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악몽일 뿐이다2021.11.19.
이클리트는 한가득 제비꽃을 품에 안았다. 매일 아침 그녀에게 주었던 것. 그걸, 이제 다시 그녀에게 줄 수 있었다.
‘진짜 나의 아내니까. 영원히, 함께할 테니까.’
그런데 침실에 그녀가 없었다. 이클리트는 멍한 시선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부인?”
밖으로 나온 이클리트는 어떤 인기척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이 넓은 저택에 자신 혼자 있는 것처럼.
‘다들 어디 있지?’
“부인? 부인? 아멜리아!”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는 건 상관없었다. 이클리트는 계속해서 아멜리아를 찾았지만, 어디에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이클리트는 뭔가 기분이 이상해지면서, 두려워졌다.
“아멜리아! 어디 있어? 어디 있는 거야?”
어느새 이클리트는 그 넓은 저택을 마구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눈앞으로 기묘한 풍경이 펼쳐졌다. 황량한 들판에 우뚝 솟아 있는 단 하나의 묘비. 이클리트는 이상하게 그쪽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멋대로 걸음이 그 묘비를 향해 걸어갔다.
‘싫어. 멈춰. 뭐 하는 거야…….’
의지와 상관없이 걸음이 묘비에 멈춰 섰고, 묘비의 주인을 본 순간, 그의 시야에서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아멜리아 클리오 피오레.>
“아니야…… 저기에, 왜. 저 이름이, 왜…….”
순간, 그는 가지고 있던 제비꽃을 그 묘비 앞에 내려놓았다. 제비꽃을 받고서 너무나도 좋아해야 할 그녀는 보이지 않고. 음울한 바람만이 제비꽃을 흔들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이클리트는 그 어떤 것도 제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이 삭막한 세계가 꿈임을 깨달았다. 그에겐 한 세계가 끝장나버린, 종말과도 같은 악몽이었다. *** 아멜리아의 눈앞으로 익숙한 장소가 보였다. 대 회의가 열렸던 장소. 여긴, 솔라리스의 여름 궁이었다.
‘뭐지. 갑자기 여긴 왜?’
하지만 빛으로 가득했던 황궁은 시커먼 어둠이 눅진하게 잠겨 있었다.
‘이상해. 어둡고, 무서워…….’
여길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뒤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변 풍경이 변하질 않았다. 계속해서 제자리를 맴돌던 그녀의 걸음이 한곳에 우뚝 멈춰 섰다.
“하아…….”
여름 궁, 가장 높은 곳에 홀로 우뚝 솟아 있는 황좌. 그 아래에는 붉은 피와 새까만 깃털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다.
‘이게, 뭐지?’
아멜리아는 어쩐지 섬뜩한 기분을 느끼며 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황좌에 누군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빛 한 줌 없는 공간. 음산한 그림자가 점점 그녀의 눈동자 앞에서 선명해졌다. 잔혹하게 어그러진 황좌에 홀로 앉아 있는 사람은.
“……대공 전하…….”
그가 공허한 시선으로 피가 잔뜩 묻은 칼을 쥐고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침내 황제가 된 그의 모습. 그런데 그의 옆자리인 황후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아멜리아는 섬뜩한 감각에 제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심장이, 뛰고 있지 않았다.
‘그래. 이분의 황제가 되는 날, 나는 없어. 이분의 곁에, 나는 있을 수 없는 거야…….’
그 순간, 이클리트가 아멜리아는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멜리아는 심장이 저릴 만큼 슬프게 웃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려는 순간.
“그대가 없으면.”
“…….”
“이 세계도 필요 없어.”
그는 쥐고 있던 칼을 높이 들어 올렸다. 아멜리아는 미친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 안 돼!’
그의 칼이 그의 가슴을 꿰뚫은 순간, 어둠이 세상을 완전히 삼켜버렸다.
***
“하!”
아멜리아는 눈을 번쩍 떴다. 꿈속의 잔상 때문에 그녀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순간, 그녀는 끔찍한 통증을 삼키며 상체를 숙였다. 또다시 그녀의 심장에 핀 제비꽃이 시들었음을 느꼈다. 그녀는 절대로 신음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입술을 꽉 깨물고서 버텼다.
‘들키면 안 돼. 이걸, 그분에게 말할 수는 없어…….’
조금 전 그 악몽이 너무 소름 끼치는 이유는. 꿈이, 꿈으로 끝날 것 같지 않아서. 그래서, 그래서……. 그때, 뒤에서 이클리트가 아멜리아를 와락 끌어안았다.
“대공 전하?”
빈틈없이 끌어안은 그의 손이 마구 떨리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그의 손을 잡고서,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이클리트는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더 힘을 주고서 그녀를 붙들었다.
“대공 전하, 무슨 일이에요? 어디 아파요?”
“……말도 하고 싶지 않아…….”
이클리트는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를 삼키며,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의 입술이 어젯밤 내내 지폈던 그녀의 열기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하아…….”
아멜리아는 무의식중에 새어 나온 붉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떨었다. 그의 거친 듯, 달콤한 입맞춤에 심장에 박혔던 통증이 사그라지고 있었다. 이클리트는 끊임없이 그녀를 매만지고, 입을 맞추며, 그녀를 느꼈다. 그 기분 나빴던 악몽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내고 싶었다.
‘말도 안 되는 악몽이다. 그녀가 내 곁에서 없어지다니. 그런 일은 없어. 나는 언젠가 그녀와 함께 죽을 거니까.’
이클리트는 아멜리아의 귓가로 간절하게 속삭였다.
“언제나 내 곁에 있어요.”
“…….”
“눈을 뜨면 언제나 당신을 안을 수 있게. 앞으로는 이 행복이 너무 당연한, 그런 일상이 될 수 있게.”
아멜리아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손을 힘주어 붙잡았다.
“절대로 당신을 잃을 수 없어. 잃지 않아. 이제 다시는, 놓을 자신이 없어.”
아리게 파고드는 그 불안감을 아멜리아는 온몸으로 느끼며, 아주 조심스럽게 몸을 돌렸다. 이클리트도 그제야 아멜리아를 온전히 마주 보았다.
“대공 전하. 제 드레스 안쪽을 보면 뭔가가 있을 거예요.”
“무슨?”
“그것 좀 꺼내줄래요?”
이클리트는 의아한 표정으로 바닥에 벗겨져 있는 드레스를 뒤져서 뭔가를 꺼냈다.
“이건…….”
바로 그가 아멜리아에게 준 얼음 목걸이였다. 아멜리아는 침대 끝으로 다가와서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공 전하와 멀어지고, 목에 걸 수는 없었지만 차마 다른 곳에 버려둘 수도 없었어요.”
“…….”
“나는 대공 전하를 잊은 적이 없어요. 잊을 수가 없었어요.”
“아멜리아…….”
그녀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서 말했다.
“그 목걸이, 다시 나한테 걸어줘요. 우리의 증표예요. 나는 당신의 것이고, 당신도 내 것이라는.”
“그럼 이것도 필요하겠네요.”
이클리트 역시 벗겨진 옷 주머니에서 아멜리아가 준 반지를 꺼냈다. 아멜리아는 그걸 보며 역시나, 하는 미소를 지었다.
“가지고 계셨네요.”
“당연하죠.”
아멜리아는 그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고, 이클리트 역시 그녀의 목에 목걸이를 채워주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채우는 증표를 어루만졌다.
“우린 이제 정말로 부부니까.”
이클리트는 양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서 아멜리아의 달콤한 말을 삼켰다.
“매일매일 더 사랑할 겁니다. 언제나 그랬듯…….”
“내가 살아 있는 한, 대공 전하와 함께할 거예요.”
다시 한번 그의 온기가 깊이 녹아내리며 번졌다. 단 하루 만에 그에게 중독되어버린 아멜리아는 머릿속의 두려움을 하나하나 지워갔다.
‘그건 그저 꿈이야. 내 두려움이 꿈으로 나타난 것뿐이야. 그렇게 되지 않도록, 그에게 나 말고 특별한 것을 잔뜩 만들어줄 거야.’
그가 더는 외롭지 않게, 제대로 살 수 있도록.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오직 오늘만을 생각할 거다. 죽는 그 순간까지, 이분을 사랑할 거니까. 그가 쏟아내는 사랑 속에서 그녀는 심장의 통증을 겨우 누르고 외면했다. *** 샤워를 마친 아멜리아의 곁을 이클리트가 마치 강아지처럼 딱 붙어서 쫓아다녔다. 사실 옷 시중으로 마미를 불러야 하는데, 조금 난감하고 쑥스러워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이클리트가 드레스룸까지 쫓아 들어와서 말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네?”
“혼자서는 못 입잖아요. 끈도 내가 잘 묶는 거, 지난번에 보여준 것 같은데.”
“아니, 그렇긴 한데…….”
그렇다고 옷을 입혀 달라고 하는 건!
“어제 벗겨주기도 했잖아요.”
“대, 대공 전하!”
그는 나직이 웃었고, 아멜리아는 부끄러움에 살짝 토라졌다. 이클리트는 그 모습조차도 사랑스러웠다. 어제는 한 사내를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뒤흔들었으면서. 지금은 또 저렇게 수줍어서 어쩔 줄 몰라 하다니 말이다. 그녀의 저런 모습은, 오직 자신만이 볼 수 있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아. 전부. 전부 다 내 것이야.’
“돌아서봐요.”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결국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에게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슈미즈를 입히고, 코르셋을 채웠다. 그의 손길이 살결에 스칠 때마다, 어젯밤이 생생하게 떠올라서 절로 등허리가 꼿꼿해졌다. 이클리트 역시 자꾸만 흘러내리는 그녀의 보랏빛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내리다가, 자신도 모르게 살짝 힘을 주곤 그녀의 가녀린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자, 잠깐…….”
그녀는 움찔하며 자신의 목덜미를 가렸다.
“그렇게 해버리면 들키잖아요!”
“부부니까, 상관없잖아요.”
“그래도…….”
너무 부끄럽잖아! 아멜리아의 눈동자가 잘게 떨리며 깜빡이자, 그는 입꼬리를 깊이 올리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이렇게 하면 다 가려지죠?”
“당분간은 묶고 다닐 수 없겠네요.”
“당분간?”
“응?”
“당분간이 아닐 텐데.”
그가 위험스럽게 속삭이며 그녀의 슈미즈를 살짝 끌어내리자, 아멜리아가 재빨리 그의 손을 붙잡았다.
“입혀주시기로 하셨으면서!”
“벗기고, 다시 입혀주겠습니다.”
이클리트가 단숨에 그녀를 들어 올려서는 입술부터 시작해서 온 얼굴에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 이 아찔한 공격에 아멜리아는 자꾸만 몸이 풀렸지만, 이성을 꽉 붙잡고서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 안 돼요!”
아멜리아가 밀어내자, 이클리트가 눈에 띄게 눈꼬리를 축 내리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슬쩍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를 계속 보고 있다가는 정말로 홀라당 먹혀버릴 것 같았다.
“진짜 안 돼요. 여기가 피오레 공작가도 아니고…….”
“부부니까, 이해해줄 겁니다.”
“카르티아 공도 만나기로 했어요. 아무튼 일단 지금은 안 돼요.”
“그럼 나중엔 괜찮은 겁니까?”
열망 섞인 이클리트의 눈동자가 집요하게 아멜리아를 바라보았고, 아멜리아는 그 눈빛만으로도 속이 뜨거워지면서 겨우 입을 달싹였다.
“그, 근데 그 밀주 사건은 어떻게 됐어요?”
이클리트는 아멜리아의 말에 표정이 확 굳어지면서 이제야 아멜리아에게서 조금 멀어졌다.
“카마리 경이 확인해본 결과, 여기로 밀주가 유통됐지만 정작 후야제에 쓰인 술은 밀주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미 전부 쓰인 겁니다.”
“……사냥 대회에요?”
대답 없는 침묵이 모든 것을 뜻했다.
“그럼 정말 밀주가 반인반수를 찾아내는 도구라는 거네요.”
“그렇게 예상합니다.”
이클리트는 괜스레 입안이 바짝 말라서, 물 한잔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사실 반인반수는 그렇게 자유롭게 짐승의 모습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둥이는 완전한 여우의 모습이었는데.”
“그래서 그 밀주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의 말에 무거운 어조를 띠었다.
“그 밀주가 반인반수를 마음대로 짐승화 시킨다는 거네요.”
“일명 야성이죠. 달 없는 밤, 그들의 또 다른 존재를 일으키는.”
“…….”
“밀주가 억지로 야성화 시키지 않으면, 반인반수를 찾아낼 수 없으니까. 그들은 절대로 정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인간과 똑같지 않으면, 곧바로 죽음이니까.”
“죽음. 아무 죄도 짓지 않았는데, 그저 존재한다는 이유로?”
“살아 있는 것이 죄악이니까.”
이클리트는 불안한 손길에 힘을 주고서 겨우 물을 전부 마셨다. 하지만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다. 그녀의 반응 하나하나가 그를 애타게 했으니까.
“수인을 받아들이지 못한 인간.”
그때, 아멜리아가 묘한 말을 뱉었다.
“수인을 시기 질투하면서, 정령을 탐내려다 완전히 마법을 잃은 인간들은, 결국 그 증오의 대상으로 반인반수를 택한 거네요.”
“…….”
“역시 인간은 이기적이네요. 항상 힘으로 정복하고, 복종시키려고 하고. 가지지 못한 것을 한없이 욕심내고 말이에요. 인간이 그저 살아가듯, 수인도 그저 살아갔을 뿐인데.”
“부인.”
“반인반수를 누군가 이용하려고 한다는 건데, 분명 인간이겠죠?”
아멜리아의 말에 이클리트의 표정이 다시금 어두워졌다.
“이유가 뭔지는 몰라도, 또다시 인간의 욕심으로 상처 입히고 있는 건 확실해요. 둥이는 이용당하고 있어요. 자기 의지를 잃은 채, 도구로 묶여있다고요. 난 그런 둥이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어요. 슈란 씨한테 반드시 숲으로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아멜리아의 입에서 슈란이 나오자, 이클리트는 살며시 주먹을 움켜쥐었다. 사실 둥이가 반인반수라면, 슈란 그 자도 수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확실하진 않았기에, 이클리트는 말을 아꼈다.
“그럼 이제부터 나도 대공 전하와 함께 밀주를 파헤쳐봐야겠네요. 반인반수를 이용하는 이가 황실까지 접근했으니, 이건 솔라를 위해 다섯 공작가인 내가 나서야 할 일이에요.”
“말릴 수가 없겠군요.”
“그런데 대공 전하는 생각보다 수인이나 반인반수에 대해서 잘 아시네요.”
아멜리아는 이클리트를 바라보며 물었고, 이클리트는 잠시 멈칫하다 의연하게 고개를 돌렸다.
“제가 아는 건 이게 전부입니다.”
“……그렇군요.”
예전엔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기에, 그의 속을 전혀 알 수가 없었는데. 이젠 조금 알 것 같았다. 그가 뭔가 숨기고 있을 땐.
‘나를, 제대로 보지 못해.’
다른 사람에겐 몰라도 적어도 그는 자신에겐, 그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