소. 아주 잠깐. 잠깐이었소. 그래서 고맙소. 이리 돌아와 줘서…….”

클로에는 그런 아스란의 말에 다시금 웃으며 그를 함께 안아주었다.

16553716386933.jpg“아주 잠깐이었다면서. 그렇게 제 걱정을 하셨나요? 전 괜찮아요, 폐하.”

아주 잠깐. 마치 기적처럼, 그녀가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가 있었다. 물론 그녀는 자신이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는 자각이 없었다. 클로에에겐 찰나에 돌아온 지금의 기억이 현재의 전부였다. 그러니 그녀를 자극해선 안 됐다.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 분명 그녀가 충격받고 상처 입을 테니까.

16553716357713.jpg“그대가 조금은 긴 꿈을 꾸는 듯하여. 그 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까 봐. 그게 조금 두려워서…….”

16553716386933.jpg“그런가요? 그러고 보니, 꿈을 꾼 것 같기도 해요. 몹시 그리웠고, 보고 싶었던 이를 만난 것 같았거든요.”

아스란은 클로에를 안은 손에 힘을 풀지 않은 채, 영원히. 아니면 조금 더 길게, 이 순간을 음미하고 싶었다. ***

16553716415695.jpg“당장 오늘 밤, 공작 각하의 공을 황후 폐하께서 크게 치하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케이트의 말에 아멜리아는 솔직히 조금 놀랐다. 사실 크게 기대하진 않았다. 이번 일을 조용히 처리한다는 명분으로, 폐하의 치하도 공식적으로 하진 않을 거로 생각했다. 그래서 명예까진 챙기지 못해도, 라니와의 약조만큼은 챙기려고 했는데. 대대적인 무도회와 더불어.

16553716415701.jpg“황후 폐하께서 직접?”

16553716415695.jpg“예.”

아멜리아는 크게 놀란 티를 내지 않았다. 황후께 병환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건, 다섯 공작가와 몇몇 측근들뿐이었으니까.

16553716415701.jpg‘그래도 이따금 정신이 돌아오시는 거구나.’

그건 다행이었다. 케이트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16553716415695.jpg“몹시 중요한 자리입니다. 가주께서 처음으로 피오레의 명예와 긍지를 하나 올리시는 일이 되니까요.”

16553716415701.jpg“그렇지. 그것도 이렇게 크게 치하해주시니.”

16553716443489.jpg“그 중요한 자리에 마땅한 드레스가 없어요! 바로 오늘 저녁이라니! 시간이 너무 없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마미가 울상을 지었다. 물론 무도회를 위해 준비한 다른 드레스가 있었으나, 이런 중요한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다. 대회의에서 입었던 드레스를 또 입을 수도 없었고. 그때,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클리트가 의연한 어조로 말했다.

16553716443493.jpg“결혼식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드레스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인은 그저 그 자체로 빛날 테니까.”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의 말에 엷은 미소를 그렸다.

16553716415701.jpg“대공 전하의 말씀이 맞아요. 피오레 가주로서 서는 자리이니만큼, 그 자리에 맞는 것으로 준비하죠.”

16553716443489.jpg“하, 하지만!”

마미는 당황했으나, 케이트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16553716415695.jpg“가주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아멜리아는 케이트의 모습에 살짝 놀랐다. 결혼식 때는 그렇게 반대했는데, 지금은 조금씩 자신을 존중해주는 듯했다. *** 사건이 벌어진 지 고작 하루. 하지만 무도회 홀이 순식간에 정리되고, 그런 일이 언제 벌어 졌냐는 듯, 귀족들이 홀에 모여 있었다. 아멜리아 역시 이클리트와 함께 홀 앞에 섰다. 그때와 다른 건, 지금 저 홀에서의 주인공은 오롯이 그녀였다. 아멜리아는 드레스가 아닌 블러드 아이리스를 상징하는 머스켓티어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이번 사건에서 묵묵히 제 할 일을 다 해준 티어들과 함께하겠다는 의미로 선택한 것이었다. 이번 사건을 빠르게 수습할 수 있었던 것은 티어들의 역할이 컸으니까.

16553716415701.jpg‘나 혼자 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절대.’

이클리트는 변함없이 그녀를 응원하며 손을 마주 잡았다.

16553716415701.jpg“대공 전하와 비슷한 옷을 입고 서니까, 기분이 남다르네요.”

16553716443493.jpg“어떻게 다른 겁니까?”

아멜리아는 조금 부끄러운 생각을 수줍게 속삭였다.

16553716415701.jpg“지금 저 자리에 우리 둘만 같은 걸음을 걷고, 비슷한 걸 가지고 있는 거니까. 뭔가 특별하게 느껴져서.”

아멜리아는 이 분위기를 핑계 삼아, 떨리는 입술을 살포시 열었다.

16553716415701.jpg“설레고, 좋아요.”

뜻밖의 말이 이클리트의 심장은 뜨겁게 두드렸다. 그는 조금 더 세게 그녀의 손을 잡고서 나직이 속삭였다.

16553716443493.jpg“부인의 특별한 순간을 오롯이 독차지할 수 있어서.”

16553716415701.jpg“…….”

16553716443493.jpg“저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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