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덫을 놓다2021.12.20.
“바, 반인반수라니…….”
에드조프의 한마디에 파장은 컸다. 대신관은 놀라 굳어졌고, 신관의 낯빛은 파리하게 변했다. 에드조프는 그들의 반응에 아차, 하며 말을 돌렸다.
“아, 물론 아닐 가능성이 더 큽니다. 갑자기 반인반수라니. 그들은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고, 이런 공격성을 보일 리도 없죠.”
“아니요.”
하지만 알렉드라만이 에드조프의 말에 눈빛을 번뜩였다.
“바스티얀 대공 전하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괴물 같은 놈들인데,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요. 그 괴물들이 드디어 본성을 드러낸 거라면?”
알렉드라는 시신 가까이 다가가서 주위를 살폈다.
“신관님이 본 건 분명 짐승인데, 짐승 발자국은 없고 오직 사람 발자국만 이렇게 있습니다. 게다가 두 개의 발자국. 같은 발자국은 아닙니다. 크기가 다르니까.”
알렉드라는 발자국을 노려보며, 차갑게 읊조렸다.
“놈이 불완전한 짐승의 모습으로 이 신관님을 죽였다면. 모든 증거가 성립되지요.”
대신관은 알렉드라의 말에 믿어지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달 없는 밤도 아닌데 반인반수가 짐승화가 되다니.”
“괴물들인데, 뭔들 못 하겠습니까?”
알렉드라는 시신이 꽉 쥐고 있는 술병을 들어 올렸다.
“이 병, 술병 같은데…… 요즘 이런 술병과 함께 실종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대신관은 자신도 들어본 적 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저도 들었습니다.”
“그 실종 사건은 짐승 발자국과 사람 발자국이 동시에 찍혀 있다고 하지요. 이 술도 수상하군요. 어쩌면 그 사건과 이번 사건이 연관 있을지도 모릅니다.”
에드조프는 점점 의심이 확신이 되어가고 있는 상황을 지켜보며, 또다시 한마디의 불을 지폈다.
“그 술이, 반인반수에게 무슨 영향을 주는 걸까요?”
그러자 포르티셰 기사가 말을 덧붙였다.
“북부에서 내려온 밀주라고 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밀주 거래가 커져서, 뒷골목 위주로 살펴보던 중, 경로를 알게 되었습니다.”
“북부라면, 클리오 대공 전하께서 뭔가 아실지도 모르겠군요.”
대신관의 말에 알렉드라는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이 실종 사건의 범인이 반인반수라면, 이 술이 분명 연관 있을 겁니다. 그럼 북부의 책임도 피해갈 수 없을 테고 말입니다.”
이미 그의 어조엔 확신이 차 있었다.
“대신관님, 이번 일은 철저히 조사해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포르티셰 공작 각하.”
대신관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만약 정말로 반인반수에게 신관이 당했다면, 아무리 죄인이라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신을 모욕한 것입니다.”
“게다가 어쩌면 반군의 짓일 수도 있고요.”
알렉드라는 우려하는 척, 마치 그걸 원하는 어조를 띠었다.
“첫 실종 사건이 벌어진 곳과 루베르가 있는 영지가 멀지 않았다고 했으니. 모든 가능성을 열어둬야지요. 나는 솔라를 지키는 기사로서, 루베르를 절대로 믿을 수 없습니다.”
알렉드라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안 그래도 그는 루베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피오레 가주가 뭣 모르고, 선을 넘어서까지 루베르를 감싸는 것도 거슬렸다. 어쩌면 이번 일에 루베르가 얽혀 있을지 모른다. 아니, 알렉드라는 확신했다.
“루베르라니…….”
대신관이 의아한 듯 읊조렸으나, 알렉드라는 완강했다.
“갑자기 반인반수가 날뛰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누군가 뒤에서 그들을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황궁에서 갑자기 짐승이 날뛴 것도 어쩌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알렉드라는 그때의 치욕을 잊지 못했다. 포르티셰 공작가가 피오레 공작가에게 얼마나 치욕을 당했던가! 만약 황궁을 공격한 게, 정말 반인반수고. 루베르라는 게 알려지면.
‘이참에 루베르 놈들을 확실하게 척살할 방도가 생길지도 모른다. 눈엣가시인 그 피오레 가주 계집도 눌러주고. 운 좋으면 클리오 대공까지 한꺼번에 없앴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 괴물들이 설치게 놔둬선 안 됩니다. 그것도 이 솔라 제국에서! 전부 멸해야 합니다. 관련된 이들 전부 다. 포르티셰 공작가의 명예를 걸고, 이번 일을 맡겠습니다.”
살의가 담긴 알렉드라의 표정을 보면서, 에드조프는 입꼬리를 짙게 올렸다. 덫은 뿌려졌고, 이제 시작이었다.
‘이클리트. 네 정체를 밝히지만 않고, 이용만 하면 되는 거지. 그러다가 실수로 정체가 드러나면, 어쩔 수 없는 거고.’
모든 화살이 북부와 이클리트를 가리키도록 할 거다. 그리되면, 악화한 여론이 이클리트, 나아가 황궁을 압박하기 시작할 거다.
‘폐하는 널 버릴 테고, 넌 아멜리아를 떠나야 할 거야. 아니, 아멜리아도 널 버릴 테지.’
에드조프가 알렉드라를 끌어들인 것도 그가 가장 루베르에 적개심을 많이 품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다섯 공작가 중 피오레 다음으로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고.
‘포르티셰 공작이라면 아주 악착같이 물어뜯을 거야. 이번 기회를 놓칠 리가 없지.’
짐승들이 날뛰는 건 이제 시작이다. 반인반수. 그 괴물이 자신과 관련 있다고 상상이나 할까. 전부, 이클리트. 그 괴물 놈을 향할 테니까. 에드조프는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짓고서, 대신관을 다독였다.
“대신관님, 이번 일은 포르티셰 공작 각하와 더불어 바스티얀 대공가에서도 협조하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모든 정황이 사실로 드러나면, 솔라 제국의 새로운 위기입니다.”
“그렇지요.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혹시 모르니 신성회에서 야생 짐승들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하도록 하시지요. 반인반수는 숨기더라도, 그 정도는 해서 제국민들을 보호해야 하니까요.”
“물론입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 케이트는 아멜리아에게 편지 한 장을 건넸다.
“신성회에서 오늘 아침, 제국민에게 알린 내용입니다.”
편지를 읽은 아멜리아의 표정이 하얗게 굳어졌다.
“이건…….”
-태양신의 가호를 받는 솔라 제국민 여러분. 참으로 무서운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짐승에게서 이상 반응이 일어나며, 제국민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있습니다. 모두 조심하십시오. 태양신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저주받은 이들이 신을 능멸하며 벌이는 소행일지 모릅니다. 저희는 포르티셰 공작가와 바스티얀 대공가와 함께 이번 일을 명명백백히 밝혀낼 것입니다. 특히, 북부에서 밀거래되는 밀주가 이번 일과 관련되어 있으니, 절대로 그 술을 가까이하지 마십시오.-
“포르티셰 공작가와 바스티얀 대공가?”
아멜리아는 신성회가 공식 발표한 성명문에 낯익은 이름이 박혀 있자, 기막혔다.
‘대체 이들이 신성회와 어떻게 같이 움직이는 거지? 게다가 이 성명문, 이번 사건을 교묘하게 저주받은 북부 탓으로 돌리고 있잖아.’
“가주님.”
그때, 이사나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이사나는 아멜리아가 들고 있는 편지를 보며 말했다.
“보고 계셨군요. 신성회가 움직인 이유가 이것 때문인 듯합니다.”
이사나는 오늘 아침에 티어에게 올라온 밀서를 보였다.
“우리에게서 도망쳤던 신성회 신관, 그자가 포르티셰 공작령 신전에서 죽은 채 발견됐습니다.”
아멜리아는 이사나의 말에 단숨에 깨달았다.
“이 신관의 쓰임이 신성회를 이렇게 움직이게 하려고…… 설마, 이 신관. 짐승에게 당한 건가요?”
“예. 겉으로는 그러한데, 얼핏 눈치채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반인반수의 짓이라고 말입니다.”
아멜리아는 이사나의 말에 난감해졌다.
“신성회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포르티셰 공작까지 나섰으니 더 그러겠죠. 그런데 바스티얀 대공은 대체 왜…….”
“때마침 바스티얀 대공 전하와 포르티셰 공작 각하께서 신전에서 기도회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사건 현장을 같이 발견한 듯합니다.”
아멜리아는 순간 냉소를 그렸다.
‘이게 우연이라고?’
장마에 기도회를 열긴 하지만, 바스티얀 대공이 갑자기 포르티셰 공작령까지 가서 함께 기도회를 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함께 한 자리에서 우연히 이런 사건이 벌어졌다라…….
‘밀주의 주인은 아멜리아를 도와주고, 신관을 이용해 신성회에 적개심까지 불어넣었어. 그리고 그 적개심이 향할 곳. 이미 밀주가 북부에서 왔다는 게 알려졌으니.’
편지를 움켜쥔 아멜리아의 손끝이 하얗게 떨려왔다.
‘이들은 루베르와 북부, 아니 대공 전하를 동시에 노리고 있구나.’
그리고 이 일에는 에드조프가 있어. *** 비가 거세지고 있었다. 이미 날은 저물었고, 이런 날씨에 피오레에서 체자렛으로 이동하기 위해 아리나 숲을 넘는다는 건 무모했다. 상인들은 숲 초입에서 짐 마차를 세운 채, 서로 웅성거리며 말했다.
“비가 너무 험해. 오늘은 그냥 여기서 쉬자고.”
상단주의 말에 다들 동의했다.
“그래. 괜히 무리했다간, 위험할 거야. 안 그래도 요즘 비 오는 날, 소문이 흉흉한데.”
그때, 잠자코 있던 신입 상인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지금 이동하지 않으면, 시간을 제때 맞추지 못할 텐데요.”
“그건 그렇지만…….”
“아리나 숲이 위험할 게 뭐가 있습니까? 저긴 체자렛 백작령 소지에, 원래도 길목인걸요. 서둘러 이동해서 중반까지만 가도, 시간 맞혀서 거래할 수 있을 겁니다.”
머뭇거리던 이들도 신입 상인의 말에 동요했다.
“하긴. 중반까지만 가도…….”
“우리가 이 숲을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
“거래에서 신뢰는 필수지. 우리가 신입보다 생각이 못 했군. 자, 자. 빨리 이동하자고.”
그렇게 상인들은 신입 상인의 주도하에, 아리나 숲 안으로 이동했다. 상인들은 대형을 유지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원래 험준한 숲은 아니지만, 그래도 워낙 소문이 흉흉하니 내심 긴장된 표정이 역력했다. 게다가 오늘은 신성회에서 그런 성명문도 내놨으니 말이다.
“신성회에서 직접 짐승을 조심하라고 하다니.”
“그 밀주와 관련 있는 모양이야. 북부에서 시작됐다고 들은 것 같기도 하고.”
“거긴 저주받은 곳이잖아. 루베르 놈들도 살고 있고.”
“피오레 가주님은 왜 그런 불길한 놈들에게 폐하께서 하사하신 영지를 주신 건지…….”
“이러다 무슨 사달이라도 나는 거 아니야?”
얼마쯤 걸었을까. 어느 정도 중반부에 다다른 것 같았기에 상인들은 마차를 세웠다. 상단주는 주위를 살펴보며 입을 열었다.
“이쯤에서 야영을 하도록 하지. 더 가다간 진짜 위험할 것 같아.”
“예, 대장!”
그들은 짐 마차를 꼼꼼하게 세운 뒤, 천막을 치고 야영 준비를 서둘렀다. 이런 밤에는 어떻게든 불을 피워야, 덜 위험할 수 있었다. 혹시 모를 산짐승도 쫓아낼 수 있었고. 물론 비가 거세고, 주변이 습해서 불붙이기가 워낙 까다로웠지만, 어떻게든 천막 아래 자리를 잡고서 불을 지폈다. 그들은 체온 유지를 위해 신입 상인이 챙긴 독주도 꺼냈다. 상단주는 신입을 향해 술을 거하게 따라주었다.
“수고했다, 신입. 이렇게 먼 길 따라온 건 처음이지?”
“감사합니다, 대장. 저 때문에 괜히 무리하게 길을 나선 건 아닌지…….”
“괜찮아. 아무 일도 없었잖아. 마시고 푹 쉬어.”
“그나저나 대체 북부 밀주랑 짐승이 무슨 관계라는 거지?”
“그건 모르지. 너무 맛있어서 짐승들도 난리 나는 건가? 원래 북부 독주가 유명하긴 하잖아.”
“이야, 그럼 좀 궁금한데? 이건 밀주 아니냐, 신입?”
밀주냐는 말에 신입 상인은 그저 웃기만 웃었다. 그렇게 긴장이 풀린 상인들이 농담하면서 웃고 떠들고 있는데,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면서 모닥불을 꺼버렸다. 순식간에 덮친 어둠. 상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숨을 죽이며 두리번거렸다.
“뭐, 뭐야.”
“걱정 마. 그냥 바람이 심해서 그래. 얼른 다시 불을 지펴서…….”
그때, 뭔가 기이한 울음소리와 함께 오한이 스쳤다. 공기 중에 맴도는 팽팽하고 섬뜩한 기운. 상인들은 본능적으로 뭔가 주위를 포위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타박타박 발걸음 소리와 함께 멀지 않은 곳에서 희번덕한 시선이 느껴졌다. 바로 그들의 앞으로 늑대 무리가 나타난 것이다.
“대, 대장…… 저기. 저기…….”
상인이 겁에 질린 채, 말이 헛돌았다. 상단주는 애써 정신을 바짝 차리며 조심스럽게 술병을 집어 들었다.
“다들 내가 신호를 주면, 마차로 달려. 무조건 도망가야 해.”
이윽고, 상단주가 술병을 휘두르며 외쳤다.
“달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야영장. 상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마차로 달렸고, 늑대들은 울부짖으며 그들에게 덤벼들었다. 상단주가 마구 술병을 휘둘렀으나, 결국 술병을 놓치면서 늑대들 앞으로 술병이 깨졌다. 쨍그랑-! 날카로운 파음과 함께, 늑대들이 잠시 주춤했다. 상인들은 그 틈에 마차를 타고 도주하고자 했다.
“잠깐, 신입은. 신입은 어디 있어!”
상단주가 신입을 찾았으나, 어디에도 신입이 보이지 않았다.
“뭐야. 길이라도 잃은 거야?”
“대장, 일단 우리 먼저 도망을!”
“자, 잠깐. 저게, 저게 뭐야…….”
깨진 술병 주변으로 늑대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쏟아진 술을 홀짝이더니, 이내 포효하면서 서서히 모습이 기이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하늘에선 비바람이 몰아쳤고, 번쩍이는 벼락 아래 늑대들이 두 발로 서기 시작하며 변하는 모습은 상인들의 눈에 흡사 마물이 강림한 것 같았다.
“저, 저, 저. 괴물, 괴물은…….”
마침내 사람으로 변한 늑대들이 섬뜩한 노란 눈동자를 빛나며 상인들을 노려보았다. 정말로 나타난 것이다. 괴물이라 불리는.
“반인반수…… 악!”
사람으로 변한 늑대들이 순식간에 단검을 빼 들고서 상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빛엔 이성은 없었다. 오직 공격 본능으로 지배당한 채, 단검을 휘둘렀다. 상인들은 이 지옥 같은 광경에 온몸을 떨면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의 얼굴엔 절규만이 가득했다.
‘제발, 태양신이시여! 저희를 살려주소서. 구원해주소서. 제발, 제발 저희를!’
진흙에 발을 헛디딘 상단주가 땅을 굴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늑대가 달려와 단검을 빼 들었다.
“사, 살려줘. 제발. 살려줘!”
탕-! 그 순간, 구세주 같은 총성과 함께 늑대가 털썩 쓰러졌다. 상단주는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 시선 끝에 장총을 든 메사리나가 있었다.
“괜찮은가?”
“다, 당신은…….”
“메사리나 체자렛이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저건 또 뭐고…….”
상단주는 체자렛이라는 이름에 구세주를 만난 듯, 환호하며 메사리나의 로브 자락을 꽉 붙들었다.
“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영애가 아니었다면 저는, 저 괴물에게 죽었을 겁니다! 역시 듣던 대로 천재 머스켓티어시군요!”
그녀를 찬양하는 상단주를 뒤로 하고서, 메사리나는 자신이 죽인 반인반수를 바라보았다. 사실, 지금 그녀의 손은 마구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이곳에서 우연히 이들을 구한 것이 아니기에.
‘여기서 기다리면 때가 올 거라더니. 설마 저거야? 저 괴물? 진짜 반인반수라니. 대체 그 여자, 반인반수와 무슨 관계인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