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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검은 새의 그림자 (62/199)

62화. 검은 새의 그림자2021.08.06.

엄청난 굉음과 함께 사방의 빛이 꺼지면서 암흑 속에 잠겼다. 귀족들은 설마 또다시 짐승들이 나타난 건가, 두려움에 떨었다.

16553716864096.jpg“가, 갑자기 무슨 일이지?”

16553716864096.jpg“태풍이 부는 건가?”

16553716864096.jpg“이렇게 갑자기?”

귓가에 울릴 정도로 바람 소리가 사방을 찢고 있었다. 그 칼날 같은 바람 앞에, 이미 제비꽃은 엉망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멜리아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제 앞에 있는 이클리트를 바라보았다. 주변이 어두운 건 그녀에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상하게 그의 모습만큼은 아주 또렷하게 보이고 있었으니까. 주변의 웅성거림도, 날카로운 바람 소리도 그녀에게 닿지 못했다. 아멜리아는 오직 이클리트만을 바라본 채, 상체가 들썩일 정도로 떨리는 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클리트는 그런 아멜리아를 가만히 바라보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16553716864117.jpg“무도회는 끝났어요. 이제 괜찮아요, 부인.”

분명 평소와 같은 그의 목소리인데. 자신에게 손을 뻗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꿈에서 본 그 장면이 겹쳐 보였다. 거대한 검은 날개. 붉고 붉은 눈동자를 가졌던. 그 무섭고도 슬펐던 존재.

16553716864121.jpg‘아니야. 절대, 절대 아니야.’

아멜리아는 그 잔상을 지워내며, 곧장 이클리트의 손을 꽉 붙들었다. 마치 놓치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그와 동시에 홀 안으로 다시금 빛이 들어왔다. 귀족들은 별다른 문제 없이 돌아온 모습에 안도했으나, 제비꽃이 엉망이 된 모습에 움찔했다.

16553716864096.jpg“어머, 저걸 어째.”

16553716864096.jpg“바스티얀 대공 전하의 선물이…….”

16553716864096.jpg“아무래도 정말 태풍이 불었나 봐요.”

제비꽃을 가져온 시녀들은 몹시 난감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이클리트는 어수선한 주변을 향해 대공으로서 목소리를 높였다.

16553716864117.jpg“날씨가 심상치 않은 듯하니, 큰 폭풍이 치기 전, 무도회는 여기서 끝내도록 하겠다. 그대들도 무사히 돌아가도록.”

귀족들은 이클리트와 아멜리아를 향해 마지막으로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이클리트는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속삭였다.

16553716864117.jpg“돌아갈까요?”

16553716864121.jpg“……네.”

이클리트는 조금 앞서서 걸었고, 아멜리아는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의 발길 아래 제비꽃이 다시금 엉망으로 짓밟혔다. 그녀는 평소와 너무나도 똑같은 이클리트를 보면서, 자꾸 비집고 들어오는 불길한 생각을 누르고 또 눌렀다.

16553716864121.jpg‘그래. 아니야. 내가 전부 잘못 본 거야. 아니, 난 아무것도 못 본 거야.’

  이클리트와 아멜리아가 움직이자, 티어들이 그들을 호위하기 위해 따라나섰다. 카마리는 이사나와 함께 홀에 남아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비했다. 갑자기 태풍이라니, 너무 이상했으니까.

16553716892959.jpg“조금 전까지 엄청 예쁜 꽃이었는데, 저렇게 짓밟히니 아주 엉망이네요.”

16553716892962.jpg“작정하고 엉망으로 만든 거니까요.”

카마리의 말에 이사나는 나직한 어조로 속삭였다.

16553716892962.jpg“게다가 그때와 비슷하네요.”

16553716892959.jpg“그때라니요?”

되묻던 카마리가 멈칫했다. 그때, 밀주의 행방을 쫓아서 여관을 덮쳤던 날. 그날도 갑자기 폭풍 같은 바람이 휘몰아쳤었으니까.

16553716892962.jpg“그때도 갑자기 마른하늘에 낙뢰가 치고, 난리가 나더니. 어쩐지 대공 전하의 심기가 불편해지면, 하늘이 그 분노를 대신해주는 기분이네요.”

16553716892959.jpg“설마요. 대공 전하께서 신도 아니고.”

16553716892962.jpg“그러니까. 이런 우연이 왜 계속 대공 전하께만 일어날까요. 그분이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날씨도 도왔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16553716892959.jpg“우연입니다.”

16553716892962.jpg“나도 우연히 또 난 비슷한 걸 본 것 같아서.”

16553716892959.jpg“비슷한 거라니?”

이사나는 이클리트가 있던 자리를 싸늘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그날, 그 어둠 속에서도 말도 안 되는 걸 보았었다. 이사나에겐 익숙하긴 했으나, 결코 보아선 안 되는 것.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나 보였다.

16553716892962.jpg“검은 새.”

  *** 이클리트는 아멜리아를 침실로 데려다주었다.

16553716864117.jpg“피곤할 텐데, 쉬고 있어요. 마미를 불러줄게요.”

그리고 그가 돌아서려고 하자, 아멜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다급하게 그를 붙들었다.

16553716864121.jpg“대공 전하!”

이클리트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16553716864117.jpg“할 얘기가 있으신가요?”

16553716864121.jpg“어디 가세요? 그러니까, 같이. 같이 쉬는 거 아니에요?”

이클리트는 안온한 눈빛으로 그녀를 다독였다.

16553716864117.jpg“잠시 만나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은 따로 침실을 쓰도록 하죠. 하루 정도 떨어져 있어도,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푹 쉬도록 해요. 상처가 아직 완전히 나은 건 아닐 테니까.”

평소와 똑같이. 아니, 평소보다 더 다정한 그의 모습에 아멜리아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돌아서는 이클리트에게서 그녀는 눈을 떼지 못했다. 이상하게,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16553716864121.jpg‘대공 전하. 정말 당신은 누구예요? 정말, 누구인 거예요?’

설마 꿈속의 그 검은 새가. 당신이에요? *** 아멜리아 앞에 그토록 다정했던 그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오히려 넘치는 이 분노를 누르고, 감추기 위해 더 다정하게 웃었고, 더 따뜻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걱정할 테니까. 아니, 무서워할 테니까. 지금도 그녀가 염려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이클리트는 이대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 복도를 내딛는 그의 걸음이 점점 빨라지다 못해, 거의 날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온갖 감정이 폭발할 듯 뒤엉킨 채 당도한 곳은 에드조프의 궁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이클리트의 모습에 시녀장이 파리한 표정으로 앞을 막았다.

16553716864096.jpg“클리오 대공 전하, 여긴 어떻게…….”

16553716864117.jpg“다치게 하기 싫으니 비켜라.”

흉포하기까지 한 그의 기세에 시녀장이 떨면서 물러섰다. 이클리트는 거칠게 문을 열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에드조프가 소란스러운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가 이클리트를 보곤 가볍게 미소를 그렸다.

16553716951156.jpg“이젠 예법 따윈 땅바닥에 줬나 보군. 하긴, 짐승 따위가 인간의 예법을 이해하긴 어렵나?”

16553716864117.jpg“…….”

16553716951156.jpg“무도회는 끝났나 보군. 갑자기 태풍이라니. 제비꽃이 엉망이 됐다는 얘기는 들었어. 아무래도 다시 보내야겠군. 아예 그녀가 황궁을 나서는 길 곳곳에 제비꽃을 뿌려줄까? 고작 꽃다발은 약했어. 그렇지?”

이클리트는 주먹 끝에 마지막 인내를 담아 힘을 주며, 경직된 턱을 들썩였다.

16553716864117.jpg“뭐 하시는 겁니까.”

16553716951156.jpg“선물이지.”

16553716864117.jpg“그러니까, 형님이 왜?”

16553716951156.jpg“어마마마를 지켜줬잖아. 그러니 그 보답으로 그녀가 좋아하는 제비꽃을 보냈지.”

그때, 이클리트가 순식간에 에드조프의 어깨를 거칠게 붙잡으며 읊조렸다.

16553716864117.jpg“헛소리하지 말고, 대체 뭐 하는 거야.”

그의 손톱이 마치 칼날처럼 그의 어깨를 파고들며, 눌렀던 분노를 터트렸다.

16553716864117.jpg“형님이 그녀를 배신한 겁니다. 형님이 그녀에게 상처 준 겁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대체 뭐 하는 거야!”

서슬 퍼렇게 파고드는 이클리트의 감정 앞에, 에드조프는 예리한 미소를 그렸다.

16553716951156.jpg“그래, 내가 상처 줬지. 내 것이었으니까. 나만이 그녀를 가장 아프게 할 수 있었어. 그래서 이제 다시 그 상처를 어루만져주려는 거야. 그 또한 나밖에 할 수 없으니까.”

16553716864117.jpg“…….”

16553716951156.jpg“이 황궁은 결국 내 것이 될 거다. 여기서 숨 쉴 그녀 또한 내 것이어야 마땅하고.”

에드조프의 눈빛엔 이젠 숨기지도 않는 그녀를 향한 욕망이. 그 더러운 욕망이 눅진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가까스로 힘을 누르고 있던 이클리트는 밀려든 에드조프의 본색 앞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이클리트가 짧게 속삭였다.

16553716864117.jpg“내 것이다.”

일순, 공기가 차갑게 메말랐다.

16553716864117.jpg“그분은 내 것이고, 나도 그분의 것이다.”

더 이상 서로 숨기는 것 없이. 아멜리아를 향한 가장 순수하고, 뜨거운 집착이 날 것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에드조프는 그런 이클리트를 보며 건조하게 속삭였다.

16553716951156.jpg“네까짓 놈의 냄새를 묻히지 마.”

16553716864117.jpg“내 냄새가 묻은 게 아니라, 내게 그분의 냄새가 묻은 거야. 처음 그 순간부터, 나는 아멜리아. 그분의 것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어.”

절대로 드러내선 안 되었던 그의 감정이, 결국 완벽했던 통제를 넘어 잔뜩 쏟아져 나왔다.

16553716864117.jpg“내 세상을 그분이 만들었으니까. 내가 지금 살아있는 단 하나의 이유가 그분이니까. 마지막 그 순간까지, 내 하찮은 목숨은 오직 그분을 위해 살면서 복종해야 하니까!”

이클리트가 소매 끝에 숨겼던 단검을 꺼내 에드조프의 목에 겨눴다. 얼마나 날이 날카로운지, 그의 목에 닿자마자 차가운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에드조프는 자신도 모르게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토록 광기 어린 감정을 토해냄에도 불구하고, 이클리트의 눈동자는 두려울 정도로 냉정했다. 복잡할 것 없이, 단 하나의 진심만이 선명했으니까.

16553716951156.jpg‘날 죽이고 싶다는, 아주 순수한 살기.’

이클리트는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고, 내뱉고 싶지도 않았던 말을 잔뜩 입술에 짓눌렀다.

16553716864117.jpg“지금이라도 감히, 다른 마음 품지 마. 애초에 이용하고자 했으면서, 감히 진심이 되지 마. 그럴 자격 없어. 그렇게 되면,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에드조프는 입꼬리를 차갑게 올렸다. 고작 이런 협박에 물러설 생각이었다면, 그 여자의 더러운 손을 잡지도 않았을 거다. 그 역시 전부를 걸고 가볼 생각이었으니까.

16553716951156.jpg“그녀는 죽어도 반드시 내 곁에서 죽게 될 거다. 내가 가지지 못하면, 아무도 가지지 못해.”

포기하지 않겠다는 말.

16553716864117.jpg“그렇다면 그녀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형님을. 아니 네놈을 죽일 거다. 이 생을 전부 걸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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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드조프의 목덜미가 더 깊이 베이는 소리가 들렸다.

16553716951156.jpg“그래서 지금 죽이겠다고?”

16553716864117.jpg“이렇게 쉽게 죽일 순 없지. 그녀가 황후가 되어 방아쇠를 당기면, 그 차가운 총구 아래 떨어진 네 목을 내가 또다시 꿰뚫고 말 거다.”

이클리트는 이대로 끊어버리고 싶은 걸 꾹 참고서, 단검을 떼어냈다. 하지만 그런데도 피가 쉼 없이 에드조프의 하얀 목을 타고 흘렀다.

16553716864117.jpg“황제가 되어서. 황제로서, 네놈의 피를 짓밟을 것이다.”

이클리트가 돌아섰다. 그가 그어놓은 이 피를 시작으로, 그들은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는 것이다. 사방에서 죄이던 공기가 그제야 느슨하게 풀렸다. 태연하게 서 있던 에드조프는 제 목을 감쌌다. 그런데 제법 깊었던 그의 상처가 아물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에 닿은 감촉에 움찔했다. 얼핏, 단단한 피부가 만져졌고 에드조프는 이를 악물며 단추를 목 끝까지 채워버렸다. 에드조프는 일렁이는 시선으로 하늘을 응시했다. 진짜 달 없는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 역시 이젠 물러설 곳이 없었다.

16553716951156.jpg“황제가 될 거다. 반드시 황제가 되어, 내가 진짜가 될 거야.”

  침실을 빠져나와 걸어가는 이클리트의 표정은 무서우리만큼 침착했다. 하지만 이미 그의 안에선 채 삼키지 못한 증오가 꿈틀거렸다. 에드조프가 그녀를 또다시 욕심낸다는 사실이 끔찍해서. 그가 그녀를 또다시 상처 입히게 할 순 없었다. 걸어가던 그의 걸음이 처음으로 선황제들의 초상화가 있는 곳에 멈췄다. 단 한 번도 욕심낸 적 없었다. 이 제국 자체가 그에겐 감옥이었기에. 그저 빨리 죽음으로서 이 제국에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하지만.

16553716864117.jpg“황제가 될 것이다.”

이 제국을 가져, 그녀를 지킬 것이다. 만약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면.

16553716864117.jpg“전부를 가져야지.”

온 세상을, 그녀의 발아래 두게 할 것이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붉은 그림자가 싸늘하게 드리워졌다. 어둠을 만드는 거대한 검은 날개가 폭풍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아래 심장이 고요하게. 더없이 깊고 고요한 심연 속에 차갑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이제 경고는 없었다. 서로에게 빈틈이 보이면. 한 걸음 더 다가오는 그 즉시. 이 제국에 더는 두 마리의 사자는 없을 것이다. *** 아멜리아는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잠이 오진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그를 기다렸다. 물론 그는 오늘 밤 침실을 따로 쓰자고 했고, 돌아온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데도 아멜리아는 습관처럼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차분한 척하지 않으면, 걱정을 넘어선 불안이 그녀를 지배했다.

16553716864121.jpg‘잘못 본 게 확실해. 왜 자꾸 그런 환각을 보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진짜일 리가 없잖아.’

대공 전하가 그런 붉은 눈을 가졌다니. 그분이 얼마나 예쁜 푸른 눈동자를 가졌는데. 게다가 검은 새라고? 그럼 대공 전하께서 인간이 아니라는 건데. 인간이 아니면. 저주받은 홍안의 계승자.

16553716864121.jpg“……수인.”

아멜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되뇌던 말이 툭 튀어나오자 흠칫했다.

16553716864121.jpg“아니야. 말도 안 돼. 수인은 사라졌어. 정령들과 함께 사라졌다고.”

게다가 대공 전하는 솔라 제국의 황자다. 어머니는 달라도, 폐하의 피를 이어받은 이 황가의 사람.

16553716864121.jpg“괜한 생각하지 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대공 전하께서 다쳐. 다치고 말 거야.”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역시나 잠이 오지 않았다. 또다시 그 악몽을 꾸게 될까 봐. 그 악몽에서 대공 전하를 보게 될까 봐. 사실, 그게 두려웠다. 그때, 뒤에서 조심스러운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멜리아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튕겨 나갈 듯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클리트는 놀란 듯, 머리를 긁적였다.

16553716864117.jpg“부, 부인. 미안합니다. 깨울 생각은 없었는데…….”

16553716864121.jpg“무슨 일이세요?”

사방이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그는 제 표정을 보지 못할 테니. 몹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거다.

16553716864121.jpg‘그가 너무 많이, 보고 싶었어.’

그가 들어선 순간, 불안은 사라져버렸다. 이클리트는 머뭇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16553716864117.jpg“상처는 괜찮으십니까? 다 낫기도 전에 움직여서 걱정됐습니다.”

아멜리아는 그가 핑계를 대며 진심을 감추는 게 느껴졌다. 예전엔 보이지 않았던 사소한 그의 감정 변화가 이젠 다 보였으니까. 자신이 그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기에. 그와 있는 공기의 흐름조차 신경 쓰일 만큼. 그녀는 이클리트만을 보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천천히 그에게 등을 보였다.

16553716864121.jpg“직접 봐주세요.”

열기를 품은 목소리 끝에 이클리트는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천천히 그녀의 뒤로 다가왔다. 긴장이 베인 그의 손길이 그녀의 얇은 슈미즈를 슬쩍 끌어내리며, 하얀 목덜미를 타고 서늘하게 드러난 어깨를 바라보았다. 루시아의 약은 몹시 특별했기에, 다행히 그녀의 상처는 많이 아물어있었다.

16553716864117.jpg“아프진 않습니까?”

16553716864121.jpg“아프지 않아요.”

뒤에서 들리는 그의 목소리를 품으며, 아멜리아의 입꼬리가 절로 휘어졌다.

16553716864121.jpg“흉 지지 않을까요?”

16553716864117.jpg“괜찮을 겁니다. 아니, 상관없어.”

이클리트는 뜨거운 손가락으로 그녀의 상처를 문지르듯 쓰다듬었다.

16553716864117.jpg“그 어떤 모습이어도, 부인은 제게 부인입니다.”

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그녀의 기분이 먹먹해졌다.

16553716864121.jpg“나도 그래요. 대공 전하가 무슨 모습이든, 내게 대공 전하는 대공 전하에요.”

이클리트는 위안으로 밀려드는 그녀의 말에 호흡이 조금씩 들썩였다.

16553716864121.jpg“대공 전하가 주는 제비꽃이 보고 싶어요. 그 제비꽃만 보고 싶어요.”

아멜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곧장 마주친 두 사람의 시선이 빈틈없이 엉켰다. 절로 묵직해지는 숨을 삼키며, 아멜리아가 나직이 입술을 달싹였다.

16553716864121.jpg“정말 상처가 걱정돼서 오신 건가요?”

16553716864117.jpg“…….”

16553716864121.jpg“그래서 오신 거예요?”

그녀의 입술 너머 달콤한 독이 퍼진다. 그가 감추고 있는 진심을 녹이도록. 이 어둠 속에 그녀의 눈동자만이 말갛게 빛나며, 그를 끌어당겼다. 차마 삼키지 못한 숨이 그의 목젖에 걸려 크게 꿈틀거렸다. 결국, 그는 그녀의 입술을 깊이 머금으며 막혔던 숨을 내쉬었다. 아멜리아는 눈을 감고서, 그의 호흡을 들이키고 또 들이키다 그의 진심까지 삼켰다.

16553716864117.jpg“그대가 보고 싶어서.”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항상 그대가. 그대의 숨결, 온기, 목소리, 시선,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수도 없이. 지나칠 정도로 넘치는 감정을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꾹꾹 담아 겨우 한 마디.

16553716864117.jpg“아주 많이, 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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