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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어쩌지 못하는 마음 (87/199)

87화. 어쩌지 못하는 마음2021.11.01.

둥이를 쫓아간 아멜리아가 멈춘 곳은 아찔한 절벽 위였다. 아래는 거대한 폭포가 쏟아지고 있는지, 귀가 먹먹할 정도로 굉음이 울리고 있었다. 어느새 둥이는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절벽 끝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검은 독수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16553725510813.jpg“둥아. 이리 와. 거긴 위험해!”

아멜리아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서 있는 둥이를 보면서 손짓했다.

16553725510813.jpg“괜찮아. 괜찮으니까, 이리 와. 아무도 널 해치지 않을 거야.”

그녀가 아주 조금씩,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자, 둥이가 사나운 표정으로 외쳤다.

16553725510823.jpg“가까이, 가까이 오지 마!”

16553725510813.jpg“둥아…….”

16553725510823.jpg“나한테 오지 마. 더는, 못 버티니까…….”

16553725510813.jpg“그게, 무슨?”

둥이는 다시금 사납게 으르렁거리면서 머리를 붙잡았다.

16553725510823.jpg“하아. 시끄러워…… 시끄럽다고!”

둥이는 힘겹게 숨을 토하며, 으스러진 어조로 외쳤다.

16553725510823.jpg“……내가, 당신을. 죽일 거야. 죽이라고 했어. 그 명령을, 이제 거역할 수 없다고!”

괴로워하는 둥이를 보면서 아멜리아는 멈칫했다.

16553725510813.jpg“명령이라니? 대체 누가 그런 명령을…….”

16553725510823.jpg“그 여자. 그 여자는, 마녀야. 우리들을 전부. 전부, 무기처럼…… 악!”

겨우 붙들고 있던 이성이 그대로 끊긴 듯, 둥이가 완전히 변해버린 표정으로 아멜리아를 향해 마체테를 휘둘렀다.

16553725510813.jpg“둥아!”

아멜리아가 곧장 장총으로 막아봤지만, 헛수고였다. 둥이의 움직임은 몹시 빨랐다. 장총에 막히자마자, 둥이가 몸을 돌려 마체테로 아멜리아의 심장을 노렸다. 아멜리아는 이를 악물고서, 그녀의 앞으로 곧장 불의 마탄을 쐈다. 쾅-! 그녀의 주변으로 불의 장막이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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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둥이는 자신이 아픈 건 상관없다는 듯,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려고 했다. 오히려 놀란 건 아멜리아였다.

16553725510813.jpg“안 돼, 둥아! 다쳐!”

그 순간, 이클리트의 칼이 둥이를 그대로 밀어버렸다.

16553725510813.jpg“대공 전하!”

이클리트는 쓰러진 둥이가 다시 일어서려고 하자, 그를 완전히 힘으로 짓누르며 읊조렸다.

16553725539049.jpg“역시, 너였군.”

16553725510823.jpg“크르르륵!”

16553725539049.jpg“황궁에서 아멜리아에게 이끌었던 것도, 너였지? 그렇지?”

16553725510823.jpg“악!”

둥이는 있는 힘껏 이클리트를 밀쳐냈다. 그러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그대로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16553725510813.jpg“둥아!”

아멜리아가 절벽으로 달려갔지만, 이클리트가 그녀를 붙잡았다.

16553725539049.jpg“위험해!”

16553725510813.jpg“하지만!”

16553725539049.jpg“저 정도로 죽지 않을 겁니다. 반인반수라면.”

이클리트의 입에서 둥이의 존재가 더 확실시되자, 아멜리아는 온몸이 굳어졌다.

16553725510813.jpg“반인반수…… 수인이 아니에요?”

16553725539049.jpg“수인은 홍안을 이어받습니다.”

16553725510813.jpg“그렇구나. 둥이가, 반인반수…….”

아멜리아는 한껏 일그러진 이클리트의 표정을 보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16553725510813.jpg“하지만 둥이가 날 공격한 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16553725539049.jpg“부인…….”

16553725510813.jpg“날 해치려고 했던 게 아니었어요. 황궁에서도, 맞아. 황궁에서도 둥이가 날 구해졌어. 내 마탄에 쓰러지지 않았던 늑대들을 해치운 건 분명 둥이일 거예요. 내가 분명 새하얀 존재를 봤으니까. 물론 아까 그 모습은 조종당하는 것 같았지만…….”

아멜리아의 말에 이클리트는 결국, 감추고 있던 모든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16553725539049.jpg“조종당하는 게 맞을 겁니다.”

16553725510813.jpg“뭔가 아는 건가요?”

16553725539049.jpg“우리가 쫓고 있는 밀주. 누군가 카르티아 공작가로 무도회를 핑계 삼아 밀주를 반입했습니다. 귀족들이 주문한 술로 위장한 겁니다.”

16553725510813.jpg“대체 왜요? 어차피 사람한테는 아무 효능도 없는데. 설마…….”

순간, 머릿속으로 파고든 생각 하나에 아멜리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16553725510813.jpg“그 밀주로, 둥이를. 반인반수를 조종하는 건가요?”

이클리트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16553725539049.jpg“인간에게 반응하지 않고 굳이 육식계 짐승에게만 반응하는 밀주를 만든 것은 사실, 반인반수를 찾아내기 위한 도구인 듯합니다.”

겉으로는 의연한 척 말했지만, 사실 이클리트는 조금 두려웠다. 방금 전 둥이의 모습은 다소 기이했다. 보통 반인반수는 반은 인간이고, 반은 짐승이지만, 거의 인간에 가까웠기에. 짐승의 힘인 야성은 달 없는 밤에만 나타나곤 했다. 그래서 저들이 인간들의 틈에서 의심 없이 숨어 살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클리트는 조금 특별했다. 수인의 힘이 훨씬 강한 것. 하지만 이는 자신이 정말 괴물이라서 그런 거라고 이클리트는 생각했다. 아스란의 계략 때문에 돌연변이가 된 건 아닐까, 의심했으니까.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아스란과 함께 자신을 실험체처럼 다뤘던 남자가 있었다. 지금, 그가 반인반수라는 걸 아는 사람은 아스란과 에리얼, 에드조프와 카힐로, 루시아 그리고 그 의문의 남자였다. 아무튼 그래서 그는 오직 순수 수인에게만 계승되는 홍안도 불안정하게 이어받고 있었다. 그렇기에 로사의 도움으로 달 없는 밤조차 야성이 드러나지 않도록, 힘을 컨트롤할 수 있었던 것. 하지만 둥이는 평범한 반인반수이기에 힘을 자유롭게 다룰 수 없었다.

16553725539049.jpg‘게다가 완벽한 짐승의 모습을 하다니. 반인반수라면 달 없는 밤에도 특정 부위만 야성화되어야 하는데.’

진짜 짐승처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완벽했다.

16553725539049.jpg‘설마 저 밀주가 반인반수에게서 인간을 빼앗고 오로지 짐승화 시키고 있다는 건가?’

그럼 황궁에서 봤던 그 흑표범도, 들이닥친 늑대들도. 어쩌면 인간을 잃어버린 반인반수일 수도 있다는 건가? *** 이클리트는 완전히 지쳐버린 아멜리아를 데리고 카르티아 공작가로 돌아왔다. 웅성거리며 모여 있던 이들은 그들의 등장에 서둘러 달려갔다. 특히, 헤이츨이 이클리트를 보며, 그에게 안겨 있는 아멜리아를 살폈다.

16553725605676.jpg“괜찮은 겁니까? 대충 상황은 바스티얀 대공 전하께 들었습니다. 갑자기 멧돼지 떼의 습격이라니. 저희 쪽 부주의입니다.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16553725539049.jpg“바스티얀 대공?”

이클리트는 에드조프라는 말에 미간이 굳어졌다. 그녀가 그와 함께 있었다는 건가? 아멜리아는 헤이츨의 말에 움찔하며, 자신도 모르게 이클리트를 살폈다. 그러곤 애써 의연한 표정으로 헤이츨에게 말했다.

16553725510813.jpg“나는 괜찮아요, 카르티아 공. 미안해요. 괜한 걱정을 끼쳤네요.”

16553725605676.jpg“아닙니다. 그나저나 대공 전하께선 어떻게 여길?”

16553725510813.jpg“다른 볼일이 있으셔서 거기 들렸다가, 여기 오셨어요. 제 소식을 듣고 곧장 산으로 달려오신 듯해요.”

16553725605676.jpg“아. 그렇군요. 아무도 본 사람이 없어서 몰랐습니다.”

아멜리아는 헤이츨의 말에 멈칫했다.

16553725510813.jpg‘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고? 그럼 대체 대공 전하는 어떻게 내가 있는 곳까지 오신 거지?’

이클리트는 헤이츨의 다소 서늘한 어조에 저도 모르게 아멜리아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아멜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16553725510813.jpg“윽!”

16553725539049.jpg“부인!”

16553725605676.jpg“이런. 다치셨군요.”

16553725539049.jpg“다쳤다니…….”

16553725510813.jpg“아니, 다친 게 아니라…….”

아멜리아가 어깨를 감추려고 하자, 이클리트가 어깨를 당겨 이제야 상처 부위를 확인했다. 아까는 둥이 때문에 너무 정신없어서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클리트의 눈빛이 차갑게 얼어붙었고, 아멜리아는 어색하게 웃었다.

16553725510813.jpg“진짜 그냥 살짝 스치기만 했어요.”

16553725539049.jpg“나한테는 다친 거, 숨기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16553725510813.jpg“대공 전하?”

이런 상처는 예전에도 난 적 있었다. 그런데, 그때보다 더 반응하며 어두워진 이클리트의 모습에 아멜리아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헤이츨은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끼며 먼저 입을 열었다.

16553725605676.jpg“치료사를 부르겠습니다.”

그가 손짓하자,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이 우르르 달려와 아멜리아를 안내했다.

16553725510823.jpg“공작 각하, 이쪽으로 오세요.”

16553725510813.jpg“아, 아니 잠깐. 혼자 갈 수 있으니까…….”

하지만 하녀들에게 둘러싸인 채, 아멜리아는 이 자리를 떠야 했다. 그 때문에 한껏 궁금해하는 귀족들이 그녀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아마도 헤이츨의 작은 배려인 듯싶었다. 아멜리아는 이 자리를 떠나면서, 끝까지 이클리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한 채, 멀어지는 아멜리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그답지 않게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멜리아는 그 시선이 심장에 깊숙이 박혀, 울컥거리는 아픔이 어깨의 상처보다 더 세게 느껴졌다.

16553725510813.jpg‘대체 왜 저런 눈빛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이클리트에게 손을 뻗을 뻔했지만, 끝내 무슨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를 휩쓸리듯 빠져나갔다. 이클리트는 사라지는 아멜리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반인반수 때문에 그녀가 다치고 말았다. 가장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16553725539049.jpg‘내 곁에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더 많이 다치게 될까. 그러다가 위험해지면. 이번에도 내가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감당할 수 없는 끔찍한 생각에 다다르자, 이클리트는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숙였다. 자꾸만 부족한 호흡이 그의 목을 할퀴고 있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벌써 이렇게 나약해지는 건, 이 위험의 끝에 그녀가 있기 때문이다. 밀주로 인해 야성이 이성을 삼키고 변해버린 둥이의 모습. 둥이는 원치 않아도 칼을 휘두르며 끝내 피를 보게 만들었다. 그녀의 말처럼 녀석은 그녀를 해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황궁에서 자신을 지하실로 이끈 것 역시, 그녀를 구하기 위함이었을 거다.

16553725539049.jpg‘수인은 본능적으로 불필요한 살생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는 반인반수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하게 만드는 거지?’

그 순간, 그의 신경을 더욱 거슬리게 하는 목소리가 박혔다.

16553725661899.jpg“아멜리아가 다쳤다니. 정말 멧돼지한테 당한 거야?”

이클리트는 이를 악물고서 고개를 들었다. 그 자리에 에드조프가 여유로운 태도로 그를 응시했다.

16553725661899.jpg“아니면 다른 짐승 새끼?”

16553725539049.jpg“…….”

이클리트는 에드조프를 무시한 채,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하지만 에드조프가 일부러 이클리트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16553725661899.jpg“이거, 그녀에게 돌려줘. 어쩌다 보니 단둘이 같이 있었거든.”

에드조프가 건넨 것은 아멜리아의 머리끈이었다. 이클리트는 그녀의 머리끈을 차가운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에드조프는 그런 이클리트를 향해 비틀린 어조로 속삭였다.

16553725661899.jpg“넌 늦게 와서 모르겠군. 우리가 연인이었다는 게 귀족들 사이에서 밝혀졌어.”

16553725539049.jpg“뭐?”

그는 하녀들이 가지고 있던 소식지를 이클리트의 발 앞에 던지며 말했다.

16553725661899.jpg“이클리트, 넌 절대로 아멜리아를 지키지 못해. 이런 작은 소문도 그녀를 흔드는데, 네가 괴물이라는 게 밝혀지면 그녀는 끝장이야. 정말로 그녀를 사랑한다면, 그녀의 곁에서 떠나.”

에드조프가 묵직한 말을 남긴 채, 떠났다. 평소라면 에드조프의 말 따위 가볍게 무시했을 텐데. 반인반수로 인해 그녀가 다치게 되면서, 이클리트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그냥 흘러 넘길 수가 없었다. 그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바닥에 떨어져 있던 소식지를 들어 올렸다. 에드조프가 그녀에게 청혼했었다는 사실. 서로 비밀 연인이었다는 것. 그로 인해 그녀에게 쏟아지는 날 선 모욕과 조롱들. 이클리트는 손끝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소식지를 꽉 붙들었다.

16553725539049.jpg‘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녀가 모든 걸 감당하고 있었구나.’

특히나 이번 추문으로 그녀에게 붙고 있는 꼬리표는 두 남자 사이를 오간 악녀였다.

16553725539049.jpg‘아니야. 오히려 내 멋대로 좋아한 거다. 그녀는, 아무 잘못 없어.’

전부 말도 안 되는 거라고 부정하려 했으나, 단 하나 부정하지 못하는 게 있었다. 에드조프와 한순간이라도 연인이었던 그녀. 그녀가 그로 인해 얼마나 고통스러웠고, 지금도 그를 향한 복수에 모든 걸 걸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16553725539049.jpg‘조금, 부러워.’

차마 이 새카만 마음 하나를 완전히 누르지 못했다. 이클리트는 스스로를 원망하는 시선으로 머리끈을 꽉 움켜쥐었다. 가면 갈수록 더욱.

16553725539049.jpg‘내가 참, 못난 사람이야.’

  *** 밤이 완전히 깊어졌다. 사냥터에서 일어난 사건은 일단 일단락되는 듯싶었다. 내일 해가 밝으면, 귀족들이 기다리는 후야제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클리트가 해결해야 할 일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카마리는 이클리트에게 카르티아로 들어온 여러 종류의 술을 꺼내 보였다.

16553725690064.jpg“저택으로 유통된 술은 이게 전부입니다.”

16553725539049.jpg“술이 죄다 섞였군.”

16553725690064.jpg“소량이라도 마약 성분이 섞인 술을 밀거래한 것이니, 보통 술인 것처럼 치밀하게 준비했을 겁니다.”

16553725539049.jpg“밀주로 들어온 건 이미 그 역할을 다했을지 모른다.”

16553725690064.jpg“예?”

16553725539049.jpg“오늘 멧돼지 사건. 우연히 그들이 폭주를 일으킨 게 아니야.”

16553725690064.jpg“아…….”

16553725539049.jpg“그래도 남아 있는 게 있을지 모르니, 조사하도록 하지.”

16553725690064.jpg“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가주님은?”

카마리 역시 이곳으로 오면서 소식을 들었다. 대공 전하께서 그렇게 급하게 공작가로 돌아온 것도 다 가주님 때문인 거다.

16553725539049.jpg“마미가 안정을 취하고 있다고 하더군. 아무 일도 없었어.”

16553725690064.jpg“다행입니다.”

16553725539049.jpg“이만 물러가도록 해.”

16553725690064.jpg“예.”

카마리가 자리를 비우자, 이클리트는 여러 병의 술 중에서 한 병을 골라 냄새를 맡았다. 다행히 밀주는 아니었다. 그는 또 다른 술병을 집으려다가, 냄새를 맡았던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제법 따끔거리는 독주가 그의 속을 헤집었다.

16553725539049.jpg“하아…….”

이클리트는 멈추지 않고 술을 더 마셨다. 오늘은 조금, 취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순, 아멜리아의 술버릇이 떠올랐다. 그는 벌써 입꼬리가 풀어지면서, 부드럽게 읊조렸다.

16553725539049.jpg“마시지 말라고 했는데, 내가 마시네.”

16553725510813.jpg‘술을 마시면, 사람이 솔직해지더라고요. 대공 전하도 이걸 먹고, 솔직하게 말해줘요.’

   이클리트는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는 눈동자로 앞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기억 속에 선명해지면서, 마치 눈앞에 있는 것 같았다.

16553725539049.jpg“나는 지금, 너무 솔직해지면 안 되는데…….”

눈앞에 그녀가 허상이라서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들켰을 거다. 사실, 마음이 단 하나도 정리되지 않았다는 걸. 오히려 더 커져서, 감히 해선 안 될 못난 미움까지 보였을 테니. 끊임없이 독주를 마신 이클리트는 어느 순간, 허상이 점점 더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정말로 눈앞에 아멜리아가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던 것. 분명 주변에 빛 하나 없는데, 그의 시야가 환해지고 만다. 제비꽃처럼 아름다운 보랏빛 머리카락에 빨려들 듯 빛나는 초록색 눈동자. 눈, 코, 입. 어느 것 하나 감히 탐낼 수 없는, 너무나도 귀하고 아름다운 여인.

16553725539049.jpg“내 세상. 유일한 빛이, 또 이렇게 있네요.”

이클리트는 헝클어진 미소를 띠며, 아멜리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술이라는 게, 이렇게 좋은 건 줄 몰랐다.

16553725539049.jpg“계속, 생각하고 있었는데. 환영이라도 보니, 좋네요. 술이 정말로, 좋은 거네. 좋은 거였어…….”

그녀의 말처럼 마음이 점점 솔직해지다 못해 용감해지고 있었다. 자신이 바라는 환영이라면. 신이 처음으로 제게 좋은 꿈을 내려준 거라면. 이 정도는,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16553725539049.jpg“사실은. 그대 옆에 있고 싶어, 안달 나 미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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