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얼어붙은 그곳으로2022.01.07.
“세인트…….”
아멜리아는 둥이의 진짜 이름을 알고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세인트. 예쁜 이름이네. 그것도 모르고 내가 괜히 이상한 이름을 붙였어.”
세인트는 그런 아멜리아를 잠시 바라보았다.
‘나는, 둥이라는 그 이름으로 살 때 좋았어.’
하지만 그 진심을 삼킨 채, 날 선 어조를 이어갔다.
“이젠 반인반수조차 아니지. 기억이 지워진 채, 무기가 되고 있을 뿐.”
아멜리아는 그 말에 눈을 크게 뜨며, 가까이 다가갔다.
“기억이 사라지고 있다니?”
“그 밀주는 반인반수를 끄집어내는 도구지만.”
세인트는 순간 이클리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사실은 인간으로서의 기억을 지우고, 그냥 짐승이 되는 거예요. 사육하는 거죠.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무기로 만드는 독이에요.”
세인트의 말에, 이클리트는 순간 뭔가 섬뜩한 기억이 스쳤다.
‘네가 진짜였다면, 내 독으로 무기로 만들었을 텐데.’
‘뭐지? 누구 목소리지? 웬 여자 목소리가…… 하지만 이런 기억은 없는데…….’
이클리트가 당황하는 사이, 아멜리아가 철창을 열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부인!”
그가 막을 새도 없이, 아멜리아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세인트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 너도 기억이 지워지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다음에 만났을 때는 그냥 심장을 노려서 날 죽여요.”
세인트는 듣는 사람조차 소름 돋을 만큼, 공허한 시선과 목소리로 읊조렸다.
“죽어야만 끝나니까. 날 정말로 구하고 싶다면, 그냥 죽여줘요.”
이클리트는 세인트의 모습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지난 날, 자신의 모습과 똑같았으니까. 아멜리아는 이미 살 의지를 잃어버린 세인트를 보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구하는 게 아니야. 살려야지. 살아야지. 그러려고 구하는 거잖아! 너도 날 그렇게 구해줬잖아.”
세인트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미 엉망으로 망가진 머릿속으로 아멜리아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번졌다.
“날 해치고 싶지 않지? 기억이 지워져서 날 공격한 거야. 그렇지? 황궁에서도. 카르티아에서도. 넌 날 여러 번 구해줬어.”
“……진심으로, 해치려고 했을지도 모르잖아요.”
세인트는 제게 가까이 다가오는 아멜리아를 밀어냈다.
“반인반수는, 수인만큼은 아니더라도. 아니. 어쩌면 수인보다도 더 인간에게 호의적이지 않아요. 다들 잡종이라고 여기니까. 그런 내가 왜 당신을 구했다고만 생각해요?”
“난 내 눈에 보인 것만 믿어. 그때 분명 넌 날 구해줬어. 날 미워했다면, 굳이 네 정체를 드러내는 위험한 짓을 하면서까지 그런 행동 하지 않았을 거야.”
“슈란, 그자는 당신에게 날 일부러 보냈어요. 내가 스파이일 거라곤 생각 안 해요?”
“그때 넌 아주 떨고 있었어. 온몸으로 슈란을 겁내면서 나한테 곧장 안겼지. 지금 생각해보니, 나한테 도와달라고 한 거 아니야? 내가 도와주길 바란 게 아니냐고.”
세인트는 그녀와 처음 만난 순간이 불현듯 떠올랐다.
‘걱정하지 마. 이제 아플 일 없을 거야. 내가 잘 지켜줄게.’
달 없는 밤이 아닌데도, 갑자기 완전한 여우의 모습이 되어서는. 마음대로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지도 않았다. 두려움과 공포에 매몰되려는 찰나, 그녀의 손길과 단 한마디의 다정함이 그때는 그에게 세상 전부의 온기처럼 느껴졌었다.
“그래서. 도와주겠다고요?”
“도와줄게.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결의에 담긴 목소리와 눈빛이 세인트에게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처음부터 신기한 사람이었다. 항상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보았던 이 녹안. 상처를 치유해주던 그 다정한 손길. 괜찮다고. 다 괜찮다고 다독이던 그 목소리까지.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이대로 죽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넌 예쁘고 착한 아이니까. 내가 널 무사히 숲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줄게. 좋은 날만 가득할 수 있게. 그런 내일을 만날 수 있게.’
그녀가 내뱉은 내일이라는 말에, 온몸이 뜨거워졌었다. 사실은. 너무 살고 싶었으니까. 예전처럼,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었으니까. 물론 믿을 생각은 없었다. 말로만 하는 호의는 바람 같은 거니까. 상처만 치유되면 적당히 도망치려고 했는데. 이 사람은 자꾸만 자신의 시선을 빼앗았다. 루베르에게 진심으로 다가가는 모습을 보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지켜주고자 하는 진심에. 이 생소한 모습을 조금 더 지켜보고 싶어졌다. 어쩌면. 정말로 자신을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과 함께. 물론 그 마녀가 바라는 건, 이 사람과 자신이 친해지는 것. 이 사람의 약점을 만들어야 했으니까. 그 마녀의 생각대로 움직이고 싶지 않았는데……. 그녀가 위험해지니,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직였다. 끔찍하다고 여겼던 제 능력까지 사용하면서, 지켜버린 거다. 알게 모르게. 정말로 관계라는 것이 생겨버렸다.
‘그러니 위험해. 더는 가까워지면 안 돼.’
“……당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나 구하세요.”
“응?”
“실종된 사람들. 아직 살아있으니까.”
세인트는 그들이 있는 장소를 알려주었다. 아멜리아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확인하고 안도했다.
“고마워.”
섣불리 나서지 못하고 있던 이클리트가 세인트에게 다가갔다. 이클리트는 세인트의 눈빛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내 정체가 뭔지, 녀석은 알고 있어.’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말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밀주의 주인이 누군지, 아는 건가?”
세인트는 이클리트를 바라보았다. 이자의 정체를 자신은 알았다. 하지만 어떻게든 끝까지 감출 생각이었다.
‘이자는 살아있어야 해. 이자만이, 그녀를 끝까지 지킬 테니까.’
“밀주의 주인은 그 여자. 그 마녀…… 윽!”
“세인트!”
세인트는 칼날처럼 파고드는 통증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잠시 멈춰 있던 광기가 다시금 그에게 족쇄를 매달기 시작했다.
‘점점, 제정신으로 있는 날이 짧아진다.’
이대로 있다간 곧, 온전히 정신을 잃게 될 거다.
‘어차피 난 틀렸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해. 그렇다면 적어도. 다른 이들이라도…….’
세인트는 겨우 고개를 들고서 아멜리아를 바라보았다. 어찌나 고통이 심하던지, 그의 눈동자에 핏발이 전부 터져 피눈물이 고여 있었다. 아멜리아는 그 모습에 입술을 꽉 깨물고서 그를 붙잡았다.
“이, 일단 치료사를. 내가 치료사를 데려올 테니까…….”
“황궁에. 뱀이 두 마리…… 두 마리 있어…….”
이클리트는 세인트의 말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유모. 그 여자는, 유모…… 악!”
“세인트!”
아멜리아가 세인트를 안으려는 순간, 이클리트가 재빨리 그녀를 안고서 뒤로 물러섰다. 완전히 이성이 나가버린 세인트가 거대한 여우의 모습으로 철창을 씹어서 부숴버린 채, 사라졌다.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에게 안긴 채,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황궁에. 밀주의 주인이 있나 봐요. 두 마리라면, 두 명이라는 뜻일까요?”
이클리트는 아멜리아를 꼭 안아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황궁에 뭔가가 숨어 있는 건 확실해요.”
‘대체 황궁에 뭐가 있는 거지? 그 여자. 유모라니. 게다가 나도 모르는 기억 속의 그 여자는, 대체 뭘까.’
이클리트의 눈빛이 혼란으로 점철되어 나직이 떨려왔다.
*** 일단 모든 의문을 뒤로 한 채, 북부 일정이 빠르게 잡혔다. 북부에서 밀주가 시작된 건 확실하기에. 거기서부터 단서를 찾아야만 했다. 특히, 밀주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이클리트는 이번에 북부를 가면 루시아를 직접 찾아갈 작정이었다. 현재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는 배를 타고 바닷길을 지나고 있었다. 북부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이 바다를 건너는 것이었다. 이사나는 사방이 뻥 뚫린 배에서 더욱 경호 경계를 강화하며, 긴장한 표정으로 갑판에 서 있었다. 이번에 북부로 가는 인원에는 이사나를 선두로 카마리와 이 근방으로 흩어져 있던 블러드 아이리스가 함께했다. 카마리는 긴장하고 있는 이사나의 곁으로 와서는 사탕을 건넸다.
“실종된 사람들은 전부 구한 겁니까?”
이사나는 카마리가 건네는 사탕을 기분 좋게 물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도망친 여우가 거짓말은 안 한 모양이에요. 다들 무사해요. 물론 납치된 순간을 전혀 기억 못 하지만.”
“반인반수를 보지도 못했고?”
“전부 어떤 짐승이 덮쳤다고만 알고 있었어요. 술에 대한 기억도 없고. 역시나 일부러 꾸며진 거죠. 반인반수의 저주로.”
“역시. 밀주의 주인을 찾는 게 급하겠네요. 그나저나 배는 처음 아닙니까?”
카마리의 말에 이사나는 잠시 멈칫하다가 싱긋 웃었다.
“……처음이죠, 당연히.”
“하긴. 북부로 갈 일이 아니면 솔라에서 배 탈 일은 별로 없죠. 대부분 육로로 통하니까.”
그래서 더더욱 북부는 솔라에서 감옥 취급받는 거였다.
“뱃멀미 조심하십시오. 북부로 가는 바닷길은 꽤 험합니다. 특히 한 번도 배를 타본 적 없는 사람에겐 곤욕일 겁니다.”
“오, 이거 긴장되네요.”
“혹시 위험한 일 생겨도, 걱정 마십시오. 제대로 지켜주겠습니다. 바다와 북부는 내 구역이니까.”
카마리가 검을 휘두르며 말하자, 이사나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거, 자꾸 습관 되겠어요.”
“뭘 말입니까?”
“누가 날 지켜준다고 하는 거. 그 말에 자꾸 기대게 되는 거. 카마리 경처럼 날 지켜준다고 많이 말해준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만큼 내가 이사나 경을 많이 아끼는 겁니다.”
“나도 카마리 경 아껴요.”
일순 훅 파고든 말에 카마리는 멈칫했다.
“카마리 경이 나보다 훨씬 멋있는 것 같아서, 부럽기도 하고.”
“그, 그럼 얼른 좀 반하십시오!”
반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얼른 반하라고 반 협박조로 말하고서 가버리는 카마리의 모습에 이사나는 또다시 웃음이 나왔다.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올 수 있는 건, 정말로 카마리 덕분이었다. 사실, 이사나는 다른 의미로 몹시 긴장하고 있었으니까. 그는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눈빛이 잘게 떨렸다. 낯설지 않은 바닷내. 역시나 낯설지 않은 이 길.
‘북부…….’
그곳으로, 돌아가는 건가. ***
“와! 바다!”
아멜리아는 뱃머리에서 떠나지 못한 채, 계속해서 바다를 보고 또 보았다. 분명 신나면 안 되는데. 자신도 모르게 흥분되고 만다. 바다를 본 적도 많이 없었지만, 이렇게 배를 타고 건넌 적은 한 번도 없었고, 꿈조차 꾸지 않았으니까.
‘맞아. 이 바다 건너에 뭐가 있을지 궁금해도, 항상 포기했었어. 평생 알지 못할 거로 생각했고. 알기도 전에, 죽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비록 얼마 남지 않은 생이지만, 그래도 찰나에 주어진 기적에 아멜리아는 행복했다. 이 짧은 1년이 그녀에겐 일생에 가장 큰 선물이 되었으니까.
‘이렇게 바다도 건너고. 그리고…….’
순간, 불어온 바람에 그녀의 모자가 벗겨졌다.
“아!”
그녀가 손을 뻗은 순간, 이클리트가 먼저 모자를 붙잡았다.
“대공 전하!”
이클리트는 그녀에게 모자를 씌워주면서 말했다.
“조심하십시오. 바닷바람은 그냥 바람과 달라서 자칫, 바다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에이, 설마요.”
“처음 뱃길이니 힘들 수도 있고요.”
“아직까진 괜찮아요.”
아멜리아는 모자를 붙잡으며 이클리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모험가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머리카락 역시 정돈되어 있지 않았지만, 바람에 아무렇게나 나부끼는 모습이 묘하게 섹시해서, 아멜리아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특히나 바다에서 그를 보고 있으니, 그의 푸른 눈동자가 저 바다를 닮아서 더 오묘하게 시선을 끌었다. 아멜리아는 절로 미소를 그렸다. 바다를 보고 있을 때도 행복했지만, 역시 그를 보고 있는 이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다시 주어진 생에서 가장 소중한 건.
‘생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거야.’
이클리트는 걱정 어린 시선으로 아멜리아의 곁으로 부는 바람을 슬쩍 다른 곳으로 돌렸다.
“사실 바닷길을 택하고 싶진 않았는데. 정말 힘들 겁니다.”
특히 북부로 가는 바닷길은 몹시 험했다. 남부에서 북부로 가는 것이니, 날씨가 변화무쌍했던 것. 그의 힘으로는 이 큰 바다의 날씨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빨리 가는 길은 이것밖에 없었잖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진짜 괜찮으니까. 사실 이러면 안 되는데, 조금 기대도 돼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거라서. 게다가 진짜 눈을 볼 생각에 설레기도 하고.”
아멜리아는 진심으로 환하게 웃었다.
“대공 전하와 함께라서, 더 좋아요.”
그녀의 미소에 이클리트의 심장이 간질거렸다. 예전엔 그녀의 첫 순간을 욕심내고 탐냈지만, 이젠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녀의 처음을 함께 하니 좋은 건, 어쩔 수가 없다.
“저도, 좋습니다.”
“진짜요?”
“진짜.”
스스로 내뱉은 말에 사실, 놀랍긴 했다. 북부로 가는 이 길이 즐거울 거라 상상도 못 했으니까. 사실, 이클리트로서는 가장 두려운 선택이 북부에 남아 있었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무섭고, 떨리는데. 이상하게 그녀를 보고 있으면, 이 떨림이 눈 녹듯 사라진다. 황궁에 갈 때도 그랬다. 마냥 그녀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이 좋아서. 불안감도 두려움도 어느새 전부 잊어버리고 만다.
“조금은 즐거워도 되지 않을까요? 이제껏 힘들었으니까. 아주 조금은, 쉬어도 될 겁니다.”
“그래도 될까요?”
“게다가 이것도 우리에겐 중요한 겁니다.”
“네?”
“잊지 마세요. 우린 아직 신혼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부부죠.”
이클리트가 슬쩍 손가락을 움직이자, 바람이 다시 그녀를 향해 불면서 모자를 흔들었다. 아멜리아가 모자를 잡으려는 순간, 이클리트가 그녀의 손을 잡고 같이 모자를 당겨서는 순식간에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
아멜리아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서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대, 대공 전하!”
“아직, 이런 것도 많이 해야 할 신혼이죠.”
“그렇지만, 누가 보면…….”
분명 티어들이 사방에서 여길 지켜볼 텐데!
“봐도 상관없지만, 보지 못하게 이렇게 가리잖아요.”
그의 목소리에 배인 열기가 차츰 짙게 번졌다. 이클리트가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문지르다가, 살짝 힘주어 당겨서는 똑바로 눈을 맞추도록 했다. 아멜리아는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달뜬 숨을 내쉬었다. 이클리트는 그런 그녀의 숨을 금방이라도 다시 삼킬 듯, 다가와서는 눅진하게 속삭였다.
“아니면, 그만둘까요?”