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마침내 완성된 덫2021.12.24.
솔라 제국에 엄청난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북부에서 건너온 밀주를 마시고 난폭해진 반인반수가 상인들을 잔인하게 공격한 것이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상단주는 여전히 그때의 공포를 잊지 못한 채, 몰려온 전령사들을 향해 말했다.
“정말이지, 레이디 메사리나께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모두 죽었을 겁니다. 정말로 너무 감사할 뿐입니다.”
“이 위험한 일에, 소란을 듣고서 곧장 뛰쳐나와 저희를 위해 싸워준 영애는 아마 없을 겁니다. 레이디 메사리나는 천재 머스켓티어가 맞습니다. 저희의 구세주입니다!”
상인들이 하는 말을 전령사들이 빠르게 적어나가며, 가장 궁금한 점을 물었다.
“술을 마시고 짐승들이 난폭하게 변했다는 겁니까?”
“그냥 술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북부의 밀주였습니다. 그 밀주를 마시더니 짐승이 난폭해졌어요. 하지만 진짜 정체는 바, 반인반수였습니다.”
“반인반수가 정말 맞습니까?”
“맞습니다. 그놈들이 우리를 공격했어요. 정말로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밀주가 그들을 더욱 난폭하게 만드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괴물이에요! 인간인 척, 숨어 산다더니. 다 거짓말입니다. 이제야 그 본성을 드러낸 겁니다. 그놈들을 죄다 찾아서 죽여야 합니다!”
“우리 신입이 실종됐습니다. 분명 그놈들이 죽인 거예요. 이래서야 솔라에서 마음 놓고 이동할 수 있겠습니까? 부디 황실에서 나서주셨으면 합니다!”
상인들의 목소리는 전령사들에 의해 빠르게 기사화되어 제국 곳곳으로 번졌다. 그로 인해 반인반수에 대한 두려움은 증폭되었고, 너무 당연하게 루베르에 대한 불신은 깊어졌다. 추문 때문에 사교계에서 거의 매장당할 뻔한 메사리나는 이들을 구한 영웅으로 평판이 순식간에 뒤집혔다. *** 솔라 제국 전역이 시끄러운 가운데, 어쩌면 그 폭풍의 한 가운데 있는 피오레 공작가는 아직은 고요했다. 아멜리아는 칼렌이 보내온 밀서를 확인했다. 밀서의 내용엔 레이디 메사리나가 스스로 자숙하겠다며 체자렛 백작령인 아리나 숲으로 갔고, 기가 막힌 우연으로 그곳을 지나던 상인들이 반인반수에게 공격당하자, 구해줬다는 거였다. 그녀는 밀서의 내용에 싸늘하게 웃었다.
“메사리나가 스스로 아리나 숲에서 자숙? 상인들을 구해줬다고? 그럴 리가 없지. 이미 저런 일이 벌어질 걸 알고 그런 거야.”
때마침 규모가 큰 상단이 지나가다 변을 당했고, 그 때문에 곧장 전령사들이 몰려들어서 다음날 바로 제국 곳곳에 소식이 퍼졌다. 너무 완벽한 타이밍으로 일이 진행된 것이다.
“방울이 울렸군요.”
밀서를 같이 확인한 이클리트의 한마디에 아멜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사나와 카마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
“메사리나와 바스티얀 대공이 동시에 움직였네요. 그들이 움직이자마자, 우연인 척 북부의 밀주로 반인반수들이 사람을 공격했어요. 그토록 꼭꼭 숨기고 있던 반인반수를 수면 위로 올린 거예요.”
정말로 시기적절하게 밀주가 사용되었다. 결국.
“바스티얀 대공이 판을 벌인 거네요.”
아멜리아의 말에 이클리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반인반수임을 알고 있는 사람. 황궁의 비밀을 스스로 밝히기엔 리스크가 있으니, 에드조프가 사고를 가장하여 세상에 퍼트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밀주의 주인이 바스티얀 대공 전하와 관련 있는 사람이라는 거군요.”
카마리의 말에 아멜리아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바스티얀 대공이 클리오 대공 전하를 표적으로 삼은 거예요.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 약점도 보였네요. 이번 밀주 사건의 주인을 밝혀내면, 바스티얀 대공도 끌려 나오게 되어 있어요.”
밀주의 배후에 에드조프가 있다. 즉, 반인반수를 끌어들이는데 에드조프가 공조했다는 거다. 이 사실이 밝혀지면, 에드조프는 완벽하게 추락한다. 이사나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칼렌이 곧 당도할 겁니다. 방울을 가지고.”
그의 말에 아멜리아와 이클리트의 표정이 묘한 빛을 띠었다.
“하지만 그전에 가주님.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이사나의 말에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이번 일로 루베르에 대한 얘기는 안 나올 수가 없습니다. 분명, 가주님을 향한 원망의 목소리가 높아질 겁니다.”
이클리트는 이사나의 말에 온몸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끝까지 의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언제나 거짓은 부지런하죠. 하지만 그럼에도 거짓이기에 빈틈은 있기 마련이에요. 우린 최대한 침착하게 움직이면서, 그 빈틈을 찾으면 돼요. 그럼 거짓은, 반드시 무너져요.”
*** 제국에 반인반수가 나타나 사람들을 공격한다는 보고는 결국 아스란에게 닿았다. 에리얼의 보고를 받은 아스란은 몹시 흥미로운 눈빛을 띠었다.
“북부에서 시작된 밀주가 황궁에서 짐승들이 이상해진 것과도 관련 있는 것 같습니다. 포르티셰 공작의 보고에 따르면, 밀주는 육식계 짐승에게만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카르티아에서 열린 사냥대회에서 멧돼지가 갑자기 날뛴 것도 현재 조사 중입니다.”
“결론만 짧게 말해.”
아스란의 말에 에리얼은 한마디로 정리했다.
“반인반수가 정말로 나타났고, 제국민들 모두가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아스란은 비릿한 냉소를 그렸다.
“갑자기 그들이 움직인단 말이지.”
아주 꼭꼭 숨어있던 그들이 움직이며 솔라 제국을 뒤집기 시작하자, 아스란은 자연스럽게 이클리트를 떠올렸다.
“아닌가. 스스로 움직인 것이 아니고, 억지로 끌려 나온 건가? 반인반수를 찾아내는 밀주라니.”
만약, 그 밀주에 이클리트가 반응한다면?
‘아직 포기하지 않았어. 시간의 숲을 열 열쇠!’
일순, 아스란의 안광에 광기가 서리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이번 일로 이클리트를 죄어야겠다. 북부에서 시작됐으니, 북부도 책임을 면치 못해.”
듣자 하니 포르티셰 공작이 선두에 서서, 에드조프와 함께 움직이고 있다고 들었다. 신성회까지 그들 편에 서 있는 것 같고. 포르티셰 공작으로서는 기회를 잡은 셈이다. 항상 루베르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며 호시탐탐 다섯 공작가에서 제외할 기회만 노렸으니 말이다. 이참에 그들을 완전히 척살할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아스란으로서도 루베르가 시간의 숲과 관련해서 도움 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없애버리는 게 나았다. 괜히 반군으로 커지게 되면, 귀찮아지니까.
‘이클리트도 어떻게든 걸고넘어지겠지. 에드조프를 더 확실한 황위 계승자로 세워야 할 테니.’
“내가 굳이 건드리지 않아도, 알아서 그 밀주를 이클리트가 마시게 될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만약 그러다가 정말로 클리오 대공 전하의 비밀이 드러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에리얼의 염려에도 아스란은 흔들리지 않았다.
“정체가 드러나면, 다시 미궁에 가둬야지. 나도 속아서 이클리트를 낳은 거라고. 제국민들 앞에 더 괴물 취급하면 돼. 그리고 그것보단 열쇠가 더 중요하다.”
아스란의 목소리는 더없이 잔인하고 비정했다.
‘이클리트가 열쇠만 되어준다면. 시간의 숲만 내 손에 들어오게 된다면. 다른 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
“그나저나 루베르에 대한 불신은 더 깊어지겠군. 하필이면 실종 사건의 시작이 내가 하사한 영지와 멀지 않으니. 과연, 피오레 가주가 어찌 나오려나.”
*** 이사나의 우려대로, 갑자기 들이닥친 반인반수의 공포는 제국민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이 불안을 풀어줄 원망의 대상이 필요했던 것. 그 원망의 대상은 자연스럽게 루베르가 되었다. 따라서 루베르를 옹호하는 쪽에 가까웠던 아멜리아에 대한 비난도 점점 거세지더니, 끝내 피오레 영주민들이 공작가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가주님! 지금 당장 루베르를 피오레에서 쫓아내 주세요!”
“저들이 괴물을 부르고 있어요! 이러다가 우리 다 저들에게 공격당할 거예요!”
“클리오 대공 전하는 정말로 이 밀주에 대해서 몰랐던 겁니까!”
“그 밀주가 정말 저 괴물들에게만 반응하는 겁니까? 평범한 사람도 괴물로 만드는 게 아닙니까!”
“가주님!”
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이사나는 침착하게 티어들에게 호위 경계를 더 올렸다.
“혹시라도 피오레 공작가에 무슨 일이 벌어져선 안 된다. 블러드 아이리스의 명예를 걸고, 공작가를 안전하게 지켜낸다.”
“예, 단장님!”
티어들이 순식간에 자신들의 구역으로 사라지고, 이사나는 그제야 조금 긴장했던 숨을 내쉬었다. 그의 곁으로 자연스럽게 카마리가 섰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네요.”
“카마리 경.”
“이렇게 될까 봐, 북부에서 밀주가 시작된 걸 어떻게든 대공 전하께서 은밀히 해결하려고 하셨던 건데. 이렇게 되면, 루베르를 자연스럽게 이주하려던 가주님의 계획에도 약간의 차질이 있겠습니다.”
“희망 고문이었죠.”
냉소적인 그의 반응에 카마리가 고개를 들었다.
“언제나 결국엔 이렇게 돼요. 루베르에게 뿌리박힌 차별을 없앨 수 없을 겁니다. 겉으로는 이해하는 척해도,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은 여전히 괴물이고, 자신들과 다르다며 배척하니.”
모두가 이번 일에 루베르가 연관 있다고 생각한다. 연관되었다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는데. 이미 그렇게 낙인찍고, 칼을 꽂고 있다. 사실 증거 같은 건 상관없었다. 믿는 것만 믿으니까. 그렇게 믿는 것이 편하니까. 그들은 두려움을 해소할 뭔가가 필요할 뿐이니까.
“……루베르 얘기만 나오면 반응이 격해지는 거 압니까?”
이사나는 자신도 모르게 드러나 버린 표정을 애써 감추며 웃었다.
“그런가요? 가주님께 옮았나 봐요. 그들을 안타까워하는 거.”
그때, 카마리가 이사나의 앞으로 와서는 그를 빤히 보았다. 그 눈빛이 너무 맑아서, 이사나는 갑자기 속이 거북해졌다. 저 눈이 자신을 너무 훤히 꿰뚫는 것 같아서.
“왜요? 새삼 또 잘생겨서 반했어요?”
이사나는 괜스레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했다. 하지만 카마리가 약간 분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좋아하는 남자에 대해 너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나한테 너무 분합니다.”
“모르는 게 나은데. 그냥 카마리 경의 눈에 보이는 나만 좋아해 줘요.”
“나는 전부 알고 싶습니다.”
“…….”
“예전에 이사나 경이 나한테 그랬죠.”
‘날 너무 좋게 보지 마요.’
‘카마리 경한테 너무 미안해지고 싶지 않으니까. 이건 진심이에요.’
“이사나 경의 진짜 모습을 알고 싶습니다. 내가 이사나 경의 겉모습만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걸. 설령 이사나 경의 다른 모습에 내가 상처받아도, 그 상처를 뛰어넘고 다시 이사나 경을 좋아하면, 그땐 이사나 경이 진짜 날 좋아해 줄 것 같아서.”
이사나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순간 정말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당신을 그 정도로 사랑한다는 걸, 알려주고 싶습니다.”
또다시, 속이 이상해졌다. 이사나는 카마리의 이런 티 없는 순수함이 부러우면서도 부담스럽기에, 감당할 수 없었다.
‘난 이렇게 깨끗하지 못해. 그녀가 보고 있는 난, 전부 거짓이니까.’
자신은 증오로 똘똘 뭉쳐있다. 몹시 나약하고, 비겁하며, 증오하고 분노하지만. 두려워서 결국 이렇게 숨어 있는.
‘저런 마음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 영지민들이 공작가 밖에서 아우성이었지만, 공작가 안은 평온했다. 이런 일에 동요하지 않고, 평소처럼 똑같이 행동할 수 있도록. 케이트와 마미가 하녀와 시종들의 기강을 철저히 잡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가주인 아멜리아와 이클리트가 전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그 분위기를 따라가는 듯했다.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는 집무실에 함께 있었다. 그녀는 라니가 보낸 편지를 확인하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영지에 직접적으로 위협을 가하진 않지만, 그래도 어려움이 있긴 있네요.”
루베르는 이주한 영지에서 나오지 못했고, 루베르를 치료하던 치료사들도 다시 다 떠났다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부인처럼 의연하게 기다리고 있겠죠.”
이클리트의 말에 아멜리아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라니가 자기들은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적어놨어요.”
이런 일에 익숙하다는 말이 살짝 마음 아팠지만, 그땐 희망이 없어도 지금은 희망이 있다며, 잘 견디고 버틸 거란 말이 아멜리아가 내린 선택에 위안을 주었다. 이클리트도 예전처럼 불안한 내색 없이, 아멜리아의 곁에 묵묵히 있었다. 지금, 그녀가 끝까지 침착하게 행동하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있었다.
“칼렌 경이 가져올 방울이 우리에겐 몹시 중요해요.”
급한 건 자신들이 아니다. 어떻게든 이 판을 크게 만들려고 하는 저들이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꼬리를 밟히게 되어 있다. 크게 만들면 만들수록, 훗날 진실이 드러났을 때 빠져나갈 수 없게 될 거다. 그때, 이사나가 다급하게 집무실로 들어왔다.
“가주님, 칼렌 경이 당도했습니다.”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는 짧게 서로를 바라보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곧장 리볼버 하나를 들고서 싱긋 웃었다.
“자, 그럼 어디 방울을 울려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