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선물을 받다 (61/199)

61화. 선물을 받다2021.08.02.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와 나란히 걸어가다가, 그녀 혼자 아스란 앞에 섰다. 귀족들 모두가 숨죽인 채 그녀를 지켜보았다. 처음 황궁에 도착했을 때, 귀족들이 그녀를 대하던 태도와 지금을 비교하면 판이하였다. 멀리서 이사나가 다른 티어들과 이 모습을 지켜보았다. 티어들은 아멜리아가 블러드 아이리스의 제복을 입을 줄 몰랐기에, 신기한 듯 눈을 크게 떴다.

16553716558867.jpg“우리 가주님, 제복 입은 모습도 근사하시네요.”

16553716558867.jpg“이야. 저택에 있는 티어들이 엄청 부러워하겠는데?”

16553716558867.jpg“당연하지.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우리가 함께하고 있는 건 엄청난 행운이라고.”

16553716558867.jpg“포르티셰 칼잡이 놈들, 아주 배알이 꼬이다 못해 터지겠네. 매번 은근슬쩍 우릴 무시했었는데 말이야.”

16553716558867.jpg“그러게. 이번에 벌벌 떨면서 아무것도 못 했잖아.”

16553716558867.jpg“우리도 가주님 없었으면 아무것도 못 했겠지. 역시, 주인을 잘 만나야 해.”

16553716558867.jpg“끝나고 거하게 한잔해야겠어. 아주 술맛 끝내주겠다고!”

이사나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역시나 사탕을 입에 물고서 티어들과는 다른 시선으로 아멜리아를 응시했다. 그녀의 낯빛을 살피고, 상처 입었다는 어깨도 보게 되었다.

16553716558902.jpg“다치셨다더니, 괜찮아 보이시네.”

그제야 안도하는 시선 끝에 제복을 입은 모습이 보였다.

16553716558902.jpg“뭘 입어도 근사하시고.”

  무릎 꿇고 있는 아멜리아의 앞으로 아스란을 대신해서 클로에가 다가왔다. 이런 자리에 너무 오랜만에 나타난 클로에는 지하실에서 만났 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고 우아했다. 보기엔 아무런 무늬 없이 평범한 드레스였지만, 황금을 실로 자아내어 움직일 때마다 물결치는 드레스의 자태는 그저 보는 것만으로 감탄을 자아냈다. 게다가 세월의 흐름을 비껴가는 듯, 변함없이 아름다운 클로에의 자태에 신비로움마저 느끼게 했다. 사실, 클로에가 이런 자리에 얼굴을 보인 적이 너무 오랜만인지라, 항간에는 황후에게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냐는 소문도 돌았다. 하지만 오늘 직접 눈으로 그녀의 무사함을 확인한 귀족들은 역시 헛소문이었구나, 하며 안도했다. 클로에는 손을 뻗어, 아멜리아의 턱 끝을 올려 시선을 마주하도록 했다. 아멜리아는 클로에의 푸른 눈동자를 올곧게 바라보았다.

1655371655891.jpg“이번에 피오레 가문이 아주 큰 공을 세웠다. 항상 제국을 위해 일해주어 고맙다. 그 경의를 표한다.”

그녀는 아멜리아에게 황족의 색인 황금 비단을 직접 하사했다. 아멜리아는 모두가 제대로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16553716587765.jpg“폐하께서 주시는 치하를 영광스럽게 받겠나이다. 이 영광이 결코 빛을 바라지 않도록, 앞으로도 더욱 솔라를 위해 충성의 총성이 끊이질 않게 하겠나이다.”

클로에는 아멜리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목에 비단을 둘러주었다. 조금은 서늘한 비단의 감촉에 목에 닿은 순간.

1655371655891.jpg“고마워요. 그리고 조금 더 곁에서 버텨줘요.”

뜻밖의 말에 아멜리아가 눈을 크게 떴으나, 클로에는 그런 말 한 적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이마에 나직이 입을 맞췄다.

16553716587765.jpg‘뭐지? 내가 잘못 들었나?’

클로에가 돌아서고, 아스란이 마지막으로 아멜리아에게 물었다.

16553716587778.jpg“피오레 공이 원하는 것을 말하라. 공을 세웠으니, 그에 합당한 상을 내릴 것이다.”

16553716587765.jpg“제가 원하는 건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오는 말에 아스란은 서늘한 미소를 그렸다.

16553716587778.jpg“과연. 체자렛 백작을 닮아서 똑똑하군. 백작도 한때 짐의 곁에서 그 좋은 머리를 써주었지.”

아멜리아는 갑자기 아버지의 이름이 나오자 의아해졌다.

16553716587765.jpg‘뭐지. 아버지가 폐하의 곁에서 일하신 적이 있었나?’

16553716587778.jpg“좋다. 피오레 공에게 새로운 영지를 하사하겠다. 그 영지를 활용하는 건, 공의 몫이다. 공이 원하는 재물로 채우도록 하라.”

아스란은 알렉드라가 기분 나빠하지 않도록, 루베르를 재물이라고 돌려서 표현했다. 아멜리아는 그 표현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 이 정도에서 물러섰다.

16553716587765.jpg“폐하의 뜻을 감사히 받겠습니다.”

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는 알렉드라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그 역시 이번 일을 수습하기 위해 기사들을 풀었다. 하지만 안개 때문에 기사들의 큰 활약은 없었다. 그 사이에 티어가 움직이고, 저 계집이 황후를 구했다니.

16553716587817.jpg‘또 그까짓 하찮은 재주로!’

  아멜리아를 향해 귀족들이 전부 고개를 숙이며, 이번 일을 축하했다. 이제 그녀를 향한 귀족들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황제와 황후의 치하를 받은 최연소 가주가 되었으니까. 이클리트가 그녀에게 다가와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아멜리아의 위상이 높아질수록, 남편이자 황자이며 차기 황위 계승자인 이클리트의 위상도 달라진다. 벌써 귀족들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계산적으로 눈을 빛냈다. 독보적이었던 바스티얀 대공의 세력에 어쩌면 균열이 생길지도 모르니 말이다. 아멜리아를 에스코트하면서, 이클리트는 자신도 모르게 클로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클로에는 그저 무심하게 이클리트를 외면했다. 그 시선에 이클리트는 어쩐지 심장이 저릿했으나, 찰나였다.

16553716616865.jpg‘역시.’

굳이 서운하지도, 아플 일도 아니었다. 이게 당연한 거니까. 그저.

16553716616865.jpg‘많이 아프신 게 아니라면, 그게 다행일 뿐.’

16553716587765.jpg“대공 전하?”

아멜리아가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자, 이클리트는 곧장 웃으며 더욱 그녀의 곁으로 파고들었다.

16553716616865.jpg‘됐어. 다른 건 상관없어. 내 옆에, 그녀만 있으면 돼.’

그렇게 두 사람이 다정하게 손을 잡은 채로, 걸음을 내디뎠다. 누가 봐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부부였다. 클로에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곁눈질로 지켜보다가, 자꾸만 숨이 가빠지면서 떨리는 손을 꼭 붙잡고서 등을 보였다. 그 모습에 아스란의 표정이 굳어지며 가까이 다가섰다.

16553716587778.jpg“무슨 일이오?”

1655371655891.jpg“조금, 피곤해서. 아직 제 몸이 다 낫지 않았나 봐요.”

16553716587778.jpg“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아스란이 손짓하자, 쉐리와 시종장이 다가왔다. 아스란은 귀족들에게 마지막 무도회를 마음껏 즐기라는 말과 함께 클로에와 홀을 빠져나갔다. 황제와 황후가 사라지니, 이 무도회의 주인공은 저절로 아멜리아와 이클리트가 되었다. 어떻게든 이번 기회에 눈도장을 찍어보려는 귀족들이 서로 눈치를 살피며 가까이 다가가려는 순간, 아멜리아는 알렉드라에게 다가갔다. 이클리트는 경계하는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고, 아멜리아는 태연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16553716587765.jpg“포르티셰 공. 조만간 마차를 성대하게 보낼 겁니다. 그러니 이제 내 영지령 사람들에게 함부로 손대지 마세요.”

16553716587817.jpg“뭐라고?”

16553716587765.jpg“내 영지령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멜리아는 웃으며 차갑게 경고했다. 더는 알렉드라가 라니와 소냐를 비롯해서, 그곳에 사는 루베르와 마을 사람들에게 함부로 하는 모습은 용납할 수 없었다. 알렉드라는 차마 목소리를 높이지 못한 채, 한껏 일그러진 어조로 읊조렸다.

16553716587817.jpg“이번엔 고작 그런 잔재주로 운 좋게 이겼을지 몰라도,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16553716587765.jpg“당연하죠. 고작 이 정도로 만족하지 않을 겁니다. 루베르도 솔라 제국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그 정도는 해야 만족할 수 있죠.”

16553716587817.jpg“네까짓 게 무슨 힘으로!”

16553716587765.jpg“그까짓 게 결국엔 이 무도회의 주인공이 됐잖아요? 가만히 있으면 아무도 모릅니다. 포르티셰 공의 기사들도 가만히 있어서, 있는 줄도 모르지 않았습니까.”

16553716587817.jpg“이 건방진!”

그때, 아멜리아의 곁으로 피오레의 티어들이 위협적으로 섰다. 어젯밤, 자신들의 주인을 모욕했던 알렉드라에게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경고였다. 더는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주인에게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경고. 알렉드라는 그 모습에 이를 갈았다. 아멜리아는 그런 그를 보며 싱긋 웃었다.  

1655371664396.jpg

  그리고 일부러 다른 귀족들이 들을 수 있게 목소리를 높였다.

16553716587765.jpg“어머, 포르티세 공께서도 저를 이렇게 축하해주실 줄 몰랐는데. 너무 감사합니다.”

몹시 기뻐하는 아멜리아의 목소리에 귀족들이 전부 그쪽을 주시했다. 알렉드라는 앙큼한 짓을 벌이는 그녀를 노려보았으나, 황제의 치하를 받은 그녀를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무시할 수 없었기에, 슬쩍 고개 숙여 예를 다했다.

16553716587817.jpg“참으로 축하드립니다, 피오레 공. 부디 오늘의 영광이 빛을 잃지 않기를. 아주 사소한 흠에도 무너질 수 있는 것이 영광이니.”

16553716587765.jpg“우려하고 걱정해주는 그 마음, 감사합니다, 포르티셰 공.”

루시아는 알렉드라를 제대로 한 방 먹이는 아멜리아의 모습에 통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16553716643975.jpg“세상에. 얌전한 레이디가 벌집을 건드리나, 싶었는데. 아주 멋지게 꽃밭을 쟁취했네.”

애초에 알렉드라가 에드조프를 앞세워, 이번 대회의와 더불어 무도회까지 주인공으로 군림하나, 싶었더니. 마지막에 활짝 꽃을 피우고 주인공이 된 것은 아멜리아와 이클리트였다. 아마 오늘 일은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 퍼질 것이다. 제국민들이 즐겨 읽는 신문에도 실릴 것이고. 헤이츨은 옆에서 이 모든 일을 기록하고 있었다. 현자의 가문인 카르티아 공작가의 가장 중요한 소임이 바로 솔라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었다. 루시아는 이 재미난 구경을 아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묵묵히 기록해가는 헤이츨을 보며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16553716643975.jpg“그래도 오늘은 제법 쓰는 맛이 있겠네요.”

헤이츨은 루시아를 쳐다보지도 않으며 딱딱하게 말했다.

16553716675948.jpg“역사를 기록하는 명예로운 순간입니다. 그런 저속한 표현은 불쾌합니다.”

16553716643975.jpg“그런가? 명예로운 순간인 건가? 확실히, 중요할지도 모르겠네.”

루시아는 비어 있는 황좌를 바라보며 살 떨리는 얘기를 속삭였다.

16553716643975.jpg“오늘이 새로운 역사의 시작일지도 모르지. 태양은 지고 있고, 밤이 오는 건 막을 수 없고. 단 하나의 영광만이 빛나야 할 테니. 과연 누구의 영광이 오래가려나.”

밤을 거둬내고, 오랫동안 영광스러울 수 있는 자리는 단 하나. 솔라의 황제뿐. 헤이츨은 다소 섬뜩한 말에 멈칫했으나, 이내 태연하게 오늘의 사실만을 기록하고 또 기록했다. 훗날의 일은 아직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 아스란은 그녀가 언제 또 제정신이 아닐지 모르기에, 그녀 옆에 있고 싶었지만 공국으로 돌아가는 손님들과 독대해야 했기에, 그저 기도하는 마음으로 클로에를 황후궁으로 보냈다. 홀로 남겨진 클로에의 표정은 복잡 미묘했다. 그때, 기척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리면서 에드조프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16553716675959.jpg“어마마마!”

클로에는 순간 멈칫했으나, 천천히 그를 안아주었다.

1655371655891.jpg“에드. 무슨 일이니? 오늘 무도회엔 왜 안 왔어?”

에드조프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그녀의 목소리에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16553716675959.jpg“어마마마와 단둘이 보고 싶어서요.”

1655371655891.jpg“어리광도 참. 역시 내가 너무 오래 쓰러져 있었나 봐.”

16553716675959.jpg“너무 오래요. 그래서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1655371655891.jpg“지나가다니?”

에드조프는 클로에를 안은 손에 여전히 힘을 풀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16553716675959.jpg“제 생일이었어요. 항상 케이크 만들어주셨잖아요. 다시 먹고 싶어요. 이번엔 소중하게 먹을 겁니다. 그리고 보여드리고 싶은 여인도 있어요. 어마마마와 닮았는데, 닮았다는 걸 이제야 알았어요.”

주절주절 말을 이어가던 에드조프는 일순, 자신을 다독이던 클로에의 손길이 멈추자 심장이 싸해졌다. 그리고 곧장 클로에가 에드조프를 밀치면서 악을 질렀다.

1655371655891.jpg“너, 넌 누구야. 넌 아니야. 네가 아니야. 나가. 나가! 데려와! 데려오란 말이야!”

클로에의 비명에, 쉐리가 들어와서는 클로에를 붙들며, 에드조프에게 말했다.

16553716558867.jpg“대공 전하,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황후 폐하께서…….”

하지만 에드조프는 쉐리를 무시한 채, 악을 쓰는 클로에의 양어깨를 거세게 붙잡았다.

16553716675959.jpg“어마마마!”

클로에는 여전히 길길이 날뛰며 에드조프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그럴수록, 에드조프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16553716558867.jpg“대공 전하!”

쉐리가 말렸으나, 에드조프는 섬뜩할 정도로 클로에를 응시하며 속삭였다.

16553716675959.jpg“저예요. 저밖에 없어요. 어머니의 아들은 오직 저뿐입니다. 어머니도 그리고 아멜리아도 제가 가질 겁니다. 전부 다 내 것이니까. 이클리트, 그 짐승에겐 절대로 안 빼앗겨!”

이클리트라는 이름 하나에 클로에가 멈칫했다. 에드조프는 그 모습을 애써 무시하며, 하얗게 질린 그녀의 뺨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마치 자신의 흔적을 새기듯이.

16553716675959.jpg“영원히 제 곁에 있으세요, 어마마마.”

지금쯤 아멜리아, 그녀에게도 이번엔 결코 버릴 수 없는 자신의 선물이 안겨지고 있을 것이다.

16553716675959.jpg‘날 거부할 수 없을 거야, 아멜리아. 끝도 없이 너에게 쏟아낼 테니까. 나의 사랑을.’

  *** 황실의 마지막 무도회가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비록 포르티셰 공작과 헤스틴, 카르티아 공작은 자리를 비웠지만 사실 이번 무도회의 주인공은 아멜리아였기에, 모든 이목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끊임없이 쏟아지는 인사를 받았고, 곁에 선 이클리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 그래도 싫어하는 무도회인데. 모든 귀족에게 억지 미소라도 지어주고 있으려니, 죽을 맛이었다. 한 걸음 뒤에서 이사나와 카마리가 호위를 명목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굳어져 가는 그들의 표정이 재미있었다. 특히 이사나의 시선이 이클리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몹시 고소하다는 눈빛으로.

16553716558902.jpg“아이고, 대공 전하. 죽고 계시네, 죽고 계셔. 전장의 흑사자께서 인사하다가 지쳐서 죽는다니.”

165537167049.jpg“저렇게 수많은 사람의 관심은 처음이라서 그러실 겁니다.”

카마리의 말에 이사나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16553716558902.jpg“처음이라고요?”

165537167049.jpg“보통은 적의 가득한 적들이고, 시체였으니까요.”

16553716558902.jpg“부하들이 함께하지 않나요? 티어들은 따로 싸워도, 기사들은 다를 텐데.”

165537167049.jpg“함께 계시지 않았습니다. 전쟁에서 대공 전하는 항상 혼자였어요.”

순간, 카마리의 목소리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165537167049.jpg“모두 대공 전하를 노리니까. 곁에 누군가를 두면, 죽을 수도 있으니. 대공 전하 혼자 전부 감당한 거죠.”

16553716558902.jpg“소름 돋게 무서운 방식이네요.”

165537167049.jpg“나름대로 지켜주시는 애정이라 생각합니다.”

그때, 당혹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홀 안으로 제비꽃다발을 품에 안은 시녀들이 줄줄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평범한 꽃다발도 아니었다. 압도적으로 거대한 꽃다발을 시녀 두 명이 안은 채, 끝도 없는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홀 안으로 제비꽃 향기만이 날릴 만큼 엄청났다. 그런데 이 어마어마한 꽃다발이 전부 아멜리아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이사나는 몹시 불길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16553716558902.jpg“하, 이거 또 일이 생기네.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다니까.”

  *** 아멜리아는 발 디딜 틈도 없이 제 주변으로 쏟아지는 제비꽃다발을 싸늘한 시선으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16553716587765.jpg“이게 대체 뭐지?”

시녀는 그녀에게 고개 숙이며 말했다.

16553716558867.jpg“황후 폐하를 구해주신 일이 감사하다며, 바스티얀 대공 전하께서 보냈습니다. 제비꽃을 좋아하시니, 여길 가득 제비꽃으로 채워주시겠다는 대공 전하의 뜻입니다.”

16553716587765.jpg“하…….”

아멜리아는 너무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때 짓밟았더니, 이젠 아예 짓밟지도 못하게 하겠다는 건가? 이 넓은 홀 안을 가득 채우겠다고? 상황을 모르는 귀족들은 바스티얀 대공의 선물이라는 말에 특히나 귀부인들의 표정이 부러움으로 환해졌다.

16553716558867.jpg“세상에. 역시 바스티얀 대공 전하시네요. 너무 낭만적이고, 로맨틱하세요.”

16553716558867.jpg“황후 폐하를 구했으니, 은인이겠죠.”

16553716558867.jpg“피오레 공작 각하와는 체자렛 백작가와 교류도 있었으니까. 친분도 있으실 테고.”

16553716558867.jpg“너무 부러워요!”

로맨틱? 이게 무슨 로맨틱인가. 원하지도 않는 선물을 억지로 손에 쥐여주다 못해, 강압적이기까지 하는데.

16553716587765.jpg‘이건 선물이 아니야. 또 내게 명령하는 거야. 이 수많은 시선 앞에서 구경거리가 되어 선물을 받으라고.’

감히, 또다시 거부할 생각하지 말라고. 한껏 분노를 누르고 있는 아멜리아에게 이클리트가 덤덤한 어조로 짧게 읊조렸다.

16553716616865.jpg“그냥 이 무도회를 끝낼까요?”

16553716587765.jpg“네?”

16553716616865.jpg“어차피 받을 건 다 받았고. 부인도 피곤하시죠?”

덤덤하게 들리는 그의 어조가 점점 섬뜩하게 귓가에 닿았다.

16553716616865.jpg“괜한 쓰레기까지 상대할 필요는 없잖아요.”

16553716587765.jpg“대공 전하?”

16553716616865.jpg“……이 쓰레기가 당신에게 묻는 게 싫어.”

순간, 어디선가 서서히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아멜리아는 뭔가 불길한 느낌에 그를 붙잡으려고 했다.

16553716587765.jpg“대공 전하, 잠깐…….”

  쿵-! 갑자기 홀의 문이 폭풍 같은 바람에 부서지면서 제비꽃이 전부 엉망으로 휘날려 사라졌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빛 또한 사라졌다.  

16553716791181.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