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스캔들2021.10.18.
“클리오 대공 전하는 그럼 이번엔 아예 오지 않으시나요?”
묘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들이 또다시 그를 언급했다.
“급한 일이 있으셔서, 사냥 대회 이후 무도회엔 참석할 거랍니다.”
“어머, 그러시구나. 저희는 또 두 분의 사이가 소원해져서 그런 줄 알았네요. 괜한 걱정을 한 거네요. 그렇죠?”
“아직은 신혼 아니신가요? 그러고 보니 벌써 침실을 나눴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대체 저들이 말하는 의도가 뭐지? 아까부터 계속 대공 전하를 찾는 것도 이상했다. 이들은 여전히 그분을 괴물이라 여기며 무서워하고, 황후의 핏줄이 아니라며 무시하고 있는데……. 그때, 한 영애의 질문에 아멜리아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바스티얀 대공 전하께선 오늘 오시나요?”
“그걸 왜 나한테 묻지?”
하지만 영애는 차가워진 아멜리아의 태도를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가주님은 잘 아실 것 같아서요. 바스티얀 대공 전하께 탄일 선물도 받으셨다면서요? 반지라고 하던데…….”
“그걸, 어떻게?”
그러고 보니 저들이 대공 전하와 침실을 나눈 건 어떻게 아는 거지? 자신들의 냉전 상황을 아는 듯한 말투도 그렇고.
‘케이트가 경고하긴 했지만, 공작가 밖으로 새어 나갈 정도는 아니었어. 그런데 어떻게?’
아멜리아는 속내를 감추고 있는 영애들 너머로 서늘한 미소를 띠고 있는 메사리나를 응시했다. 그 순간, 원치 않은 타이밍으로 에드조프가 나타났다. 영애들은 에드조프와 아멜리아를 번갈아 바라보며 슬쩍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머, 바스티얀 대공 전하께서 오셨네.”
“사냥 대회도 아니고 이런 자리까지 오시다니.”
“저희는 이만 물러가 볼게요.”
“서로 보고 싶으실 테니.”
영애들의 기이한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순간, 메사리나가 아멜리아에게 인사하며 차갑게 읊조렸다.
“결혼도 하셨으면서 너무 옛 연인을 자주 만나시네요, 가주님.”
“뭐?”
아멜리아가 뭐라 입을 열 새도 없이 메사리나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메사리나가 에드조프를 만나지도 않고 스스로 물러나는 모습과 영애들의 이상한 태도에 그제야 설마, 하면서 에드조프를 바라보았다.
‘나와 바스티얀 대공이 한때 연인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메사리나밖에 없어. 그가 철저히 숨겼으니까. 그런데 지금 영애들의 태도는…….’
특히 메사리나가 에드조프가 왔음에도 저렇게 모른 척한다고? 오히려 자신과 만나도록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 같은……. 다른 귀족들과 인사하던 에드조프가 아멜리아와 시선이 마주치고는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걸어왔다. 아멜리아는 그런 에드조프를 싸늘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한가하신가 보네요. 이런 작은 무도회까지 오신 걸 보니.”
에드조프는 아멜리아의 손등을 억지로 잡아끌어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왜 왔겠어? 그대가 여기 있잖아.”
그는 아멜리아의 비어 있는 손가락을 보며 안타까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내가 준 반지는 역시 안 꼈군. 뭐, 상관없어. 기대해. 앞으로 그게 뭐든 질릴 정도로 줄 테니까.”
아멜리아는 에드조프의 지긋지긋한 목소리를 꾹 참으며, 그의 어깨너머를 응시했다. 영애들이 전부 이쪽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메사리나 역시 마치 방관자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들의 손에 뭔가가 있었다. 아멜리아는 그게 뭔지 깨닫고선 순간 차가운 숨을 삼켰다.
‘하녀들이 읽고 있던 그 소식지. 하. 그렇게 된 건가.’
메사리나, 그녀가 자신을 진짜 악녀로 만들 생각인 거다. 아니, 악녀가 문제가 아니다. 귀족 세계에서 가장 더러운 오점인 추문, 상간녀로 피오레 이름을 더럽힐 작정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에드조프까지 건드리게 되는데. 설마 메사리나가 에드조프를 포기한 거야?’
*** 아멜리아는 메사리나가 주도한 게 분명한, 영애들의 의심 섞인 시선을 잔뜩 받고서 침실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직 확실하지 않은 거로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하필이면 대공 전하께서는 부재고, 그 빈자리로 에드조프가 나타났으니…….
“아주 사실이길 바라는 소문에 불을 지피고 있구나.”
특히, 에드조프가 대놓고 한 짓들도 있었다.
‘무도회 때 억지로 날 끌고 간 적도 있었고, 결정타는 그 망할 제비꽃이었지.’
아멜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나 때문에 피오레의 명예에 흠집이 가게 해선 안 되는데.’
특히, 이 사실을 대공 전하께서 아시면 싫어하실 거다. 아멜리아는 무엇보다 그 점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아니, 아니야. 멀어지기로 했으면서. 이런 걸 신경 쓰면 어떡해.”
그보단 자신의 명예가 더럽혀져서, 그를 황위에 올리지 못할 가능성만 생각해야 한다.
“절대, 메사리나의 뜻대로 둘 순 없지.”
정말로 메사리나의 짓이라면, 그녀 역시 최악까지 각오하고 저지른 짓일 거다. 감히 일개 백작가의 영애가 황자이자 대공, 그리고 공작을 건드린 일이니까.
“이번 일을 에드조프가 가만 보고 있을 리가 없지. 그는 자신의 평판이 그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이야.”
그래서 자신과 연인 사이였다는 것도 철저히 숨긴 사람이다. 오직 자신을 이용만 하고 버리기 위해서.
‘잘하면 이번 일을 역으로 이용해서 메사리나를 제대로 추락시킬 수도 있어.’
이 추문을 주도한 게 귀족 영애라는 게 밝혀지면, 두 번 다시 사교계에 얼굴 들고 다닐 수 없게 된다. 일단, 대체 피오레 내에서만 돌아야 할 자신과 대공 전하의 냉전에 관한 것이 어떻게 영애들의 입방아에 오르게 됐는지, 그 경위부터 파악해야 했다.
“에드조프가 내게 반지를 준 일도.”
그게 이 소문에 꽤 결정적인 증거가 된 것 같으니까.
‘그 소식지가 몹시 수상해.’
이런 일을 알아볼 사람으로 적합한 건 마미였다.
“마미, 밖에 있니?”
마미는 곧장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가주님, 부르셨어요?”
“마미, 영애들이 가지고 있는 소식지 좀 알아봐.”
“소식지요? 가주님이 그걸 어떻게 아세요? 그건 그냥 온갖 근거 없는 얘기가 적혀 있는 건데.”
“그 근거 없는 얘기에 감히 피오레가 오르내리는 것 같아.”
“예?”
아멜리아는 무도회에서 있었던 일을 마미에게 말해주었다. 그러자 마미의 표정이 사색이 되어선 질린 입술을 달싹였다.
“누가 감히 그런 짓을…….”
“소식지에 실리는 귀족가 정보는 하녀들이나 시종들이 판다면서.”
“하지만 피오레에서 그런 짓을 할 사람들은 없어요. 그런 짓을 했다간, 귀족 사회에서 매장이라고요! 그리고 다들 얼마나 피오레에서 일하는 걸 긍지와 자부심으로 여기고 있는데…… 잠깐.”
마미가 멈칫하자, 아멜리아도 마미와 같은 생각을 했다.
“이번에 신입들이 들어오긴 했는데…….”
“나도 피오레와 함께했던 사람들이 이런 짓을 했다고 생각하진 않아. 뭣 모르는 이들이 저지른 거겠지.”
마미는 몸이 떨릴 만큼, 싸늘하게 파고드는 아멜리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미 역시 이번 일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이번 일은 피오레를 평생의 주인처럼 섬기며 일해 온 자신들의 긍지를 건드리는 일이기도 했다.
“마미, 이번 일은 너에게 전부 맡길게. 아니, 이건 네가 해야 할 것 같아.”
“물론이죠. 오히려 감사해요. 반드시 잡초를 골라내겠습니다.”
아멜리아는 조금은 누그러진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둥이가 안 보이네. 네가 데리고 있니?”
공작가에 도착한 이후, 둥이가 계속 보이지 않았다. 적절한 시기에 작별과 함께 산으로 보내줘야 했는데…….
“어머, 저는 가주님이 데리고 있는 줄 알았어요.”
“뭐? 그럼 설마 혼자 가버린 건가. 제대로 인사도 못 했는데.”
그러고 보니, 둥이가 카르티아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계속 산 쪽을 바라보던 게 떠올랐다. 어쩌면 산으로 돌아갈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을지 모른다.
‘내 욕심으로 지금까지 데리고 있었는지 몰라.’
괜한 슬픔보다는 언젠가 다시 만나리라는 희망으로 헤어지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 마미는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보내야 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순식간에 가버릴 줄 몰랐는데.”
“애초에 우리가 키우는 동물이 아닌걸. 오히려 잘된 거야. 야생을 잊지 않고 있었다는 거니까.”
“그렇겠죠? 하아. 그럼 가주님, 쉬세요. 소식지 관해선 제가 확실하게 알아볼게요.”
“부탁해.”
마미가 침실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멜리아가 조심스럽게 복도로 나왔다. 잠이 오지 않아서 조금 산책을 하고 싶었다. 하늘에는 한 줌의 초승달이 겨우 걸려 있어, 제법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예전엔 이 어둠이 너무 무서웠는데.’
이 어둠 속에 자신은 항상 혼자였으니까. 그 시커먼 구렁텅이에 빠져서, 헤어 나올 수 없는 그 공포에 사로잡혔었으니까. 하지만 더는 어둠이 무섭지 않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그분이 항상, 항상 지켜보고 계셨어.’
자신을 위해 태양마저 가져다주겠다고 말하면서.
‘언제나 날 위해 빛나고 계셨지.’
아멜리아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 이클리트를 떠올렸다.
“……보고, 싶다.”
입 밖으로 꺼낸 진심 하나가 심장 위로 내려앉았다. 아닌 척하고, 막으려고 해도 보고 싶은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다만. 지금은 아무도 없으니까. 혼자 그를 마음껏 생각하는 건, 괜찮으니까.
‘들키지만 않으면 돼.’
그녀는 품에서 로사의 편지, 아니 이클리트의 편지를 꺼내 보았다. 그날 이후, 아멜리아는 항상 이 편지를 지니고 있었다. 마치, 예전의 이클리트처럼. 그는 자신에게서 이 편지의 의미를 잃게 만들까 봐 걱정했지만. 이 편지는 이제 그녀에게 다른 의미로 심장에 깊이 스며선, 강한 힘을 주었다.
‘그분의 마음이 들려.’
이 심장을 마지막까지 뜨겁게 안아줄, 그의 사랑으로. *** 사냥 대회 날이 밝았다. 워낙 귀족들이 유희로 즐기는 사냥인 만큼, 구경하는 귀족들의 분위기도 몹시 자유로웠다. 물론 사냥에 참여하는 귀족들의 얼굴엔 살짝 긴장이 섞여 있었지만. 사냥 대회에서 이기면, 라이벌에게 본때를 보여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아멜리아는 별다른 부담 없이 사냥에 참석했다. 사실 그녀는 사냥 대회에서 이기는 것보다, 사냥 대회 이후 무도회가 문제였다.
‘그땐 대공 전하께서 참석하실 텐데. 영애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을 어떻게든 바로 잡아야 해.’
그때, 이번 사냥 대회를 주관하는 헤이츨이 나와서 간단한 규칙을 설명했다.
“사냥터로 정해진 산 안에서는 마음껏 움직일 수 있습니다. 사냥 도구도 여러분이 편하신 것으로 사용하시면 되고요. 시간은 해가 저물 때쯤, 하늘 위로 끝났다는 신호가 갈 겁니다. 그때, 가장 크거나, 희귀한 짐승을 잡은 사람이 승자입니다.”
헤이츨은 커다란 지도를 보여주며 말을 맺었다.
“곳곳에 이정표가 있으니, 길을 잃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 어렵거나 위험한 코스가 아니니,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출발도 자유롭게 해주세요. 여러분들에게 새로운 역사의 행운이 따르길 바랍니다.”
헤이츨이 물러서자, 귀족들이 줄줄이 말을 이끌고 산속으로 사라졌다. 아멜리아도 가볍게 말 위에 올랐다. 그때, 그런 그녀의 곁으로 에드조프가 다가왔다. 아멜리아는 싸늘한 표정으로 곧장 말머리를 돌리려고 했으나, 에드조프가 가볍게 그녀의 앞을 막았다.
“비켜주시죠.”
“이제 말을 타는 모양이군.”
마치 자신에 대해서 다 아는 듯 말하는 태도에 아멜리아는 치미는 화를 꾹 삼키며 싱긋 웃었다.
“남편이 가르쳐 줬어요. 워낙 모든 걸 함께하니 말이죠.”
“그런 남편이, 왜 지금은 안 보이는 거지?”
“바스티얀 대공 전하께서 신경 쓸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에드조프는 묘한 어조로 읊조렸다.
“사냥당할까 봐, 겁먹은 거지. 이해는 가. 그 자식도 짐승이니까.”
예전에는 그의 모욕적인 언사에 분노했을 테지만. 아멜리아는 짐승이라는 단어가 기묘하게 머릿속을 맴돌았다.
‘짐승. 수인…….’
“그럼, 곧 다시 만나도록 하지.”
에드조프가 먼저 고삐를 당겨 사라지자, 그 빈자리로 이번엔 메사리나가 다가왔다.
‘아주 시작 전부터 스트레스 제대로 받게 하는구나.’
아멜리아는 오늘 움직이기 편한 바지 차림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메사리나는 마치 무도회에 참가하기라도 한 듯,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피오레 공작 각하, 우리가 이렇게 같은 출발선에 서 있네요.”
티어로 참여하는 건 두 사람 뿐이기에, 구경하는 이들의 시선이 그녀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메사리나는 제대로 장총을 장전하고서 싱긋 웃었다.
“조심해요. 이번에 내 사냥은, 절대 실패하지 않을 테니까.”
떠나려는 메사리나의 앞으로 아멜리아가 거칠게 말을 끌었다. 그 때문에 메사리나가 재빨리 고삐를 잡고서, 휘청이는 몸을 붙들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사고인 척, 하는 짓?”
“뭐?”
“지난번처럼 날 또 건드리거나, 어떻게 할 생각이면. 나도 사고인 척,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는 소리야. 그리고 지금 네가 벌이고 있는 것도.”
메사리나는 멈칫했으나, 의연하게 웃었다.
“벌이고 있는 거라니요?”
“너도 최악을 각오하고 시작한 일이겠지?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도 제대로 악랄하단 소리 들어봐야겠다. 그래야 내가 덜 억울하지.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요.”
“내 사냥도 절대 실패하지 않을 거란 소리야.”
아멜리아가 말의 옆구리를 치며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메사리나는 그런 아멜리아의 시건방진 말에 이를 악물었다.
‘아무 대책도 없는 주제에 허세는! 바스티얀 대공 전하와 연인이었던 건 사실인 주제에. 그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걸? 바스티얀 대공 전하께 두 번 버려지는 게 네 운명이야, 아멜리아.’
“악녀가 되는 게 두렵지 않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악녀에 상간녀까지 합쳐서, 아주 제대로 나락으로 추락해 봐. 과연 클리오 대공이 그런 네 곁에 끝까지 있어줄지,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