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오지 말았어야 했던 답장2021.08.30.
이클리트는 아멜리아가 들고 있는 총을 보면서 말했다.
“나도 저격술을 배워보고 싶은데.”
그 말을 들은 칼렌은 순간 당황하여 자세를 고쳐 잡았다.
“대, 대공 전하께서도요? 혹시 마나가 있으십니까? 제가 잘 몰라서…… 대공 전하께서 소드마스터시라던가.”
“그런 건 아니지만.”
“그, 그럼 취미로 하시기엔, 그래도 저격술은 마나가 있어야…… 무, 물론 제가 대공 전하를 가르쳐드리기 싫은 건 아닙니다!”
“배운다면 부인에게 배우고 싶은데.”
“예? 아, 가주님께. 저한테 하신 말이 아니시군요. 죄송합니다!”
칼렌이 더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자, 아멜리아는 한숨을 쉬며, 불쌍한 칼렌의 등을 떠밀어줬다.
“칼렌 경, 오늘은 그만하도록 하죠. 아무래도 대공 전하께서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 보네요.”
칼렌은 아멜리아의 말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칼렌이 물러나자, 아멜리아는 서늘한 눈빛으로 이클리트를 노려보았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방해하시는 거예요?”
이클리트는 아멜리아의 냉한 눈초리에 살짝 풀 죽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도 좀 배워볼까, 하고…….”
“억지인 거 아시죠?”
“칼렌 경이 정말 부러웠으니까. 부인에게 선생님이 너무 많은 거 아닙니까? 그래도 내가 부인의 첫 번째 선생님인데. 너무 적게 불러줬습니다.”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의 불만에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나도 놀라워하는 중입니다.”
그는 아멜리아를 빤히 보면서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이렇게 질투가 많을 줄 몰랐으니까요.”
너무 솔직하게 내뱉는 말에 아멜리아는 움찔했다. 하지만 이클리트는 멈추지 않고, 계속 그녀의 속을 간지럽게 만들었다.
“정말로 부럽고 부러워서, 억지로라도 끼어들고 싶었나 봅니다. 아무튼 부인의 첫 번째 선생님은 접니다. 그건 잊지 말아요.”
아멜리아는 끝까지 그 부분을 놓치지 않는 그를 보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안 잊어요.”
이클리트는 그녀의 말에 금세 환한 표정을 지었다. 아멜리아는 달라진 이클리트의 모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예전엔 이렇게까지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았는데. 그녀를 향한 날 것의 감정을 계속해서 꺼내 보이면서. 마치 한 번만 더 날 봐 달라는, 그런 몸짓처럼 보였다. 그 작은 행동 하나하나를 아멜리아는 또 놓치지 않고 전부 반응하고 있었다. 정말로 머릿속에서 단 한 순간도 그가 떠나질 않는다.
‘자꾸만 당신 생각을 하게 해. 아니, 하고 있어.’
이클리트는 살짝 굳어져 있는 그녀를 보면서, 살며시 몸을 숙여선 그녀와 조심스럽게 시선을 맞추었다. 고작 하룻밤 같이 있지 못했는데, 몇 년이고 떨어져 있었던 것 같은 그리움이 그의 눈동자에 배여, 그녀의 얼굴 구석구석을 음미하게 했다.
“어제는 잘 쉬셨습니까? 아무래도 제가 있으면 쉬지 못할 것 같아서, 침실엔 안 갔습니다. 솔직히 제가 부인과 같이 있을 자신이 없었지만.”
“…….”
“이제 날 너무 믿지 마세요. 손만 잡고 지켜줄 자신은, 없을 것 같으니까.”
아멜리아는 그의 속삭임을 따라 손바닥에 아직 남아 있는 붉은 흔적이 다시금 화르르 타오르는 걸 느꼈다. 그녀가 괜스레 손가락을 움찔거리자, 눈치챈 이클리트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고서,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을 문지르듯 쓰다듬었다. 달아오른 열기가 그녀의 목 안으로 맺히면서, 이상한 기분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서 의연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제 침실을 따로 써야겠네요. 신혼도 끝났고, 귀족 부부는 침실을 따로 쓰기도 하니까요.”
아멜리아의 말에 이클리트는 살짝 어두워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보고 싶어도 참아야겠지.”
“…….”
“아직은, 잘 기다려보겠습니다.”
아직이라는 말이 또 다른 뜻을 품고서 그녀의 귓가에 야릇하게 걸려들었다. 아멜리아는 계속 그와 대화하다가는 또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아서, 얼른 말을 돌렸다.
“그런데 정말 왜 오신 거예요?”
“보고 싶어서 오기도 했고, 이걸 주려고 오기도 했습니다.”
이클리트는 품에서 뭔가를 꺼내 아멜리아에게 건넸다. 그건 편지였다. 아멜리아는 순간 안광으로 긴장된 감정이 뒤섞였다.
‘그가 편지를 쓴 건가.’
하지만 그의 편지가 아니었다.
“로사 유모에게 답장이 왔습니다.”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의 말에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로사, 유모한테서요?”
“네. 많이 기다리셨잖아요. 아마도 좀 늦어진 모양인데, 그래도 이렇게 때마침 도착했으니까.”
아멜리아는 이클리트가 내미는 답장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선뜻 손을 뻗어 잡지 못했다. 이클리트는 그런 그녀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한 채, 조금 머뭇거리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부인께서 기다리던 편지를 받으셨으니, 저는 부인의 탄일 때 다른 걸 드리겠습니다.”
아멜리아는 이클리트가 편지를 주지 않겠다는 말에 애써 정신을 차리며, 떨리는 손으로 답장을 건네받았다.
“그렇구나. 답장이, 이렇게 왔구나.”
그에겐 유모에게서 답장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아멜리아는 로사 유모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다. 그러니 답장이 올 리도 없었다. 그런데도 왔다는 건.
‘대체 이건 누가 쓴 편지지?’
이클리트는 어쩐지 표정이 너무 어두운 아멜리아를 보면서, 그제야 그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사실 편지를 받으면 몹시 기뻐할 거로 생각했는데.
“답장을 기다렸던 거 아닙니까? 아니면 무슨 일 있어요?”
아멜리아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기뻐요. 기다렸던 답장이니까. 얼른 읽고, 또 답장을 써야겠어요.”
그녀는 불안하게 뛰어오르는 심장을 겨우 누르며, 이클리트에게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클리트는 그 모습에 그녀가 무리해서 웃고 있다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
“좀 더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아니면 이젠 내 앞에선 잘 웃지 않으려는 겁니까?”
“그게 무슨 말이세요. 잘 웃고 있잖아요.”
그러자 이클리트가 저번처럼 아멜리아의 입꼬리를 꾹 눌렀다.
“억지로 웃는 거, 모른다고 생각하면 그게 더 서운합니다.”
“피, 피곤해서 그런 거예요.”
이클리트는 아멜리아가 계속 뭔가를 감추는 게 보였지만, 더 파고들지는 않았다.
“그 말이 진심이길 바랍니다. 절 피하는 거라면, 꽤 상처받을 거 같으니까.”
“…….”
“곧 영지로 떠나실 거죠?”
“가야죠. 직접 파악하고 싶으니까.”
“그럼 그때 말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선생님이 되고 싶기도 하고, 부인에게 승마술도 필요할 테니까. 가르쳐드리기로 약속한 거니까, 이건 피하지 말아요.”
“안 피해요. 저도 바라던 거였어요. 감사해요.”
아멜리아는 이클리트가 계속 자신을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제 손에 쥐여 있는 편지가 너무 거슬려서 더는 그와 마주하고 있을 수 없었다.
“근데 제가 진짜 좀 피곤해서. 어제 정말 잠을 못 잤어요. 그래서 좀 쉬고 싶은데.”
그는 머뭇거리며, 그녀의 뺨을 감싸곤 걱정스럽게 읊조렸다.
“진짜 나 때문이군.”
“아니에요.”
“데려다줄까요?”
“괜찮아요. 마미가 기다리고 있어요. 진짜 대공 전하 때문만은 아니에요.”
아멜리아는 이클리트를 다독이고선, 먼저 걸음을 돌렸다. 이클리트는 멀어지는 아멜리아를 바라보며 무거운 어조로 속삭였다.
“나 때문만은 아니라는 건, 나도 포함되어 있다는 건데.”
너무, 몰아붙이는 걸까. 기다리는 건 누구보다 잘한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기약 없는 내일을 계속 기다렸었으니까. 하지만 그녀 앞에서만 생경한 감정이 자꾸만 그를 아이로 만들며 보채게 한다. 좀 더, 좀 더 그녀를 바라고 원한다고.
*** 편지를 움켜쥔 그녀의 손가락이 자꾸만 헛돌았다. 그가 준 답장이 너무 무거워서, 놓쳐버릴 것 같았다. 불길하고 불안한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잠식했다. 훈련장 밖에서 기다리던 마미는 아멜리아가 급하게 걸어 나오자, 곧장 다가갔다.
“가주님! 왜 벌써 나오세요? 그런데 대공 전하는요? 분명 들어가시는 거 봤는데?”
마미는 칼렌이 먼저 나오길래, 분명 두 분이서 제법 오래 함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먼저 나온 아멜리아의 표정이 너무 안 좋았다.
“세상에. 가주님, 어디 불편하세요? 표정이 너무…… 치료사를 부를…….”
하지만 아멜리아는 마미의 손목을 거칠게 잡고서, 외진 곳으로 데려왔다. 마미는 본능적으로 큰일이라는 감지하고선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
“가주님?”
아멜리아는 다소 무서운 시선으로 마미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제대로 말해줘.”
“네?”
“처음 로사 유모한테 네가 편지 보냈던 거니? 내가 피오레 공작가에 있다고 말이야.”
시작은 갑자기 도착한 유모의 편지 한 통.
‘로사 유모님 편지가 왔어요.’
‘편지? 정말?!’
‘근데 유모는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지? 마미가 말했나? 내가 말한 기억은 없는데······.’
자신이 피오레 공작가에 있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기다렸다는 듯 보내온 유모의 편지에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겼다. 아니, 감히 유모의 편지가 아닐 거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으니까. 마미는 아멜리아의 말에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요? 그럴 리가요. 가주님이 알려주시기 전까진 저는 로사 유모님이 어디 사시는지도 몰랐는걸요. 편지를 보내고 싶어도 보낼 수가 없었죠. 그래서 그때 가주님께 제 안부도 전해 달라고 했던 거예요.”
마미의 말에 점점 생각하던 것이 현실이 되자, 그녀의 손끝이 차갑게 떨렸다.
‘그럼 내가 여기 있는 줄, 로사 유모는 몰랐다는 거야. 그럼 대체 편지를 어떻게…….’
애초에 모든 편지가 이곳으로 와선 안 되는 거였어. 게다가 모든 편지의 답장이 너무 빨리 도착했었고. 마미는 당황해하는 아멜리아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저도 그때 궁금했어요. 가주님이 언제 공작가에서 유모님께 편지를 보내셨나, 했거든요. 유모님한테는 마법 통신구도 없으시다고 했는데. 나 말고 다른 하녀에게 시키셨나, 싶었고. 하지만 굳이 유모님을 아는 절 두고 다른 하녀를…….”
아멜리아는 점점 엉망으로 튀는 감정을 붙들고 또 붙들며 억지로 생각을 정리하고자 했다.
‘처음 유모한테서 받았던 편지.’
-아가씨. 스스로 빛나야 위엄을 세울 수 있습니다.-
‘평판도 명예도 스스로 빛나야 생기는 것.’
그 뒤로는 쭉, 너무나 기시감 들었던 것들. -소중하고 또 소중한 나의 제비꽃이여.-
‘소중하고 소중한 나의 꽃이여.’
항상 유모의 위로와 대공 전하의 위로가 비슷하게 맞물렸다. 그래도 그냥 우연이라 여겼다. 사실 우연이 아닐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더는.
‘보내지도 않았던 편지의 답장을, 대공 전하께서 주셨어.’
아멜리아는 제 품에 있는 로사 유모의 답장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두려운 느낌이 그녀의 손을 묶어두고 있었다.
‘대공 전하께서, 로사 유모를 알고 계셔.’
아니, 아니다. 처음엔 서로 아는 사이라고. 너무 기가 막힌 우연이지만,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대공 전하께서 처음으로 내 부탁을 거절하셨다.’
그저 평범하게 편지 한 통을 써 달라고 했는데……. 유모에게 답장이 왔다며, 은연중 거절한 것이다. 사실 그녀는 그의 필체를 확인하고 싶었다. 아멜리아는 또 다른 품에서 이클리트가 떨어뜨렸었던 통을 꺼냈다. 마미는 어쩐지 말이 없어진 아멜리아의 안색을 살피다가, 그녀가 꺼내는 통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건 뭐예요? 정말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로사 유모님이 어디 아프시대요?”
“나도 유모가 지금 어떻게 된 건지 알고 싶어.”
“네?”
아멜리아는 통을 열어서, 그 안에 있는 편지들을 꺼냈다. 처음 실수로 통이 쏟아져서 나왔던 편지들. 그 편지를 보고 그녀는 시선이 멈춰버렸다. 전부 그녀가 로사 유모에게 보냈던 편지의 일부들. 그걸 유모가 아닌, 이클리트. 그가 가지고 있었다. 서로 알기만 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녀가 받은 편지들은, 로사 유모의 편지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보냈던 편지들도 로사 유모가 받은 것이 아니라…….’
아멜리아는 흔들리던 눈에 힘을 주고서, 마미에게 짧게 말했다.
“마미, 케이트를 불러.”
“네?”
“내 탄일에 작은 축제를 열어야겠어.”
*** 아멜리아는 케이트에게 명령을 내렸다.
“지난번에 케이트가 그랬지. 작은 파티도 괜찮을 것 같다고. 거기서 조금만 규모를 키워볼까, 해.”
“말씀하시지요.”
“영지민들을 위해 작은 축제를 열자. 티어들에게 한턱내기로 했는데, 조금 크게 내보도록 하지. 사실 아직 영지민들에게 제대로 인사하는 자리는 없었잖아? 루베르를 무사히 데려오려면, 나도 영지민들에게 잘 보여야 할 것도 있고 말이야.”
케이트는 갑작스러운 제안에 살짝 당황스럽기는 했으나, 크게 무리할 것도 아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그렇게 알고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
그때, 때마침 이클리트가 들어왔다. 그녀가 걱정됐던 이클리트는 아멜리아가 케이트에게 하는 명령을 얼핏 듣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뭘 하시는 겁니까?”
아멜리아는 이클리트를 향해 태연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탄일을 이대로 넘기는 건 너무 아쉬울 것 같아서요. 다 같이 즐기는 축제도 나쁘지 않으니까. 그때 저랑 약속하셨잖아요? 같이 놀자고 했던 거.”
“그건…….”
“이참에 다 같이 놀아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