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오늘 밤은 당신의 것이에요2021.11.15.
예전엔 내 감정보다 남의 눈치를 더 봤다. 내가 약해서. 내가 아파서. 내가 민폐니까. 사랑을 받는 것도, 주는 것도 어려워서. 그저 혼자 참으면서, 스스로 갉아 먹히기만 했는데. 그게 결국,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다.
“사랑해요, 대공 전하.”
하지만 이젠, 참을 수 없는 감정을 만나고 말았다. 그를 만나고, 내 감정이 더 소중해졌다. 그를 너무 사랑하는 이 마음이. 그를 놓치고 싶지 않은 이 욕심이. 심장이 끊임없이 경고하듯 아팠지만. 지금 이 고백으로, 훗날 어떻게 망가지고 돌이킬 수 없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을 만큼.
“사랑해요.”
이제 막을 수 없을 만큼.
“마음껏, 대공 전하를 사랑하고 싶어요.”
이클리트는 아멜리아를 그저 멍하니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뭐라고 말해버리면, 혹시 이 모든 게 전부 사라지면……. 아멜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이클리트의 눈치를 살피다가, 마미와 티어들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다.
“가주님! 어디 계세요!”
“대공 전하!”
그녀는 살짝 두려운 마음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미안해요. 내가 너무 내 멋대로 행동했죠? 대공 전하의 대답은 나도 기다릴게요. 대공 전하가 날 기다린 만큼, 기다려볼게요.”
그렇게 그녀가 돌아서려는 순간, 이클리트가 다급하게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기다리지 마요.”
“네?”
“그러다 그 마음이 바뀌면 어떡해…….”
절박하게 번지는 그의 목소리에 아멜리아는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바뀌어요, 절대.”
“그럼 내 대답도 지금 들어요. 더는 얌전히 못 기다려.”
이클리트는 순식간에 아멜리아를 안아 올렸다. 그녀는 깜짝 놀랐지만, 곧 그에게 안긴 채,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클리트는 마미와 티어들이 찾을 수 없도록, 정반대로 돌아서서 걸음을 내디뎠다. 그는 아주 힘껏 그녀를 안고 있었고, 아멜리아 역시 살며시 그를 움켜쥐고서 잠시 눈을 감았다. 누군가의 심장 소리가 온몸이 떨릴 만큼, 요란하게 들리고 있었다. 사실, 그녀도 지금 듣고 싶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지금.
‘당신을 너무나도 원해요.’
*** 이클리트가 도착한 곳은 카르티아 저택의 후원 중 하나였다. 손질은 잘 되어 있었지만, 워낙 인위적으로 가꾸지 않아서 그런지 우거진 장미 덩굴과 수풀이 마치 비밀의 정원처럼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그는 중정 같은 아치형 테라스에 아멜리아를 살포시 내려주었다. 비록 달이 거의 보이지 않아서 주변이 너무 어두웠지만, 이클리트가 슬며시 손을 뻗어 주위를 반딧불의 불빛으로 가득 채웠다. 마치 지상에서 빛나는 별 같아서 아멜리아는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클리트는 살며시 입을 열었다.
“무섭진 않죠?”
“이제 어두운 건 안 무서워요. 대공 전하께서 항상 이렇게 빛이 되어주니까.”
“…….”
이클리트가 의식적으로 그녀와 살짝 거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멜리아는 그 미묘한 거리를 먼저 지우면서, 그에게 다가섰다.
“그럼, 대답해줄래요?”
앞으로 다가온 아멜리아는 그와 가만히 눈을 맞추었다. 마침내 이클리트가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가까워졌다.
“대답할 필요도 없어요. 내가 가진 모든 감정은, 당신 때문에 만들어진 겁니다.”
아멜리아는 그의 손을 살포시 감싸며 좀 더 가까이 뺨을 기대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이 닿으면 닿을수록, 이클리트는 아찔한 숨을 삼키며 결국, 고개를 숙이고서 그녀의 입술 끝에서 나직이 입술을 벌렸다.
“날, 사랑해줄 겁니까?”
귓가로 헝클어진 서로의 호흡이 눅진하게 밀려들었다. 아멜리아는 겨우 시선을 바로 한 채, 열기에 엉킨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날 당신에게 했던 말, 나도 다 거짓말이었어요.”
“…….”
“미워한 적 없어요. 단 한 순간도 그럴 수가 없었어요. 당신이 내게 보낸 그 편지들이 진심이듯, 나도 그랬으니까.”
그녀는 그의 얼굴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다가, 살짝 그를 당겨 입술을 머금은 채 제 마음을 내쉬었다.
“사랑해요. 오직 대공 전하만을, 사랑해요.”
이클리트는 터질 듯한 숨을 삼키며, 그대로 그녀의 허리를 감싼 채 깊이 입을 맞추었다. 조금은 부드럽지 않은 키스가 그녀에게로 쏟아졌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그게 뭐든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성을 잃고 저를 붙잡고 있는 그의 모습이 더 사랑스러울 뿐이었다. 점점 깊고 짙어지는 온기에 온몸이 들썩이며, 점점 걷잡을 수 없는 기분에 빠져들었다. 아멜리아는 어쩐지 낯설지 않은 갈증이 빠르고 불규칙적으로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떨리는 미소를 그렸다.
‘그래. 이제 이게 뭔지 정확히, 알겠어.’
서로에게 닿을 때마다, 상상할 수도 없었던 감각과 열기가 흐르고 있음을 느꼈다. 연신 그녀를 몰아붙이던 이클리트가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시작도 하지 못한 그의 욕망이 그를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클리트는 초인적인 힘으로 이 짐승 같은 욕구를 누르며, 그녀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이제 겨우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는데. 더 큰 욕심을 부릴 수는 없었다.
“다들 부인을 찾을…….”
하지만 아멜리아가 곧장 그의 목덜미를 끌어당기며, 그가 멀어지지 못하게 했다. 이클리트는 부서질 듯, 눈을 크게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늘 밤은 아무도 날 찾지 못하게 해줘요.”
“…….”
“여기 있으면 그럴 수 있잖아요. 오늘 밤은, 대공 전하의 것이에요.”
“아멜리아…….”
그저 이름을 내뱉었을 뿐인데. 이클리트는 입안이 타들어 갈 것만 같았다.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를 들을 때마다 겨우 붙들었던 이성이 점점 흉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자꾸 대공 전하와 같이 있으면, 다른 뭔가를 바라게 되는데. 그게 뭔지 몰라서 괴로웠어요.”
아멜리아는 그를 붙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며, 떨리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자꾸만 안고 싶고, 입 맞추고 싶고, 만지고 싶고…….”
그녀의 수줍은 욕망 앞에 이클리트의 눈빛이 더 어둡게 일렁였다. 지금 눈앞에 그녀는 그에게 너무 작고 여린 짐승이었다. 단숨에 삼켜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짐승이, 겁 없이 그를 도발하고 있었다.
“대공 전하는 내가 바라는 걸 줄 수 있는 거죠? 아니면. 이번에도 내가 먼저 해요?”
이클리트는 조금 무서운 호흡을 길게 내뱉으며 읊조렸다. 어느새 그의 눈빛도, 목소리도 모든 게 평소와 달라져 있었다.
“그 뭔가를, 해도 되는 건가?”
그는 천천히 그녀를 바닥으로 밀어붙였다. 육중한 체구가 그녀의 몸을 압박했지만, 아멜리아는 이상하게 두렵지가 않았다. 이클리트가 그녀의 말간 얼굴을 가만히 음미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위아래로 깨물고서 조심스럽게, 하지만 끊임없이 허락을 구했다.
“이렇게 해도 되고, 여기. 여기도, 이렇게. 그댈 사랑하게 해줄래요?”
간지럽게 쏟아지는 입술이 점차 깊어지며, 하얀 목덜미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속삭임은 다정했지만, 더없이 집요하게 그녀를 탐하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저도 모르게 몸을 들썩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가빠오는 심장 소리가 입 밖으로 야릇하게 번질 것 같았다.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리를 타고 내리며, 등 뒤에 있는 코르셋 리본을 슬쩍 붙잡았다. 위태롭게 걸린 손가락은 끊임없이 꿈틀거렸고, 아멜리아는 이게 그의 마지막 허락임을 깨달았다. 이클리트는 말없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멜리아는 몹시 긴장되고 떨렸지만, 당장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갈망이 그녀를 괴롭힐 것 같았다. 아주 오래 기다렸던, 이 낯선 감각이 지금 너무나도 그를 원하고 있었기에. 그의 손을 붙잡고서 함께 코르셋 리본을 당겼다. 스르르, 리본이 풀리면서 두 사람의 시선이 다르게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이제 다른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서로가 아닌 다른 건 송두리째 사라져버렸다. 서로의 시선과 닿아 있는 손끝과 귓가에 부서질 듯 들리는 서로의 호흡만이 전부였다.
“내게 당신을 새겨줘요.”
“…….”
“내 처음을, 온통 당신으로 지워지지 않게. 그렇게 안아주세요.”
그녀에게 닿은 그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이클리트는 그의 세상 전부를 오롯이 바라보며.
“그대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뜨겁고 부드러운 어조로 그녀를 삼켰다.
“알게 해줄게.”
입술을 비집고 들어선 난폭한 압박감에 아멜리아는 몸이 서늘하게 떨렸지만, 그래도 좋았다. 멈추고 싶지 않았다. 아니, 너무 간절히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몰아치는 호흡이 끊어지지 않고서 서로를 빈틈없이 끌어안았다. 그가 그녀의 드레스를 조금씩 벗겨내기 시작하자, 시원한 공기가 살결에 느껴지며 아멜리아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분명, 바닥이 차가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갑자기 푹신한 느낌과 함께 주변으로 익숙한 꽃향기가 느껴졌다. 아멜리아는 설마, 하면서 살짝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바닥부터 시작해서 그녀의 주변으로 제비꽃이 무수히 피어있었다. 마치 제비꽃이 침대가 된 것 같았다.
“이게…….”
이클리트는 몹시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달랬다.
“미안해, 힘을 써 버렸어. 하지만 당신을 아무 곳에서나 안을 수는 없으니까…….”
아멜리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그가 만들어준 제비꽃에 폭 안겼다.
“이런 침대는 처음이네요. 너무 예뻐요.”
이클리트는 부드럽게 풀린 아멜리아의 미소를 보며 다시금 그녀에게 다가섰다.
“그대보다 예쁘진 않아.”
아멜리아의 눈가와 코끝, 입술을 타고 목덜미와 그 아래로 훑어 내리며 속삭였다.
“당신보다 향기롭지도 않고.”
그가 그녀의 옷을 완전히 벗겨내자, 아멜리아가 크게 숨을 헐떡이며 그의 커다란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녀 역시 손을 뻗어, 그의 옷을 하나하나 벗겨냈다. 마침내 조각처럼 완벽한 육체가 그녀 위를 드리우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욕망 섞인 숨을 삼켰다. 저도 모르게 그의 몸을 어루만져보고 싶었다. 이클리트는 아멜리아가 제 등에 있는 흉측한 상처를 볼 수 없도록 했다. 그녀에게 무서운 걸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이 순간엔, 예쁘고 아름다운 것만 기억하게 하고 싶었다. 그때, 시선을 내리깐 이클리트는 그녀의 심장에 새겨져 있는 제비꽃을 보고 멈칫했다. 그의 시선을 깨달은 아멜리아는 애써 침착하게 미소를 지었다.
“제비꽃을 너무 좋아해서, 새겼어요.”
“그대의 심장에.”
“맞아요.”
“……부럽군.”
이클리트는 제비꽃 위로 지그시 입술을 눌렸다.
“하!”
꽃잎이 떨어지는 것과는 다른 달콤한 통증이 순식간에 그녀의 입술을 벌렸다. 이클리트는 집요하게 제비꽃의 향을 음미하며 읊조렸다.
“나도 여기에 새겨지고 싶어.”
“대, 대공 전하…….”
“그대에게 제비꽃은 소중하니까. 이 순간만 기억해. 다른 나쁜 건 잊어버리고.”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에드조프가 준 제비꽃 때문에 생긴 무수한 나쁜 기억들.
“이제 날 먼저 생각해줘요. 아니, 나만 생각해.”
다정한 집착 끝에, 그의 온기가 점점 더 깊고 가까워지자 아멜리아는 터지는 숨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의 열기에 살결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에게 닿는 곳마다 달콤한 전율이 일어 미칠 것 같았다. 숨이 멎을 것처럼, 더욱 간절히 원했다. 비록 이 심장의 꽃은 죽어가고 있지만. 그에게 사랑받는 이 순간, 처음으로 제대로 살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더없이 행복해서 눈물이 날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안기는 게 이렇게 좋은 거구나. 이런 거구나. 그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온몸으로 느껴져……’
아멜리아는 자꾸만 기분 좋게 흐트러지는 시선을 그에게 바로 맞추었다.
‘당신은 항상. 항상 날 너무 예쁘게 만드는구나.’
이클리트는 난생처음으로 간절히 소망했고, 끝내 이뤄진 이 환희 넘치는 자신의 전부 앞에 무릎을 꿇고서 애원하고 싶었다.
“시간이 멈춰버릴 만큼. 이대로 영원히 머무르고 싶을 만큼.”
“…….”
“아멜리아, 그대가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
“……이클리트…….”
사랑하는 여인이 불러주는 그 이름 하나에 이클리트는 세상 전부를 가진 듯, 벅차올랐다. 그는 한 번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아멜리아를 품에 안았다. 첫 순간의 아픔도. 낯설게 휘몰아치는 절정의 순간까지, 그녀와 끝까지 함께 했다. 이클리트는 자신의 품에서 한껏 헝클어진 모습으로 안겨 있는 아멜리아를 다독여주었다. 아멜리아는 정말이지 손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느껴졌다. 제 몸 구석구석까지, 제비꽃 향기와 함께 새겨진 안온한 그의 흔적이. 아마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이제 시작이었다.
‘내 몸에 하나하나. 그를 넘치도록 새길 거야. 죽는 그 순간까지, 내 몸에서 그가 지워지지 않도록…….’
“아멜리아.”
그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다시금 그녀의 심장을 건드렸다.
“사랑해. 점점 더, 그댈 사랑하는 것밖에 모를 거야.”
이보다 진심일 수 없는 한마디에 아멜리아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렇게 속삭이는 그의 눈가도 나직이 떨리며 젖어 들었다. 더는 감히 바랄 것도 없이 전부 이뤄진 이 순간. 이클리트는 더 소중히 그녀를 끌어안았고, 아멜리아 역시 온전히 그에게 제 몸을 기대었다.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오랫동안 음미하고 또 음미하면서. 제비꽃의 향기가 유난히 더 달콤하고 감미롭게 그들에게로 내려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