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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헛된 희망이 아니에요 (105/199)

105화. 헛된 희망이 아니에요2022.01.03.

16553731594257.jpg“루베르도 피오레 영지민입니다.”

영지민들이 힘주어서 하는 말에 그들의 뒤에 있던 루베르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누군가가 이렇게 자신들의 앞에 서서 같다고 말해준 적은 없었다. 그들은 항상 절벽까지 내몰렸고, 그것도 모자라 그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쳐야 했다. 그저 수인과 어울리고, 정령들을 지키며 살았을 뿐인데. 그것은 죄가 되고, 저주로 낙인찍혀 오랫동안 살아온 땅을 잃은 채. 악착같이 버티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피오레 가주를 만나서 조금씩 달라지더니, 이번에는 진짜 살아갈 터전이 생길 것 같았다. 알렉드라는 감히 건방지게 제 앞을 막아선 영지민들을 보며 조소를 그렸다.

16553731594265.jpg“미쳤군. 저것들과 같다고? 우리가? 가주를 닮아서 제정신이 아니야. 훗날, 저들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제국은 너희를 지켜주지 않을 거다. 그게 지금 너희들이 한 선택이야.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할!”

1655373159427.jpg“그 책임은 가주인 제가 집니다.”

영지민들 앞으로 이번엔 아멜리아가 나섰다. 그러자 티어들도 그녀의 양옆으로 주르르 나서서 이들을 보호했다. 마지막으로 이클리트가 아멜리아의 곁에 서자, 알렉드라는 싸늘하게 읊조렸다.

16553731594265.jpg“아주 가관이군. 그 명문가인 피오레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는지.”

알렉드라는 이클리트를 보며 시건방진 말을 내뱉었다.

16553731594265.jpg“밀주의 책임을 대공 전하께서도 피하지 못하실 겁니다.”

16553731594283.jpg“…….”

16553731594265.jpg“이미 북부에서 시작된 걸 알고도 은폐하면서 남부에 오신 정황을 포착했습니다. 그에 대한 조사가 필요합니다.”

16553731594293.jpg“클리오 대공은 아주 예전부터 이 밀주에 대해 알고 있었던 거 아닌가?”

그때, 에드조프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울렸다. 아멜리아는 멈칫했다.

1655373159427.jpg‘대체 언제 온 거야, 여긴.’

이클리트는 지그시 주먹을 움켜쥐며 에드조프를 마주했다. 에드조프는 아멜리아에게 황명이 적힌 칙서를 보였다.

16553731594293.jpg“황명을 가져오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하지만 대충 상황이 정리된 것 같군요. 아, 하나가 빠졌나.”

에드조프는 이클리트를 향해 냉소를 그렸다.

16553731594293.jpg“밀주에 대해서 여기 있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겠지. 밀주가 정말로 짐승에게만 해를 가하는지. 사람한테는 정말 피해가 없는지. 다들 그걸 불안해하니까.”

에드조프의 은밀한 말에 주변이 웅성거렸다. 사실 가장 걱정하고 있는 지점이 바로 밀주가 정말 사람에겐 해가 없는지, 였으니까.

16553731594293.jpg“네가 증명할 수 있겠지?”

에드조프는 어디서 구해온 밀주를 이클리트에게 내밀었다.

16553731594293.jpg“네가 직접 마셔서 말이야. 그래야 저들도 의심이 사라지지 않겠어?”

그는 지금 이클리트를 협박하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에겐 해가 없지만, 반인반수라면 다르니까. 이클리트는 에드조프의 시커먼 속내에 날 선 숨을 삼키며 그를 노려보았지만, 에드조프의 눈매는 더없이 여유로웠다.

16553731594293.jpg‘여기서 넌 절대 마실 수 없겠지. 하지만 마시지 않는다면, 북부에 대한 신뢰는 더더욱 바닥을 칠 거다. 너에 대한 의심도 늘어날 테고!’

지켜보던 영지민들은 망설이는 이클리트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16553731594257.jpg“뭐지. 왜 안 마시는 거지?”

16553731594257.jpg“정말 밀주가 사람한테도 영향을 주는 건가?”

16553731594257.jpg“하지만 그게 아니면 왜…….”

웅성거림이 커지기 시작하자, 이클리트는 불안한 표정으로 에드조프가 건넨 술병을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아멜리아가 먼저 에드조프에게서 술병을 빼앗았다. 그녀는 분노를 삼킨 시선으로 에드조프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1655373159427.jpg“사람이면 누가 마셔도 상관없는 거 아닌가요?”

그리고 말릴 새도 없이 아멜리아가 병째로 마시기 시작했다.

16553731594283.jpg“부인!”

아멜리아는 순식간에 술을 절반이나 마시고는 에드조프를 보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1655373159427.jpg“자. 인간에겐 아무 해가 없어요. 그래도 못 믿겠으면.”

그녀는 남은 술을 에드조프에게 내밀었다.

1655373159427.jpg“이번엔 대공 전하께서 마셔보세요. 조사하신다면서요. 저도 마셨는데, 설마하니 대공 전하께서 무서워서 피하진 않으시겠죠?”

아멜리아는 별생각 없었다. 에드조프가 이클리트를 걸고넘어지는 게 너무 화가 나서, 그래서 너도 마셔보라고 한 것뿐인데. 순순히 마실 거로 생각했던 그가 술병을 쥔 채, 망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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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망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술병을 쥔 그의 손끝이 조금 떨리는 듯했다.

1655373159427.jpg‘뭐지? 왜 불안해하는 거지?’

그때, 이클리트가 아멜리아와 에드조프 사이로 끼어들어서는 그녀를 감싸 안았다.

16553731594283.jpg“북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북부에서 해결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니 포르티셰 공은 더는 선을 넘지 말도록.”

이클리트는 서늘한 눈초리로 알렉드라와 에드조프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16553731594283.jpg“배후가 누군지, 밀주 성분이 정확히 뭔지는 반드시 내가 밝혀낼 테니.”

완강하게 나오는 이클리트의 모습에 알렉드라도 더는 말을 보탤 수 없었다. 일단은 그가 북부를 다스리는 대공이었기에.

16553731594265.jpg“……그럼 대공 전하를 믿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결과가 있어야 할 겁니다.”

1655373159427.jpg“걱정 마세요. 제가 함께 북부로 직접 갈 테니까.”

아멜리아가 알렉드라의 말을 거세게 받아쳤고, 알렉드라는 그런 아멜리아는 노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16553731594265.jpg“쭉, 지켜보겠습니다.”

알렉드라가 돌아서자, 기사들이 늑대들을 데리고 물러섰다. 에드조프 역시 걸음을 돌리려다가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를 향해 차가운 경고를 뱉었다.

16553731594293.jpg“아멜리아, 이 일은 이제 시작이야. 그리고 그대는 반드시 이번 선택을 후회할 거고. 하지만 걱정 마. 난 언제나 그대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에드조프는 마지막으로 이클리트를 무심히 쳐다보며 걸음을 옮겼다. 아멜리아는 술병을 쥐고서 사라지는 에드조프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1655373159427.jpg‘내가 착각한 걸까. 한순간, 그가 정말로 저 술을 무서워하는 것 같았는데…….’

16553731594283.jpg“부인? 괜찮은 겁니까?”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의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며 웃었다.

1655373159427.jpg“아, 괜찮아요. 대공 전하는요?”

16553731594283.jpg“……괜찮습니다.”

하지만 이클리트는 아멜리아의 안색을 보면서 눈매가 불편하게 가라앉았다. 상황이 엉망으로 수습되고, 영지민들과 파수꾼들이 아멜리아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그녀를 향해 살며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16553731594257.jpg“저희가 잘못했습니다, 가주님.”

16553731594257.jpg“저들은 우릴 해친 게 아니라 도와준 건데…… 저희는 가주님을 믿겠습니다.”

16553731594257.jpg“가주님은 축복의 꽃을 모두에게 보여주시는 분입니다. 저희가 잠시 잊고 있었어요. 가주님이 저희에게 그 불꽃을 보여주신 의미를.”

16553731594257.jpg“공작가를 시끄럽게 한 죄도 받아야 한다면, 받겠습니다. 다른 피오레 영지민들에게도 충분히 의견을 전하겠습니다.”

아멜리아는 다정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1655373159427.jpg“불안하고 걱정하는 건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걱정 마.”

아멜리아는 이들과 이들 너머에 서 있는 루베르를 보며, 자신이 낼 수 있는 한 가장 흔들림 없이 완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1655373159427.jpg“그대들은 반드시, 내가 지킬 테니.”

루베르는 그런 아멜리아의 시선과 목소리에 존경과 경애를 담아서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비가 그치고,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어느 때보다 길고 험한 밤이었으나, 그래도 어둠은 끝나고 차츰 환한 빛이 찾아오고 있었다. 영원한 어둠은 없기에. 아무리 고단해도 반드시 태양은 뜨니까. 아멜리아는 더더욱, 자신의 선택을 믿었다. 새벽이 찾아오니, 주변에 사는 다른 영지민들도 댐으로 다가왔다. 밤새 시끄러운 소리에 그들도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댐 근처에 있는 루베르를 보고 다들 움찔했다. 하지만 이곳에 있던 영지민과 파수꾼들이 직접 루베르의 손을 잡으며 상황 설명을 해주었다.

16553731594257.jpg“무서워하지 마. 이들이 우릴 도와줬어.”

16553731594257.jpg“그래. 이 댐을 지켜줬다고. 우리의 은인이야.”

16553731594257.jpg“이봐. 손이 왜 이래? 다쳤잖아? 이거, 피부가 너무 하얘서 상처가 더 잘 보이잖아?”

16553731594257.jpg“이리 와봐. 나한테 구급 약품이 좀 있을 거야.”

16553731594257.jpg“그나저나 토사는 어떻게 한 거야? 마법 도구야? 마법 도구에 저런 것도 있었나?”

처음엔 두려워하던 영지민들도 점점 루베르에게 다가와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기 시작했고, 낯설어하던 루베르도 그들의 대화를 차츰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6553731594257.jpg“오! 정말 이게 마법 도구라고? 신기하네. 이것만 있으면 농사가 좀 쉬워지겠어.”

16553731594257.jpg“고마워요, 정말. 우리를 도와줘서.”

루베르와 영지민들이 정말로 서로 어우러져 있는 모습. 경계를 넘어서. 차별 따윈 없이. 그저 동등한 눈높이로 그들은 함께 이곳에 있었다. 어딘가 다녀온 이사나는 뜻밖의 풍경에 시선이 멈춰버렸다.

16553731741878.jpg“이게, 대체…….”

16553731741885.jpg“가주님 뜻대로 변화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사나의 곁으로 카마리가 다가왔다. 카마리 역시 이런 광경은 처음이기에, 신기한 듯 눈을 떼지 못하며 말을 이었다.

16553731741885.jpg“이번엔 그저 단순한 희망고문이 아닌 겁니다. 정말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곳은.”

이사나는 자신도 모르게 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16553731741878.jpg“그러네요. 정말 가주님은, 대단하시네요. 첫 등장부터 그러시더니.”

16553731741885.jpg“새삼 더 반하지 마십시오.”

카마리가 이사나의 앞으로 와서는 그의 얼굴을 붙잡고서 진지하게 말했다.

16553731741885.jpg“같은 여자로서 멋지고, 대단한 거 인정하지만. 그래도 이사나 경은 양보 못 합니다.”

16553731741878.jpg“응?”

이사나는 농담이 아닌 카마리의 말에 당황했다가 이내 진심으로 웃어버리고 말았다. 카마리는 그 모습에 살포시 입꼬리를 올렸다.

16553731741885.jpg“이번엔 진짜 웃었네요.”

16553731741878.jpg“내 웃는 얼굴 보고 반한 거 아니에요? 그 모습이 너무 잘생겨서?”

16553731741885.jpg“…….”

16553731741878.jpg“그러니까 카마리 경 앞에서 종종 잘생긴 모습 보여줘야지.”

16553731741885.jpg“무, 무슨! 그런 거 아닙니다.”

얼굴이 붉어진 카마리가 고개를 휙 돌렸다. 하지만 입은 아니라고 말하면서, 눈은 연신 이사나를 훔쳐보고 있었다. 이사나는 그런 카마리의 모습에 또다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 아멜리아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환하게 웃다가, 자신도 모르게 몸을 휘청거렸다. 그 술, 사람한테 영향이 없는 건 없는데, 독하다!

1655373159427.jpg‘아윽, 머리가 빙글거려. 나 진짜 술에 약하구나.’

그녀가 미간을 찡그리며 걸음을 돌리려는 순간, 갑자기 몸이 붕 떠올랐다.

1655373159427.jpg“어, 어!”

아멜리아가 고개를 들자, 이클리트가 그녀를 안고서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1655373159427.jpg“대공 전하?”

16553731594283.jpg“분명 술 마시지 말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1655373159427.jpg“하지만 그땐 어쩔 수 없었어요!”

16553731594283.jpg“…….”

1655373159427.jpg“그리고 나, 안 취했어요. 진짜로.”

씨알도 안 먹힐 말을 하는 아멜리아의 모습에 이클리트는 순간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16553731594283.jpg“얼굴이 빨간데?”

1655373159427.jpg“아닐걸요?”

순간, 이클리트가 아멜리아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16553731594283.jpg“뜨거운데?”

아멜리아는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다들 각자 일을 하느라 바빠 보였다.

1655373159427.jpg“나, 남들이 보는데!”

16553731594283.jpg“열 잰 겁니다.”

1655373159427.jpg“누가 열을 그렇게 재요! 대공 전하 때문에 더 뜨거워진 거잖아요!”

16553731594283.jpg“아무튼 진짜 다시는 마시지 마요.”

이클리트는 아멜리아를 꼭 안아주면서, 차마 내뱉지 못할 말을 삼켰다.

16553731594283.jpg‘미안해요, 내가.’

자신 때문에 그 술을 마신 거다. 결국 그 자리에서 그녀를.

16553731594283.jpg‘지켜주지 못했어.’

하지만 이클리트는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아멜리아의 앞에서 웃었다. 아멜리아는 그런 이클리트를 보면서 따라서 웃었다.

1655373159427.jpg“역시. 대공 전하의 미소가 좋아요.”

그녀는 취기가 돌아서 눈앞이 몽롱해져도 그의 미소만큼은 오롯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은 고단했고, 힘들었던 기분이 그의 미소 앞에 완전히 사라지고 있었으니까.

16553731594283.jpg“부인 앞에서 더 많이, 많이 웃을게요.”

적어도 그녀가 좋아하는걸, 마음껏 보여주면서 힘들었을 그녀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더는 스스로를 미워하고 싶지도 않았고.

16553731594283.jpg‘그녀가 사랑해주는 나를, 더는 저주받았다고. 죽어야 할 존재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 이제 난 살고 싶어. 그녀와 함께, 제대로 살고 싶어.’

오직 그녀를 위해서. 자신은 앞으로 더욱 빛나야 한다. 그런 황제가, 되어야 한다.

16553731594283.jpg‘그러니 여기서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난 저주받지 않았어. 그저 다른 이들과 똑같이, 살아가고 있을 뿐이야.’

  *** 공작가로 돌아온 아멜리아는 취기가 사라지자마자, 이클리트와 함께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철창 안에는 둥이가 인간의 모습으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알렉드라가 오기 전, 이사나가 둥이만 어떻게든 몰래 빼내어 이곳에 둔 것이었다. 아멜리아는 둥이가 조금은 진정한 듯한 모습에 기대심을 품고서 가까이 다가가려고 했으나, 이클리트가 그 앞을 막고서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16553731594283.jpg“네 진짜 이름은 뭐지?”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차갑게 번뜩이더니, 한껏 낮아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16553731594257.jpg“……내 이름은 세인트. 반인반수, 아니. 이젠 반인반수조차 아니지. 기억이 지워진 채, 무기가 되고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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